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119
119화
‘똑똑.’
“아가씨, 아르텐 대사제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들어와 달라고 전해 줘. 그리고 마야. 아까 내가 한 말 잊지 않았지?”
“예, 예. 그럼 조금 있다가 오겠습니다.”
마야가 문을 열고 방을 나서자 하얀 사제복을 입은 채 우아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아르텐이었다. 여전히 고고한 눈동자는 바다를 보는 듯 청연했으며 맑고 깨끗했다.
“오랜만이네요. 아르텐.”
“그러게요. 축복 이후 처음인가요.”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가오는 그였다. 최애캐라 생각했던 사내가 흑막이라 느껴졌을 때의 당혹감은 이미 없었다. 그가 대사제라는 건 꿈에도 몰랐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아르텐이 엘리자벳의 편이란 건 확실했다. 적어도 아라한의 말처럼 엘리자벳이 성녀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아르텐은 내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선 의례인 것처럼 내 손을 잡고 신성력으로 치유를 시작했다.
아르텐의 손에서 내 손으로 전달되어 오는 하얀빛이 아롱거리며 내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고 그렇게나 많이 자서 가벼워졌을 몸인데도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 것은 아무래도 무언가 내 몸에 있긴 있었나 보다. 아니면 오즈번이 밟았던 발이 나은 건가.
“남아 있던 것들도 다 정리했습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날 쳐다보는 아르텐이었다. 최애캐라서 눈부시고 예쁘고 잘생긴 건 맞는데. 크흡, 선생님. 제가 선생님한테 물어볼 것들이 많아요.
“감사합니다.”
“…궁금한 게 많으신 표정인데…. 바로 나가지 않을 테니 물어보세요.”
“……어.”
물어볼 것이 너무 많았다. 엘리자벳의 과거와 엘리자벳이 성녀라는 것. 그리고 방랑을 떠났다가 갑자기 정체를 밝힌 이유도. 그중에서 제일 궁금했던 그녀의 과거에 대해 입을 여는 나였다.
“제게 14년 전 기억이 없는 이유가 무엇이죠. 그리고 일전에 독을 먹고 쓰러졌을 때. 꿈을 꾸었습니다. 저와 지금 황제이신 폐하께서 함께 납치당한 꿈을요. 그리고 아라한 공작님께서 말씀하시길 14년 전, 성녀로 간택된 것은 저라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14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후,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것 같군요.”
아르텐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짓는 저 미소가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오히려 안심되는 건 무엇일까. 숨긴 것이 많은 사람치고 착한 역할은 없을 텐데.
후, 오즈번이 갑작스럽게 변한 이유도 물어봐야 했다. 신전에 기도회를 하고 왔다던 오즈번이 갑자기 변한 이유에 신전이 개입되어 있다는 건 오즈번이 변했다는 걸 아르텐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이후, 신전을 방문하려는 오즈번을 대놓고 문전 박대 한 것이 아르텐이니까.
“일단, 기억이 없는 이유는 기억을 봉인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봉인이요…?”
“네, 본래 폐하께도 기억을 봉인해 두었지만, 그 봉인을 스스로 깨셨기에 가만히 두었습니다. 공녀님께서 꾸셨다는 꿈도 봉인의 일부분이겠지요.”
“…하.”
느닷없이 봉인이라니. ‘무슨 개막장 소설 같은 플레이야!’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떡밥이 가득 있는 이 소설은 장기 휴재 중이었다. 그러니 소설의 끝이 없기에 엘리자벳의 기억 봉인이라는 떡밥은 충분히 있을 법한 설정이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고.
“제가 성녀로 간택된 것과 14년 전 사건은요.”
“그것 역시 봉인해 둔 기억과 관련되어 있으니 기억을 찾으시면 자연스레 해답을 얻으실 겁니다.”
“봉인은 누가 해 둔 거죠.”
“…….”
무언가 뜸을 들이던 아르텐은 계속 유지하고 있던 미소를 지운 채 입을 열었다.
“제가 걸어 두었습니다.”
“아…?”
“제가 걸어 두었습니다. 기억의 봉인. 14년 전, 사건이 궁금하시다 하셨죠. 그걸 알게 되시면 결국 모든 진실에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14년 전보다 더 오래전의 기억과 시간들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나를 향해 손을 뻗던 아르텐이 조심스레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아, 가엾은 나의 아가. 내가 미안하구나. 그러나, 기억의 봉인은 스스로 깨야 한다. 그래야지 진실의 검을 가질 수 있을 테니.”
인자한 미소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부처 같은 미소랄까. 그 미소 속에는 미안함과 간절함이 섞인 듯 보였다. 그 미소가 너무나도 맘에 걸려서 무언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다. 정확하겐 물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압박감이 날 옥죄는 듯하였다.
“기억하도록 하거라. 이 내가, 너의 곁에 있음을. 이 내가 요번에는 널 반드시 지키마.”
“…….”
“아르켈미스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아르켈미스. 대사제인 아르텐의 입에서 아르켈미스가 나온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르텐이 말하는 것이라면 ‘대사제의 이름을 걸고.’라고 했을 대사였다.
아르켈미스의 이름을 거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조금 전, 날. 아니, 엘리자벳을 ‘가엾은 나의 아가’라고 말한 이가 아르텐이 아닌 아르켈미스라는 것을. 신이 있다는 걸 믿는 유신론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소설 속에 빙의까지 됐는데 뭔들 못 믿겠는가.
아르텐은 나의 손등에 잠시 입을 맞추더니 이내 몸을 일으키곤 예를 취하며 마저 입을 열었다. 정말 아르켈미스라는 신인 것인지 아니면 그저 대사제이기에 ‘아르켈미스’ 즉, 신의 이름을 걸고 당신을 지키겠다는 의미로 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르텐이 평범한 사제가 아니라는 설정에 대사제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줄 무언가는 그가 아르켈미스라는 추측만 남겨 줄 뿐이었다.
“제국의 성녀, 엘리자벳 아르엘시아 빈센트 공녀에게 수호의 검이. 진실의 검이 닿기를 기원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문을 나서는 아르텐이었다. 결국, 질문의 답은 모호했다. 내가 스스로 기억을 찾아야지만 그 봉인을 온전히 깰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그 기억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 건데. 카를시아한테 가서 슬쩍 물어봐? 아니, 카를시아 성격상 안 가르쳐 줄 것 같은데. 기억의 봉인까지 해 둔 거면 엘리자벳이 그 기억을 찾아서 좋은 것 없다는 뜻이잖아.
아르텐의 말에 의하면 카를시아는 기억을 찾았음에도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거고 그 뜻은 그 역시도 내가 기억을 찾지 않길 바란다는 뜻임이 분명했다.
‘아, 그건 그렇고 오즈번에 대해서 안 물어봤잖아!!’
“하아, 소득이 하나도 없을 줄이야. 이거야 원, 그냥 스무고개잖아.”
소득은 없었다. 아니, 아예 소득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아라한의 말대로 14년 전에 엘리자벳은 성녀로 간택되었다. 그런 엘리자벳의 기억까지 봉인하면서 엘리자벳에게 숨기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똑똑.’
“들어와.”
아르텐이 나갔으니 당연히 마야나 보우쉘이 왔을 거란 생각에 들어오라 명했고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마야나 보우쉘이 아니었다.
“라트…?”
매일 나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다던 아라한이 빨간색 튤립을 가득 안은 채 들어왔다. 그리고 깨어 있는 나를 보며 눈을 끔뻑인 채 무언가 생각을 정리하는 듯 보였지만 이윽고 나를 향해 달려와 나를 끌어안는 아라한이었다.
“엘리…!”
그때의 아나이스와 마찬가지로 미묘하게 떨리는 아라한의 손이었다. 그 떨림이 등을 타고 전해지자 미묘하게 울렁이는 심장이 내 가슴을 콕콕 찌르는 듯했다.
‘…뭐야, 갑자기.’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울렁거림에 눈을 끔뻑이던 나는 이 느낌을 어디선가 느껴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나이스가 끌어안았을 때도 느껴지지 않았던 울렁거림. 그 울렁거림이 마냥 싫지 않으면서도 부끄러웠다.
“…안 죽었어요. 라트.”
“그래도 3일이나 쓰러져 있었다고요…!”
“3일 동안 숙면을 한 거랍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라트의 등을 토닥이며 그를 달래 주었다. 원래 이런 남자였었나. 사실 돌아갈 생각에 맘에 두지 않았던 것도 한몫하긴 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조금 여유를 둬도 될 것만 같다.
“정말이지…. 아나이스 님의 품에 안긴 당신을 본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고요….”
“그래도 일어났잖아요…?”
떨어지는 돌이라도 맞아서 기절한 거면 이해를 하겠는데 돌에 맞지도 않았고 그냥 오즈번한테 발 밟히고 도망치는 인파 속에 넘어진 것이 다였다. 근데 저런 대사는 뭔가 오글거린다고…!
“하하…. 미안해요. 그것보다 꽃 다 망가지겠어요.”
“…….”
그제야 날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선 코를 훌쩍이며 튤립을 내게 건네는 아라한이었다.
‘아니, 공작 양반. 설마, 울었어…?’
콧등이 살짝 붉어진 채 눈가가 촉촉한 것을 보아하니 울먹인 게 분명했다. 아니, 저 정말로 민망해서 그래요. 저는 그냥 잠든 것뿐이라고요!! 독을 먹고 쓰러진 것도 아니고 샹들리에에 맞아서 다친 것도 아니고. 그냥 잤을 뿐이야!! 그만해!
그러나 나의 외침이 들릴 리가 없던 아라한은 침대 옆 의자에 앉고선 입을 열었다.
“엘리가 꽃을 워낙 좋아하는 것 같아서, 공부해 봤습니다.”
“…? 공부요?”
“예, 난생처음 꽃말이라는 걸 공부해 봤어요.”
“…….”
내가 꽃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꽃과 꽃말에 관해 공부한 아라한의 모습이 어이가 없다가도 귀여워 보였다.
그래, 아라한은 이런 로맨티시스트였다. 오즈번을 위해 자신의 친우인 황제와 검을 겨눌 정도로. 그런 그가 날 좋아하는 것도 이상했고 더불어 엘리자벳에게 이렇게 우호적인 것도 신기했다. 뭐, 이제는 익숙해진 사실이지만.
“후, 그래서 이 빨간 튤립의 의미는 뭔가요.”
“…알면서 묻는 거죠.”
“그럼요. 이런 꽃보다 직접 말로 듣고 싶은 순간이 있다고요?”
물론 그 의미를 직접 들으면 이 울렁거림이 더 화끈거릴 것 같지만. 뭐, 정말로 고백의 의미겠어? 그냥 적당히 아라한을 놀리고 싶은 마음에 뱉은 말이었다. 이런 장난을 칠 정도로 친해졌고 그를 향했던 경계심이 누그러졌다는 걸 느끼고 있었으니까. 아라한 역시 나의 장난이 재밌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