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122
122화
“따로 뭐, 접촉하는 사람도 없고요……?”
“예. 루시엘라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따로 접촉하는 자는 없더군요. 브론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속셈일까요. 정말 회개라도 하는 걸까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단호하게 뱉은 아라한의 말에 난 눈을 끔뻑였다. 원작에서는 둘이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였을 텐데 이제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죽일 기세로 벼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뭐, 이미 비틀린 소설이라 상관없으려나.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라한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흑화하기 전의 오즈번이라면 당연히 회개라 생각했을 부분이었다.
그러나 오즈번은 이미 내가 알고 있던 오즈번이 아니었다. 빈센트가 공작이 된 기념 연회 이후로 달라진 태도를 보이며 움직이는 그 모습은 내가 불현듯 떠올렸던 ‘마몬’과 흡사했다.
‘그것도 기억과 연관이 있는 걸까.’
드문드문 떠오르던 단어들과 장면들. 나아가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말하는 듯한 그 느낌들이 기억났다. 또 무언가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까 머리를 집중해도 떠오르는 건 없었다.
“후, 그런 무거운 이야기는 일단 나중으로 미뤄 두고 엘리. 그래서 같이 축제 구경…. 가 주실 겁니까?”
“아…. 뭐, 네. 어차피 축제도 구경하고 싶었고 이제 그만 이 방에서 나가고 싶어요.”
나의 투정 아닌 투정을 듣고선 ‘피식’ 웃음을 짓는 아라한이었다. 그리고 무언가 또 일렁이듯 내 가슴을 찔렀다. 일전에 디저트 가게 갈 때도 저 미소를 보고선 심장이 두근거렸던 것 같은데….
그냥 잡아 둔 물고기라 생각했다. 곰끼리의 꼬리를 줄 때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을 정도로 그에게 꼬리를 건넸으니까. 그냥 막연하게 데이트 신청이라는 핑계를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
아니, 애초에 썸을 생각했으면서 이 정도도 자각 못 하다니…! 그냥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아라한이어서.
근데 그렇게 치자면 아나이스가 제일 먼저 떠올라야 하는데 아라한이 떠오르는 것부터가…. 어느 정도의 호감은 있다고 생각을 했지만, 그 호감이 이렇게 자각하면 부끄러울 것만 같은 ‘사랑’이라는 감정일 줄은 몰랐다.
아니, 부정하고 있었던 것도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온 감정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 적당했다.
‘젠자아앙….’
원래 상처든 감정이든 모르고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다가 자각하는 순간 아파져 오고 쓰라려 오는 법이었다. 그리고 후에 밀려오는 민망함도 같은 느낌이리라.
솔로 인생이 너무 길어서였을까, 그냥 내 몸이 아니라서 자각을 못 했던 것일까. 호감의 수준이 그냥 잡은 물고기를 이용하자는 정도의 친분이라 생각했다. 막연하게. 근데, 이거, 그린 라이트잖아!!
“망했어….”
“응? 엘리?”
그리고 자각한 순간,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있는 내가 걱정된 아라한이 내게 다가왔고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맞이하던 아라한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니, 저 얼굴에 저 표정은 반칙이라고…!
“열 있는 건 아니죠?”
라며 뻗는 손에 이마에까지 닿은 손. 평소에 그는 배려심이 깊은 매너남이었다. 그걸 모를 리가 없던 나였는데. 이제껏 튤립을 갈러 올 때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음…. 열은 없는데.”
그러니까요, 선생님. 그 얼굴로 그 표정은 반칙이라고요. 자각 왜 했냐, 나. 안 돌아갈 거라 맘을 먹었지 연애할 거라고 마음먹진 않았잖아. 자, 진정하자. 상대방은 라트 아라한이야. 제아무리 나한테 반했다지만 그게 정말인지 알 수가 없잖아…? 게다가 시간도 많이 지났고? 아니, 물론 저 빨간 튤립의 꽃말이 사랑의 고백이긴 한데…!!!
‘왜 하필 빨간 튤립이냐!!!’
자각하니 보이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내 반응마저도 다른 이들에게 하는 것과 다르다는 걸 깨닫는 순간 확 밀려오는 민망함은 그칠 줄 몰랐다.
“하하, 괜찮으니까 걱정 마세요….”
겨우 진정시키고 겨우 뱉어 낸 말이었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의 아라한이었지만 지금 당장 그의 얼굴을 마주 보기엔 너무 민망했고 부끄러웠다. 그러니 적당히 말해서 돌려보내도록 해야지.
“맞다. 오늘 오후에 회의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벌써 시간이…. 그럼 엘리, 내일 또 올게요.”
“하, 하, 저도 내일부터는 좀 움직일 거라 방에만 있진 않을 거예요. 어차피 같이 축제 보기로 했으니까 그때, 보도록 하죠.”
“…음…. 그래요. 엘리도 푹 쉬는 게 좋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세요.”
“네네, 알겠어요.”
여전히 아련한 눈동자로 날 지그시 쳐다보는 아라한이었고 그걸 기어코 돌려보낸 나였다. 그렇게 아라한이 나가고 나서야 깊은 심호흡을 하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으아악!! 내가 미쳤지! 미쳤어!!”
자각은 둘째 치고 얼굴에 다 티 났을 거 아냐! 하아, 쪽팔려. 이제 와서 자각한 나도 웃기고 그 자각에 흑역사를 만든 사실이 더 웃기는 상황이었다. 하아, 예전에 내가 어떤 생각으로 아라한이 다가오는 걸 그대로 내버려 뒀을까. 끄응…. 사실 딱히 놔두진 않았던 것 같은데….
“…나 또, 뭐…. 흑역사 만들 짓 한 거 없지?”
그래, 앞으로 안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넘어가려는 순간, 일전에 디저트 가게에서 티라미수 케이크 먹다가 얹혔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래, 아무렴 어떠하랴. 욕하거나 대놓고 아라한의 얼굴에 침 뱉은 것도 아닌데.
“…….”
…침. 뱉은 적 있었다. 그것도 매우 거하게. 2번이나! 그리고 춤추면서 여러 번 아라한의 발을 우지끈 밟은 적도 있는 것 같은데. 또, 아라한을 부려먹기도 하고 이용도 해 먹었지. 아니, 물론 그건 쌤쌤이라고 해도 얼굴에 침 뱉은 거 실화냐. 그런데도 나 좋다고 한 아라한은 뭘까. 설마 그런 쪽 취향일까. 그건 둘째 치고 너무 흑역사가 많은데요.
“아…. 또 떠올랐어.”
독 먹고 쓰러져서 아무도 안 믿길래 뱉었던 말.
‘절박한 표정의 여인이 더 아름답고 매혹적이잖아요.’
도대체 어떻게 절박해야 아름답고 매혹적일까. 아니, 애초에 절박한데 아름답고 매혹적인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리고 그 말에 아라한은 납득을 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말에.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할 오늘은 어떠했던가.
얼굴을 붉히며 뒤늦게 자각한 것을 깨달은 탓에 제대로 말을 못하고 더듬거렸던 것 같은데. 아, 민망해. 쪽팔려!
“…젠장, 내가 미쳤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런 흑역사를 만들고 또 그걸 뱉었는가. 더 민망한 건, 그렇게까지 했는데 죽기는커녕 다들 나의 흑역사 같은 행동과 말에 수긍하고 넘어간다는 것이겠지.
‘차라리 죽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도 않지.’
억울하다. 죽지도 못하고 여기서 계속 그 흑역사를 계속 생각할 거 아냐. 아니면 어디선가 왕들의 사관처럼 황제의 사관들이 내 말을 기록했을지도 몰라.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말이었다.
‘악녀라 불리는 엘리자벳 아르엘시아는 절박한 표정의 여인이 더 아름답고 매혹적이라는 말과 함께….’라든가.
‘엘리자벳 아르엘시아 백작 영애가 제국 유일의 공작이신 라트 아라한 공작님께 재채기를….’
‘엘리자벳 아르엘시아. 티라미수를 먹고 그 가루를 공작의 얼굴에 내뱉어….’
라는 이미 신문 기사에 박제되어 기록이 되어 버렸구나. 와아, 망했구나. 그리고 오늘 일도 엘리자벳에 빙의한 이세화의 흑역사가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엘리자벳의 방을 나서는 순간 긴장했던 몸이 풀린 것인지 아라한의 얼굴이 빨개진 채로 한동안 그녀의 방 앞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사랑스러웠다. 열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열 있는 것 아니냐며 그녀에게 스킨십을 한 것은 그녀의 표정이 너무 사랑스러워서였다. 만지고 싶고 안아 주고 싶고 키스하고 싶었다. 이토록이나 자신이 사람을 갈망하고, 특히나 여자를 갈망하게 될 줄은 몰랐다. 천천히 다가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조급한 마음에 그녀를 힘들게 한 것은 아닐까 걱정했는데. 베어리펀의 꼬리를 줄 때만 해도 혼자 망상에 빠져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던 아라한이었다.
도대체 엘리자벳이 말한 ‘썸’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으니 그 의미가 그리 좋은 의미가 아니리라 생각했다. 물론, 엘리자벳이 그 뒤에 부가적인 설명을 더 해 주었지만, 그것은 많은 사람이 있고 저 자신의 표정이 좋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후…. 나도 중증이군.”
그러나 오늘 본 엘리자벳은 달랐다. 엘리자벳은 잘 모르는 듯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표정에 모든 것을 다 담고 있었다. 매 순간, 달라지는 표정을 늘 구경하고 싶을 정도로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웠고 그 사랑스러움이 저에게만 보인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쾌감이란 말로 설명할 수도 없을 정도의 감각이리라.
“어서 아나이스 님께 약혼에 대해 말씀드리고 엘리에게 할 성대한 프러포즈를 준비해야겠는걸…?”
10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듯이 아라한에게 엘리자벳은 그러한 존재였다. 첫 만남부터 그리 좋은 만남은 아니었으니까. 자신의 얼굴을 보며 재채기를 하던 얼굴이 순간 떠올랐다. 얼굴 가득히 새겨져 있던 당혹함과 당황스러움. 그 사이에 어울리지 않을 당당한 발언까지.
어느 누가 재상인 자신에게 ‘얼마면 되죠?’라는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아마 엘리자벳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그 모습에 변덕을 부렸던 지난날의 자신에게 ‘장하다, 라트 아라한!’이라 외치고 싶은 아라한이 붉어진 얼굴을 겨우겨우 진정시킨 채 자신의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바빠질 예정이니까…. 먼저, 엘리랑 축제 때 입을 옷이랑….”
준비해야 할 것과 해야 할 것들이 넘쳐 났다. 그런데도 그 발걸음이 가벼운 이유는 다 그녀를 위한 것들이기 때문이리라. 엘리자벳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도망가지 않도록. 이미 자신에게 걸려 버린 그녀를 놓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엘리.”
제가 다가가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절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꼭 말할게요.
“사랑합니다. 엘리.”
이미 해가 지고 있는 빈센트가의 저택은 노을에 물들어 주황빛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미 건물을 나왔고 마차에 올라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나 아라한은 자신의 고개를 한 번 더 돌려 그녀가 있을 방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