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140
140화
“…….”
저 공작 양반이 아무렇지 않게 ‘결혼’ 이야기를 내뱉고 있었다. 아직 엘리자벳은 19살이야!! 어리다고!! 이제 갓 성년이 된 애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스튜 식겠습니다. 얼른 드세요.”
“…….”
스튜가 목으로 넘어갈 것 같습니까? 전혀요.
“흐음, 입에 안 맞으십니까? 주방장에게 새로 내오라고 할까요?”
“…아뇨, 그냥. 그만 먹어도 될 것 같아서요.”
“정말요? 어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셔 놓고. 나중 돼서 속 쓰리다고 앓아누우면 곤란해요.”
“차라리 앓아눕고 싶은데.”
“그럼 제가 간호해 줘야죠, 뭐.”
“…갑자기 엄청 건강해진 느낌입니다!”
라는 말과 함께 스튜를 폭풍 흡입 하던 나는 아예 그릇째 들고선 스튜를 마시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도 잠시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고 있는 아라한이었다.
“잘 먹었어요…!”
그릇을 다시 쟁반에 두고선 깊은 한숨을 쉬며 생각을 정리하는 나였고 그런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온 아라한의 손은 냅킨을 든 채 내 입술 주변을 닦아 주었다.
“술도 그렇고…. 엘리는 한입에 넣는 걸 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민망해서 그런 거랍니다. 술은…. 배운 게 원샷이라 그런 거고!!’
그러나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나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계속 놀리고 있는 아라한을 보며 입을 열었다.
“마야랑 제롬이 걱정할 거예요.”
“그렇네요. 벌써 엘리가 돌아가야 한다니 아쉬워요.”
“…….”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스튜 먹었던 그릇을 정리하며 ‘시녀들을 부를게요.’라는 말과 함께 방을 나서는 아라한이었다. 그리고 아라한이 나가자마자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술을 잘게 깨무는 나였다. 서서히 정신을 차려서인 걸까. 아니면 이것도 빌어먹을 신의 힘을 가진 엘리자벳의 몸이 문제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이 민망하기 그지없다.
아라한의 말대로 유혹 아닌 유혹을 아라한에게 하는 나의 모습이 기억나자 당장이라도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싶었지만 겨우 충동을 진정시켰다.
“미쳤지, 미쳤어!! 으아악!”
머리를 부여잡고선 발악하는 머리를 헝클이고 있는 찰나에 아라한의 명으로 내 옷시중을 들기 위해 문을 연 시녀들이 내 비명에 놀라 걸음을 멈춘 채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히이익!”
“…아….”
‘망했다. 내 이미지 악녀가 아니라 이제 미친년으로 낙인이 찍힐 것 같은데.’
평소의 나라면 변명이라도 했을 테지만 변명할 의지도 꺾인 채 ‘그래, 그 사고를 쳤으니 미친년 맞지.’라는 느낌으로 머리를 헝클이고 있던 손을 내려놓는 나였다.
“…….”
“…….”
서로 민망하고 어색한 침묵이 오가고 나서야 조심스레 움직이기 시작한 시녀들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저…. 아직 힘드시면 조금 있다가 다시 올까요…?”
“…그냥…. 입혀 주세요.”
“…네, 공작님께서 코르셋을 매긴 힘들 것 같다고….”
마담 르쉘이 준 옷은 코르셋을 거하게 압박하고 있어야 하는 옷이었다. 그리고 지금 저 시녀가 말한 ‘코르셋을 매기 힘들다.’라는 표현은 허리가 아픈 날 배려해서 하는 말이리라. 그러나 어제 입고 간 옷과 다른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면 마야와 제롬의 입에서 무슨 말이 오고 갈지 뻔했다.
“그냥 제가 입고 있던 옷으로 입혀 주세요.”
“…아….”
“…설마 찢어지거나 찢어지거나 찢어진 건 아니죠?”
“…….”
‘미쳤나 봐. 도대체 얼마나 격하게 했으면 옷을 찢어!!’
누나의 매력을 보여 주느라 별의별 짓을 다 한 듯한 나의 모습에 이제 어이가 없기 시작한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아라한이 준비한 옷으로 입혀 달라는 말을 하고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라한은 내가 걱정하는 부분이 어느 부분인지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어제 내가 입었던 드레스와 똑같은 디자인의 드레스가 단지 코르셋만 없을 뿐이지 완벽한 모습을 유지한 채 내 몸에 입혀져 있었다.
“다행이긴 한데….”
마담 르쉘이 같은 옷을 두 벌이나 만들었을 리는 없고. 애초에 그럴 시간도 없었을 것이며 그녀는 분명 나를 위한 옷이라 명명하며 ‘엘리 컬렉션 미드나잇 버전’이라는 거창한 이름도 붙은 드레스였다. 요리조리 옷을 둘러봐도 어제 입었던 드레스와 똑같았다.
“찢어진 거 아니었나…?”
“아, 사실…. 조금 지저분해져서…. 씻은 것뿐이긴 합니다.”
지저분해졌다는 말은 내가 또 이상한 말로 해석되는데. 지금, 내가 이 드레스를 입고 ‘토’까지 한 건 아니겠지. 아, 더는 생각하지 말자. 더 생각했다간 영원히 흑역사의 나를 기억하며 살아갈 것 같아.
“하하…. 고마워요.”
“아닙니다…! 공녀님께서 어제 저희에게 얼마나 잘해 주셨는데요…!”
“…? 제가요?”
엘리자벳의 술버릇에 관한 이야기가 어디까지 나오는지 의문인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시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날 경외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그렇게 눈을 초롱초롱 뜨면서 날 바라보면 내가 좀 무서운데.
“하하…. 제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무슨….”
“저희를 보자마자 고생한다고 안아 주시고….”
“칭찬도 해 주시고…!”
“공작님 몰래 돈도 쥐여 주셨어요!”
“…….”
이 악녀 언니의 술버릇은 아무래도 ‘퍼 줘요’인가 보다. ‘퍼 가요.’보다 무섭다는 ‘퍼 줘요’의 스킬을 장착한 술버릇이라니. 권력 있는 귀족이라 다행이지, 만약 돈 없는 백성이었으면 금방 골로 갈 치명적인 술버릇이었다. 애초에 돈이 많아서 생긴 술버릇일지도.
“하… 하하….”
“그리고….”
‘또 있어?! 도대체 이 언니 술버릇이 얼마나 고약한 거야!’
시녀들은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무언가 더 이야기를 꺼내려 입을 열려는 순간, 내 치장이 끝난 건 어떻게 알았는지 아라한이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엘리? 마차는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아, 네. 나갈게요.”
‘굿 타이밍!’
더 이상 들었다가 이상한 술버릇에 대해 깨닫고 더 민망해졌을 텐데 아라한이 온 덕분에 급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시녀들은 후다닥 치장을 마무리하고선 문을 열었고 문 앞에서 날 에스코트할 준비를 하고 있던 아라한이 ‘피식’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죠.”
나는 조심스레 아라한의 손을 잡았고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가 준비된 정원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있지만 물었다가 민망해질 것 같아 입 다물기로 한 나였다.
그리고 아라한가의 저택은 빈센트 공작저만큼이나 넓다는 걸 깨닫고선 정원까지 가는 동안 어색한 침묵에 땀을 삐질 거리며 흘리고 있을 찰나였다.
“이제 수확제도 끝났네요.”
어색한 침묵이 싫었던 것인지 아라한은 내게 먼저 말을 걸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확제는 끝났다. 어제가 수확제의 마지막 밤이자 나의 흑역사의 밤이리라.
“그러게요. 뭔가 아쉬우면서도 즐거웠어요.”
수확제가 있는 일주일간은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물론 수확제의 제사는 좀 사람을 복잡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 나름대로 좋은 추억이 되리라. 엘리자벳의 과거는 엘리자벳의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만들어 갈 과거는 나의 과거이고.
“내년에도 같이 축제를 즐겨 주실 거죠?”
“엘리가 원한다면.”
“헤에, 그것보다 드레스…. 시녀들이 말하기론 조금 지저분해져서 씻었다던데…. 설마 저…. 토까지 한 거예요?!”
“아….”
그래, 흑역사도 내 과거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나중에 기억이 돌아와서 민망한 것보다 그냥 지금 듣고 잊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아라한에게 물었다. 그리고 약간 뜸을 들이던 아라한이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고…. 좀 굴렀거든요.”
라는 말과 함께 아라한의 눈동자가 날 회피하는데요? 왜죠? 설마, 마차에서도 한바탕한 거냐!! 술 마시고 연하 남친을 덮친 거냐고!!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 이제 이 정도면 그냥 술 금지로 끝나는 게 아니라 술 근처에도 안 갈 거야.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만 어느새 마차에 다다른 나는 아라한의 손길과 함께 조심스레 마차에 올라탔다. 어제 탄 것과 마찬가지인 검은색의 마차. 조금 다른 것이라곤 어제보다 조금 더 푹신해진 쿠션감이랄까.
“맘 같아서 모셔다드리고 싶지만, 그럼 엘리가 불편해할 테니까 여기서 배웅해 드리도록 할게요.”
“하…. 하하, 배려 고마워요.”
이미 말 다 해 놓고 인제 와서 불편할 테니 여기까지만 하겠다는 아라한의 말에 멋쩍게 웃음을 지을 뿐인 나였다. 불편함보다 앞으로의 일이 문제였으니까. 분명 내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걸 아나이스가 알게 되는 날엔.
‘아무리 제 손녀를 끔찍이 아낀다지만 엄청난 불호령과 함께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할 것만 같단 말이야!’
이윽고 마차가 움직이고 나를 향해 손 흔드는 아라한의 모습에 나 역시도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움직이는 내내 아나이스를 비롯한 마야와 제롬에게 어떻게 이 사태를 이야기해야지 무사히 잘 넘어갈 수 있을지 생각하기 시작한 나였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으려나. 아니, 근데 물론 엘리자벳 나이가 19살이긴 하지만 성인이면 외박도 좀 하고 남자랑 잘 수도 있지!”
‘게다가 몸속에 있는 영혼에 28살 먹은 여자가 들어가 있다고!’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도 난 아나이스의 불호령과 과잉보호를 생각하며 이걸 어떻게 타파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에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적당히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사실 제롬이나 마야의 경우 그냥, ‘다 큰 성인인데 나가서 외박할 수도 있는 거 아냐?’라고 해도 그들은 나에 대한 걱정도 걱정이지만 ‘아가씨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라는 생각을 더 가질 위인들이라 괜찮았다. 문제는 아나이스지.
신문의 대서특필에서 수호 기사단을 잔뜩 데리고 아라한가로 쳐들어가 ‘너냐, 내 손녀를 건드린 놈이?’라는 명대사를 남기신 아나이스라면 내가 아라한과 사귀는 건 둘째 치고 하룻밤을 먼저 치렀다는 걸 알게 되는 날엔 정말.
“…카를시아에게 보낸 편지에도 충격받아서 앓아누운 양반이란 걸 잊고 있었네.”
어떻게든 아나이스를 구슬릴 만한 방법을 떠올려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