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162
162화
혼미해진 정신을 부여잡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자 낡은 건물과 같은 곳에 있는 엘리자벳이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외칠 만도 하건만 그녀는 침착하게 주위를 응시했다.
‘엘리, 잘 듣거라! 누군가 널 잡아가거든 소리치지 말고 주위를 먼저 살피거라. 괜히 소리치다 범인을 자극할 필요는 없으니까. 이 할아버지가 구하러 올 때까지 침착하게 잘 살피고 있어야 한다.’
아나이스가 가르쳐 준 말이었다. 아까는 숲이었고 지금은 어느 건물이라는 건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는 건 어린 엘리자벳이지만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범인이 만약에 널 공격하려고 하거든….’
아나이스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엘리자벳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다. 그녀가 신의 힘을 가진 아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에 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하나 엘리자벳은 자신에게 그런 힘이 있는 줄 몰랐다. 그저 검술에 능통한 아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었으니까.
“침착하게….”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던 엘리자벳은 제일 먼저 오펄이 주었던 검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주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본격적으로 방을 탐색하기 위해 몸을 일으킨 엘리자벳은 욱신거리는 발을 바라보았다.
“아파….”
아팠다. 발목이 벌겋게 부어오르긴 했지만 참을 만은 했다. 오펄이 기사들을 데리고 올 때까지. 아나이스가 자신을 구하러 올 때까지. 엘리자벳은 버틸 수 있도록 제 옷을 뜯어 붕대를 만들었고 오펄이나 기사들이 다치면 종종 했던 응급 처치를 기억해 내곤 주위에 널브러진 나무 조각을 지지대 삼아 뜯은 옷을 발목에 칭칭 감았다.
‘움직이는 데는 불편하지 않으니까, 괜찮겠지.’
다행히 움직이는 데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통증은 여전히 있었지만 그래도 걷기 편해진 것을 다행으로 여긴 엘리자벳은 본격적으로 방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자신이 걸을 때마다 하얀색 가루가 날리는 것을 본 엘리자벳은 코를 훌쩍이며 살짝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스산하게 ‘삐그덕’거리는 소리로 움직이는 문소리에 엘리자벳은 걸음을 옮겼고 길게 이어진 복도 끝에 인기척이 느껴지는 걸 확인하고선 조심스레 몸을 숨겼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할아버지랑 오펄이 날 못 찾을 수 있어!’
그렇게 숨어 있던 엘리자벳은 쥐죽은 듯 조용히 있었다.
“아악!”
자신이 보았던 복도 끝 방에서 웬 남자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엘리자벳은 다시금 문 쪽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느껴지는 인기척에 무섭기도 했지만 분명 남자의 목소리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목소리였다. 만약 자신 말고 다른 누군가도 이 건물에 납치당한 것이라면 서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엘리자벳은 큰맘을 먹고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삐거덕거리는 복도의 나무 장판이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엘리자벳은 침착하게 복도 끝 방까지 걸어갔다.
“젠장…!”
점점 잘 들리기 시작한 아이의 목소리에 엘리자벳은 열린 문에 고개만 빼꼼거리며 방 안을 바라보았다. 붉은색이 얼룩덜룩 묻어 있는 남자아이는 ‘젠장’ 거리며 발길질을 했지만, 손이 묶인 것인지 제대로 일어서지 못한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금발이라고 하기엔 먼지 때문인지 아니면 붉은색의 액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연한 갈색처럼 보였다. 그러나 반짝이는 보석을 보는 것처럼 고고하게 빛나는 금안을 발견한 엘리자벳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그가 제국의 황태자란 것을 과연 엘리자벳이 몰랐을까. 아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엘리자벳은 아이가 황태자란 걸 모르는 것처럼 말을 걸었다. 그것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였다. 만약 범인이 그가 황태자란 걸 모르고 납치했다면. 그리고 뒤늦게 납치한 아이가 황태자란 걸 알았다면. 어떻게 할지 모를 일이었다. 아나이스는 늘 주의시켰다.
‘엘리, 만약 누군가 너의 정체를 모르는 것 같으면 절대로 너의 정체를 알리지 말도록 해.’
그때, 자신은 ‘왜요? 할아버지?’라고 물었다. 그리고 아나이스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우리 예쁜 아가를 노린 못된 놈들이 정체를 알게 되면 더 아가를 노릴 수 있으니까.’라고. 해서 눈부신 금안을 가진 아이가 카를시아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모를 리가 있겠는가. 자신의 약혼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마야가 얼마나 떠들었던가.
“너는 왜 이곳에 있니?”
자신의 인사에도 제대로 된 답을 해 주지 않는 카를시아의 모습에 엘리자벳은 다가가 한 번 더 되물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고 제대로 엘리자벳을 응시하는 카를시아였다. 제국에 몇 없는 적은발에 고고한 은안을 가진 아이. 그 아이가 엘리자벳 아르엘시아이며 아나이스 빈센트의 유일한 외손녀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카를시아였다.
“…그러는 영애야말로 왜 여기 있는 거지.”
맞는 말이었다. 빈센트가의 유일한 외손녀인 그녀가 자신과 함께 납치된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아, 애초에 황태자를 납치한 간 큰 놈들인데 영애라고 납치하지 않을 리는 없지.’
자신과 달리 침착한 엘리자벳의 모습에 카를시아는 황당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라 놀러 온 줄 아는 건 아니겠지.
“나 말이야? 그러게. 누군지 몰라도 날 죽이려고 했나 봐.”
“…너무 덤덤하게 이야기하는군. 마치 이런 일이 자주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너무 덤덤했다. 마치 자주 있는 일처럼. 적이 많은 빈센트라는 건 알고 있다. 황제파이기 이전에 군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개국 공신 가문이지만 후작 위에 머물러 있는 이상, 대부분 후작들로 구성된 귀족파에서 빈센트가의 권력은 늘 견제 대상이었다. 그런 빈센트가의 유일한 외손녀, 엘리자벳이 자신의 약혼녀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귀족파들에게 들렸다면 이유는 뻔했다.
“그렇지 뭐. 걱정하지 마. 너는 내가 지켜 줄게.”
덤덤하게 뱉은 말에 카를시아는 짧게 혀를 찰 뻔하였지만, 어느새 카를시아를 향해 걸어온 엘리자벳이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엘리자벳의 걸음걸이가 이상하다고 느낀 카를시아는 그제야 고개를 숙여 그녀의 발을 보았고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응급 처치는 꽤 훌륭했다.
“…다친 건가.”
“아, 괜찮아! 응급 처치는 잘했어!”
도대체 어디서 5살짜리가 저런 말을 내뱉을 수 있단 건가. 납치당한 저 자신도 어떻게든 여기서 벗어나려 버둥거렸는데 저렇게 침착하다니. 카를시아는 눈을 찌푸리며 그녀를 관찰하기 시작했고 엘리자벳은 그런 시선에도 묵묵히 걸음을 옮겨 카를시아의 묶인 팔을 풀어 주었다.
“여기가 어디인 줄 알아?”
“…아니. 모른다.”
“흐으음….”
“무엇을 찾…….”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듯한 엘리자벳의 행동에 카를시아는 ‘무엇을 찾는 거지.’라는 말을 물어보려 하였다. 그 순간 강한 바람과 함께 엘리자벳이 열고 온 문이 바닥을 나뒹굴었고 그 모습에 침착하던 엘리자벳도 마른침을 삼키며 본능적으로 카를시아의 앞을 막아섰다.
“…어딘가 문이 열렸나 봐…!”
살짝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그녀는 침착했다.
“…….”
그리고 마치 자신들을 비웃는듯한 웃음소리가 가득해진 방 안 구석에서 알 수 없는 검은색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흐으응~ 재밌는 놀이 중이었나 봐.”
사람이라 볼 수 없는 검은 연기와 같은 형체가 목소리를 내더니 이내 짙은 안개가 방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침착하던 엘리자벳은 두리번거리며 카를시아의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누군가가 놔둔 것인지 모를 검을 발견하고선 그곳을 향해 뛰었다.
“검이라도 들려고?”
마치 자신의 행동을 예견이라도 한 듯 검은 연기로 구석에 있던 검을 잡아다가 창문 밖으로 던졌다. 유리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지만, 그 누구도 고함을 지르거나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재미없는 놈들. 이럴 땐 원래 ‘꺄아악’이라든가 ‘살려 주세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자신을 막아선 엘리자벳의 모습에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납치범이란 걸 확신한 카를시아는 그녀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들은 네가 상대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다.”
조심스러운 카를시아와 달리 의기양양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엘리자벳은 널브러진 각목 하나를 주웠다.
그녀는 오펄과 아나이스에게 검을 배웠었다. 기사를 꿈꿨던 세실리아의 딸이었고 무에 능한 빈센트가의 피가 흐르는 엘리자벳이니, 호신술 정도로 배워 둔 검술에 그녀는 영재의 기질을 보이며 본격적으로 검술에 대해 배웠으니 이러한 상황에 검은 아니지만, 각목을 들고 어느 정도 방어는 가능하리라. 물론 일시적이겠지만.
“괜찮아. 내가 검은 좀 잘 쓰거든.”
“흐으응~ 얼마나 잘 쓰는지 확인하고 싶은걸. 어디 한번, 맘껏 날뛰어 봐. 아르켈미스의 아이.”
그 말과 함께 검은 형체는 자신이 쥐고 있던 검을 엘리자벳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 든 엘리자벳은 각목을 버리고 검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오펄에게 배운 대로. 아나이스에게 배운 대로 검집의 검을 천천히 뽑고선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호오? 제법 검을 다룰 줄 안다는 건가.”
재밌다는 듯 흥얼거리듯 말을 내뱉던 형체는 의기양양한 엘리자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빌어먹을 아르켈미스랑 닮은 아이. 저 적은발도 은안도! 빼다 박은 모습이 역겹구나!’
형체는 다시금 비릿하게 웃으며 엘리자벳을 향해 내뱉었다.
“빈센트는 수호의 검이라지. 얼마나 잘 수호하는지 보자꾸나.”
그 말과 함께 형체는 연기로 검을 만들더니 이내 엘리자벳이 아닌 카를시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형체가 준 검을 손에 쥐고 있던 엘리자벳은 저 검은 형체가 자신이 아닌 카를시아를 노린다는 것을 알고선 그를 막아서선 그대로 형체의 검을 받아 냈다.
“……!! 안 돼!!!”
순식간이었다. 연기가 그녀의 온몸을 감싸고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는 듯한 강한 칼바람을 내비친 것이. 형체의 연기가 걷히고 고작 5살짜리의 아이는 온몸에 피를 두른 채 카를시아의 품에 쓰러졌다.
“영애…! 정신 차리거라…!”
이미 형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공명하게 울리는 전언만 있을 뿐.
『숭고한 식의 제물이 될 아이는 금안을 가진 네가 아니라 은안을 가진 너로구나.』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변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