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175
175화
“그래,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맙구나. 이제 들어가자.”
아나이스는 ‘돌아왔어.’라고 인사한 나를 향해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맙구나.’라고 인사하며 날 맞이했다. 그런 그를 따라 드디어 저택에 입성한 나는 아나이스와 카를시아, 아라한과 함께 아나이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분명 그리 오래 비우지 않았을 텐데도 그의 집무실이 반가운 건 이제 그 누구도 다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앉자꾸나.”
아나이스의 말에 하나둘 앉기 시작한 우리였다. 곧이어 마야가 내가 좋아하는 베리류의 디저트를 잔뜩 들고 와서는 내 앞에 진열하기 시작했다.
“아니…. 마야?”
“흐윽…! 몰라요! 이거나 잔뜩 먹고 살 좀 찌세요!! 그사이 마른 것 좀 봐….”
마야는 내 모습을 보고선 여전히 코를 훌쩍이며 쉴 새 없이 디저트들을 진열하기 시작했다. 아까가 끝인 줄 알았는데 다른 시녀가 더 들어오더니 더 진열하고 있다. 어느새 테이블 가득하게 채워진 디저트에 나는 극강의 단맛과 함께 당뇨병이 올 것 같은 니글거림에 치를 떨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달달한 홍차가 아무런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홍차 본연의 향이 내 코끝을 자극했다.
“…할아버지. 설마 이거 저보고 다 먹으라는 건 아니죠?”
“물론. 다 네 것이란다.”
“…….”
아니, 할아버지? 이건 그래도 너무 심한데요?
“그 망할 놈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애가 이렇게 말랐어!”
아니, 납치당해서 감금당한 건 맞는데…! 살 빠질 정도로 고생을… 했구나. 불에 타 죽을 뻔했구나. 게다가 엘리자벳의 과거를 보느라 기력도 소진했었구나.
‘근데 엘리자벳은 개복치가 아니라서!! 튼튼하단 말이다!!’
그러나 나의 발악은 의미가 없었다. 이미 아나이스는 포크를 들어 케이크 하나를 떠서 내 입으로 직행시켰기 때문이었다.
“으읍…. 하라버지….”
“이야기는 다 먹고 나서 해도 되니 천천히 먹도록 하자꾸나.”
그렇게 시작된 나의 시식은 30분이 지나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아직 절반의 케이크가 남은 거로 보이는데 실화야? 내 눈이 잘못된 거 아니지?
“할아버지…. 저… 배불….”
“그래, 나머지는 그럼 나중에 먹도록 하자.”
그제야 케이크의 지옥에서 벗어난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홍차를 마셨다. 역시나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아 쓴맛이 나는 홍차였고 이미 입 안 가득히 생크림과 과일과 잼과 크림에 의해 달달해진 내 입은 그 쓴맛마저도 달달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홍차를 내려놓은 나였고 그것을 보고 있던 세 남자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런 거로 흐뭇해하지 마!!’
그리고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카를시아였다.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였는가.”
“아, 네.”
나는 이제 조금 떨리는 마음에 마른침을 삼키고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 사실 엘리자벳이 아니에요.”
“…….”
나의 발언에 적막이 감돌기 시작했다. 역시 놀란 거겠지. 분명 ‘네년도 마몬과 같이 우릴 속였구나!’라고 할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저들이라면 그런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라며 내 말 자체를 부정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긴장된다고. 그러나 나는 적막 속에서도 꿋꿋하게 말을 이어 갔다.
“저는 여기랑은 조금 다른 세계에서 온 이세화라고 해요.”
“……!”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아라한이었다. 묘하게 어깨를 꿈틀거리던 아라한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침착한 척하였다. 그러나 동체 시력을 가진 엘리자벳에게 그의 행동은 너무나도 잘 보였다. 하긴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이 사실 엘리자벳이 아니라고 한다면 충격받을 만하지.
“끝이더냐.”
“…네?”
나는 차분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자리에 있는 건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짓는 아나이스였다. 끝이라고 묻는다면 끝이 아니라, 대답하여야 했다. 그러나 차마 저들이 믿지 않을 것임이 뻔한데도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이야기를 해 줘야 할까. 사실 엘리자벳과 나는 쌍둥이이고 나는 아스칼에 의해 다른 세계로 가 아스칼이 말했던 시간 돌리기 전의 일들을 소설로 다 읽었었다고 어떻게 이야기를 하겠는가.
“…그….”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아나이스였다. 힘든 건 사실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사실을 알고 싶어 할 당사자들은 너무나도 태연했다. 내가 긴장하고 두려워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그리고 이어지는 아나이스의 말에 저들이 보였어야 할 놀라움을 내가 보이고야 말았다.
“너의 이름이 세화였구나. 우리 세화.”
“할아버지…?”
마치 아까 ‘우리 손녀’라고 말한 이유가 나의 이름을 몰라서 그런 것이라 생각할 정도로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내 이름을 불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화, 정말이지 이름마저도 예쁘네요.”
감히 날 속였냐고 다그쳐야 할 아라한도.
“세화라…. 그건 너의 세계에서 어떤 뜻이지.”
그 누구보다 엘리자벳이 사랑했던 사내였던 카를시아도.
“…저….”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 자체가 당황스러운 나였지만 나는 애써 티 나지 않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
“다 알고 있었다. 네가 우리 엘리가 아니란 것쯤은. 이 할아버지가 모를 리가 없잖아.”
“하지만…! 분명 할아버지는 저를….”
“네가 모든 걸 말해 주기를 기다렸단다. 내가 섣불리 너에 대해 묻는다면 넌 두려움에 떨 것이 분명하니까.”
사실이었다. 혹여나 누구에게 내가 엘리자벳이 아니라는 걸 들키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했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는 듯 아나이스는 기다렸다.
“아니…. 그건 맞지만.”
“그래서 기다렸단다. 네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 그러니 기다리자, 라고.”
“진짜 엘리자벳은….”
“엘리라면. 우리 엘리라면 당연히 너의 사정을 듣고 몸을 주었을 거라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잖아요. 근데 그걸 믿었다고요?”
그래, 상식적으로 불가능하고 믿기지 않은 이야기이지 않은가. 어느 누가 멀쩡하게 잘 살고 있던 엘리자벳의 몸에서 다른 영혼이 들어갔다는 거에 안 놀랄 수 있는가. 물론 상상이 현실이 되는 소설 속이자 모르크 제국이라지만 그건 나에게 해당하는 말이었지 책의 등장인물인 이들에게 해당하진 않았다. 그런데도 아나이스는 그 말을 믿었단다.
“어째서….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있는… 거죠?”
나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아나이스는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천천히 눈을 뜬 아나이스는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믿는다는 것에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란다. 그저 네가 나의 손녀임은 변함이 없으니까.”
“…그럼 라트도…. 폐하도….”
“그래, 알고 있었다. 그대가 엘리자벳이 아니란 것을.”
“그리고 당신의 이름이 세화라는 것도. 또 당신이….”
“엘리의 동생이라는 것도.”
“……!”
차례대로 밝혀지는 나의 비밀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세 남자의 태도에 나는 눈을 끔뻑였다.
“어… 언제부터요…?!”
“그대와 가면무도회에서 춤을 췄을 때.”
“세화와 함께 딸기 케이크를 먹었던 날이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에 나는 순간적으로 멘붕이 왔다. 아니! 알고 있었으면 귀띔이라도 해 주지 그랬어!! 나만 괜히 긴장하고 그랬잖아!!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널 버리는 일 따위는 없을 테니.”
“버리다니 표현이 심하잖아! 망할 꼬맹이!!”
“영애가 끝까지 침묵한 이유는 이 모든 것을 밝히면 모두가 자신을 싫어할까 봐…. 같은데.”
아니, 그건 맞는데 너무 팩폭이잖아요. 황제 폐하. 도대체가 엘리자벳은 저 남자의 어디가 좋았던 걸까. 생긴 거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아라한이 더 좋은데.
‘그렇기엔 난 아라한을 최애캐에도 차애캐에도 두질 않았구나. 미안하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속으로 아라한에 대한 미안함을 외치고선 나는 ‘크흠’ 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도 절….”
“아가, 네가 엘리자벳이든 세화든 그건 상관없단다. 너는 나의 손녀고 나는 너의 할아버지니까.”
“맞다. 그대가 엘리자벳이든 아니든 그대가 우리를 위해 아스칼을 해치우고 죄인을 잡은 건 확실하니까.”
“그래요. 설마 제가 당신이 엘리자벳이 아니라서 실망할 거라 생각했나요? 저는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걸 사랑하는 편이라서요.”
뭔가 허탈함이 느껴지면서도 그렇게 말해 주는 저 남자들의 말이 너무나도 좋아서. 너무 듣기 행복해서. 무언가 마음 한편에 있던 짐을 덜어 놓을 수 있어서 좋았다.
“후우…. 정말이지…. 저 혼자 얼마나 끙끙 앓았는데….”
“그러니 이제 그만 앓아야지. 세화.”
아나이스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확하겐 그들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 준 것이겠지만. 그들은 듣는 내내 화는커녕 짜증도 내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이야기에 놀라워했고 내가 살았던 세계에 있는 것들에 관심을 보였다.
카를시아는 법과 제도에 대해. 놀라운 행정 시스템에 관심을 보이던 아라한은 행정 시스템에 대해. 무엇보다 내가 살아온 환경과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던 아나이스는 나의 삶에 대해 끝까지 들어 주었다.
“그랬군. 그런 방법이…. 다음, 귀족 회의 때는 그런 식으로 죄인을 판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럼 억울한 사람도 줄어들었을 것이고.”
“그렇게 하면 보다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고 세금에 대한 백성들의 부담도 적겠군요. 한번 고려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아비라는 작자를 내 그냥!! 감히 나의 손녀를 데리고 살았으면…! 호른이나 그 새끼나 맘에 들지 않는구나!”
그렇게 나의 이야기로 모두 밤을 지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