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77
77화
오즈번과 브론드가 사라지고 귀족들 역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무도회는 엉망이 되었고 연회의 주역인 엘리자벳도 자리를 비웠다. 그러니 연회를 계속 열 필요가 없어진 셈이었다.
황제가 아직 연회에 있어 함부로 걸음을 움직이지 못하던 귀족들 역시, 조금 전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대사제가 악녀에게 축복을 주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놀라웠다.
당연히 악녀라 불리는 엘리자벳이 공녀가 됨을 받아들일 수 없던 대사제가 축복을 거부한 줄 알았으니까. 떨어진 샹들리에 역시 신이 내린 천벌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이 보는 시선들은 그러했다. 그러나 엘리자벳의 눈물을 본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됨을 인지했다.
‘엘리자벳이 정말 악녀일까.’
웅성거림 사이에선 엘리자벳이 악녀 짓을 한 적이 있는가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어쩌다 악녀가 되어 이런 모진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인지에 관한 안타까움까지 내비친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카를시아가 들었던 조잡한 목소리가 닿지 않았던 자들이었다.
“후, 이 기쁜 날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통탄을 금치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국의 눈부신 태양이자 주군 되시는 카를시아 세닐 모르크 황제 폐하. 신, 수호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이 사건을 그대로 좌시할 수는 없습니다.”
“짐의 생각도 같다. 엘리자벳이 춤추는 그때에 맞춰 떨어진 샹들리에하며 그 이전의 일들까지 생각한다면 그대로 두어선 안 되겠군.”
“부디 이번 사건의 수사권을 황궁 조사단이 아닌 수호 기사단에게 주실 수 없을는지요.”
“…좋다. 범인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조사단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황궁 조사단을 보낼 터이니 걱정하지 말도록.”
“감사합니다.”
아나이스는 카를시아와 모종의 거래를 끝내고 귀족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즐거운 연회를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마무리하게 되어 미안하오. 연회의 주인공이 자리를 비웠으니 이만 연회를 마칠까 싶소. 모두들 진심으로 축하해 주어 고맙소.”
아나이스의 말에 몇몇 귀족들은 엘리자벳의 일에 대해 안타까움을 내비치며 자리를 떠났고 몇몇은 공작이 됨을 축하하며 자리를 떠났다. 모두가 그렇게 떠나고 덩그러니 남은 사람은 카를시아와 아나이스, 아르텐과 벨루아 후작이었다.
“후작은. 가 보지 않아도 되겠소?”
“…저도 가 봐야지요. 진심으로 공작이 됨을 축하드립니다.”
정중하게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벨루아 후작의 모습에 아나이스는 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조소를 내비쳤다. 그리고 그 조소는 두 번은 없다는 경고도 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터라 미처 그의 조소를 확인하지 못한 벨루아 후작은 마지막으로 황제인 카를시아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조용히 떠나는 벨루아 후작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아르텐이 ‘피식’ 미소를 지으며 카를시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벨루아 후작은 걸음을 옮겨 공작저의 정원으로 향했다. 아르텐이 저 뒤로 따라옴을 눈치챘고 그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해서 일부러 발걸음을 정원으로 돌렸으니 어느 정도 정원의 깊숙한 곳으로 향하자 그 걸음을 멈춘 벨루아 후작이 몸을 돌려 아르텐을 노려보았다.
이미 해는 졌고 짙은 어둠이 가라앉을 시간이었기에 그의 눈부신 청안만이 또렷하게 반짝이며 벨루아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속셈이냐.”
“무엇을.”
“왜! 돌아온 것이냐고!”
“내가 내 땅의 것들을 위해 돌아왔는데 뭐가 그리 불만인지 모르겠군.”
“…이익!”
벨루아 후작이 이를 빠득 갈며 아르텐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흔들림 없는 푸른 눈동자는 호선을 그리며 그를 비웃고 있었다.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할 것이고 그렇게 만들 거니까.”
“무슨…!”
“이 몸은 정말 써먹기 좋은 몸이로구나.”
공명하게 울리기 시작하는 아르텐의 말소리가 벨루아 후작의 귀에 종소리 울리듯 먹먹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벨루아 후작은 이 음성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신의 음성.’
간혹 아주 간혹. 신이 자신의 말을 전달할 때에 신탁을 이용하지 않고 살아 있는 산 자의 몸을 들어가 말을 전할 때가 있었다. 아르텐은 대사제이니 신과 가장 가까운 자였다. 해서 신이 직접 그 몸을 잠시 빌려 자신의 말을 인간에게 전할 수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울리기 시작한 음성에 벨루아 후작은 눈을 찌푸렸다. 공명하게 울리는 이 음성은 전언이라고 불리는 것과는 달랐다. 말하는 이는 인간이지만 그 속에 깃든 것은 신이었다. 말에 힘이 있었고 그 힘은 곧 강력한 신성력이 되어 반드시 이루어질 예언이 되고 말리라.
“성녀, 오즈번이 내게 빌더구나. 엘리자벳 영애가 무사하기를. 퍽 웃기지 않은가.”
“…….”
벨루아 후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앞의 사내가, 아르텐이 아르켈미스라는 건 보자마자 알았다. 해서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그의 숨소리 한 번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키고 그의 손짓 하나가 얼마나 큰 바람을 일으킬지. 그런 사내가 오즈번을 입에 담으며 무서울 만큼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 속에 신의 사랑은 없었다. 조소. 분명 조소였다. 그의 웃음은.
벨루아 후작은 무어라 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공명하게 울리는 신의 음성이 다시 한번, 자신의 머리를 강타했다.
“감히 나의 아이를 건드린 대가는 치러야지.”
‘나의 아이’ 아르켈미스가 말하는 그 아이는 성녀, 오즈번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14년 전, 성녀로 간택되었으나 자신의 농간으로 성녀가 되지 못한 아이. 아르켈미스가 내정한 신의 아이. 성녀, 엘리자벳을 두고 하는 말임이 분명했다.
“그 무슨…!!”
“이 내가 점지한 나의 아이를. 엘리자벳을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 아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신이란 무릇 만민을 평등하게….”
“그걸 네놈에게 듣고 싶진 않구나. 벨루아 후작. 아니, 아스칼.”
“……!!”
‘아스칼’. 제국의 오랜 신화에나 등장하는 신. 그 신은 아르켈미스와는 달랐다. 오랜 성서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본디 아르켈미스를 지키는 천사였던 그는 스스로를 높여 ‘신’이라 지칭하며 ‘아스칼’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악신이라 불리는 ‘아스칼’의 본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르켈미스에 의해 땅 깊숙한 곳에 기거하게 된 아스칼이었다. 그런 아스칼이 갑자기 모습을 내밀었다. 그것도 아르켈미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나타났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이 이 모르크 제국의 주신이 되기 위해. 그러면서 다시 한번, 아르켈미스에게 검을 겨누어 자신이 창조주가 되기 위해. 해서 자신이 아르켈미스인 것처럼 인간들 위에 군림하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과 똑 닮은 아이, 오즈번을 발견하였다. 처음이었다. 자신과 같은 오만과 자만, 욕심과 욕망의 덩어리인 아이는. 그 아이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황태자인 카를시아였다. 아니, 정확하겐 카를시아의 옆에 있던 아이. 자신을 땅속에 내던진 아르켈미스가 내정한 아이, 엘리자벳 아르엘시아가 있었다.
해서 아르켈미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이 아르켈미스가 되어 그 아이를. 오즈번을 성녀로 만들었다. 그래, 엘리자벳을 죽이면서까지 성녀로 만들었는데!
‘왜 다시 살아난 것이냐…. 엘리자벳!’
살아난 것도 모자라 이(異) 세계의 영혼이 잘못 들어갔다니. 그래서 직접 개입하였다. 꿈이라는 조잡한 방법을 쓰면서까지 돌아가라고. 악녀로 죽으라고 하였건만…!!
“그 아이도! 모르크 제국의 아이다. 아르켈미스의 보호 아래에 있을 제국민이라고!”
“네놈이 점지한 그 아이를 내가 굳이 지켜 줄 이유는 없을 듯싶은데.”
“…뭐….”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꽤 발칙한 일들을 해 놓았더구나. 네가 점지한 그 아이가.”
뱉은 말의 의미를 아스칼은 잘 알고 있었다. 발칙한 일. 그것은 저 자신이 저질렀던 일도 포함일 것이다. 14년 전의 일과 더 나아가 그 전의 일들도. 애써 수면 위로 가라앉혀 놓았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이 세계에서 넘어온 영혼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르켈미스가 돌아올 줄이야. 그것도 자신이 점지한 아이를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하면서까지 인간의 일에 개입하다니.
“그러니 너는 너의 아이를 잘 지키도록 하여라.”
그 말을 남긴 채 유유히 몸을 돌려 공작저로 걸음을 옮기는 아르텐이었다. 아르텐이 말한 그 아이가 누군지 벨루아 후작은 잘 알고 있었다. ‘오즈번 루시엘라’. 인간의 모습으로 그녀를 도와주고 싶을 만큼 그를 사랑하고 또한 애정하였다.
그걸 두고 자신이 엘리자벳을 두둔하는 것을 합리화시키는 아르켈미스의 모습에 입술을 잘게 깨무는 벨루아 후작이었다. 기나긴 싸움을 직감한 그는 갑자기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오랜 악연은 절대 끊어지지 않을 신의 전쟁임이 분명했다.
“그래 봤자, 죽는 건 또 엘리자벳이 될 거야.”
그 순간, 벨루아 후작은 없었다. 검은색 머리에 섬뜩할 정도로 붉은 악마의 눈동자를 가진 사내가 호탕하게 웃으며 공작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바뀔 것은 없었다. 죽을 것이다. 엘리자벳은. 적어도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할 저 몸뚱이에 있을 다른 영혼은. 조잡한 꿈을 보여 주면 또 무서워 벌벌 떨 것임이 분명했다. 자신이 처음 마주한 영혼의 모습이 그러했으니까.
해서 되지도 않는 주술을 걸려고 하였다.
『아니, 이번에는 네놈과 그 버러지 같은 오즈번 루시엘라가 죽을 것이다.』
“……?!”
갑작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아스칼은 고개를 휘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르텐은 분명 돌아갔을 텐데…!’
사람은 없었다. 인기척도 없었다. 분명 공명하게 울리는 저 말은 아르텐이, 아르켈미스가 냈던 ‘신의 음성’과 흡사했다. 그러나 아르켈미스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무언가 더 생각하기도 전에 음성은 없어지고 말았다.
“하하, 그래…. 어차피 아르켈미스는 인간과의 맹약 때문에 인간들의 일에 개입할 수가 없다.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하였다 하여도 신의 힘을 사용하지 못한단 말이다.”
그러니 승리는 자신의 것이었다. 제아무리 신의 힘을 가진 엘리자벳이라 할지라도 그 힘을 인도할 아르켈미스가 인간의 일에 개입할 수 없는 이상. 그녀는 또다시 단두대에 목이 잘려 가엾고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 오즈번을 위한 제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