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 is so good at magic RAW novel - Chapter 127
127화 새하얀 것들 (5)
“어, 어쩌려고 그래 카를…!”
“대화를 하고 싶으니 얌전히 문을 열어달라고 해도 문을 열어줄 작자들이 아닙니다.”
카를의 마력이 천천히 결계를 허물어뜨리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좀벌레가 책을 갉아먹는 것처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리고…만약 순순히 문을 열어주더라도 제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여줄 이들도 아닙니다.”
“확실히 위험한 방법이긴 하니까….”
카를이 노리는 것은 드라일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지, 말단 병사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려면 확실한 미끼가 필요하다.
실력이 뛰어나거나, 쓸모가 있거나.
하지만 전자는 불가능하다. 마족이 다루는 마법과 인간이 다루는 마법은 구조적으로 차이가 나기에, 실력이 조금만 있으면 알아볼 수 있다.
‘결국 후자가 되어야 하는데….’
후자가 되어서 도움이 될 게 없다.
미래를 안다는 확실한 카드가 있으나, 그걸 마족들에게 알려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한 종족의 대표자로서 그들에게 합류한다면, 못해도 간부 자리는 줄 것이다.
‘하다못해 고블린도 간부로 삼았으니까….’
신생 마족 연합의 일원, 주워 담는 오르멜.
아무런 능력도 없는 그저 그런 고블린 중 하나지만, 종족의 대표자라는 이유로 간부의 일원이 되었다.
하물며 엘프는 어떨까. 그들의 대표자라는 명함을 내밀며 접근한다면 간부 자리는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엘프들도 제정신이면 쉽게 동의해주지 않겠지.’
종족의 대표자라는 건, 그 사람의 의견이 그 종족의 말을 대변하는 것이 되므로.
자기 종족의 의견을 생판 모르는 남에게 맡기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카를, 이건 너무 과격한 방법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제가 엘프들을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요.”
정현 자신의 감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카를로스가 엘프라는 종족 자체에 가지고 있는 증오였다.
그들을 압박할 수 있는, 좋은 빌미이기도 했다.
“……아아.”
시아나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쯤 파각, 하고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조금씩 깨져가던 결계에 명백한 빈틈이 드러난 것이다.
“…튼튼하긴 하네요.”
머리를 숙여야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틈. 카를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흐으읍.
결계 안으로 들어간 카를은 숨을 들이마셨다.
“…신기하네.”
무더운 여름에 바깥에 있다가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가게 안으로 들어간 느낌이었다.
결계 안과 밖의 공기가 아예 다르게 느껴졌다.
뭔가 특별한 종류의 마법으로 대기를 관리하고 있는 걸까.
“으음.”
따라 들어온 시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카를 이제 곧 엘프들이 막 몰려오지 않을까? 그러고 있어도 돼?”
“몰려와도 상관없습니다.”
카를이 그렇게 말한 순간, 시아나의 말마따나 무장한 엘프들이 몰려왔다.
게임이나 소설, 만화 등에서 나오는 전통적인 엘프들의 모습이 아닌 철로 된 갑주를 입은 모습.
장르가 RTS인 전쟁 게임이었으니 그들의 모습은 당연한 것이었다.
특별하게 장식된 갑옷을 입은, 그들의 대장으로 추정되는 엘프가 외쳤다.
“누구냐! 신원과 결계를 침범한 이유를 밝혀라!”
“음…카를 괜찮은 거, 맞지?”
서른이 넘는 엘프들이 순식간에 카를과 시아나를 둘러쌌다.
카를은 마법이 스톡되어 있을 창이 자신을 겨누는 것을 보면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알레나의 아들 안타레스다.”
“…안타레스?”
엘프 중 한 명이 문득 그렇게 물었다.
알파성의 이름. 진짜 이름이 아니더라고 해도 엘프들에게 알파성은 그들을 잠시 당황케 할 만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카를 자신은 결계를 뚫고 들어온 침입자였으므로.
놀람을 삼키는 자. 동요한 나머지 창을 떠는 자. 그리고 인간 아니야? 라며 의문을 제기하는 자가 있었다.
“나를 너희들의 장로, 사달멜리크께 인도하라.”
그들을 둘러본 카를은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며 자신의 혈육의 이름을 외쳤다.
* * *
“…카를.”
“네. 선배님.”
“사달멜리크가 누구야…? 아는 사람이니?”
엘프들의 대장은 손바닥만한 거울을 손에 들고 뭐라 대화를 나누었다.
팔란 대군이 가지고 있는 원거리 통신이 가능한 아티팩트와 비슷한 물건처럼 보였다.
그 대화의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누구냐고 외쳤을 때와 달리, 인간들의 언어가 아닌 엘프들의 언어였기에.
거울과 잠시 대화를 나눈 대장이 한 말은 안내해줄 테니 따라 오라는 것이었다.
“제 증조할머니 되시는 분입니다.”
“…응?”
“일단 150년 전 기준으로는 장로였습니다. 아마 지금도 장로를 하고 있지 않을까요.”
“아…그, 그러니?”
수명 하나는 거인족과 비교해도 될 정도로 장수하는 종이다.
장로 임기가 100년에 가깝고, 연임도 가능하니 아마 지금도 장로직을 유지하고 있으리라.
“아는 사람이 있었구나…그래서 이렇게 한 거야?”
“이름 빼고는 모르는 사람이에요. 증조 할머니라지만 한 번도 본 적 없거든요.”
“그러면 뭘 믿고…?”
“증손자라고 하면 얼굴 한 번 보려고 하지는 않겠습니까.”
혈육 간의 정 따위를 중요시 하는 사회는 아니지만, 그래도 얼굴을 보려고 하지는 않겠는가.
그 증손자가 결계를 깨부수고 침입했다면 궁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분간 여기서 기다리시오.”
두 사람을 데리고 가던 엘프 대장이 멈춘 곳은 허름한 오두막 한 채만 덩그러니 서 있는 벌판이었다.
주위를 슥 둘러본 카를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분간?”
“아아, 잘못 말했소. 그것이…잠깐. 잠깐만 기다리시오.”
인간들의 언어가 영 익숙하지 않은 것인지 대장은 허둥대는 말투로 대답한 뒤,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카를은 병사들이 힐끔대는 시선을 깡그리 무시하며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그의 눈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이거 평범한 오두막이 아니었군요.”
“응?”
“기둥에 술식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냥 오두막이면 이런 걸 해뒀을 리는 없을 테니까…이건.”
“전이진이네?”
기둥을 보자마자 시아나가 그리 말했다. 카를은 그녀의 말에 오두막의 기둥을 찬찬히 살폈다.
시아나의 말대로 전이진이었다.
“…그들이 여기로 오는 게 아니었군요. 저희한테 오라는 것 같습니다.”
“그럴까?”
“일단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으음….”
대장과 달리 병사들은 인간의 언어를 모르는 걸까.
카를과 시아나가 대놓고 말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힐끔거리기만 할 뿐, 말리거나 하진 않았다.
“먼저 넘어가죠. 선배님.”
“그래도…될까?”
“마력만 주입하면 바로 작동하는 구조인데 이 정도면 넘어가라고 놔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우리가 평범한 사람도 아니라 마법산데?”
“그렇죠.”
결계를 뚫고 들어왔는데 자신들을 마법사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생각할 가능성은 낮았다.
호기심을 빼면 시체라고 해도 좋을 마법사들이 정말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카를은 오두막 위에 손을 올려두고 마력을 확 주입했다.
“……!”
놀란 병사들이 돌아서서 창을 겨누었다.
뭐하는 짓이냐, 멈춰. 그런 의미들을 내포한 말을 외쳐댔으나 카를은 그것들을 무시하고 시아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시아나가 손을 잡은 직후 카를은 그녀와 함께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봐요. 이 정도면 그냥 쓰라고 내버려 둔 게 맞다니까요.”
“그러게. 왜 적극적으로 안 막았을까?”
“내가, 건드리지 말라고 했으니까.”
어눌한 목소리. 인간들의 언어를 억지로 발음해내는 듯한 말투에 카를은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주름이 진 엘프가 나무로 된 의자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더 늙은 엘프 두 명과, 조금 전에 보았던 대장이 있었다.
“카를, 내 생각에는 저분인 것 같은데…?”
“네.”
늙은 엘프 두 명은 남자였다.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여성 엘프. 카를은 시아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저 엘프가, 사달멜리크다.
“용감한 건지 겁이 없는 건지…모르겠군. 결계를 뚫고 허락도 없이 이곳까지 들어오다니.”
“안녕하십니까.”
카를은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증조모님.”
“……?”
“저희 할머님의 성함이 알레샤입니다. 기억, 하고 계시겠지요.”
“알레샤….”
팔걸이를 짚고 상체를 꼿꼿이 세운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 아이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얼굴도 뵌 적이 없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병 때문에 돌아가셨으니까요.”
“…….”
아아.
짤막한 탄식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카를은 냉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할머님께 자식이, 저희 어머니가 있다는 건 알고 계셨습니까.”
“들어본 적은 있단다. 유명했지. 그 아이와 눈이 똑 닮아서…알아보았다.”
“그러면 저희 어머니가 왜 몸이 약하게 태어나서, 일찍 돌아가셨는지도 아시겠군요.”
카를은 분노를 연기했다. 증오를 겨우 참아내어, 꾹꾹 눌러 담은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엘프들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사달멜리크만이 조금 동요한 표정을 지을 뿐.
갑작스레 험악해진 분위기에 놀란 시아나만이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 매몰차게 내치셔야 했습니까.”
“…….”
“고작 인간 남자를 만났다는 이유로 딸 아이를 내치셨어야 했습니까. 증조모님.”
카를로스가 엘프라는 종족 자체를 증오했던 이유.
뻔하고 단순한 이야기였다.
장로의 딸이 이종족과 금단의 사랑을 했고, 내쫓기고 남자에게도 버림받아 혼자 떠돌다 애를 낳았고…그러다 병을 얻어 눈을 감은 것이다.
카를로스의 어머니, 알레나가 태생적으로 몸이 약했던 이유 또한 그와 관련이 깊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단다.”
“대체 어떤 사정이 있었기에 그랬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제국에 위탁해 살아 간다 하더라도…피를 더럽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종족과 살을 섞은 일족은 추방하는 것이 이곳의 율법이란다.”
“사달멜리크 장로님.”
바로 옆.
그녀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엘프가 경어를 붙여 그녀를 향해 말했다.
이름 이후로는 인간의 언어가 아닌 엘프의 언어였으나, 단어 몇 개의 의미를 추측할 수 있었다.
“……어째서 ……물으시는 게….”
사담은 그만하고 용건을 물어보라는 걸까.
늙은 엘프의 말을 들은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카를을 향해 물었다.
“…이 이야기는, 이쯤 하자꾸나. 남들이 보는 곳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다.”
떳떳하지 못하니 그렇겠지요.
그렇게 말할까도 잠깐 생각했지만, 곧장 아니라고 판단했다.
필요 이상으로 도발할 이유는 없었다. 상대의 분노를 끌어내는 게 아니라, 자신의 분노를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한 자리였다.
“숲으로 들어온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도 결계를 망가뜨려서.”
“저도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접견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거든요.”
“너무 난폭한 방법이었다. 그것 때문에 놀란 백성들이 한둘이 아니야.”
“제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요.”
늙은 장로들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엘프 대장 또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고 했으나 사달멜리크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녀는 카를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기다렸다.
“제가 이 숲에 온 이유는 단순합니다. 저는 신생 마족 연합 내부에 잠입할 계획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엘프의 대표자…정도 되는 명함이 필요합니다.”
“…그게 필요해서 온 것이냐.”
“예.”
“그러면, 이리 난폭한 방법을 택해선 안 되었다. 아이야. 정중하게 찾아와 부탁을 했어야지.”
“제가 부탁을 하는 걸로 보였습니까?”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카를 자신이 목적하는 ‘엘프의 대표’라는 명함을 얻어낼 수 없다.
널리고 널린 이종족인 인간과 사귀었다고 장로의 딸이라도 가차 없이 내쫓는 배타적인 종족이 엘프다.
엘프의 피가 섞였다곤 하지만 쿼터에 불과한 카를 자신에게 협조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착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협박이었다.
회유가 통하지 않으면 남는 방법은 협박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런 이유 없는 협박은 패악질에 불과하다. 최소한 엘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 이유가 태생적으로 갖춰져 있으니 그걸 이용할 뿐이었다.
“알레나의 아들 안타레스 그리고 카를로스 크로우, 크로우 공작가의 당주로서 말하겠습니다.”
이미 설정집에서 읽어 알고 있다.
숲에서 나가는 엘프들이 늘어나고 있고, 다른 이종족과 관계를 맺으면 그들을 철저히 내쫓는 기존의 장로단에게 가지는 불만이 크다는 것을.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일부의 엘프는 카를 자신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과감히 시도할 수 있는 패악질이고, 협박이었다.
“얌전히 협조하시지요.”
사달멜리크와 달리 순식간에 창백해진 양옆의 두 장로의 얼굴을 본 카를은 승리를 확신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