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 is so good at magic RAW novel - Chapter 128
128화 새하얀 것들 (6)
주위가 침묵으로 물들었다.
자기보다 훨씬 덩치 큰 개를 본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은 시아나가 카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쩌려고 그래 카를…!’
흔히 텔레파시라 불리는 마법. 그녀는 카를의 머릿속으로 직접 목소리를 흘려 넣었다.
카를은 그녀를 향해 입술만 움직여서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결례잖아…!’
‘결례를 저질러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에요.’
예의와 결례를 차리는 것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동방 예의 지국 출신이다.
지금 자신이 벌이는 짓이 무례하다는 것은 한참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면…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
‘손자가 할머니를 버린 증조모를 원망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이치잖아요. 그 원망에서 비롯된 분노로 이런 짓을 벌인다…그렇게 되면 저쪽도 할 말이 없죠. 먼저 천륜을 저버린 건 저쪽이니까.’
‘……으으. 난 모르겠어, 카를.’
감정을 포장하고, 그럴 듯한 명분 속에 자신의 목적을 숨기는 건 귀족들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귀족들이 세 명 이상 모인 자리에 나가면 늘상 이런 대화가 오가곤 했다.
파티에서 과하게 흥분해 길길이 날뛰는 자가 있어도…무기를 쥐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적극적으로 막지 않는 이유도 이것이었다. 결국 그것도 쇼의 일부였으니까.
‘이딴 게 도움이 될 줄이야.’
배워 놓으면 언젠가는 쓸모가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게 딱 지금 같은 경우였다.
‘어쨌든…계획은 있는 거지? 사고 치는 거 아니지?’
‘네. 믿으셔도 됩니다.’
‘으…알겠어. 나중에 막, 외교적인 문제가 되거나 하진 않겠지…?’
이미 충분히 외교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이었다. 다만 그 책임은 다른 누구에게도 떠넘기지 않고 카를 자신이 감당할 것이었다.
“협조라니!”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늙은 엘프 중 한 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외쳤다.
“고작 그런 사연 하나를 가지고 우리의 대표자가 되기 위해서 찾아왔단 말이냐…!”
“제가 필요한 건 명함이지, 정말로 당신들의 대표자 자리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숨어드는 데만 쓸 뿐, 그걸 가지고 뭘 할 생각도 없고요.”
“그렇다 하더라도!”
노인이 카를의 눈앞까지 걸어왔다.
원체 신장이 큰 종족이라서일까,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카를보다 키가 컸다.
주름진 눈가를 찌푸린 노인이 카를을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런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요구하는 주제에 우리의 협조를 바라는가!”
“……후.”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해 하는 걸까, 아니면 머리를 식히려는 행동일까.
전자일 경우를 상정한 노인이 긴장의 숨을 삼킨 순간이었다.
“미안합니다.”
“…음?”
카를은 버럭 목소리를 높인 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더없이 차분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잠시, 원망에 눈이 멀어 무례한 말을 지껄였습니다. 이 점은, 확실히 사과드리겠습니다.”
“허…어?”
“그리고…멋대로 넘어온 건 불가항력이었습니다. 근사하게 만들어진 전이진이 있는데 발동하지 않고 참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도 마법사라면 이해할 수 있지 않느냐. 카를의 말에는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장로까지 오른 엘프들은 어지간한 경우엔 마법사였다.
종족 불문, 호기심은 못 참는 것이 마법사라는 족속이었다.
“죄송합니다. 증조모님. 이렇게 사과드리겠습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
허리를 거의 90도로 숙여 사과하는 카를을 본 사달멜리크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말없이 카를을 노려보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혓바닥이 참으로 간사하구나.”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끼고 사과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르고 보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라 여겨질 정도였다.
그녀는 혀를 내두르며 말을 이었다.
“알레샤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거늘. 너는…역시나 인간이다. 전혀, 엘프 같지 않아.”
“조모님이 쫓겨나신 게 벌써 50년이 넘었습니다. 설마 저를 엘프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사달멜리크는 씁쓸하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혈육, 딸 아이의 손자, 그 아이의 아들.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될 것이었다.
눈앞에 있는 카를로스 크로우는…제국의 공작이었다.
“카를로스 크로우 공작.”
“예. 사달멜리크 장로.”
한 번의 부름이 오갔고, 한 번의 이해가 오갔다. 혈육의 정으로 상대해야 할 대상이 아님을 깨달은 사달멜리크가 물었다.
“우리의 대표자라는 명함이 필요한 이유…그걸 요구하는 이유를 듣고 싶군.”
“얼마든지 설명드리겠습니다. 다른 장로들을 모아주시지요.”
“흠.”
엘프들의 장로와 제국의 공작. 둘 사이에 끼인 채 얼어붙어 있었던 엘프 대장을 향해 사달멜리크가 시선을 던졌다.
그는 경직된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방안을 돌아다니며 스위치를 켜기 시작했다.
“…….”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스위치가 켜질 때마다 톱니바퀴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눈으로 마력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시아나는 톱니바퀴 소리가 커질 때마다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카를….”
“왜 그러십니까?”
“이 시설 말이야…이 공간 자체가 하나의 아티팩트 같아.”
넓은 방, 혹은 작은 회의실.
전이진을 이용해 들어온 공간은 그닥 넓은 공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스위치가 켜지고 톱니바퀴가 돌아갈 때마다 방의 형태가 바뀌었다.
“바닥이….”
나무로 된 바닥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딸깍, 철컥, 차르르륵. 나무와 풀을 엮어서 만들어진 건축물에서 기계적인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읏?”
카를과 시아나. 두 사람이 밟고 선 바닥이 크게 회전했다.
당황한 시아나가 몸의 균형을 잃은 순간, 카를은 그녀의 몸을 잡아 지탱했다.
“고마워 카를. 넘어질 뻔했어….”
“아티팩트…가 조금 엉성하네요.”
“응?”
카를은 엘프들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계음에 목소리가 묻혀 시아나도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변환 구조가 비효율적이고 회전이 거칠어요. 마력 운용도 안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고요. 이런 규모의 아티팩트를 만든 건 대단하긴 한데…기술은 그닥이네요.”
“정말? 그래도 엘프들이 만든 건데…엘프들은 마법사의 종족이잖아.”
그렇게 말한 시아나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시설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녀와 달리 카를은 「분석」에 마력을 쏟아부어 해부하듯 자세히 살폈다.
“150…?”
“응?”
“150, 아니 200…도 되겠는데 이건.”
“무슨 숫자야 그건? 나도 알려주면 안 될까?”
“이 시설…제국 기준으로는 200년 전에나 쓰인 기술들로 지어졌어요.”
“200년…?”
시아나는 마공학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다.
다른 학문을 배울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카를이 「분석」으로 이해한 것을 설명하자 시아나의 눈이 점점 휘둥그레졌다.
“그냥 예전에 지어둔 시설 아닐까? 우리가 못 본 다른 시설은 최신 기술을 썼을 수도 있지.”
“그런 것치곤…저기 보세요. 선배님. 저쪽 바닥은 아예 색이 달라요.”
최근에 설치되었거나, 정비된 흔적.
즉 유지와 보수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장로들이 회의실처럼 쓰는 시설이고 보수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데…예전에 개발된 기술을 계속해서 쓸 이유가 있을까.
‘엘프 용병 마법사는…2티어 유닛이었지.’
아무리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제국이라고 하더라도 종족 전체가 마법의 대가라 불리는 엘프가 왜 고작 2티어였을까.
똑같은 2티어 유닛인 이중술사보다 스펙은 높지만…결국 티어는 똑같았다.
‘그게 이상한 게 아니었어.’
엘프의 수가 많지 않다곤 하지만 그들은 빠르게 무너졌다.
아덴 크로우가 당주가 되고, 황실이 지원을 끊어버린 시나리오의 크로우 공작가보다도 더 못 버텼다.
‘공격이 맹렬하지도 않았어.’
클로라리온 가문의 영지 내에 위치해 있다. 그런만큼 대삼림만 공격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빠르게 무너졌다.
‘생각보다도 더…약했던 건가?’
뒤처진 마공학 기술.
신앙이 약해진 겨울이라지만 고작 카를 자신에게 뚫린 결계.
그것 외의, 다른 정황들.
‘이거다.’
엘프들은 상상 이상으로 내실이 약하다.
그리고 이건, 카를이 이용할 수 있는 요소였다.
“…다 됐나.”
카를이 머릿속으로 정보를 정리하는 사이 공간은 일변했다.
바닥이 회전하고, 벽이 여러 차례 접히고 열리기를 반복해 공간이 거대하게 확장된 것이다.
작은 회의실만 했던 방이 거대한 강의실에 맞먹을 만큼 커졌다.
“크흠.”
누군가 헛기침 소리와 함께 시설 안으로 들어왔다.
카를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러 번 본, 네임드의 얼굴이었다.
‘루크바트.’
레굴루스와 함께 비중이 높은 엘프 중 한 명.
정확히는 칼리테와 접점이 있는 엘프였다.
그는 다른 장로들과 달리 수염을 말끔히 깎고, 주름도 거의 없는 젊은 인상이었다.
“사달멜리크. 이게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로 소집을…흠.”
뒤이어 들어온 레굴루스가 카를과 눈을 마주치더니 침음을 삼켰다.
인간을 배척하는 것을 넘어 혐오하는 엘프. 그 성향 탓에 여러 네임드는 물론이고 그 착한 카리아마저도 레굴루스를 꺼렸다.
“모두들 앉지.”
사달멜리크의 말에 장로들이 하나 둘 자리에 착석하기 시작했다.
일어선 사람은 장로들을 따라 들어온 호위병들, 그리고 카를과 시아나 뿐이었다.
당연하게도 장로들의 시선은 두 사람에게 쏠렸다. 시아나는 눈치껏 다른 장로들과 떨어진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오늘 그대들을 전부 불러 모은 것은 이유가 있다. 우리 종족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지도 모르는 사안이다. 사안을 설명할 자는 제국 북부를 다스리는 가문의 당주, 카를로스 크로우 공작이다.”
몇몇 장로들이 동요했고, 레굴루스는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카를을 노려보았다.
사달멜리크가 담담하게 말했다.
“크로우 공작.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지.”
“자세히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짧게 요약하지요.”
“……?”
그의 말투가 다시금 바뀌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투. 그는 무표정하게 회의실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당신들은 전쟁을 치를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뭐?”
“제가 그 전쟁을 대신 치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전쟁이라니 무슨 소리를….”
한 장로가 아연한 얼굴로 말을 뱉어냈다.
그의 표정을 살피던 카를이 말했다.
“설마 전쟁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겐가? 전쟁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허.”
카를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마족 연합이 마왕을 향한 쿠데타를 벌이기 위해 병력을 긁어모으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까? 쿠데타 이후는 제국이라는 건? 설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카를은 사달멜리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 또한 심상치 않은 것을 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른다. 전혀 모르고 있다.
“미친….”
마법사들의 종족이라는 엘프가 그토록 빨리 무너진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
아예 모르고 있었으니 당연히 대비도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욕지기를 뱉어낸 카를은 장로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제가 여러분께 협조를 구하고자 한 이유는…신생 마족 연합 내부에 숨어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엘프들의 대표자. 그런 명함이 있으면 숨어들기 쉽고, 간부의 자리를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지금 이건….”
카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중얼거렸다.
“제가 왜 그 자리를 필요로 하는지조차…아예 이해를 못하겠군요. 전쟁이 벌어진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당혹스러워하는 장로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카를은 앞으로 걸어가 한 장로 앞에 서서 물었다.
“루크바트 장로. 설마 당신도….”
“나는 알고 있었네. 그런데 자네, 내 이름을 알고 있군?”
“…펠하임과 가까운 엘프가 당신 아닙니까.”
“으음. 그렇지. 그러면 알만 하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래도 장로 중 한 명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장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걸까. 한 장로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루크바트! 이미 알고 있었다고?”
“내가 분명히 말해주지 않았는가, 동지들.”
루크바트가 엘프들을 둘러보면서 일갈했다.
“나는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해주었네. 헛소리로 취급한 것은 동지들이네.”
내실이 약한 정도가 아니었다. 이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냥, 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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