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51)
크레핀 토벌전 (2)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의 목표는 크레핀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다.
말했듯, 그의 가문적 배경과 위광을 먼저 무너트리지 않으면, 그를 제압한다고 해도 그 뒷수습을 할 수가 없다.
―화아아아악.
서재 안에 먼지가 피어오른다. 크레핀은 순식간에 바람을 일으켜서 먼지를 없애버리고, 다시 왼손을 들어올려보였다.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힘이지만, 4막을 진행해본 나는 대충은 알고 있다.
불완전한 상태라 악신의 힘을 온전히 구현할 순 없지만, 주변의 ‘물리력’만큼은 그의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중력, 관성력, 마찰력… 적어도 물리적인 에너지의 흐름은 그의 마력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선 그의 맘대로 조종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의 에너지 흐름이 제 손 안에 들어온 듯한 정복감을 맛보게 해주겠지.
물리력 이상의 것을 조율하기 위해선 긴 집중과, 오랜 마력 축적이 필요하다. 즉석에서 전투에 활용할 수 있는 수준이라 해봐야 이 정도일 것이다.
아직 악신의 힘이 완전히 개방되지 않은 지금. 제압하려거든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이지만, 일의 순서는 정해져있다.
나는 손에 마력을 끌어 모았다.
― 콰앙!
마력이 한 점에 몰아닥치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
중위 불 마법, ‘일점 폭발’.
크레핀 로스테일러도 그 마력의 속도에 재빠르게 반응해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아쉽게도 그 공격의 방향은 크레핀이 아니다.
― 콰앙!!!!
바닥이 무너져내리고, 그 굉음이 저택을 감쌌다.
평화롭고 즐거운 사교회는 아쉽게도 여기까지다.
* * *
― 콰과가가가강! 쾅!
에드의 마법에 의한 폭발음은 아래층에까지 똑바로 들려왔다.
한참 연회가 진행 중인 메인 홀도 마찬가지였다.
질 좋은 와인을 따른 잔을 가볍게 부딪히며 담소를 나누던 귀족들은 순간적으로 의아한 소리를 냈다.
진동 소리와 함께 외벽의 일부가 무너지는 소리. 그에 놀라서 좌중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꽤나 연륜 있어 보이는 가신 하나가 나와서 상황을 진정시켰지만, 상황의 모든 책임자인 크레핀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인파에 섞여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셀라하와, 만찬을 즐기고 있던 클라리스, 테라스에서 홀로 하늘을 보던 시니르 블룸리버까지 모두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일단 파티를 중단하고, 사용인들이 사태를 파악하는 것을 기다렸다.
“…흐음.”
그 와중에 1황녀 셀라하는 숨을 한 번 가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수상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크레핀 로스테일러와 에드 로스테일러가 동시에 자리를 비운 점이 너무 수상했다.
“와인 맛이 좋구나. 너무 많이 마신 듯 해.”
셀라하는 이야기를 하며, 덜 비운 와인 잔을 옆에서 시중을 들던 사용인에게 넘겼다. 이제 그만 마시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술을 좀 깨겠다는 의미에서 테라스로 나왔다. 그대로 고개를 돌려서 외벽을 살펴보니, 고층 부분에서 폭발이 있었던 듯 하다.
“흐음…”
셀라하는 그대로 사색에 잠겨 있다가, 이내 웃음을 흘리고서는 문을 열고 나갔다.
* * *
― 후두둑, 후둑.
흙먼지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
서재의 바닥이 무너져 내리고, 여러 책과 서류들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 ‘크레핀 공작의 개인 서재 아래 쪽에서 이상할 정도로 많은 마력 반응이 느껴진다더라. 그런데… 저택 구조상 서재 아래 쪽은 취사장이란 말야. 사용인들이 일하는 취사장에 그런 막대한 마력이 느껴질 일은 없거든.’
예니카가 알아내온 정보에 따르면, 이 아래에 묘한 마력 반응이 느껴지는 공간이 있다고 했다.
저택의 설계상으로는 취사장 바로 위에 같은 크기의 서재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히 아래쪽 취사장의 크기에 비해 서재의 넓이가 너무 넓었다.
설계도에는 없는 공간을 취사장 옆에 마련해 놨을 가능성이 컸다.
더 말할 것도 없이 그곳으로 통하는 입구는 크레핀의 서재에 있을 것이다. 그 입구를 찾아낸다면 베스트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므로 아예 바닥을 부숴버린 것이다.
―파사삭! 카아아악!
“꺄아아아악!”
천장이 무너져 내리자, 깜짝 놀란 메이드들 몇이 취사장에서 뛰쳐나갔다. 그러나, 내게는 그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거대한 외벽에 막혀 소리만 이쪽으로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역시나 예상했던데로, 서재의 바닥은 취사장과, 그 옆에 있는 비밀 공간의 사이를 딱 덮고 있었다.
내가 떨어진 곳은 바로 그 비밀 공간 부분이었던 것이다.
“커, 허윽…!”
“예니카, 괜찮냐?”
“으, 응…!”
벽돌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비밀 공간. 그곳에는 어딘가로 통하는 통로 하나만이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어두컴컴한 통로는 아래로 아래로 뻗어있다. 그 깊이를 보아하니 아예 지하 공간까지 이어져 있는 듯 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찾아온 듯 하다.
― 화아아아악!
다시금 먼지가 피어오르고, 크레핀이 그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왼손을 꽉 움켜쥐어 내 주변의 공기를 압축했지만, 나는 재빨리 반응해서 몸을 옆으로 굴렸다.
―파악!!
내 옆에 있던 돌이 압력에 못 이겨 터져나갔다.
자연스럽게 피해낸 내 모습을 보고서, 크레핀은 감탄을 했다.
“대처 속도가 엄청나군. 마치 오늘 처음 마주한 상대가 아닌 듯 해.”
당연하다. 아직 미각성 상태의 크레핀은 몇 번이고 상대해 보았다. 절대 쉬운 상대는 아니었지만, 악신 메뷸러에 비하면 귀여울 수준이다.
“당신이 실수하신 게 뭔지 압니까?”
나는 옷을 털고 일어나서 재빠르게 이야기했다.
“내가 가장 부담스러웠던 것은, 이 저택이 온전히 당신의 영역이란 겁니다. 사용인들도, 호위병들도 모두 당신의 명에 따라 움직이는 로스테일러의 사람들이죠.”
“…”
“그런 공간에, 내 사람을 들이는 것을 허락하다니. 최고의 이점을 스스로 버리셨습니다.”
지금 해야할 일은 크레핀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나는 그대로 예니카의 손을 잡아 끌고, 지하 통로로 몸을 던지듯이 해서 들어갔다.
“우, 우아아아앗?!”
깜짝 놀란 예니카가 휙 이끌려서 함께 통로로 빨려들어갔다. 그대로 계단을 따라 쭉쭉 아래로 달렸다.
이런 비밀 공간을 만들어서까지 숨겨놓은 곳이라면, 필시 크레핀의 악행에 대한 증거가 잔뜩 남아있을 가능성이 컸다.
― 타다닥!
에드가 통로로 달려들어가던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크레핀 로스테일러는 재빨리 검을 움켜잡으며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그를 쫓을 수는 없었다.
― 콰앙!
― 콰가가가가가각!
비도 오지 않는데, 벼락이 내려쳤다.
입구로 향하려는 크레핀을 막아서려는 듯이, 그 정면에 내리친 벼락은 다시 흙먼지를 피어올렸다.
“크흠…!”
크레핀은 재빨리 옷 소매로 입을 가리며 여파를 버텨내었다. 그리고 먼지를 다시 날려보내버리자, 그곳에는 휘날리는 옷깃을 정리하며 서있는 소녀가 있었다.
예쁘게 두갈래로 내려 묶은 백발엔 윤기가 흐른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당당함은 인상 깊지만, 잠 오는 듯 멍한 눈매는 다시 기운이 빠지게 만든다.
커다란 마녀 모자를 고쳐 잡고, 육포를 우물거리며 외투 주머니에 손을 박아넣고 있다. 그러다 이윽고 나른하게 이야기 한다.
“미안하게 됐네.”
― 파바바박!
그 순간, 빛으로 이루어진 검 너덧자루가 허공에서 발현되더니, 그대로 날아와 바닥에 꽂혔다.
그녀를 중심으로 마치 방어진처럼 세워진 거대한 검자루들은… 저렇게 숨 쉬듯 쉽게 발현해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고위 빛 마법 ‘휘광의 검자루’.
그 사이를 온갖 중위 결계식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뚫어낼 수 없는 방어진을 그려낸다.
“이제부터 여기는 접근 금지 구역이야.”
희대의 천재 마법사, 루시 메이릴.
벼락처럼 등장해 순식간에 공간을 장악해버린 그녀는 중위 마법 수십개에 고위 마법까지 발현해놓고는 지쳐하는 기색조차 없다.
“지금… 무슨 짓이지…?”
“왜? 기분 나빠?”
말만 들으면 도발하는 것 같다.
그러나, 차분하고 순수한 목소리를 들어보면… 그런 의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루시는 전투를 할 때 그런 식으로 상대를 도발해 평정을 흔들어 놓는 일 따윈 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야기할 뿐이다.
“그럼… 뚫고 넘어와 봐.”
단 수 초만에 발현해낸 결계식이지만, 어지간한 고위 정령을 다 끌고 와도 뚫을 수 없는 강철의 벽이다.
크레핀은 루시의 그 티 없는 눈을 응시하며, 조금씩 미간을 좁혔다.
* * *
한 편, 올덱에서부터 출발한 마차에는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는 로르텔이 있다.
현자의 봉서를 한참동안 응시하면서, 로스테일러 저택을 향하는 모습엔 모종의 귀기가 서려있다.
온갖 장부들이 마차의 벽에 가득하다. 체크해야할 일들이 잔뜩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르텔은 시간을 쪼개서라도 올덱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황도 클로에론으로 넘어가면, 진중한 표정의 페니아 황녀가 야밤의 마굿간에서 말을 끌고 나오고 있었다.
황실의 마부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황녀를 만류하려 했지만, 일개 평민이 그녀를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가장 힘 좋고 튼튼한 말 위에 고급스러운 안장을 올려 놓고, 그 위로 올라탔다. 드레스 자락이 불편하지만 갈아입을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대로 페니아 황녀는 호위대 너덧명만을 이끈 채, 무단으로 황성 밖으로 뛰쳐 나왔다.
지켜보고 있던 병사들에 의해 재빠르게 보고가 올라갔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모두가 향하는 방향은 단 한 곳이다.
크레핀 로스테일러가 암약하고 있는, 로스테일러 저택이다.
* * *
― 타다닥! 타닥!
나는 예니카의 손을 잡은 채로 그렇게 한참을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루시가 밖에서 시간을 끌어주는 틈을 타서 재빨리 이 비밀공간이 뭔지 파악해내야 했다.
이렇게까지 꽁꽁 숨겼다는 것은, 필시 이 공간은 크레핀의 역린이자 모든 비밀이 담겨있는 곳이다.
한참을 어두운 통로를 통해 아래로 내려가고 또 내려가자, 조금씩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이미 지하공간까지 들어오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여기서부터는 그냥 지하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할 듯 했다.
나는 예니카의 손목을 잡은 채 마구 달려나가면서 이야기했다.
“잘 들어, 예니카. 여기서부터 보는 건 무조건 싹 다 기억해줘야해. 나 혼자만 목격자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너가 같이 증언해주는 게 훨씬 더 신빙성이 있으니까.”
“이, 이 너머에 뭐가 있는 건데?!”
“그건 나도 모른다! 봐야 알겠지!”
“으엑!”
어쨌든 악신의 강림을 위해 이 악물고 노력해온 증거들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뭐가 됐든 증거가 될만한 물건을 가지고 나갈 수만 있으면, 이후로는 일사천리다.
어느샌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끝이나고, 길게 이어진 복도가 나왔다.
벽돌로 만든 터널 같은 느낌이다. 빛이 들어오는 곳이 없으니 마법으로 만들어진 횃불의 행렬이 통로 끝까지 이어져 있다.
나와 예니카는 그대로 복도를 달려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나가고 또 달려나가고 나서야, 그 끝에 커다란 목제 문이 하나 나왔다. 드디어 도착한 느낌이다.
더 잴 것도 없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따위가 어디 있겠냐.
나는 그대로 문을 박찼다.
― 쾅!
덜컹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내부의 구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일견 위층에서 보았던 서재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꽤 넓직한 공간에 책장이 가득하고, 한 쪽에는 여러 실험도구들이 가득 메워져 있다.
책상 두어개가 붙어있고, 그 위에는 여러 마법진을 연구한 흔적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연구실을 넘어서 반대쪽 벽에는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지금 당장은 이 서류들을 하나하나 훑어볼 시간이 없다. 나와 예니카는 그대로 대충 주변 전경만 눈에 담은 뒤 곧바로 다음 방을 향해 뛰쳐갔다. 일단은 전체적인 구조를 전부 눈에 익혀두어야할 필요가 있었다.
“헤엑… 헤엑…”
몸을 쓰는 일에는 약한 편인 예니카다. 벌써 체력적으로 지쳐가고 있는 듯 했다.
― 쾅!
그리고, 두 번째 목제 문을 열어젖히고 나서야… 우리는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으… 허업…!”
좁은 복도의 양 옆에 펼쳐진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은 감옥들이다. 단단한 철장이 세로로 늘어서 있다.
감옥으로 쓰던 방이… 얼추 열 개도 넘게 보인다. 예니카의 손목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냐?”
“으… 응. 계속 가자.”
예니카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뭔가 느꼈는지, 감옥 내부를 의식적으로 보지 않았다.
나는 곁눈질로 몇 번이고 보았는데, 유독 썩은 내가 나는 감옥 내부는… 상상했던 그대로의 내용물이 들어있었다.
감옥은 사람을 가두기 위한 시설이다.
그 내부에 무엇이 들어있을지는,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대로 복도를 쭉 가로질러 끝에 도달하자, 드디어 탁 트인 홀이 나왔다.
빛 하나 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던 지하 공간에… 하늘에서부터 달빛 한줄기가 내려오고 있다.
마치 이 공간에만큼은 빛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걸까. 굳이 깊은 지하 공간에 눈에 띄지 않는 천장까지 작게 뚫어가면서까지… 통풍을 신경 쓴 공간.
커다란 원형 홀의 중앙에… 사람의 형태가 있다.
“…아… 허읍…!”
예니카가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사람의 형태를 한 그것은… 분명히 제 발로 서있었다. 그러나, 가슴께를 대검에 꿰뚫린 상태였다.
마치 하늘에서부터 떨어진 대검에 관통당한 느낌이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혼자 힘으로 서있었던 게 아니라 꿰뚫려 있었던 것이다. 관통한 대검은 바닥에 꽂혀서, 그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풍성하게 흘러내려오는 그 금발의 모습이 익숙하다.
그것은… 로스테일러 저택의 메인 입구를 들어오면, 가장 처음 볼 수 있는 거대한 초상화에 그려진 그림…
거기에서 보았던 그 풍성한 머리칼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자, 한줄기 소름이 몸에 내달렸다.
체구도, 외관도 비슷하다.
다만, 신체의 상태가 이상하다.
왼팔이 없다.
오른쪽 다리도 없다.
한 쪽 눈은 칼에 베인 것인지 자상이 남아있다.
몸 여기저기엔 바늘로 꿰인 듯한 자국이 가득하다.
하나 남은 눈은 편안하게 감긴 상태다. 끔찍한 몸 상태가 뭐 어떻냐는 듯이, 정말로 편안하게 잠에 든 듯한 모습이다.
“에드… 저 사람은… 에드의…”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누가 뭐라해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한 때, 로스테일러 가문의 빛나는 보석으로 불리던 그 여자가 맞았다.
쿵쾅대며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시체라면 질리도록 봐왔다. 단 몇 초만에 수천명이 죽어나가는 광경도 몇 번이고 봐왔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주특기다. 그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나는 이성적인 사고를 위해 이를 악문다.
“악신은, 피를 대가로서 강림하는 법이라고 했지.”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악신의 힘을 제 수족처럼 다루기 위해, 제 피가 흐르는 딸을 실험에 이용했구나.”
예니카는 글썽이는 눈물을 참으며 입을 가렸다. 아르웬의 몸에 새겨진 여러 상처들을 보고서 아예 말문이 막혀버린 듯 했다.
“억지로 제 딸을 동원하다 안되면, 다른 자식들까지 동원하려 했던 것인가.”
나는 그렇게 읊조리며… 잠시간 가만히 서있었다.
일단은, 고통스럽게 떠난 아르웬을 위해 묵념이라도 할까 하려던 차였다.
“글쎄, 그 말은 절반만 맞는 말이야. 에드. 잊어버린 거니?”
대답이 돌아올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신체 부위의 거의 절반이 없는 상태로 검에 꿰뚫려 있던 소녀.
하나 남은 그 눈꺼풀이 지그시 들어올려지고, 영롱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당연스럽게, 입도 목청도 멀쩡히 움직이고 있었다.
예니카는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 앉고 말았다. 나도 두 눈을 부릅뜨고 그 광경을 보았다.
“오랜만이구나. 에드. 많이 컸네.”
목소리만큼은 상상한 그대로였다. 타냐가 성인이 된다면 이런 느낌일까.
“나는… 예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꼴이 말이 아니지?”
대답해도 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시원스럽게, 아르웬 로스테일러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