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03)
의미 부여 (6)
한 밤의 수도원 회랑은 조용하다.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으니만큼, 불필요하게 밤중에 회랑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수도녀들은 아침이 빠르기 때문에 어차피 이 시간 쯤 되면 다들 취침에 들 준비를 하고, 오스틴 수도원장의 사망 정황을 알고 있는 외부인들은 괜한 의심을 사기 싫어 제 방에서 나오질 않는다.
그 덕에, 보좌주교 멜리니르와 나는 누구의 시선에도 보여지지 않은 채 수도원 복도를 가로지를 수 있었다.
“클레드릭 수도원 지하에는… ‘참회실’이 있습니다…”
열쇠 고리에서 짤랑대는 소리가 났다.
보좌 주교 멜리니르의 허리춤에 걸린 커다란 열쇠 뭉치는 보고 있기만 해도 살벌할 정도로 그 개수가 많았다. 사실상 수도원 내부에 있는 모든 방의 열쇠를 한 데 모아놓은 듯 했다.
스산한 복도를 지나 끝에 있는 계단을 쭉쭉 내려갔다.
“그리고 수도녀들 중에는 주기적으로 참회실에 찾아와 죄를 고백하는 어린양들이 있지요. 과거에 큰 죄를 지은 수도녀들이기에, 만월이 뜨는 밤에는 참회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 죄를 곱씹습니다.”
“그렇습니까…”
“다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입니다.”
한참을 아래로 아래로 나아가서, 1층의 거대한 홀을 지나 다시 복도 안쪽으로 한참을 빨려들어갔다.
그렇게 식당, 공동 주방, 비품 보관소, 기도실, 작은 정원을 지나 텃밭을 가로 질러서 별관으로 향한다. 별관 내부에서도 안 쪽으로 쭉 들어가서 가장 깊은 복도를 꺾으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 옆에는 ‘참회실’이라는 문구가 붙어있었다. 제 아무리 참회의 공간이라지만 너무 외진 곳이었다.
그대로 지하 계단을 쭉 따라 내려가보니, 과연… 벽돌로 이루어진 지하감옥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멜리니르가 철창에 열쇠를 꽂아 넣고 들어가자, 가운데에 뻗어진 긴 복도 양 옆으로 독실 같은 공간이 쭉쭉 이어져 있는게 보였다.
각 독방은 철창으로 분리되어 있고, 내부를 보면 간단한 성서나 기도 용품, 그리고 달빛이 들어오는 작은 창문이 높이 뚫려 있는 게 전부다. 이곳에서 스스로 과거의 죄를 뉘우치는 기도를 하며 죄를 사함 받는 것이다.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이 외진 수도원에서, 또 외진 참회실까지 와 속죄의 기도를 올린단 말인가. 제 아무리 사정이 복잡한 수도녀들이 많다 해도, 이 정도까지 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일 것이다.
그 사실을 방증하듯, 각 독방은 구석구석 먼지가 쌓여있거나, 오랜 시간 열리지 않은 듯 철창에 녹이 슬어있는 부분이 많았다. 사실상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참회실인 것처럼 보였다.
“더.. 들어가야 합니다…”
멜리니르는 나를 이끌고 가운데에 쭉 뻗어진 참회실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대로 끄트머리에 도달하자, 꺾어들어져 가는 복도가 있고, 간단한 비품들이나 성서가 놓여있는 책장이 있었다.
여기가 이 참회실 공간의 끝인가 했더니, 멜리니르는 까치발을 들고서 꼭대기 언저리에 있는 성서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빈 책장 공간에 손을 집어넣더니, 뭔가를 조작하는 듯 낑낑댔다.
-카강
레버가 내려가는 듯한 묘한 소리가 들리더니, 책장이 옆으로 스르륵 밀려났다. 그리고 그 뒤로 커다란 나무문이 드러났다.
“…”
내가 당황스러움을 삼키고, 복잡한 표정을 짓자 멜리니르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뭐라 설명을 더 하기 보다는 직접 보는 것이 낫다면서… 멜리니르는 또 다른 열쇠를 목재 문에 꽂아넣었다.
– 끼익
이윽고 비밀 문이 열리고 내부의 광경이 드러난다.
과연, 처음 보는 사람들은 모두 마른 침을 삼킬 수 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 크르르르, 킁, 킁.
– 카앙! 카앙!
– 크우으으, 크르르, 킁.
짐승이 숨을 고르는 소리다.
목제 문을 열자마자 쏟아져나오는 그 소리는, 내가 짐승의 우리에 와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을 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전까지와 똑같은 구조로 되어있는 독방 안에 들어있는 것들은… 짐승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도 않다.
멜리니르는 눈을 지그시 감고,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한 표정으로 나와 함께 내부 복도를 가로질렀다.
나는 양 옆을 가득 채운 독방들을 보며… 잠시 마른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지하 비밀 독방에 들어온 인간들을 보고, 붉은 안광을 드러내며 철창을 쾅쾅 쳐대는 짐승들.
기본적으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짐승의 귀와 꼬리를 드러내며 침을 질질 흘리는 그녀들은 모두… 수도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인족.
한 때, 북방 초원 지대를 뒤집어 엎고 일어나, 클로엘 황제를 시해하기 직전까지 갔던 이단의 무리들.
클로엘 제국 역사에 가장 큰 희생을 치른 전쟁 중 하나인, 아인족 토벌 전쟁의 패자이자…
클로엘 황실이 주도해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제국의 적이었다.
*
“절단자 젤란.”
수호자 오벨과 함께 아인족들로부터 황실을 지킨 전쟁 영웅의 이름이다.
아인족 토벌 전쟁에서 수호자 오벨을 보좌했던 3명의 마법사는 이미 유명하다.
탐구자 글래스트, 무법자 칼레이드, 절단자 젤란이다.
탐구자 글래스트는 생을 마감했고, 무법자 칼레이드는 실베니아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지만… 절단자 젤란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하다. 다만, 최근에 오스틴으로부터 언급을 들은 바는 있다.
– ‘글쎄. 전쟁영웅 ‘젤란’의 이름 정도는 들어봤겠지? 그도 이 수도원에 왕왕 들러서 기부하곤 했어. 좀 더 과거로 나가보자면… 전 세대 대마법사 글록트 또한 그랬고.’
방을 배정받을 때 했던 말이다.
과연, 살아있는 역사책인 오스틴 수도원장이라고 해야할까.
그녀는 생전에 이미 주기적으로 젤란과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던 듯 하다. 전쟁이 끝난 뒤 젤란은 이 수도원에 찾아들었던 것이다.
그 이유라 함은 아마도…
“아인족 토벌 전쟁이 끝나고, 오스틴 수도원장님께 열세 명의 아인족 아이를 데려온 자가 바로… 그 전쟁영웅인 절단자 젤란입니다.”
– 카앙! 캉! 캉!
– 크르르르르! 컹! 컹! 컹!
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소리. 철창을 쳐대며 당장이라도 우리에게 이빨을 박고 싶어하는 짐승의 무리가 독방에 가득하다.
그 중에는… 내가 수도원에 처음 도착하던 날에, 짐을 들러 왔던 붉은 머리의 소녀도 보인다.
그 때와는 완전히 다른, 이성을 잃은 모습에 나는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그런 아수라장의 한 가운데에서도 멜리니르는 어떻게든 이성을 유지한 채 말을 이어갔다. 눈을 지그시 감은 것은, 이 광기어린 광경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전쟁을 위해 살아가는 아인족 무리들이지만, 몸이 튼튼하지도 않고 나이도 너무 어려서 부락에 남겨진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태어난지 얼마 안된 여자 아이들이 특히 그랬지요.”
“그 아이들을… 젤란이 오스틴 수도원장한테 맡겼다는 거야…?”
“예. 인간과는 수명이 다른 아인족이지만, 그래도 아이는 아이입니다. 전쟁의 피바람에 엮이지 않은 아이들이니까 필시 갱생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아인족은 전쟁을 위해 태어난 종족이다. 태생적으로 피를 탐하고, 체재 전복을 꿈꾼다.
그것이 클로엘 황실에서 이야기하는 아인족이었다.
전쟁의 뼈아픈 역사 탓일까. 황실의 아인족 박해는 이미 유명할대로 유명했다.
이 거대한 제국에 국경에서 살아가던 아인족의 부족들은 이제 완전히 씨가 말랐다.
“그는… 피로 끝날 뿐인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어요. 오스틴 수도원장님을 만나 죄를 사함 받으면서, 속죄를 위해 전쟁터에서 살려서 데려온 아이들을 이 수도원에 맡긴 겁니다.”
“그럼 이 참회실은…”
“제 아무리 사랑으로 품고 가르쳤어도, 만월이 뜨는 밤에는 짐승의 피가 끓어오릅니다. 그렇기에… 수도녀들 사이에 섞여 있는 아인족의 아이들은 만월이 뜰 때 쯤이 되면 제 발로 이 참회실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만월의 피에 취하면, 사람에게 이빨을 들이미는 야수가 된다.
그 사실을 스스로도 알기에, 아인족의 아이들은 스스로 목줄을 차고 참회실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성을 되찾아 다시 인간들 사이에 섞여들 수 있을 때가 오기 전까지… 스스로 독방에 갇혀서 남을 해하지 않기 위해.
이윽고 만월의 때가 지나면 다시금 수도녀로 돌아가 신앙 생활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이 클레드릭 수도원에 섞여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아인족의 아이들이 살아온 삶이다.
– ‘클레드릭 수도원의 신세를 지는 수도녀 중에서는 뒷 이야기가 뒤숭숭한 친구들도 많거든.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귀족가의 사생아나, 저주 받은 혈족의 피를 타고난 아이도 몇 있지.’
오스틴 수도원장이 은연중에 했던 이야기다. 저주 받은 혈족의 피를 태어난 자란, 이런 것을 의미하는 거였나.
그녀는, 제국이 증오하는 그 아인족의 후예들을 자기가 관리하는 수도원에 감춰주고 있었던 것이다.
“황실에서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겠지요. 클레드릭 수도원의 존폐와도 직결되는 문제로 이어질 겁니다.”
나는 독방 하나를 쳐다보았다. 붉은 머리를 예쁘게 땋아내린 소녀. 나를 해안가까지 마중나와 짐을 들어주었던 소녀다. 평소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꽉 싸매고 있는 수도복은 완전히 흐트러져 있다.
점잖고 얌전해보이던 외관은 간 데 없고, 흘러내린 베일 사이로 짐승의 귀가 드러난다. 과연, 이런 수도복이기에 저런 짐승귀도 쉽게 가릴 수 있었던 것이다.
생활공간만 아인족 아이들끼리 잘 분리해주면, 생각보다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채 신앙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을 터다.
무엇보다 이 클레드릭 수도원은 사회와는 완전히 유리된 바다 위의 별세계다. 그 중에서도 별관 공간이니 만큼… 세상과의 접점을 완전히 최소화 시킬 수 있다.
“그래도, 오스틴 수도원장님은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
“이 아이들은 스스로도 자기 피의 저주를 이겨내고, 인간들의 사회에 섞여들려고 누구보다 노력하고 있어요. 그리고… 선조들이 쌓아올린 전쟁의 피비린내와는 상관 없는 아이들입니다.”
멜리니르는 고통스러운 듯 입술을 꽉 깨물고 이야기했다.
“언제나, 어디서나 통용되는 말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전쟁은 아이의 손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결국 전쟁의 희생양일 뿐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오스틴 수도원장이기에, 제국의 눈을 피해서까지 그녀들을 받아들인 것이다.
‘내 가슴으로 낳은 딸들이거든.’
그 한 줄의 속삭임이, 오스틴 수도원장의 생애를 관통하는 의의였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수도원 내에서 도는 ‘유령’에 관한 소문도, 그 진상은 에드 도련님이 생각하시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뭐라고요?”
멜리니르는 나를 이끌고 복도 더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스무개 남짓한 독실 중 하나. 창살이 부서져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마른침을 삼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며칠 전, 한 밤 중에 아인족의 아이인 에일렌이 탈출했어요.”
예쁜 금발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신비로운 푸른색 눈동자가 두드러지는 소녀였다. 가끔 수선실에 찾아가면, 눈을 내리 깔면서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수도원 사이에 도는 ‘유령’에 대한 소문.
나는 그 정체가 수도원에 숨어든 루시 메이릴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으나….
“오스틴 수도원장은… 그 에일렌을 찾아내기 위해 한밤 중에 복도를 나선 거에요.”
‘유령을 잡으러 간다’
오스틴 수도원장이 최후에 남겼던 그 말의 의미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에일렌은 아인족 중에서도 이성적인 아이였어요. 만월이 뜨는 날에도 최대한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에 가까운 아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완전한 만월에 가까워지면… 다른 아이들처럼 이성을 유지할 수는 없었을 거에요.”
“그렇다면 보좌주교께서 하는 말은 지금…”
“…방금 전 회동에서 성녀 클라리스님이 이야기 하셨듯, 텔로스 교단 내에서는 오스틴 수도원장님을 살해할 정도로 앙심을 품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어요.”
멜리니르는 처음부터 이 모든 가능성을 알고 있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특히 이 클레드릭 수도원에서는, 오스틴 수도원장님은 모두가 신세를 진 은인이에요. 그러니 수도원 내부에서 오스틴 수도원장님이 살해당하셨다면… 그 원인은…”
개인적인 앙심으로 인한 살인을 배제한다면, 결국 가능성은 피에 취한 야수의 급습밖에 남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바로 지금, 인간들의 눈을 피해 클레드릭 수도원의 지붕 사이를 오가며 야수의 피와 싸우고 있는 소녀가 있다.
정황이라는 것이 이토록 잘 맞아 떨어지면… 그 자체로 신빙성을 가지는 근거가 되고 만다.
“하지만 오스틴 수도원장은 자기 방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상처도 단검에 찔린 상처였고요. 방 상태도 정갈했습니다. 이성을 잃은 야수가 저지른 일이라기엔 지나치게 깔끔하지 않습니까?”
“그건…”
“거기다가, 만월에 취한 아인족이 며칠씩이나 누구에게도 목격되지 않고 수도원을 거닌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도…”
거기까지 이야기 하려다, 나는 그대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새로운 가능성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이윽고 모든 퍼즐이 완성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튿날 아침의 회동.
황실 쪽에서 연락 하기를,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클레드릭 수도원에 조사 부대가 도착한다고 했다.
거기다가 썰물 시간을 생각해보면 거의 심야시간이 되어서야 이 수도원에 진입할 수 있다. 결국 오늘 하루는 또 다서 귀빈들끼리 서로를 경계해가며 숨막히는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야기의 결론은 이미 나있었다.
성녀 클라리스의 명에 의해서 또 다시 소집된 외부인 회동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지난 밤에는 모두 자기 방에 잘 박혀있었다고 했지. 인원 점검을 해보니 외부인들 중에는 큰 화를 입은 자도 없는 것 같고 말이다. 모든 게 루시 메이릴을 구속해놓은 뒤로 정상으로 돌아가는구나.”
예배당 연단에서 회동을 주재하고 있는 페르시카 황녀는, 그렇게 모여앉은 귀빈들을 안심시켰다.
“오늘 늦은 밤 즈음에는 조사대가 들어와서 일을 모두 마무리 지을게다. 루시 메이릴을 조사대 쪽에 넘기고, 우리는 간단한 증언을 제출한 뒤 모두 영지로 돌아가면 될 일이구나.”
보좌주교 멜리니르는 불안한 얼굴로 뒤편에 정중하게 앉아 있었고, 성녀 클라리스는 불만에 가득찬 얼굴로 페르시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클라리스는 함부로 발언하진 않았다. 페르시카의 권위에 밀릴만한 자는 절대로 아니었지만… 섣부르게 움직여서 상황을 예상 밖으로 끌고가는 행위는 하지 않으려는 듯 했다.
무언가 믿는 기색이 있는 듯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루시 메이릴은 가장 감시하기 쉬운 첨탑 꼭대기의 다락방에 가두어두었다. 내려올 수 있는 루트도 한정적이기에 그 누구의 눈을 피하기도 쉽지 않겠지.”
루시 메이릴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깟 다락방에서 탈출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루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첨탑의 다락에 박혀 나올 생각이 없었다.
“따로 질문 사항이나 불만 사항이 있느냐?”
그렇게 모든 사항을 확정 짓듯이, 페르시카 황녀가 군중의 앞에서 의향을 물었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페르시카도 이럴 거라고 생각했는지,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시끌시끌하던 어제와는 마치 다른 사람인양, 군중은 침묵했다.
자신들에게 아무런 해도 없는 상태로 모든 일이 마무리 된다. 그것만으로도 침묵할 이유는 충분했다.
루시 메이릴이라는 표면적 제물이 정해진 시점에서, 불만을 말 해봐야 손해일 뿐이었다.
끄트머리에 앉아 팔짱을 낀채로 기도석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나를 향해… 클라리스 성녀가 시선을 던진다.
정말 이대로 모든 일이 마무리 되도 괜찮냐고 내게 묻는 듯한 느낌이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이 클레드릭 수도원에서 일어난 이 불미스러운 사건은… 모두 마무리 짓는 것으로 하자.”
그렇게, 모든 결론은 내려졌다.
사건의 끝이었다.
*회동이 끝난 예배당엔 고요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호위기사 튜네의 경호를 받으며, 기도석의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페르시카 황녀는 얼굴을 한 번 쓸어올렸다.
“겨우 일이 마무리 되었구나.”
“고생 많으셨습니다. 페르시카 황녀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 일이 많아서 고생스러웠다. 남은 일만 잘 마무리 하고, 황실로 돌아가자꾸나.”
페르시카 황녀는 기운 빠진 듯한 목소리로, 한탄하듯 이야기했다.
“결국 이 멀리까지 왔건만… 수확이라 할 건 없구나. 참으로 허무한 일이로다…”
문득 올려다본 예배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에는, 으리으리한 크기에 아름다운 색조가 곁들여진 천사의 그림이 펼쳐져 있다.
페르시카 황녀는 신을 믿지 않는다. 신앙심 따위도 없다.
수도원의 기도회까지 찾아온 것도 정무적 판단의 연장선일 뿐이다.
그래도, 기분이다. 이 성지까지 왔으니 신을 위한 기도 한 번 정도는 올려도 괜찮겠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들어, 페르시카 황녀가 잠시 손을 모은 시점이었다.
-쿠당탕!
의자를 밀고 일어나는 소리.
회동이 끝난 예배당에 남아있는 귀빈은 없었다. 수도원 일과가 시작되면 외부인들이 굳이 예배당에 와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 맨 뒷좌석에…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편한 자세로 누워있던 소년이 있었다. 어쩌면 귀빈들이 다 나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찌뿌둥한 몸을 풀고 중앙 연단으로 이어진 붉은 카펫을 따라 걸었다.
페르시카 황녀가 어이 없다는 듯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자, 아는 얼굴이다.
반쯤 올린 금발 머리칼과 이지적인 인상이 확 눈에 띄었다.
에드 로스테일러.
소문으로만 무색하던 그 소년이다.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에 아직까지도 독대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가 제발로 직접 찾아온 것이다.
“기도 중이셨습니까.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페르시카 황녀의 반대편 기도석에 앉아서, 양손을 맞댄 채 덩달아 기도를 올렸다.
페르시카 황녀가 뭐라 말문을 틀까 고민하던 차에, 에드 로스테일러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먼저 말문을 텄다.
“사실 이렇게 정중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지만, 저는 신 같은 건 믿지 않습니다.”
페르시카와 마찬가지다. 에드 로스테일러 또한 신앙심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인간이다.
그는 신과 세상을 논하며 살았다기 보단, 현실과 생존을 논하며 살아온 인간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존재에 대한 신앙이 자리할 마음의 여유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기도하는 것도 그저 구색 맞추기일 뿐이다.
“설령 세상을 만든 어떤 이가 저 하늘 위에 존재할지라도, 이런 미약한 기도가 그 귀에 닿을 리는 없겠지요.”
“텔로스 교단의 성지 한가운데에서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구나. 에드 로스테일러.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만, 생각보다도 더 재밌는 자로군.”
“사실 당연한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 모든 사건과 진실을 파악하고 있는 전지한 존재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제 기도도, 오스틴 수도원장님의 사망에 대한 진실도… 바로 옆에 있었던 자가 아닌 이상에야 모르겠지요.”
뒤숭숭한 사건이다. 수도원 내에서의 기류도 많이 긴장감이 오른 느낌이다.
이제 모든 걸 해소해줄 때가 되었다.
“그래도… 적어도 페르시카 황녀님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 말이냐? 내가 무엇을 말이냐?”
나는 기도를 위해 모은 손을 내리지 않고, 그대로 넌지시 이야기했다.
“오스틴 수도원장의 사인이 자살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호위기사 튜네가 몸을 흠칫 떨었다.
언제나 조용하게 본분을 다하는 그녀 치고는, 흔치 않은 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