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88)
학생회장 선거전 (1)
세상에서 가장 많은 전사를 죽인 것은 바로 오만이다.
실력에 자신하여, 호기롭고 용맹하게 돌격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자들을 경계해라.
시도 때도 없이 목숨을 걸어 세상에 제 존재를 피력하는 자들에게 경의를 품지 마라.
두려워해라, 클레비어스.
공포는 네 무기다.
도망쳐야 되는 순간이 온다면 꽁지가 빠지게 도망쳐라.
자존심 따위에 목숨 걸지 마라. 명예 같은 것에 집착하지도 마라.
네게 다가온 모든 위기와 시련에 억지로 맞서서 대응할 필요는 없다. 구태여 불가능에 도전해 스스로 상처를 늘릴 필요도 없다.
그리 살다보면, 어느 순간 발이 떨어지지 않을 때가 온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칠 수 있음에도, 두 발이 땅바닥에 붙어서 움직이려 하지 않을 때가 반드시 온다.
세상 모두가 불가능이라 외치는 시련 앞에서, 두 다리 붙들고 똑바로 서있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온몸이 미칠 듯이 떨리지만 신기하게도 검을 잡은 손에는 굳건하게 힘이 들어간다. 패배가 확실한 상황이건만 몸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관성에 휩싸이게 된다.
널 그렇게 만드는 건 자존심이니 명예니 하는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신념이다.
그런 게 아니라면 도망쳐라. 추하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비겁하게 살아남아라.
진흙탕 속에 구르더라도 비열하게 살아남아 네 때를 기다려라. 드높은 명예와 영광을 쫓아 네 안위를 희생하는 짓 따위는 절대로 하지 마라.
영웅의 삶을 살지 마라. 아무도 네게 강요하지 않은 가시밭길을 구태여 걷지 마라.
절벽 위에 피어난 꽃은 숭고해 보이지만, 끝끝내 동산을 가득 매우는 것은 억센 잡초들이다. 그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 ‘대련 신청서’
“…”
눈폭풍이 끝난 뒤. 슬슬 다음 학기를 준비하느라 분주해진 학생들로 오필리스관도 떠들썩 해졌다.
1학년 수석 웨이드 캘러모어가 클레비어스를 상대로 내민 대련 신청서. 한창 눈폭풍이 진행되던 기간에 클레비어스 앞으로 도착한 도전장이었다.
클레비어스는 개인실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뒤 메이드들이 다과를 준비해놓은 테이블에 앉았다.
항상 커튼을 쳐놔서 유독 더 어두운 방 한 구석, 클레비어스는 다과들을 한웅큼 집어서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어먹었다.
그리고 몸을 떨면서, 허리를 수그리고 바닥을 쳐다보고는 욕지거리를 몇 번 내뱉었다.
“왜… 왜 X팔… 나냐고…”
음울하게 내려앉은 다크서클 아래로 땀 한줄기가 삐질거리며 지나갔다.
캘러모어 가문의 천재 검사 웨이드의 도전 신청에 클레비어스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허나 끝끝내 대답을 요구하는 여론에 못 이겨, 결국에는 기권하겠다는 의사까지 표명했다. 괜시리 싸워서 다치고 싶지도 않았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살 뻗치고 싶지도 않았다.
역시나 클레비어스 답다라는 사람들의 평가에 클레비어스는 불만조차 가지지 않았다.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른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추잡하게 두들겨 맞고 패배하는 것보다는, 겁쟁이 소리를 듣다가 관심 밖으로 사라지는 게 낫다.
클레비어스는 소심한 손짓으로 창문 커튼을 슬쩍 들춰보았다.
어두운 방구석에 포근한 빛이 슬쩍 들어오다가 만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겨울도 완전히 끝이나, 새 생명이 만물에 가득히 피어난 봄의 광경이다.
음울한 클레비어스가 가장 싫어하는 풍경이었다.
“그 자식 성격이면 또 도전장을 잔뜩 내밀고 다니겠지…”
웨이드에 대한 소문은 클레비어스도 듣고 있었다.
실력에 자신이 넘쳐, 인정 받고 싶어한다는 소문이다. 선배들을 모두 꺾겠다고 호기롭게 외쳐대는 모습에 1학년들도 덩달아 기세가 등등해져 있다는 이야기도 덤이다.
그 첫 타자가 클레비어스인 건 불행이자 행운이었다. 이제 다음 타자가 정해지면 첫 타자는 은근슬쩍 묻히게 될 테니까.
“개 같은 인생…”
봄이 되고 세상엔 화사한 꽃들이 피어나, 실베니아의 학사는 다시금 특유의 낭만에 휩싸인다.
방구석에 자리한 어둠에 틀어박혀서, 클레비어스는 그 빛나는 낭만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았다.
필시 자신은 어둠에 속한 인간이다.
그게 뭐 어쨌냐는 듯, 창밖에 휘날리는 봄날의 꽃잎은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 새학기였다.
*
봄은 잊을 때 즈음 해서 온다. 그래서 더 각별한 법이다.
온통 흰 눈으로 덮여있던 세상이 가고, 포근한 햇살이 꽃잎들을 틔워내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내가 이 생활을 한지도 만 1년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작년 이맘 때 오필리스관에서 쫓겨나 무작정 숲에서 자리잡고 생활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제법 그럴싸한 캠프와 오두막이 있고, 나름 쓸만한 가구들까지 꽉꽉 차 있다.
등교 한 번 하면 온 몸에서 땀이 강처럼 흐르던 몸뚱아리도 어느덧 꽤 단련이 되어, 등하교 시의 조깅 정도는 어렵지 않게 소화해낼 수 있게 됐다.
“어머나, 반가운 얼굴.”
점심시간을 틈타 생활동에서 연구실 물자들을 구입해서 돌아가던 길이었다. 방과 후에 가져다 놓을 심산이었다.
생활동에서 교수동으로 넘어가는 다리 근처, 실베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다과점 라플라스 베이커리의 테라스석에 낯익은 소녀가 하나 앉아 있었다.
이제는 유명할만큼 유명해져서, 마냥 선량한 것처럼 빙긋빙긋 웃는 저 속내에 능구렁이가 수백마리는 들어차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제 막 개학식이 끝난 참인데 벌써부터 연구실 업무를 보시는 건가요, 에드 선배님.”
아무렇지 않게 안부를 보내는 모습에 나는 손을 휘적여서 인사를 보냈다.
소녀의 상태를 확인하려거든 머리칼을 보면 된다. 그 착 가라앉은 적갈색 머리칼을 한쪽으로 잘 묶어서 단정하게 내렸다면 어깨에 힘을 풀고 있는 상태다.
중요한 업무를 보거나, 격식있는 자리에 나갈 때는 풍성하게 그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이런 저런 액세서리를 잔뜩 달고 있는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어쨌든 쾌 큼직한 상단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니만큼, 쉬이 여길 수는 없는 소녀다.
로르텔은 빙긋빙긋 웃으면서 손짓을 보내더니, 와서 차나 한 잔 하자는 듯이 내게 이야기를 건넸다.
“너 혼자 이런 데서 차를 마시기도 하는구나, 로르텔. 의외네.”
“사실 업무차 들른 김에 좀 쉬고 있었거든요. 중요한 이야기는 일단락 되었고, 직원들이 재고 조사 정도만 마무리 지으면 떠날 참이었어요.”
“재고 조사?”
“여기 차 한 잔 더 주실래요?”
턱을 괴고 앉아서 빙긋빙긋 웃다가, 근처에 있던 직원에게 로르텔이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그러자 직원은 쏜살 같이 튀어나갔다.
튀어나간 건 일개 직원이었는데, 차를 들고 돌아온 것은 라플라스 베이커리의 주인장이었다.
한 때 황실 주방에서 일한 적 있고, 황도의 유명한 음식점을 몇 개나 가지고 있었다던 양반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차를 한 잔 더 내려놓았다.
그리고 정중히 인사하고, 더 필요한 거 있으시면 바로 불러달라고 고개를 푹 숙인 뒤 주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로르텔 말대로 주방에서는 모종의 마무리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 했다.
“저 사람이 저런 표정 짓는 건 처음 봤는데.”
“뭐어… 꿀리는 게 있나 보죠.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으니까.”
“근데 너희가 무슨 권한이 있다고 베이커리의 창고를 들춰보고 있는 거냐. 그냥 일개 거래처가 그래도 돼?”
“저희야 뭐 일개 거래처일 뿐이지만, 중요한 식자재들은 싹 다 엘테 상회에 발주하는 베이커리니 만큼 눈치를 볼만도 하겠죠? 이 실베니아 안에서 사실상 이만한 베이커리의 물량을 수주할 수 있을만한 곳이 엘테 상회 말고는 없으니까요.”
물량도 물량이지만, 라플라스 베이커리는 고급 식자재들을 잔뜩 쓴다. 그것도 신선도 유지가 핵심인 물자들이다. 어지간히 유통 경력이 많이 쌓여서, 완전히 노련해진 상단이 아니고서야 믿고 맡기기가 힘들다.
어지간한 규모의 도시라면 상회끼리 수주 경쟁을 붙여볼 수도 있겠지만, 크기가 한정 되어 있는 아켄섬 내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엘테 상회에서 물자 발주를 받지 않으면, 당장 내일부터라도 라플라스 베이커리는 영업이 영 힘들어지는 것이다.
로르텔은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독점 권력이라는 게 이럴 땐 참 재밌죠? 없는 권한도 만들어 내주잖아요.”
“저 사람들 표정을 보아하니 재밌어 하는 건 너밖에 없는 것 같다.”
“어머, 말씀하시는 게 심술궂네요. 맞는 말씀이지만.”
로르텔은 쿡쿡 하고 웃고서는 찻잔을 훑었다.
“저희 입장에서도 나름 정당성은 있답니다. 허위 발주가 발각된 듯 해서요.”
“허위 발주?”
“네. 필요도 없는 물자들을 미리 잔뜩 발주해놓고, 납품 일자가 다가오면 전부 취소해버리는 짓이죠. 결국 다 걸리게 되어있는데, 끝끝내 이런 짓을 하는 거래처가 꼭 있더라고요.”
나는 짐들을 내려놓고 맞은 편에 앉아서 주인장이 내와준 찻잔을 슬쩍 들어올렸다. 뭔가 평소보다 향도 그윽하고 짙은 것이, 심혈을 다해 준비했다는 느낌이 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눈폭풍 기간 동안 아켄섬 물자 수급에 다소 애로사항이 피었거든요. 길이 얼고, 마차가 못 다니게 되었으니까요”
“천재지변이니까 어쩔 수 없지.”
“네, 맞아요. 그래서 대부분의 생활동 내 상권의 거래처들은 물자 수급을 차례대로 대기하고 있었거든요. 저희 입장에서는 수요가 크고 급한 지점부터 얼른 물자를 공급하고 있었는데…”
그 이후로는 뻔한 이야기였다.
물자를 빨리 수급받고 싶었던 라플라스 베이커리는 필요하지도 않은 식자재들을 잔뜩 부풀려서 허위로 발주를 넣은 뒤, 납품 일자가 가까워지자 필요분만 남기고 거의 대부분의 발주를 취소해버린 것이다.
워낙 상회에서 다루는 물자 규모가 크니 이 정도는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는지, 다소 안일한 판단이었다.
당장 식자재 수요는 드높은 상태다. 취소된 물자는 다른 곳에 팔아치우면 되니 상회가 금전적으로 손해 볼 일은 없다, 그러나, 당장 대부분의 거래처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혼자만 꼼수로 물자를 공급 받는 짓은 괘씸하다.
“수지타산이 맞으면 한 푼 금화에 영혼도 팔아치우는 게 상인이란 족속들이지만… 그래도 지켜야할 상도덕이 아예 없는 건 아니거든요. 우리 입장에서는 다 똑같은 거래처니까.”
엘테 상회의 실권자 반열에 든 로르텔은, 적어도 생활동 내에서는 거의 물밑 세계의 왕이나 다름 없는 자리에까지 올랐다.
물론 로르텔은 직접 누군가를 다스리거나 통치하지 않는다. 그럴 신분도 아니며 권한도 없다.
허나 사람이 모여든 곳엔 혼란 또한 찾아드는 법이다. 그렇기에 통제할 이 또한 필요하다.
로르텔의 통제수단은 바로 돈 그 자체다. 일견 평화로워보이는 생활동의 물밑을 훑다보면, 결국 모든 돈의 흐름은 로르텔의 지갑 속으로 이어지게 되어있다.
– 쾅!
이윽고 주방 문을 박차고 사내 하나가 튀어나왔다. 방금 차를 가져다주었던 주방장이었다. 재고 조사가 꽤 진행된 모양이었다.
실질 사용분과 발주량을 비교하는 작업은 딱히 어렵지도 않다.
“로, 로르텔 아가씨! 제 말을 좀 들어주세요! 담당 직원 분께서 너무한 요구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발주량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차후 발주 물량을 이렇게까지 제한 하시면…!”
사내도 알고 있을 것이다. 로르텔의 결재 없이 담당 직원이 독단으로 발주량 제한을 걸었을 리가 없다. 모든 것이 로르텔의 허가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로르텔에게 호소해보러 나온 것이다.
반쯤 비는 듯한 자세로 로르텔에게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했다.
몇 분에 걸쳐서 로르텔에게 개인적인 사정 설명, 발주량에 대한 변명, 가게 운영 현황을 이야기하고, 로르텔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찻잔을 입에 대고만 있었다.
“제발… 한 번만 가게 상황을 감안해 주십시오…! 이렇게 되면 저희는…”
“맞다.”
차를 마시며 듣고만 있던 로르텔이 입을 열자, 사내는 얼른 숨을 집어 삼켰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사내가 아니라 나를 향하고 있었다.
“저도 오후에 수업 있거든요. 같이 교수동으로 가실래요?”
애초부터 로르텔은 사내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로르텔은 슬쩍 사내 쪽을 쳐다보았지만, 시선은 한 없이 싸늘해져 있었다.
*
“학생회장 선거가 곧이네요.”
“너는 출마할 마음이 없나보네?”
“학생회 권력은 탐이 나긴 하지만, 학생회장 하겠답시고 상회 일에 손을 못대면 주객이 전도되어버리거든요.”
교수동 학생 광장을 가로지르고 있으면 정말 새학기긴 하구나 싶을 정도로 인파가 엄청나다.
방학 기간에는 텅텅 비어서 소리를 지르면 웅웅 울려댈 정도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광장의 전체적인 생김새조차 한 눈에 안들어올 정도다.
“가장 좋은 건 저한테 호의적인 인물이 학생회장이 되어주는 거겠죠. 에드 선배님은 하실 맘 없으세요? 제가 밀어드릴 수 있는데.”
“그럴 뜻 없다. 한다고 될 보장도 없고.”
“아쉽게 됐네요. 그러실 거라 생각은 했지만요.”
로르텔은 교복 블라우스 위에 세미 로브를 두르고, 책 두어권을 껴안은 채 걸었다.
로르텔은 로르텔대로 상회 일이다 학업이다 정신이 없어 보인다. 어쨌든 학생 신분이고, 마법을 단련하기로 했으니 이쪽에도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얘 또한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서 살고 있겠지.
“선배님 동생 분이 출마한다고 했었죠. 타냐양이었나. 그 애나 밀어줄까 싶어요.”
“타냐를?”
로르텔은 주변을 몇 번 스윽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내게 지그시 이야기했다.
“때려죽여도 페니아 황녀님 쪽을 지지하고 싶진 않거든요. 뭐어, 학사 대부분은 황녀님을 지지하는 것 같으니… 일단 출마하면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되겠지만요.”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진 않겠지만…”
“알아요, 선배님.”
로르텔은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타냐양 본인이 알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페니아 황녀님이 출마한다고 하면 타냐 양한테는 거의 희망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정말 말도 안되는 기적이 일어나서 학년 수석들 대다수가 타냐양을 지지한다고 해도… 아마 그래도 한창 역부족일테고요. 아무리 로스테일러 가의 차녀라 할지라도, 격의 차이가 너무 커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사에서도 타냐는 정말 말도 안되는 표 차이로 패배한다.
가진 수를 모두 동원하고, 추하고 비루하게 발악해서 단 한 표라도 더 얻으려고 난리를 피워보지만 압도적인 표 차이는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차악의 영애 타냐 로스테일러.
절망적일 정도로 압도적인 표 차이 앞에서, 결국 분한 마음을 눌러 참으며 치를 떤 채 퇴장하는… 로스테일러 출신의 징검다리 악역일 뿐이다.
“혹시… 에드 선배님은 페니아 황녀님을 지지하시는 거에요?”
“나..? 글쎄다. 애초에 누구를 지지하냐 마냐 할 건 없고, 굳이 말하자면 혈육인 타냐를 좀 더 응원하겠지.”
“그 점은 다행이네요. 뭔가 선배님까지 페니아 황녀님을 지지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좀 불안했거든요. 학사 대부분이 페니아 황녀님을 우러러 보고 있지만… 뭐, 정작 선배님이 아니라면 됐어요.”
페니아 황녀랑 엮인지는 좀 됐다. 이런 저런 사건 사고가 있긴 했지만, 빈말로라도 그렇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 사람 나 엄청 싫어할 걸.”
“그런가요?”
“나도 확신은 아닌데… 내가 황녀님 입장이었다고 생각해보면, 딱히 나한테 좋은 감정 품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래, 아마 나한테 엄청 앙심을 품고 있거나, 최소한 악감정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신다면 안심이긴 한데요…”
“…안심?”
“…”
로르텔은 스윽 책을 감싸 쥐고는 고개를 훅 수그렸다.
“제가 에드 선배님을 이성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 아시죠?”
“…”
“질투라는 건 생각보다 보편적인 감정이랍니다? 이래봬도 저도 여자고요.”
그리고는 내 한 쪽 팔을 휘감아 안더니, 내리깔았던 시선을 슬쩍 하고 올린다.
여우처럼 가늘어진 눈가를 요염하게 몇 번 감았다 뜨고, 음흉하게 웃으며 나를 올려다 본다.
“혹시 유효타였어요?”
“…”
“심장 소리 한 번 검사 할게요?”
광장 한복판에서 가슴께에 귀를 묻으려는 로르텔을 한 손으로 꾸욱 눌러서 막았다. 우읏 하는 소리와 함께 밀려난 로르텔은 씨익 웃고 고개를 털었다.
“하여튼 철벽만 치고서는. 제가 뭐 죄 지은 거 있어요?”
“네가 나한테 뭐 죄 지은 건 없지만… 졸업하는 날까지는 나도 좀 곤란한 입장인지라.”
“…졸업하는 날 까지는?”
수백 수천 번의 협상 테이블에서 사소한 어감 하나까지 캐치해 상대의 약점을 잡아채던 소녀다. 약간의 어조와 단어 선택 하나까지도 모두 그녀에게는 단서이자 정보다.
“졸업하면요?”
“…”
“어머, 이건 대형 정보를 하나 낚은 느낌이네.”
팔을 감아 안고 베시시 웃는 모습이 능구렁이 그 자체다. 로르텔은 어깨에 턱을 묻은 채 음흉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 보았다.
“모종의 시간적 제약이라. 그런 어마어마한 정보를 건네주셔도 괜찮은 걸까. 대체 졸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학업이 끝나고 나면 심정적으로 어떤 진전이 있으실 예정이군요.”
“…”
“사실 뭐 그 때까지 철벽을 칠 수 있으실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로르텔은 팔을 풀고 휙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나아가더니, 휙 돌아서고는 입가에 손을 올리고 여우처럼 웃었다.
“이쯤 해둘게요, 뭐… 졸업이라고 하니 멀어보이지만 그래봤자 내후년 일이라는 거죠. 의외로 순식간에 온답니다?”
“내가 거기다 대고 뭐라 할 말이 있겠냐만은…”
“그러시겠죠, 뭐. 어쨌든 건강에도 이상은 없으신 듯 하고, 학업도 착실히 진전이 있으신 모양이니 안심이 되네요. 저번에 드렸던 마공학용품들은 어떻게 됐어요?”
“전부 썼다. 방학 중에 마공학 단련을 좀 했어.”
“어머, 좋은 결과 있으셨어요?”
나는 뭐라 대답할까 고민 좀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만 놓고 보면 대성공이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스케쥴로 하루 종일 마공학 수련만 해서, 개학 전 날에는 드디어 전설급 마공학용품의 시제품까지 완성했다. 실전 활용은 못 해봤으므로 시제품 취급이다.
“그건 다행이네요. 도움이 됐다고 하니 저로서도 좋은 일이구요. 아쉽게도 저는 산적한 문제들이 너무 많아서 방학 중에 다 처리를 못했거든요.”
“문제들이 그렇게 많냐? 아까 라플라스 베이커리 같은 일들?”
“뭐, 그것도 문제의 일환일 뿐이에요. 당장 중요한 문제는 현금 부족이거든요. 지갑에 돈이 좀 궁해요.”
로르텔이 돈이 궁하다. 이게 성립 가능한 명제인가 싶긴 하지만, 사실 잘 생각해보면 무슨 문제인지는 명확했다.
자산과 현금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현금 사용처가 안 그래도 잔뜩 쌓여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상회 본점에서 오던 금화 궤짝을 실은 마차가 사고에 휘말렸거든요. 눈사태에 휩쓸린 모양이던데, 사고 현황 파악해서 피해 복구 하고, 현금 수령 받는 데까지는 시간 차가 생길 예정인가봐요. 그래서 가용자금이 간당간당 해요.”
주기적으로 현금을 받는 상회 쪽 유통로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런 재난이야 이만한 상회를 굴리다보면 주기적으로 있는 일인 듯 하다.
“그 덕택에 이렇게 자산이 많은데 실질적으로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지점 측에서도 쓸 데 없는 지출은 지양하고 있어요. 저 개인적으로도 쓸 데 없는 지출은 절대 안 하고, 있는 지출도 되도록 줄일 예정이고요.”
“그 정도로 현금이 부족한 상황이야?”
“일시적인 병목 현상일 뿐이지만요. 그래도 막 극적으로 돈이 모자라고 그런 건 아니에요. 평소 생활을 유지할 기본 유지비는 여유롭게 남아요. 다만 추가 지출을 할 여력이 좀 없을 뿐이죠.”
사실 기본 유지비라고 해도 로르텔이 기준이라면, 그 액수의 단위부터가 다르다.
이런 변수들도 대부분이 아켄섬 근처에 몰아친 눈폭풍의 여파인 것이다. 봄이 되었지만 아직도 겨울의 여파는 착실히 남아있었다.
“썩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에요. 안 그래도 어제 불안한 거래처에서 만기가 한참 남은 거래 대금을 상환 요청하길래 거절했어요.”
“그 쪽도 사정이 썩 좋진 않았나보네.”
“다들 힘든 시기에요. 특히나 돈 관리 하기 어려운 시기죠.”
로르텔은 부는 봄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을 훌훌 털었다.
“뭐, 돈 관리는 제 주특기니까요. 일단 독하게 마음 먹었으니 이 이상 쓸 데없는 지출을 늘릴 마음은 없어요.”
“그래도 지출이라는 게 마음처럼 되는 게 아닐텐데… 고생 좀 하겠네.”
“무슨 말씀이세요, 에드 선배님. 제가 누군데요. 지출 관리 하나 못하는 인간이 상단 운영 제대로 하겠어요? 절 너무 얕게 평가 하시는 거 아니에요? 절대 쓸 데 없이 지출 늘릴 일 없으니 걱정 마세요.”
로르텔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여우처럼 웃었다.
베이커리에서 사내를 차갑게 내려다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뭐가 됐든 로르텔은, 사업에 관여된 일이면 차가운 금속 같은 인간이 되는 기질이 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에드 선배님, 근데 수업 가시는 길인데 왜 책을 안 들고 가세요?”
교수동 깊숙이 들어오자, 이제 수업 진행되는 교실까지는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나? 나는 도서관에 들려서 대여해가야 돼.”
“아니, 책을 빌려서 수업을 받으세요? 학생 도서관이면 교수동 거의 외곽까지 나가셔야 되잖아요.”
“그냥 운동 삼아 뛰어다닌다고 생각해야지. 체력 관리 조금만 안 해도 금방 몸이 허약해지더라.”
“아니, 뛰어다닐만한 거리가 아니잖아요. 그거 몇 푼 한다고 그냥 학사 측에서 구매…”
로르텔은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확실히 책 값도 이거 저거 쌓아놓고 보면 학생이 감당하기에 적은 돈은 아니다. 실베니아의 교재들은 하나 같이 고급서적들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력질주로 도서관이랑 수업동 사이를 뛰어다니는 것도 제 정신으로 할 일은 아니다. 내 입장에서는 일상처럼 당연한 일이지만.
문득 로르텔은 식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지갑을 꺼내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내용물을 이리저리 확인해댔다.
뭐가 그렇게 고통스러운지… 끝끝내 고뇌하며 눈동자를 떨다가 이내 머뭇머뭇 묻는 것이다.
“어, 얼만데요… 다 합치면…?”
“…”
그냥 정중히 거절했다.
*
“도서관 정리 해놓은 건 확인 하셨습니까? 에드 선배님.”
새학기 되고 나서 직스의 얼굴을 보는 것도 간만이다.
원소학 수업을 끝마치고 나서 인파 사이를 헤치고 교수동 광장으로 나오자, 근처 나무에서 등을 기대고 서있던 직스는 그런 식으로 말을 걸어왔다.
“어, 그래. 잘 처리했더라. 고맙게 됐다.”
“별 거 아닙니다. 마법으로 일처리 해서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에드 선배님. 웨이드에 대한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웨이드? 1학년 수석?”
직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직스의 말을 듣고나니 슬슬 떠오른다.
3막 3장, 학생회장 선거전의 스타트를 끊는 에피소드.
웨이드 캘러모어의 도장 깨기다. 내가 알기로는 3막 5장까지 이 도장 깨기는 이어진다.
북방 국경지대를 지키는 군단장의 아들로서, 천부적인 검술의 재능을 타고나 압도적인 무력으로 1학년 수석의 자리를 차지한 웨이드.
1학년 수석의 자리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웨이드는 각 학부의 수석에게 결투를 신청해 모두 꺾어버리고, 급기야는 고학년 선배들한테까지 결투를 신청하고 다니는 것이다.
제 한계가 허락하는 한 전부 이겨먹어 보겠다고 날뛰던 웨이드는 파죽지세로 학사의 유명인과 수석들에게 결투를 신청해 하나둘씩 때려눕히고서는… 심지어 직스조차 만신창이가 되는 아슬아슬한 전투 끝에 겨우 이겨버린다.
물론 직스는 꽤나 지쳐 있어서 온전히 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였고, 온전한 상태였다면 결과가 어찌될 수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진 건 진 거다.
정말 학사의 강자들을 죄다 쓰러트릴 것처럼 날 뛰던 웨이드였다. 허나 결국엔 합동 전투 실습에서 테일리에게 패배한다.
정말 1학년치고는 기염을 토했다고 할만한 성과다. 그가 테일리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꺾은 상대들은 하나 같이 물로 볼 수가 없다. 1학년의 에이스라 부를만한 학생이었다.
“최근 유망하다 싶은 학생들에겐 죄다 결투장을 보내고 다니는 신입생입니다. 듣자 하니 선배님한테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해서.”
“그래, 미리 일러준 건 고맙다. 너도 몸 조심하고.”
“오늘 저녁 중에 신입생 환영행사 한다고 하는데, 혹시 오셔서 얼굴이라도 확인하시겠습니까?”
어차피 웨이드의 얼굴은 익숙하리만치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됐다. 오늘 저녁 중에 따로 선약도 있고.”
“선약 말입니까?”
“예니카가 정령술 좀 봐주기로 했어.”
반지로 인한 마나 억제도 어느정도 잦아들었으니, 슬슬 온전히 내 마력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중위 정령 계약까지 끝마치고 나면, 적어도 3학년 중에서는 나보다 정령술에 능하다 할만한 사람은 예니카 한사람 밖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외에도 중급 마법 습득도 하고, 남아 있는 기초 마법 숙련도도 채우고, 마력 감응 훈련에 조금만 더 진전이 생긴다면… 정말 3학년 중에서는 탑 텐 안에 들어갈 수 있을 듯 하다.
진전이 보이는 덕에 요즘엔 단련에 박차를 가하는 맛이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성과가 있으면 역시 단련 그 자체에도 흥미가 붙는 법이다. 하루 종일 헬스장에 들러 붙어 있는 사람들이 과연 이런 기분인가 싶다.
나는 손을 털며 직스에게 인사를 보낸 뒤 광장을 빠져 나왔다.
문득 고개를 돌려 광장의 전경을 보니, 활기찬 학사의 풍경이다.
딱히 이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라 생각했건만, 막상 활기 넘치는 학사를 보고 나니 기운이 좀 솟는 느낌이다.
새학기 특유의 신선한 공기는, 그렇게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나는 언덕을 너머 교수동을 가로질러 걸어나갔다.
*
“흠… 역시 말해둘 걸 그랬나.”
인간관계 사이에서 선을 타는 일은 역시나 참 어렵다.
직스는 나무에 기댄 채로 에드를 떠나보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서 웨이드에 대한 주의도 전해 주는 김에… 페니아 황녀에 대한 이야기도 해둘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직스와 페니아는 같은 학년이다 보니, 종종 수업 동선이 겹칠 때가 있다. 평소에는 호위 인력에 둘러 쌓여있는 페니아 황녀이기에 가까이 접근하기 힘들지만, 수업을 받을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방학 이후로 유독 기운이 없어 보이는 페니아 황녀다.
허나, 직스나 혹은 주변 사람들이 에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보면, 기묘할 정도로 고개를 꺾어서 그 쪽을 쳐다보거나, 척 봐도 귀를 기울이는 듯한 모습이 자주 보인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지만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이름에 반응해대는 느낌이다.
“아직 확신 하기엔 좀 그렇긴 하지…”
직스는 광장 한구석 나무에 기대서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간만에 맑고 드높은 하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