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87)
봄이여 오라 (5)
개축한지 얼마 안된 건물이니만큼, 눈폭풍 정도에 오필리스관이 끄떡할 리가 없다.
관리 인력도 모두 베테랑들이고, 거주 하는 학생들도 대부분 능력이 출중하다보니 덱스관이나 로레일관에 비해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난방 대책도 완벽히 마련되어있고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메이드들이 마련해준다. 그렇기에 오필리스관 내부는 자연재해에 대비한다기보단 긴 휴식기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겨울 특유의 은은한 어둠이 자리한 복도를 가로지르면 으스스한 기분이 들 때도 있으나, 오필리스관 내부의 여러 홀이나 학생 시설들엔 은은한 불빛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포근한 느낌도 든다.
각 층 중간 중간에 있는 학생 홀은 주로 오필리스관 거주 학생들을 위한 자유 공간으로 준비되어 있는 느낌이다. 물론 용도에 비해서 공간이 좀 넓은 감은 있다.
벽을 따라 세워진 고풍스러운 원목 기둥과, 홀 전체에 깔끔하게 자리한 테이블들. 그리고 메이드들이 항상 채워놓는 디저트나 음료들이 기둥 사이에 즐비해 있고, 가운데 위치한 커다란 난로 근처에 큰 원목 원탁들이 가득히 배열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객실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아무리 그래도 방 안에만 있기에는 지루한 법이다.
때문에 오필리스관 내부에 있는 학생 시설들은 평소보다는 사람이 꽤 있었다.
학생들끼리 담소를 나누며 디저트를 먹거나, 가벼운 독서회 정도가 진행되는 테이블도 보였다. 체스를 두는 학생들도 있고, 이런저런 원소 마법을 가볍게 구현해보며 감응 수련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결투를 하고 싶다고?”
직스는 엘카와 함께 본가에 내려갔다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
눈폭풍 시기 전에 도착하고 싶었으므로, 무리하게 여정을 진행한 탓에 피로가 좀 쌓여서 지금부터 착실히 회복해나갈 생각이었다.
학생 홀 테이블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앉아 연금학 서적들을 탐독하고 있던 직스는, 자기에게 인사를 하러 온 후배의 발칙한 발언에 호기심 어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예, 직스 선배님.”
직스는 읽던 책의 귀퉁이를 접은 뒤 테이블에 슥 올려두었다.
찾아온 후배는 웨이드 캘러모어다. 1학년 전체 수석이었다.
백발에 연회색 눈동자. 거의 알비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새하얀 소년이 듬직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서는 다짜고짜 한다는 말이 대련 신청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직스 선배님은 마법부를 넘어서 학사 전체에서도 강자로 유명하신 분 아닙니까. 아직 신입생 신분에 당당히 대련을 신청할 상대는 아니지요.”
“나는 그런 거 신경 안쓰긴 해. 네가 원한다면 칼 한 번 맞대주는 건 그리 어렵진 않지.”
직스는 턱을 괴고 앉아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런데 왜?”
“물론 후배로서 선배님께 가르침을 청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 표면적인 이유는 됐고.”
직스가 그리 말하자, 웨이드는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 가치를 증명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직 학사 내에서는 제 강함을 제대로 피력하지 못한 듯 해서, 강자라고 이름난 선배 분들을 찾아 대련을 신청하고 다니는 중이지요.”
“호오… 학년 수석 자리까지 먹어놓고 그런 소리를 해?”
“바로 직스 선배님과 대련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습니다만, 여정에 지치신 상태신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으니 바로 직스 선배님과 대련하는 건 너무 섣부르겠지요.”
웨이드는 특유의 청량한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직스는 그 속내가 썩 외모만큼이나 순수한 것 같진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학생회장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선언하는 타냐나, 선배들을 결투로 전부 꺾고 다니겠다는 웨이드나, 하나 같이 패기 넘치는 모습들을 보이는 후배들에게 직스는 퍽 기특한 감정도 들었다.
“2학년 선배님들 중에서는 우선 같은 전투부의 수석이신 클레비어스 선배님이나, 연금부의 엘비라 선배님부터 꺾고 나서 직스 선배님께 도전장을 보내겠습니다.”
“마법부 수석은 내가 아닌데?”
“마법부의 2학년 수석은 모든 학년의 학생들이 논외로 치고 있는 분 아닙니까.”
웨이드는 의자를 하나 당겨서 앉은 다음, 홀을 관리하는 메이드에게 차를 한 잔 내와달라고 부탁했다.
확실히, 루시 메이릴은 성적 산출을 하든 대련을 하든 아예 논외로 쳐두고 순위를 매기는 것이 일종의 관례로 자리잡았다.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현 시점에서 사실상 마법부의 2학년 수석은 직스 선배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글쎄다. 나는 그런 식으로 정신승리 하고 싶진 않고. 루시가 나보다 강한 것은 사실이니 논외로 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겸손한 품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사실입니다. 직스 선배님까지 꺾는다면 저는 적어도 2학년들 보다 높은 수준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는 건가. 당사자를 앞에 두고 당신을 꺾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상황 여하에 따라 시비를 트는 행위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직스는 그런 것에 일일이 기분 상해 하는 성격은 아니다. 아마 웨이드도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직스 선배님을 상대로는 제가 승리할 수 있을지 어떨지 장담하기 힘들긴 합니다마는…”
“그 소리는, 나머지 2학년 수석들은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로 들리네?”
웨이드는 그저 지그시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날 꺾고 나면 어쩔 건데?”
“그럼 3학년 선배님으로 뻗어 나가야지요. 3학년 전체 수석이신 예니카 선배님이나, 전투부 수석이신 드레이크 선배님.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는… 저희 1학년의 마법부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에드 선배님과도 겨뤄보고 싶군요.”
“의욕이 넘치는 건 좋지만, 그 자신감이 오만함으로 번져나가지 않게 잘 경계해야 될 걸.”
딱히 건방지다는 감정을 담은 말도 아니다. 직스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야기 했을 뿐이다.
웨이드는 조언 감사하다는 말로 능숙하게 대처할 뿐, 딱히 귀담아 듣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우선은 클레비어스 선배님과의 대련 일정을 잡아 놓기로 했습니다. 마침 눈폭풍 시기라 기숙사에만 있어야 하는 시기이니,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신 것 같았습니다. 대련 장소는 오필리스관 지하 강당을 사용하면 될테고요.”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실내에서만 보내기에는 워낙 길다. 그러니 오필리스관 측에서는 시간을 떼울 만한 여러 방안을 준비해놓았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학생 대련이다.
“다만.. 클레비어스 선배님은 저와의 대련을 기피하시는 것 같아서 좀 실망입니다.”
그리 말하고 웨이드는 흐뭇하게 한 번 웃었다.
안 봐도 뻔 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음울한 클레비어스가, 저렇게 패기 넘치고 자신감을 뽐내는 신입생의 대련 신청을 받아줄 리가 없다.
웨이드를 보고 있으면 어떻게든 대련을 성사시켜 싸우려는 의욕이 넘쳐보인다. 회유를 하든, 징그럽게 들러붙든 해서 어떻게든 클레비어스를 이기고 오려 할 터다.
“오늘 이렇게 인사를 드리는 건, 제가 다음에 대련 신청을 할 때를 생각해서, 미리 예고 해드리기 위함입니다.”
“배려심은 고마운 일이지만, 쓸 데 없는 배려긴 하네.”
직스는 다시금 웃음을 한 번 흘리고, 덮어두었던 연금술 서적을 집어들어 대충 슥슥 넘겼다.
“나를 꺾고나서 3학년 선배… 이를테면 예니카 선배나 에드 선배까지 넘본다라… 내 생각에는 그렇겐 안될 것 같다.”
“이해합니다. 저도 제가 직스 선배님을 그리 쉽게 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 소리가 아니야. 확실히 들리는 소문이나, 자신감이나, 실적 같은 걸 보면 넌 굉장히 실력자인 것 같긴 하지만… 상대를 가늠하는 능력은 좀 더 기를 필요가 있겠다.”
직스는 책장을 넘기면서,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 했다.
“뭘 모르는 것 같은데, 너는 클레비어스 선에서 끝이야.”
“…”
“예니카 선배님이나 에드 선배님은 물론이고, 내 선까지 오지도 않아, 너는.”
클레비어스는 언제나 음울하고, 겁 많고, 한심해보이는 인간이었다. 이미 소문도 자자했다. 어떻게 전투부 수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투의 소문이었다.
웨이드는 승패를 단정짓는 직스의 말에 눈가를 슬쩍 떨면서 불쾌함을 표하려 했으나, 직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확언했다.
“날 이기고 싶으면, 현실감각부터 좀 키우고 와.”
*
북쪽숲에는 괴한이 산다.
에드의 야생 생활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그런 소문이 돌고 있었다.
에드의 생활상을 알고 있는 학생들이래봐야 학사 전체를 뒤져봐도 열몇명이 채 안되므로, 그런 묘한 소문이 도는 것도 납득이 간다.
피 흘리는 야생동물 시체를 잔뜩 짊어지고 기분 나쁜 미소를 짓는 남성의 모습으로 대표되는 그 소문은, 목격 정보만 모아놓고 보면 하나 같이 무시무시하다.
물론 진상을 알고 있는 벨 입장에서는 썩 기묘한 느낌이었다.
-휘이이이이이잉!
“크윽…”
눈폭풍이 몰아치는 북쪽 숲. 빼곡하게 들어선 침엽수들이 눈발을 꽤 막아줘서 시야는 뚫려있었으나, 불어대는 강풍은 확실히 가냘픈 벨의 몸으로는 버티기가 영 버거웠다.
그나마 방한 대책은 충분히 하고 나왔다. 얇은 옷을 몇겹씩 껴입고, 그 위에 메이드장 복식을 입은 데다가, 두꺼운 케이프도 둘렀다.
가벼운 불계열 마법으로 보온도 좀 하고 나니 생각보다 버틸만 했다.
일차적인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에드의 오두막이다.
만약 성녀 클라리스가 북쪽숲을 향했다면, 그나마 그녀와 마주칠만한 사람은 에드 밖에 없다.
‘발자국…!’
희소식이라고 해야할까. 찍힌 지 얼마 안된 발자국이 북쪽숲의 눈길을 따라 나있다. 방향도 에드의 오두막과 그럭저럭 일치한다.
에드에 대해 잘 모르는 학생들은 그가 말도 통하질 않고 매정하고 차가운 인간일 것 같다고 이야기하지만… 벨은 이미 익히 이야기를 나누어봐서 알고 있다. 의외로 제법 상식적인 인간이고, 대화가 통하는 데다가, 그렇게 안보이지만 나름 배려심도 있다.
누군지 모를 인간과 마주쳐 안 좋은 꼴을 보느니, 차라리 에드와 마주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도 그럴 것이, 예니카나 로르텔, 루시 같은 쟁쟁한 여성들이 전혀 경계심을 가지지 않고 치근덕대는데도 불구하고 제 본분을 성실히 다하는 남자다. 적어도 그는 신용할만한 인간인 것이다. 클라리스를 상대로 안 좋은 해코지나, 음흉한 생각을 품을 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클라리스를 마주치더라도, 어떤 나쁜 마음을 품기보다는 분명 오필리스관으로 되돌려 보내려고할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쓸 데 없이 에드 주변의 인간관계가 복잡해지는 것일테다. 이미 벨은 충분히 머리가 아픈 상황이었다.
저 멀리, 에드의 오두막이 시야에 들어왔다. 몰아치는 눈폭풍 탓에 생각보다 더 오래 걸렸다.
‘에드 도련님은… 카일리 아가씨의 진짜 신분에 대해 모르시겠지.’
카일리의 정체는 성도의 비호를 받는 성녀 클라리스다.
설령 에드는 그 정체를 모르더라도, 클라리스를 상대로 친절히 잘 대해주고 있을 터…
그런 확신을 가지며 벨은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쿠웅!
“…”
뻑뻑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에드와 클라리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 벨씨. 역시 벨씨가 오셨네요.”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상처에 붕대를 감고 있는 에드.
그리고 오두막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며 무릎 꿇고 앉아, 가냘픈 두 손으로 나무 의자를 든 채 벌을 서고 있는 클라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벨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
두 여자가 덜덜 떨고 있지만, 그 이유는 각자 달랐다.
한 명은 의자를 받치고 있는 팔이 너무 저려서 덜덜 떨고 있었고, 하나는 성도의 비호를 받는 성녀가 벌을 서고 있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에드에게 카일리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 할 수도 없으니… 벨은 이도저도 못한 채 테이블에 앉아서 그가 건네준 차를 어렵사리 받아들었다.
“그, 그… 에드 도련님.”
엉망이 된 오두막 안을 정리하는 일도 얼추 마무리 되자, 에드는 벨을 보고 왜 부르냐 대답했다.
“그… 사정 설명은 잘 들었습니다만, 이제 슬슬 카일리 아가씨를 데리고 돌아가지 않으면 눈폭풍이 더 거세져서 곤란해질 듯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에드는 잠시간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메이드 장이 장시간 오필리스관을 비우는 것도 썩 바람직한 일은 아니겠죠.”
“그,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클라리스 쪽을 흘끗 쳐다보던 벨은 일단 어떻게든 그녀부터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에드는 목재 의자 하나를 끌어와서 벌을 서고 있는 클라리스 앞에 앉았다.
눈물을 머금고 오들오들 떨면서 의자를 바로 들고 있는 모습이 썩 안쓰러울 지경이다.
에드는 그대로 잠시간 고민에 빠졌다.
처음에 오두막에서 클라리스가 튀어나왔을 때는 그도 분명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평정을 되찾고 생각을 정리해보면, 이 어린 성녀가 여기까지 찾아들어온 이유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필시 반 배정 시험 당시의 그 자그마한 사고가 원인이었을 터.
메릴다와의 전투 과정에서 브로치를 떨어트려버리고, 그 실책을 재빠르게 커버해주었지만… 클라리스는 그 광경을 보고 에드가 본인의 정체를 간파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처한 상황이라서 에드의 대처가 매끄럽지 못했던 것은 있다. 그래도 그 이상 원만하게 대처할만한 수단이 또 없었다.
카일리의 정체는 3막 후반부나 되어서야 드러나는 핵심 반전 중 하나다.
벌써부터 카일리의 정체가 만천하에 알려져서, 성당 기사단의 비호를 받으며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 받아야하는 상황에 처하면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에드는 오두막을 정리하면서, 덤으로 생각도 마저 정리했다.
카일리는 에드가 본인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이 변하지 않는 한, 계속 카일리는 불안에 빠져 있을 것이다. 일단 그 의심을 걷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기에, 에드는 역으로 돌파하는 방법을 택했다.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은 죄송하게 됐습니다, 성녀님. 의자는… 이만 내려놓으십시오.”
그 말에 벨과 클라리스는 동시에 몸을 떨었다.
클라리스의 동공은 순식간에 확 넓어지고, 벨도 그녀답지 않게 목소리를 떨며 다시금 확인했다.
“아, 알고 계셨습니까…?”
“저도 엄연히 텔로스 교단의 세례를 받은 신자거든요.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환시 마법이 풀린 모습을 보면, 보통은 대번에 알아봅니다.”
“저, 정말요…?”
사실은 애매한 부분이다.
반 배정 시험 당시에 카일리의 환시 마법은 완전히 풀리진 않았었고, 설령 알아보았다고 한들 그렇게 자연스럽게 브로치를 챙겨주는 대처를 해내기는 힘들다.
물론 애매한 부분이므로, 적당히 임기응변과 순발력으로 대처해냈다고 둘러대면 할 말은 없을 터.
그게 아니면 에드가 카일리의 정체를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 그러면…”
“의자는 일단 내려놓아도 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아… 네..에…”
행동 방침에 대해서는 얼추 정리가 끝났다.
어쨌든 에드는 성녀 클라리스와 이 이상 엮이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일단 당신의 정체를 간파하고 있다고 시원스럽게 인정해버려서, 성녀가 불안해 할 요소를 없애두는 게 일차적인 과제였다.
그 다음은 에드가 성녀의 정체를 어디가서 발설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만 심어주면 된다.
“텔로스 교단의 신자로서, 존경해마지 않는 성녀님을 상대로 이런 불온한 짓을 한 것은 죄송하게 됐습니다. 허나, 저는 성녀님께 자유의 무서움을 알려드려야만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어두운 오두막. 몰아치는 외풍. 이따금씩 투둑대며 천장을 치는 바람의 소리.
성황도의 성녀 개인 침실이나, 오필리스관 개인실과는 궤를 달리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
고개를 들어 의자에 앉아있는 에드를 바라보면 그 뒷배경은 너무나도 살벌하다.
피가 묻은 사냥덫의 톱니들과 쇠톱, 갈고리에 걸려 건조되어가는 멧돼지 시체나 내장들, 핏내음이 무겁게 가라앉은 실내.
물론 폭풍 때문에 대부분 억지로 실내에 들여놓은 것들이지만, 클라리스가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은 아니다.
다만, 양손을 맞잡고 허리를 숙인 채 앉아 무덤덤히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에드의 모습은… 너무나도 괴리감이 넘쳐나고 있었다.
클라리스가 처음으로 본 에드의 모습은 오른산 꼭대기의 제단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한 손에는 단검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마력을 모으며 신입생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바로 그 모습이다.
그 광경은 마치 같은 선상에 있는 인간이라기보다는, 뛰어넘어야 할 벽이나 시련으로만 보여서… 에드라는 인간 그 자체가 짊어지고 사는 짐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신분을 숨기고, 학사의 사람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리는 것을 보아하니… 성녀님은 자유라는 가치에 묘한 낭만을 지니고 있으신 듯 합니다. 일부는 인정합니다. 그건 분명… 가치있는 것이겠지요.”
“그, 그건…”
“저도 이 숲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입장입니다. 속박되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답답하고 고된지는 잘 알고 있기도 하고요.”
낭만가 아델이 부르던 노랫 속에 담겨 있던 풍경들.
총천연색으로 빛나고, 꽃내음이 가득한 세상에 낭만을 품게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자유로움 하나로 내딛는 길은 언제나 꽃내음으로 가득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이 오두막에 비릿하게 서린 멧돼지 피냄새처럼… 진득하게 허파를 짓눌러서 구역질이 올라오는 때가 많다.
“제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유추가 되십니까?”
두 학년 위 선배. 단순히 강하고 무섭다는 감상만으로는 축약하기가 힘든 느낌.
피가 흐르는 상처조차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서늘한 오두막의 구석에서… 보기만 해도 끔찍한 시체들 사이에 앉아 소녀를 내려다 보는 모습에선… 살아온 인생의 결 자체가 다르다는 사실이 여실히 느껴진다.
텔로스 교단의 신자들은 기본적으로 클라리스를 보면 언제나 경외와 존경의 뜻으로 무릎을 꿇는다. 성녀를 상대로 벌을 세우고 화를 낸다는 발상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소년은 아무렇지 않게 차가운 눈으로 성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앙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있지만, 그보다 앞서는 것은 생존 그 자체다. 적어도 이 소년은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아왔다.
이 남자의 삶은… ‘살아간다’기보단, ‘살아남는’ 것이다. 그 조그만 어감의 차이는 별 거 아닌 것 같이 느껴져도, 그 실상은 막대하다.
모든 것에는 빛과 어둠이 있기 마련이다. 자유라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델이 자유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음유시인이라고 한다면.
필시 이 남자야말로 자유의 무거움과 어둠을 누구보다도 여실히 대변하는 자다.
“이만 돌아가시고, 다시는 오두막 근처로 접근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성법의 가호라 할지라도 실족사나 조난으로 인한 동사, 아사 같은 것은 피할 수 없지 않습니까.”
에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시원스레 고개를 푹 숙여보였다.
“모질 게 대한 것은 죄송하게 됐습니다. 안타깝게도 성녀님 주변에는 이런 이야기를 해줄만한 분이 없으신 것 같아서 주제를 넘었습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툭 결론을 내려주었다.
“그럼 이만 돌아가십시오.”
클라리스의 입장에서는 뭐라 대답해볼만한 기회조차 없었다.
그대로 돌아서는 에드에게, 클라리스는 차마 말을 붙일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
눈폭풍이 거세지기 전에 얼른 오필리스관으로 향해야만 했다. 벨의 안내를 받으면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필리스관으로 돌아간다면 따뜻한 실내에서 맛있는 스프를 먹으며 몸을 녹일 수 있을 것이다.
잘 정돈된 방에 앉아 눈폭풍 따위는 먼 나라 이야기 같이 평화로운 기분으로 책을 좀 읽을 수도 있다.
그렇게 오필리스관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이 거센 눈폭풍은 ‘창 밖의 이야기’가 된다.
벨의 손을 맞잡고 캠프를 떠나며, 클라리스는 어렵사리 뒤를 돌아보았다.
캠프를 떠나는 둘의 모습을 확인한 에드가 다시 손도끼를 어깨에 들쳐맨 채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두막 안은 여전히 서늘하고, 피비린내가 진득할 것이다. 추적추적한 현실의 무게감이 다시금 어깨를 짓누를 터. 그 광경이 클라리스의 뇌리에 새겨져 사라지지 않는다.
소년은 그 무게감에 어떠한 부담도 느끼고 있지 않다. 살아남기 위해 당연히 감당 해내야할 삶의 무게일 뿐이다.
클라리스는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아리따운 백조들도 수면 아래에서는 추한 발길질을 이어나간다고 한다. 자유를 누리는 삶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제단 꼭대기에 앉아서 신입생들을 막아서며 무감각하게 마법을 휘두르던 모습만 보고서는, 그 이면에 저런 모습이 있었으리라고는 절대 상상할 수 없다.
“벨씨.”
“예, 클라리스님.”
“나 때문에 먼 걸음 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너무 괘념치 마시길.”
벨의 손을 맞잡고 눈폭풍을 헤쳐나가며, 클라리스는 몇 번이고 오두막 쪽을 돌아보았다.
어쨌든 실베니아에 와서는, 처음으로 존경스럽다 할만한 선배를 만난 것이다.
적어도 성도에서는… 저런 사람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는 절대로 없다.
“…”
물론 그 속뜻을 알 리가 없는 벨은, 자꾸만 두고 온 에드 쪽을 쳐다보는 클라리스를 보며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다.
‘설마? 아닌가? 아니겠지…? 맞나? 애.. 애매한 걸…’
벨은 그렇게 속만 태우고 있을 뿐이었다.
*
그렇게 눈폭풍이 몰아치고, 겨울이 조금씩 떠나간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각자의 겨울은 형태가 다르다.
누군가는 지하의 도서관에 틀어박혀 마공학을 연구하고, 누군가는 덱스관의 창가에서 정령들과 담화를 나눈다.
오필리스관 개인 침실에 앉아 상회 장부를 마감하는 소녀가 있는고 하면, 메이드들에게 시달리며 방에 갇혀서 앓는 소리를 내는 소녀도 있다.
휴가 기간까지 시간을 내서 서류 업무를 처리하는 학사 조교도, 열심히 검술을 수련하는 낙제생 출신 검성도, 학생 홀에 앉아 연금술 서적을 읽는 북방 초원지대의 수호자도.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겁쟁이 검귀도. 모두 나름대로 제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황족 숙소, 개인 침실에 가만히 앉아 창가를 올려다 보던 백금발의 소녀 또한 마찬가지다.
몰아치는 눈발을 보며, 페니아 황녀는 슬픈 시선을 내리깔고 작게 결심 했다.
봄이 오고 새학기가 시작되어, 많은 것들이 변하는 시기가 온다.
학생회장 선거도 이제 코 앞이었다.
사실상 학사의 여러 지지층에게 두루 믿음을 받아, 학생회장으로서는 유력한 인물로 손꼽히는 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
“역시 저는…. 출마하지 않을래요…”
에드 로스테일러의 입장에서는, 이야기의 모든 전제가 무너지는 소리이자, 모든 재앙의 시작과도 같은 한 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