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enius decided to become a star RAW novel - Chapter 15
15. 있지. 방법.
한 때 연극판에서 제법 밥을 먹었던 중년 연기자가 강도훈에게 이런 얘길 해준 적이 있었다.
‘야, 말도 마라. 연극 무대에서 연기 꽤나 했다고, 드라마 우습게 봤었더랬지. 근데 이게 연극 연기하고는 다르더란 말이야.’
연기에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던 선배는 첫 드라마 연기를 죽 쑤고 감독에게 심한 말을 들었다.
‘한 소리 듣고는 꽤 열을 받았었거든. 나름 연기에는 자부심이 있었으니까. 근데 말이야. 나중에 모니터해보니 내가 봐도 어색한 거야. 그래서 생각했지. 역시, 나는 드라마하고는 안 맞는구나. 나는 연극 연기가 딱이다.’
그런데 선배는 다시 드라마로 돌아왔다. 그리곤 적잖이 성공을 거두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 연극 연기와 드라마 연기가 달라서 못했던 게 아니야. 그냥 내가 연기를 못 했던 거지.’
선배는 뭔가 심오한 깨달음을 전수해주듯 말을 이었다.
‘간혹 연극 연기하면 막 과장하고 오버하는 연기라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 본질적으로 연기는 같은 거야.’
처음에는 도훈도 선배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연극과 드라마가 같은가.
‘다만 연극 무대에서는 드라마처럼 카메라 워크나 음향 보조가 없잖아. 그러니 조금 더 발성을 크고 또렷하게, 표정을 정확하게, 몸짓을 조금 크게 하는 것뿐이라고. 그걸 과장한다고 생각하면 안 돼. 자연스러움을 확장한다고 생각해야지.’
나중에서야 그게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강도훈에게는 꽤 인상 깊었던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딱 그 가르침의 표본 같은 연기였다. 저 우진혁의 연기는.
드라마 연기가 아니다. 그러나 자연스럽다. 표정, 몸짓, 발성까지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다.
저 녀석도 누군가에게 이런 얘길 들었을까?
아니. 그러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그걸 들었다고 해도, 깨닫고 해내는 건 또 다른 문제. 그런데 들은 적도 없이, 본능적으로 해냈다면?
하.
열등감이 질투가 되어 강도훈의 가슴 구석구석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자, 이영준, 우진혁, 수고했다.”
박동철 선생의 말과 함께 진혁의 연기가 끝났다.
“““우와!”””
짝짝짝짝!
강도훈은 학생들의 환호와 박수가 말할 수 없이 거슬렸다.
“자, 다음.”
우진혁의 연기가 워낙 강렬했던 탓에 다음 순서의 학생들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오디션이 끝이 났다.
“자, 모두 수고했어요. 여러분의 노력과 진지한 태도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원래는 이 자리에서 바로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박동철 선생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해서 오늘 당장 판단하기보다는 좀 더 신중하게 고민을 하는 것이 여러분의 노력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비록 미봉책이긴 했으나, 당장은 결과 발표를 미루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그나마 최선이었다.
‘또 모이라고?’
학생들의 얼굴에 불만이 떴지만, 박동철 선생은 능숙하게 조미료를 쳤다.
앞으로 있을 캐스팅 발표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미리미리 부드럽게 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모두들 너무 열심히 해주어서, 이번 오디션에 참가한 모든 학생들에게 상점을 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담당하는 영어 과목 수행 평가에도 노력 점수를 반영할 거고요.”
당근과 채찍. 역시, 학생들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선생님이 신중하게 고민해서, 내일 방과 후에 배역 선정 결과를 발표할 테니, 이곳으로 다시 모이도록. 이상.”
박동철 선생이 한숨을 돌리며 음악실을 나섰다.
***
“저, 선생님.”
“어? 도훈아. 뭐 할 말 있어?”
교무실로 향하던 박동철 선생이 강도훈을 향해 한없이 사람 좋은 미소를 건넸다. 조금 주저하는 듯하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우진혁이요. 꽤 잘하더라고요.”
“으, 응? 아, 그래 뭐. 도훈이 네가 그렇게 봤다면 그게 맞겠지.”
순간 복잡했던 박동철 선생의 뇌가 더 복잡해졌다.
만에 하나라도 강도훈이 우진혁과 꼭 같이 하고 싶다든가 하는 말을 했다간 자신의 계획은 나가리가 될 판이었다..
“근데요. 선생님이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응?”
“그게 작품이란 게 각자 각자 연기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응? 아! 그렇지.”
“연기자 간에 케미가 되게 중요한 건데… 솔직히 진혁이 연기하고 저는 좀 안 어울릴 것 같아서요.”
강도훈이 난처하다는 듯 목 뒤를 주무르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선생님, 죄송하지만 혹시 진혁이를 주요 배역으로 넣으실 거면, 미리 좀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면 제가 빠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선생님께 이런 말씀 드리는 게…”
박동철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이게 웬 떡이냐.
역시 연기 전문가는 달랐다.
그렇지. 케미! 케미! 얼마나 멋진 말인가. 무대 위 배역들의 조화라는 건.
우진혁을 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던 박동철 선생은 쾌재를 불렀다.
“아, 아냐, 아냐. 도훈아. 그럴 필요 없어. 뭐니 뭐니 해도 이번 연극의 주인공은 넌데. 네 중심으로 가야지. 원래 배역이라는 게 주인공에 맞춰 가는 거지. 우진혁은 전혀 걱정하지 마. 선생님도 다 보고 있었어요. 너하고 케미가 좋지 않을 거라는 거.”
“아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더 죄송해지네요. 역시 선생님 눈이 정확하실 텐데, 제가 그걸 못 믿고…”
박동철이 강도훈의 어깨에 친근하게 손을 올렸다.
“아, 녀석. 우리 사이에 뭘 죄송하고 말고 하냐. 아무튼 선생님만 믿어.”
“감사합니다.”
“아, 어머니께는 안부 전해드리고.”
“네.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강도훈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걸렸다.
***
“와, 진짜 이게 말이 되냐?”
연극 배역 발표가 끝난 직후부터 도민우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몽룡 역에 강도훈
성춘향 역에 민서연
방자 역에 여민철
향단 역에 도지연
월매 역에 김유빈
변학도 역에 이영준
이상이 주요 배역이었다.
3반에서는 민서연과 이영준이 들어갔고, 나머지 배역은 강도훈과 그 친구 여민철. 그리고 각각 다른 반의 두 여학생에게 향단과 월매 역이 돌아갔다.
“누가 봐도 진혁이가 다 씹어 먹었는데. 솔직히 난 강도훈 보다 진혁이 연기가 낫더라.”
사실이었다. 단지 발연기의 달인 도민우가 그 말을 하는 바람에 말의 신빙성이 조금 하락했을 뿐.
도민우는 배역 발표 후 즉각 항의했었다.
‘선생님. 이의 있습니다! 우진혁이 주요 배역에서 빠진 게 이해가 안 됩니다.’
‘뭐? 누가 이의를 받는다고 했어?’
‘아니, 그래도 이건.’
‘도민우! 이 자식이 어디서 버릇없이! 안 그래도 내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해 주려고 했어. 아무렴 선생님이 도민우 너보다 생각이 없겠어? 쯧.’
박동철 선생 말의 요지는 그랬다.
우진혁은 나름 잘했다. 하지만 전반적인 배우들의 케미를 생각해서 아쉽게도 주요 배역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곤 배우의 케미가 작품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 아니 변명으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배역은 연기력 순이 아니란 말이다. 연극은 조화가 중요해. 조화가. 알아들었나?’
‘하지만…’
‘더 이상 소란 피우면 벌점이다. 도민우. 당사자도 가만히 있는데 왜 네가 난리야!’
그렇게 우진혁에게 맡긴 역이 ‘담양 부사’.
마지막에 변학도가 벌이는 잔치에서 실없는 대사 한두 마디 던지는 게 전부인 단역이었다.
“난 이거 안 하려고.”
변학도 역을 맡은 이영준이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동글동글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성깔이 있는 녀석이었다. 영준은.
“내가 진혁이 추천해서 이렇게 됐는데, 나만 하면 면목이 없지.”
영준은 나름 우진혁에게 기대를 걸었다.
눈 앞에서 압도적 연기를 펼쳐버리면, 아무리 박동철 선생이라도 그냥 뭉개고 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판을 수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한데 배우 간의 케미를 떠들 줄이야. 박동철 선생의 파렴치함에 아주 넌덜머리가 난 이영준이었다.
“나도. 안 할래.”
민서연이 거들었다. 다들 눈이 동그래져서 서연을 쳐다보았다. 서연이 우진혁을 슬쩍 쳐다보더니 말했다.
“뭐. 오해하지 마. 딱히 우진혁 너 때문은 아니야. 이딴 꼭두각시 놀음에 짜증이 났을 뿐이니까.”
이영준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민서연은 저런 녀석이어야 맞지.
그 때였다.
“방향을 좀 잘못 잡은 것 같은데.”
모두가 입을 연 우진혁을 주목했다.
“그런 정도로 너희들의 불만이 접수가 되겠나. 배역이야 다른 애들 주면 그만이고. 오히려 너희들 입장만 곤란해질 것 같은데?”
“그럼, 뭐. 다른 방법 있어? 우리 불만을 제대로 접수시킬?”
우진혁이 여유 있게 웃었다.
“있지. 방법.”
***
진혁의 계획을 들은 이영준의 입이 쩍 벌어졌다. 다른 아이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와… 진짜 그걸 하겠다고?”
“근데. 그렇게 하고도 진혁이 너 괜찮겠어? 박동철 선생님 노발대발할 텐데.”
진혁이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실 진혁은 배역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연극 참여로 얻을 내신에서의 배네핏? 학생들과 교사들의 인정? 그런 것들도 전혀 관심 없었고.
지난 생의 중학교에서도 차별을 일삼는 선생은 있었다. 특히 고아 출신인 자신에겐 더욱더.
하지만 보육원과 학교는 달랐다.
연극 같은 것이 아니어도, 내신이든, 사람들의 인정이든 다 가져올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었으니까.
성적.
학교 전체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성적 앞에서는 모든 게 간단해졌다.
중학교 때도 그러했는데, 하물며 성적이 훨씬 더 중요한 고등학교에야 뭘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진혁의 이번 중간고사는 전 과목 만점이었다. 아직 성적표는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답안을 통해서 확인했다.
만점이니 당연히 전교 1등일 테고, 진혁은 앞으로도 이 압도적인 성적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그걸로 고등학교 생활은 충분할 터.
박동철 선생의 차별 같은 건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혁은 박동철 선생의 일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부당한 자에게 정당한 자신의 몫을 빼앗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진혁의 것을 빼앗으려는 자들은 그에 응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지난 생에서도, 그리고 이번 생에서도.
복수란 용병 우진혁에겐 익숙한 단어였다.
위해를 가한 자에게 반드시 복수하지 않으면, 다음엔 더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곳이 전쟁터.
복수는 용병에겐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용병으로서의 방식대로라면, 폭탄을 준비해서 박동철 선생이 아끼는 고급 승용차를 날려주는 정도는 기본이겠으나…
이젠 용병이 아닌 진혁은 참으로 학생다운 방법으로 아주 명랑하게 복수를 해줄 요량이었다.
축제 연극 당일. 가장 빛나야 할 바로 그 무대에서.
“너희들의 마음은 고맙지만, 일차적으로 내 문제인데, 내가 총대를 메야지. 물론 너희들의 도움은 꼭 필요하지만.”
총대를 멘다고는 했으나, 진혁은 알고 있었다.
박동철 선생이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일이래 봐야 별것 없다는 걸.
평화로운 민간인 고등학교에서 교사가 학생에게 줄 수 있는 벌이라는 게 뭐가 있겠는가.
전장을 누벼온 용병에겐 극렬한 고문 정도가 아니고서야 딱히 벌이랄 것도 없었다.
게다가 전 과목 만점에 전교 1등. 이런 학생은 실정법에 저촉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반성문 정도면 끝나는 법이다.
“당연히 도와야지.”
“뭐. 재밌겠네.”
조금의 염려도 보이지 않는 진혁의 모습을 보며, 이젠 걱정보다는 기대로 반짝이는 눈빛들.
진혁은 민간사회에서 벌이는 첫 복수극의 동료들에게 가볍게 미소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