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 Surgeon RAW novel - Chapter (306)
제3화 마지막 한 주 (1)
금요일 이른 아침.
스테이션에 서 있는 김지훈을 본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에 환자 리스트까지 든 것이 이미 환자 파악까지 다 한 모양이었다.
“지훈아, 너 아직 휴가잖아? 왜 왔어?”
“이준영 선생님 회진만 돌고 갈 거야. 휴가 때라 사람도 모자란데, 니들한테 쭉 맡기는 것도 미안하고.”
“너도 참 가지가지 한다. 환자들 다 괜찮아, 인마.”
환자도 환자였지만 무엇보다도 궁금한 것이 있었다.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준영 과장이 있는 당직실에 불이 환하게 켜진 것을 보았다. 밤이 늦어 들르지는 못했지만 공연히 마음이 안 좋았다.
김지훈이 슬쩍 주변을 보며 물었다.
“일석아, 수술실에서 어땠어? 괜찮았어?”
“이준영 선생님? 말도 마라. 나 휴가 갔을 때는 잠잠하셨다며. 그 말 믿고 방심했다가 호되게 깨졌다. 현수도 완전히 뭉개졌어. 에휴! 신기동 선생님에 이혁민 선생님까지, 아주 우리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나신 것 같아. 살풀이라도 한번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래? 예전처럼 탔단 말이지.”
김지훈의 입이 쭉 찢어지자 손일석의 눈이 쫙 찢어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너 지금 좋아하는 거야? 설마 우리가 탔다고 깨소금 맛이다 이런 건 아닐 테고, 도대체 뭐야?”
“자식, 눈치는 있어 가지고. 뭔가 표정이 안 좋으셨거든. 니 말을 들으니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해결되신 모양이야.”
“에휴! 타는 게 정상이라, 이 말이지. 이게 무슨 난리냐. 아! 그런데 말이야. 아주 희한한 정보가 하나 입수됐어.”
손일석이 목소리를 낮췄다.
“뭔데?”
“휴가 때 지금 구미에서 실습 도는 놈하고 우연히 만났는데, 이준영 선생님을 구미 병원에서 봤다네. 야간 근무하고 나면 무척 피곤하실 텐데 구미까지 가다니 이상하지 않냐? 구미에 이혁원이 있잖아. 가만히 보면 성만 같은 게 아니라 생김새도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는 생각까지 들어.”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그래? 확실한 거야?”
“그럼 확실하지, 인마. 나는 정확하지 않은 정보는 취급을 안 해요.”
“구미 병원에 일이 있어서 가셨을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이준영 선생님이 구미 병원까지 직접 가셔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을까? 그런 일이 있으면 송동화 선생님에게 연락을 해도 되고, 아니면 다른 사람이 내려가야 이치에 맞지. 밤에 제대로 잠도 못 주무시는 분이 간다는 게 말이 돼? 구미가 옆 동네도 아니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곰곰이 고민을 하던 김지훈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섣불리 판단할 문제도 아니었지만, 생각해 보면 궁금하기는 해도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이준영 과장과 이혁원이 어떤 관계인들, 본인들이 말하지 않는 한 입을 다물 일이었다. 한 사람은 스승이고, 또 한 사람은 아끼는 후배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도리어 신경이 쓰이는지도 몰랐다.
“에이!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잖아. 그리고 솔직히 아주 가까운 관계였으면 이준영 선생님은 몰라도 혁원이는 말을 하지 않았겠어?”
“지훈아, 우리가 언제 영양가 있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냐? 가끔은 이런 일이 은근히 호기심을 자극하잖아. 더구나 우리를 태워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나신 양반 일이야. 난 꼭 알아야겠다. 너 다음 텀이 구미지? 혁원이랑 스케줄이 일주일 겹친다. 술 한잔 먹이면서 정보 나오는 대로 나한테 보고해.”
손일석이 바짝 얼굴을 들이대며 손가락을 튕겼다.
사실 그 말도 맞았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서는 환자만 보아야 한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때 이준영 과장이 회진을 올라왔다. 김지훈이 보이자 조금은 놀란 듯 살짝 움찔거렸다.
“너 휴가 아냐?”
“예. 내일 오전까지 휴갑니다.”
“근데 여기서 뭐 해?”
“선생님 파트는 저밖에 없잖아요.”
중한 환자도 없어 신현수와 손일석에게 맡겨도 충분한 일이었다. 휴가를 하루 앞당겨 오는 전공의는 본 적이 없었다. 아니다. 1년차 때도 휴가 대신 음성에 온 김지훈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입술을 모으며 가만히 김지훈을 보다 병실로 향했다.
‘1년차 때도 그러더니. 흐음! 설마 그동안 내 표정이 안 좋아서 빨리 온 건 아니겠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군. 내가 저놈 눈만 보고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아는 것처럼 저놈도 그럴 수 있겠지. 휴우! 스승은 제자에게 든든한 받침이 돼야 하는데. 그래! 혁원이 문제는 하루 이틀 내에 해결할 수가 없는 일이야.’
이미 환자 파악을 모두 끝냈는지 이준영 과장의 물음에 김지훈이 척척 대답을 했다. 고맙고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만 했다. 그러나 나오는 목소리는 예전 그대로였다.
“김지훈, 남은 휴가는 반납한 거야?”
“낮에는 쓰고 싶습니다, 선생님.”
“그래? 그럼 저녁에 보자.”
“예,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김지훈이 스테이션으로 돌아와 손일석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 너 어디 가려고? 휴가 때 뭐 했는지 보고해야지.”
“보고는 무슨.”
손일석이 코웃음을 치고는 김지훈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쭈! 김지훈, 간덩이가 부었구나. 내 입이 무겁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안에 전 병원이 다 아는 수가 있어요. 보고 확실히 합시다, 김지훈 선생님.”
“아이! 자식이, 정말. 너 믿고 얘기했는데 이렇게 나올래?”
“성질을 내는 것 보니까 뭔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네. 더 궁금해졌어. 숙소에서 보자. 마음을 열고 들어 줄 준비가 돼 있으니까 솔직하게 낱낱이 보고해.”
사실 말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이상하게 가슴에 사무쳤다. 김지훈이 입맛만 다셨다.
“알았어, 인마. 근데 들을 것도 없다.”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고. 아 참! 지훈아, 천안 병원에 일이 있어서 구미 3년차를 바꾼단다. 누군지 궁금하지?”
“그게 무슨 소리야? 치프를 왜 바꿔?”
“나도 이유는 잘 모르는데, 오색 선배란다.”
“뭐? 오색 선배면 홍재순 선생님?”
김지훈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손일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희한한 콧소리를 냈다.
“끄응! 내가 작년에 같은 파트 돌았었잖아. 진짜 들었던 거보다 훨씬 더 답답하더라. 내가 해 줄 말은 다른 거 없다. 그냥 맞춰야 돼. 꼴통 기질이 좀 있어.”
“그건 나도 아는데, 갑자기 왜 바꾸는 거야. 아이 씨! 죽겠네. 이거 말도 안 되는 일 아냐?”
“말도 안 되지. 하지만 니 덕에 우리 중 누구 하나는 편안해졌잖아. 좋게 생각해. 하여간 인복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희한하게 결정적일 때는 없어요. 불행한 놈.”
교수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김지훈이 재빨리 사라졌다. 얼굴 보여야 누가 휴가를 갔는지 잘 모르는 교수에게 걸리면 공연히 일만 할 수 있었다.
숙소로 올라온 김지훈이 한잠 늘어지게 잔 후 논문을 폈다. 은근히 초조해졌다. 이미 작성한 논문을 틈틈이 수정해 왔지만, 김지훈이 보기에도 영 마땅찮아 보였다.
논문을 읽어 가던 김지훈의 고개가 까딱거렸다. 운전으로 점철됐던 휴가의 피로가 몰려온 것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이준영 과장의 회진 시간이 임박한 후였다. 비몽사몽 중에 손일석과 휴가 얘기를 한 것 같기도 했다.
책상 위에 놓인 논문이 바람에 힘없이 휘날렸다.
하루 일찍 복귀하기를 잘했다. 빤뻬리 하나가 떴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수술실에 들어간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눈만 껌벅거렸다.
왜 신현수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더구나 지금은 휴가 기간 중이었다. 수술실에 들어온 이준영 과장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김지훈을 보며 예의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지훈, 넌 휴가 중이잖아.”
이준영 과장의 눈이 김지훈의 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퍼스트도 아니고 세컨도 아닌 써드다!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며 써드 자리에 섰다. 신현수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며칠간 인정사정없이 탔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이준영 과장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속마음은 어떤지 모르지만 최소한 겉으로는 그랬다.
써드라고 해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무엇 때문에 타는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예상대로 신현수가 정말 살벌하게 탔다.
‘그래. 사소하다고 신경을 안 썼는데, 소장을 잘 정리하지 않아도 수술에 방해가 되네. 역시 스승님도 꽤 꼼꼼하셨어.’
안에서는 안 보이는 것이 밖에서는 잘 보이는 경우가 있다. 지금이 딱 그랬다. 그런데 써드 역시 수술 팀 중의 한 명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수술보다는 신현수가 왜 타는지에 너무 집중했다. 이를 놓칠 이준영 과장이 아니었다.
“김지훈, 너 이러려고 들어왔어? 정신 안 차려?”
터졌다. 말 몇 마디로 김지훈은 아예 피 곤죽이 됐다. 수술이 끝나고 환자가 회복실로 옮겨질 때까지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우아아! 끌기만 하면 되는 써드를 서면서 어떻게 탈 수 있지? 내가 할 일은 다 했는데, 도대체 왜 탄 거야.’
하도 답답해 신현수를 보았다. 물어보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표정이 똑같았다. 서도진만이 평상시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이젠 2년차들이 타는 모습에 완벽하게 적응한 모양이었다.
토요일 오전까지 휴가였다. 오후에 뜨는 수술부터는 김지훈의 일이었다.
당연한 것처럼 수술이 떴다. 김지훈이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신현수가 타는 모습을 똑똑히 봐서 그런지 유난히 걱정이 됐다. 예외는 없다지만 정말 심했다. 그깟 휴가 며칠에 손이 녹슨 것도 아닐 텐데, 마치 음성에서 근무할 때처럼 탔다.
수술을 마치고 나온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어후! 정말 타도 타도 끝이 없네. 어떻게 현수가 왜 타는지 보고도 이 모양이냐. 분명 확실하게 익힌 것 같은데, 지적을 받고 나면 확실히 뭔가 모자란단 말이야. 2년차 후반기가 코앞인데 정말 큰일이다.’
정신이 번쩍 났다. 이제 기본 술기 정도는 충분하게 배웠고, 확실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준영 과장의 지적은 예리하기만 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던 자만이 싹 사라졌다.
수술 과정을 찬찬히 생각하던 김지훈이 머리를 긁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늘은 정말 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타지 않은 과정이 없었다. 김지훈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1년차가 첫 퍼스트를 서는 것으로 오해할 지경이었다.
“에이! 나도 내가 부족한 걸 아니까 뭐라고 할 말도 없고 정말 짜증 나네. 머릿속에서는 착착 손이 가는데, 왜 꼭 수술만 들어가면 정확한 타이밍을 놓치지.”
김지훈이 투덜거리며 한숨을 쉬다 말고 피식 웃고 말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감고 있는 신현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스승님도 참 대단하시네. 현수, 너도 나처럼 써드를 서면서 탔으니 심난하겠다. 에휴! 마지막 일주일까지 새카맣게 타다 갈 모양이네. 이때쯤에 수술 좀 주실 줄 알았는데 완전히 물 건너갔구나.’
어깨를 부르르 떨며 일어서던 김지훈과 신현수의 눈이 마주쳤다. 표정들이 어색했다. 2년차 후반을 코앞에 두고도 1년차보다 더 탄 놈들 둘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주말 내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탔다. 이준영 과장은 극히 사소한 일까지도 지나치지 않았다. 멘탈에는 자신이 있었던 김지훈마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지막 수술이 끝난 후, 사색이 된 채 괴로워하는 김지훈을 본 이준영 과장이 눈빛을 굳혔다.
‘김지훈, 솔직히 2년차로만 보면 넌 자랑을 해도 될 정도로 잘하고 있어. 하지만 2년차 후반기에 구미와 천안을 돌면 서울보다는 훨씬 더 수술을 할 기회가 많을 거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집도를 하든 퍼스트를 서든, 그 자리에 주어진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알아야 해.’
이준영 과장의 눈에 조바심이 스쳤다. 한대현의 일과 자신의 사적인 문제 때문이라지만,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미 이삼 주 전부터 가르쳤어야 했다.
단순히 2년차로만 보았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김지훈은 달랐다. 제대로 키우고 싶다는 마음만이 아니었다. 마치 의무이기라도 한 것처럼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스승이라 불리는 이가 갖는 막중한 책임이었다.
이제야 김지훈과는 다소 떨어진 곳에서 묵묵히 고민하고 있는 신현수가 보였다.
‘신현수, 너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라이벌을 갖는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그런 기회를 놓치지 말길 바란다.’
음성에서의 기억 때문일까? 이준영 과장도 유독 김지훈에게 쏠리는 애정과 관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문득 김지훈은 세부 전공으로 무엇을 택할지 궁금했다.
위장관? 간담도? 대장 항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