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43
143 마음이 닿는 곳
* * *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을 움직여봤더니, 하나하나 잘 움직인다.
다리도 문제가 없고, 어깨도 잘 돌아간다.
숨도 잘 쉬어지고, 주변도 선명히 보였다.
길을 따라 바삐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고, 심지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데 특유의 몽롱함이 감돌며, 내 감각을 점점 무디게 만들고 있었다.
그 신기한 느낌이 이곳이 꿈속이라는 걸 구분 짓게 해줬다.
그래.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었다.
‘밀러 아저씨가 종종 말씀하셨던 자각몽이 이런 건가? 무인도에서 한참 고생하셨었는데.’
‘이런 느낌’이라면 자각몽을 꾼 이후에 아저씨가 왜 그렇게 피곤해하셨는지 알 것만 같았다.
체력이 쭉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뭐라도 해볼까?’
아. 아.
소리를 내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자각몽이라고 해서 모두 내 뜻대로 해볼 수 있는 건 아니었나 보다.
‘그보다······.’
여기는 어디지?
저 멀리 ‘ㄷ’자 모양의 건물이 눈에 띄기는 했지만, 익숙한 장소는 아니었다.
사람들을 따라 길을 걸어봤다.
다행히 걸음은 옮겨졌다.
깔끔하게 포장된 길을 따라 ‘ㄷ’자 모양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그제야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싱가포르 국립병원. 이런 모습이었구나.’
의식이 없는 상태일 때 이곳에 오게 된 이후, 병원 안에서만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터라 외관이 어떤지는 지금 처음 보게 됐다.
나는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있다.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을 따라 한참을 더 걸어 들어갔다.
그곳엔 거대한 분수가 있었는데, 바로 옆에 피아노가 놓여져 있었다.
내가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했었던 피아노.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꽤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 연주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작정 연주를 시작했었지.’
피아노 바로 앞까지 걸음을 옮겼다.
연주자가 없었기에 사람들은 아무도 피아노에 관심을 주고 있지 않았다.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살짝 틀어져 있는 의자를 끌어봤다.
하지만 이 의자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호기심이 생겨 건반을 눌러 봤지만, 소리가 나진 않았다.
‘재미없는 꿈이네.’
나는 주위를 살펴봤다.
피아노 옆쪽은 잘 보였는데, 앞쪽은 그랜드 피아노의 거대한 뚜껑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몸을 일으켜보려고 했다.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쏠리는 곳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병원의 로비에서.
단 한 곳.
그곳엔······.
.
.
.
“앗! 일어났다!”
눈을 떠보니 웬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가 내 인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수연이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휴우. 다행이야.”
“왜 그래? 수연아, 무슨 일 있어?”
수연이에게 묻자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오빠, 지금 몇 시간 동안 자고 있었는지 알아?”
“글쎄? 어제 공연 끝나고, 저녁 먹고 돌아와서 거의 바로 잠들었으니까 한 8시간 정도?”
“아니야. 오빠는 거의 13시간 동안 잠만 잤어!”
“13시간?”
“엄청 나지? 조금 전에는 너무 조용하길래 내가 숨 쉬고 있는지 직접 확인도 해봤어. 그래도 오빠 콧바람이 계속 나오긴 하더라고. 후우. 그게 아니었다면 많이 놀라고 말았을 거야.”
고개를 가로젓는 수연이.
나는 괜찮다는 말부터 해줬다.
“어제 공연이 끝난 이후에 너무 피곤했었나 봐. 푹 잤네.”
“아픈 데는 없어?”
“응. 그런데······.”
“잠깐만 기다려봐!”
수연이는 내 침대에서 폴짝 내려가더니, 도도도 달려가서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왔다.
말을 안 했는데도 내 뜻을 알아봐 주는 동생님이시다.
수연이는 패트 병 뚜껑을 따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고, 덕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버렸다.
“줘봐. 오빠가 할게.”
“아냐! 내가 할 수 있······!”
“괜찮아. 힘은 오빠가 써야지.”
“끄응······! 조금만 더······! 다 돼가는데······!”
결국엔 포기하고 마는 수연이.
나는 생수병을 건네받아 뚜껑을 따고, 1/3을 단번에 들이켰다.
미세하게 남아있던 두통이 단번에 없어지며 정신이 차려졌다.
“확실히 오빠가 힘이 더 세구나.”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도 가만히 있어 봐.”
내 이마를 짚어보시는 우리 동생님.
열은 없는 것 같다면서 최종 진단까지 내려주신다.
“그러면 오빠는 그냥 피곤했던 거야?”
나는 곧바로 수긍했다.
“그런가 봐. 그리고······. 꿈을 꾸긴 했어. 그래서 오래 잠을 잤었나 봐.”
“꿈? 혹시 악몽 같은 걸 꾼 거야?”
“그런 건 아니야. 조금 그리운 듯한 꿈을 꿨어.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 만약 여차하면 이 아이를 빌려줄까 했었는데.”
수연이는 요즘 잘 끼고 다니는 ‘쿠르 콩’ 곰 인형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쿠르 콩의 이마를 쿡 찔렀다.
“얘는 수연이를 지켜야지. 잘 때 얘 없으면 너 못 자잖아.”
“아, 아냐! 나 요즘 얘네들 없어도 잘 자. 오히려 얘가 내가 없으면 못 자는 거야. 크흠. 오빠가 잘 몰랐나 보네. 뭐······. 그럴 수도 있지.”
거짓말을 잘 못 하시는 동생님께서는 말을 하면서도 시선을 스윽 돌렸다. 볼도 몇 번인가 긁적인다.
“그런데 아버지랑 어머니는?”
호텔 방에 부모님이 안 보이길래 물어봤다.
“아빠는 강유한 교수님 만나러 가셨어. 엄마는 오빠가 일어났을 때 먹을만한 걸 사 오겠다고 로비로 내려가셨고. 금방 돌아오실 거야.”
수연이 말대로 2, 3분 정도가 지났을 때 어머니께서 호텔 방으로 돌아오셨다.
“아들. 피곤했었어? 어제 엄청 고단하게 자더라.”
“조금 그랬었나 봐요.”
“아닌 척하더니. 엄마한테는 말해도 된다니까.”
“큰 공연이었잖아요.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여간······. 아픈 데는 없는 거지?”
“네. 멀쩡해요.”
어머니는 수연이와 똑같이 내 이마를 짚어보셨다.
그러면서 내게 샌드위치를 건네주신다.
“지금은 간단하게 요기만 하고, 조금 있다가 제대로 먹자. 알겠지?”
“그러면 될 것 같아요. 수연이도 먹을래?”
“아니. 나는 오빠 자고 있을 때, 엄마랑 아빠랑 같이 샌드위치 먹었어. 괜찮아.”
“그래?”
어머니 말씀대로 간단히 샌드위치를 먹고, 샤워까지 한 뒤에 우리는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아버지와 강유한 교수님, 로랑 피아니스트님께서 이미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그곳에 합류해서 우리는 한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 어제 내 연주에 대한 이야기였다.
피드백을 가장한 칭찬.
가족들 앞에서 대놓고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조금 머쓱해지긴 했다.
“오빠, 로랑 피아니스트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하신 거야? 나도 알려줘. 나도 같이 웃고 싶어!”
“으음.”
영어를 못 알아듣는 수연이가 내게 뜻을 물어오는 바람에 조금 곤란한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물론, 어머니께서 틈틈이 통역을 해주셨기에 수연이도 우리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는 알게 됐지만 말이다.
“크흠! 역시 우리 오빠인가? 연주가 멋지긴 했어. 그런데 나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 나만 영어를 못 알아듣네.”
“그런데 수연이는 지금도 충분히 영어 잘하잖아. 유치원에서 칭찬 스티커도 늘 많이 받아 오고.”
“아냐. 그 정도로는 부족해. 엄마랑 아빠도 그렇고. 오빠는 영어뿐 아니라 독일어까지 잘하잖아. 우리 가족 중에서 나만 외국어가 안 돼. 한국에 돌아가면 열심히 따라가 보도록 할게.”
열의를 불태우시는 우리 동생님.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안 그래도 된다니까 핵심을 찔러왔다.
“오빠.”
“응?”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거야. 오빠도 14살에 카네기홀에 섰잖아? 그런데 나는 벌써 6살이고. 그러니까 오늘부터라도 하루하루가 중요한 거야. 세상에 충분한 건 없어.”
라는 설교를 듣게 됐다.
수연이 이야기를 듣고 큭큭 웃으시는 강유한 교수님.
어머니도 웃기 바쁘셨고, 아버지께서는 ‘수연이 말’의 기원을 찾아주셨다.
“내 소설에 있는 구절이었는데, 용케 수연이가 봤나 보네.”
“가끔씩 수연이 말하는 거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니까요. 천재가 따로 없어요.”
“엇! 천재는 오빠지. 나는 아직 멀었어!”
수연이 덕분에 우리는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인근 식당으로 향했다.
먼 곳은 아니었기에 도보로 이동을 했는데, 로랑 피아니스트님께서 내게 할 이야기가 있다며 따로 손짓을 하셨다.
조금 전 수연이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보시는 로랑 피아니스트님.
그런데 알고 봤더니 본론은 따로 있었다.
“허밍이요?”
“그래. 작은 소리였지만, 카네기홀 무대에서 나는 분명히 네 허밍을 들었거든. 혹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었나 해서.”
내가 그랬었나?
곰곰이 생각을 해봐도, 그런 행동을 했던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고민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본 로랑 피아니스트님께서는 살짝 미소를 지으셨다.
“그렇다면 본능적으로 나온 허밍이라고 보면 되려나?”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허밍’을 했었다는 기억은 딱히 없거든요.”
“그렇구나. 그러면 혹시 글렌 굴드라는 피아니스트는 알고 있니?”
“네. 캐나다 출신 피아니스트님이시잖아요. 바흐의 스페셜리스트로 알고 있어요.”
“맞아. 작고하신 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전설로 남아있는 분이야. 연주에 몰입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허밍은 그분의 트레이드 마크였잖아. 그게 생각나더라.”
로랑 피아니스트님께서는 몰입하다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며, 오히려 그래서 좋은 연주가 나올 수 있었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을 해주셨다.
“사실, 내가 유독 귀가 좋은 편이라 들은 거라고 봐도 돼. 다른 관객분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셨을 거야. 아주 짧고 작은 소리였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예전에 무인도에서, 비행기 추락 당시에 아저씨가 내 허밍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밀러 아저씨에게 ‘허밍’이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면, 이번에 로랑 피아니스트님의 말씀을 흘려 넘겼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어제 공연에서도 또 허밍을 했었다?
어제 꿨던 자각몽의 내용과 허밍이라는 단어가 엮이며, 생각이 더 깊어지게 됐다.
‘허밍······. 그리고 자각몽이라······.’
어느새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많은 음악가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내 연주를 칭찬해주시면서도 한결같이 카네기홀 공연을 축하해주시는 분들.
그런데 파얀스 피아니스트님께서는 내 음악을 듣고, 치유와 행복을 느꼈다고 정확히 말씀을 해주셨다.
그의 말 한마디에······.
나는 복잡한 생각을 모두 떨쳐낼 수 있었다.
“맞아요. 치유와 행복. 그게 제가 어제 바라던 연주였거든요.”
“무척 놀라웠단다. 그건 흔치 않은 음색이면서도 고귀한 기풍이니까. 피아니스트가 이에 대해 생각하고 표현하고자 한다고 해도 쉽게 보여줄 수 있는 음악이 아니거든. 그러니 네 색깔을 항상 소중히 여겼으면 한다.”
“네. 항상 그렇게 할게요.”
파얀스 피아니스트님께서는 내 어깨를 툭툭 치시면서 아주 작은 소리로 말을 이어가셨다.
“과거에 너와 비슷한 연주자가 있었지. 너와는 다르지만, 분명 비슷한 음색을 지닌 연주자가 있었어. 아름다움과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피아니스트. 하지만 그는 욕심을 내고 말았어. 잘하는 아이였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지. 너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언제나 너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려무나.”
파얀스 피아니스트님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내게 인자한 미소를 지어주시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셨다.
강유한 교수님보다도 연세가 많은 노년의 피아니스트.
그의 말씀과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할 수도, 이해시킬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내 연주를 듣고 밀러 아저씨를 떠올렸다는 파얀스 피아니스트님의 말씀을 마음 한켠에 고이 새겨두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밀러 아저씨를 기억해주셔서요.’
“조언 감사합니다. 파얀스 피아니스트님.”
“그래. 그거면 됐다.”
미국 뉴욕에서의 일정이 그렇게 길게 잡혀 있지는 않았다.
지금은 학기 중이었다.
학교에 사유서를 쓰고 단기간 연주를 하러 온 것뿐이었기에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었다.
저녁엔 ⌜Schmid⌟와 만났다.
로저스 디렉터님께서는 하루 만에 열 곳이 넘는 공연장에서 공연 제안이 들어왔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중에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곳도 있었다.
“런던과 보스턴. 참고로 런던에서는 협연을 제안해왔습니다. 피아니스트님도 잘 알고 있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말이죠. 모두 카네기홀 공연을 본 것 같았습니다.”
“정말로 디렉터님 말씀처럼 됐네요. 공연이 끝나자마자 유명 공연장에서 제안이 들어올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만큼 한서진 피아니스트님 연주가 뛰어났을 뿐이죠. 그리고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이전에 로저스 디렉터님께 들었던 내용을 내가 먼저 말해봤다.
“서두를 것은 없다. 그러니 제 뜻대로 공연을 골라도 된다. 라고 하셨죠.”
“맞습니다. 큰 공연장일수록 시간을 많이 빼앗기게 될 겁니다. 그쪽에서 요구하는 수준이 있을 테니까요. 거기에 피아니스트님은 내년에 퀸 엘리자베스를 생각하고 있잖습니까.”
로저스 디렉터님께서는 콩쿠르 전까지 공연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나를 배려해주시는 말.
하지만 나는 과도한 스케줄이 어려울 뿐, 계속해서 공연을 이어가고 싶기는 했다.
“다만, 공연을 하더라도 그 준비선 상에 있는 공연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런던은 어렵겠네요. 그쪽에선 현대곡으로 협연을 했으면 좋겠다는 언급을 했었거든요.”
30대의 젊은 지휘자.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주인인 그는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음악가였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는 현대곡이 과제로 주어지지 않기에, 지금 당장은 나하고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관련이 없게 돼버렸다.
그다음은······.
“보스턴.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죠. 카네기홀만큼은 아니지만, 공연장도 모두 전통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리사이틀 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피아니스트님이 원하는 곡을 고를 수도 있을 거고요.”
미국의 클래식 음악 역사를 돌아봤을 때, 굉장히 중요한 도시인 보스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지겠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는 한 장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조금 더 두자고 했다.
그곳에서 먼저 연락이 온다면 100% 공연을 수락하겠다고 했고.
며칠이 지난 뒤에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Schmid⌟에서 먼저 알아봐 줄 수 있겠냐고 물어봤다.
로저스 디렉터님은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싱가포르요? 그곳의 ‘에스플러네이드’가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공연장이긴 하지만, 보스턴에 비할 바는 아닌데요. 거기에다가 조금만 더 기다리다 보면 더 좋은 공연장에서 연락이 올 수도 있습니다. 아직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니까요.”
“그래도 꼭 한번 싱가포르의 공연장에 가보고 싶어서요.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그곳의 한 병원에서 자선 공연을 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본 공연이 끝난 뒤에 잠시라도 가능하다면 말이죠.”
“자선 공연은 저희 ⌜Schmid⌟ 계약과 상관없는 내용이라 괜찮긴 합니다만······.”
나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인터넷을 찾아봐도 쉽게 나오는 AC 2505 사건에 대해 간략히 말씀을 드렸다.
조금 놀라시는 로저스 디렉터님.
내 설명이 모두 끝났을 때, 로저스 디렉터님은 조금 진지하게 대답을 해주셨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한서진 피아니스트님의 영감을 찾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제 연주에 도움이 될만한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디렉터님 말씀처럼 다음 공연은 제게 어떤 영감이 되어 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없어요.”
로저스 디렉터님은 메모하던 것을 멈추고 볼펜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내 눈을 바라본다.
나 역시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봤다.
얼마간 흘러가는 시간.
로저스 디렉터님께서는 잠시 책상 위의 수첩을 바라보셨다.
나와 대화하면서 기록한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는 수첩.
그는 그 내용을 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희 ⌜Schmid⌟는 한서진 피아니스트님과 계약할 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티스트의 목표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회사니까요. 한서진 피아니스트님의 싱가포르 공연은 저희 ⌜Schmid⌟가 기획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공연이 어쩌면 좋은 흐름이 되어줄지도 모르겠네요. 유럽과 북미를 거쳐 이제는 아시아까지 피아니스트님의 무대가 이어지게 될 테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