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ary youngest son of the marquis RAW - Chapter (450)
제 451화
chapter 1
종도에서 빙궁까지의 거리는 생각 외로 가까웠다.
워낙 노아호가 빠르긴 했지만 그런 것을 감안해도 6시간 만에 도착했다는 건 분명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설산은 꽤 볼만했다.
서대륙에서는 한겨울이었지만 이곳은 초가을, 딱 그 정도였는데 높게 솟은 산이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볼만한 수준이 아니라 거의 예술 작품과도 같았다. 우리 예술가 영감님이나 스승님이 보면 꽤 좋아할 법한 그런 산.
한천빙제 유설하는 무인이기도 했지만 요리사이기도 했다.
그 빙조라는 거 누가 요리하나 싶었는데 직접 요리해 주더라.
그걸 먹으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배에서 나눈 이야기의 연장선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평화로웠다.
이게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만족스러웠다.
식사가 끝나자 거의 밤이 되었다.
시간은 오후 10시.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데 잠이 안 올 것 같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완전히 지쳐 쓰러진 게 아니면 잠을 자는 게 쉽지가 않더라. 이 불면증은 언제쯤 나아지려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유설하가 직접 배정해 준 숙소 옥상에서 밤하늘과 묘한 조화를 이루는 설산을 바라보았다.
보름달이 뜨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 스승님 생각이 난다.
같이, 저걸 봤으면 좋았을 텐데.
아련해진다. 달빛이 스승님의 얼굴이 된다. 바라보았다.
나는 한동안 쭉 그렇게 있었다.
* * *
잭이 옥상에서 궁상을 떨고 있는 동안 론은 유설하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유설하는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아까 배에서 어리버리한 모습을 보여 주던 그 남자가 맞는 걸까.
분위기는 무거웠고 표정은 싸늘했다.
살기를 내보인다거나 위협을 한다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분위기.
어디 하인이나 집사 같은 직책에 있을 법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인.
스스로를 감추는 게 매우 능숙한 무인.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면 마치 암살자.
특히 살수들이 저런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유설하는 무인이다. 세상에서 못 볼 꼴 볼 꼴 전부 겪으며 성장한 무인.
그렇기에 스스로 그어 둔 선이 있었다.
상대가 위험한 인물인가를 판별하는 그 가상의 선은 총 다섯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눈앞의 론은 계단 중에서 최하 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순식간에 계단 두 개를 뛰어 올라왔다.
머릿속의 생각과는 다르게 유설하는 부드럽게 웃었다.
“할 말이 있으시다고 하셨는데, 갑자기 분위기를 잡으시는군요.”
“그래 보입니까?”
“네. 저를 위협하시려는 건 아닐 테고 혹시 부탁하실 거라도 있으신 건가요?”
론은 조용히 유설하를 바라보았다. 묘한 침묵이 자리한다. 유설하는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내공을 끌어 올릴 준비를 했다. 준비만 했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힘을 써도 제압 정도에 그치겠지.
눈앞의 이 남자를 죽인다면 잭이라는 서쪽의 황제가 설마 가만히 있을까. 그가 움직이면 그냥 죽는 거다.
그런 유설하에게 론이 말했다.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지 마십시오.”
뜬금없는 말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폐하를 이곳으로 초대한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폐하도 모르고요.”
“그래서요?”
잠시 유설하를 바라보던 론이 작게 말했다.
“우선 경계부터 푸시지요. 그쪽을 덮칠 생각도 없고 싸움을 걸 생각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치고는 분위기가 아까랑은 많이 다르신데요?”
론이 고개를 젓는다.
“달라진 건 없습니다. 그저 앞으로 나눌 대화의 무게 때문에 다르게 보일 뿐이지요.”
“…….”
“짐작 가는 게 없으시다면 없는 채로 있으십시오. 하지만 짐작 가는 게 있으시다면 기운을 거두시고 주변 인물들을 무르시지요. 저는 저희 폐하가 편하게 쉬셨으면 하거든요.”
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설하는 론의 말에서 묘한 뉘앙스를 느꼈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내공을 끌어 올린 것은 아니었다. 전투태세를 갖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론은 지금 별궁에서 머물고 있는 잭이 그걸 눈치챘다고 말하고 있었다.
유설하는 그대로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대기하던 빙궁의 살수 몇몇이 뒤로 물러선다. 인기척이 사라졌다.
“계속해 보세요.”
“목적이 뭡니까?”
굉장히 단도직입적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빙궁에 오는 동안 그런 주제를 그 누구도 꺼내지 않았었다. 잭도 마찬가지였고 론도 마찬가지였으며 유설하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지금 수면 위로 드러난 거다. 론이 조금 부연설명을 했다.
“폐하와 저를 빙궁으로 초대한 목적.”
“……왜요? 제가 뒤에서 수작질이라도 할까 봐요?”
“엄밀히 말하면 조금 비슷합니다.”
“비슷하다?”
“앞서 말했듯 저는 폐하가 편히 쉬기를 바랍니다. 제가 힘이 있었더라면 미리 정리했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 정도의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화로 해결하려는 것이지요.”
“……대화로?”
“예. 대화. 사실 유설하 님이 폐하와 저를 빙궁으로 초대한 이유는 관심 없습니다.”
“방금 전까지는 목적이 뭐냐고 물으셨던 것 같은데 관심이 없다? 지금 하는 말씀이 매우 모순된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그제야 론은 웃었다. 희미하게 웃었다.
“폐하는 강합니다.”
“…….”
“동대륙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천마 영정, 그렇게 말씀하셨던 걸로 압니다. 맞습니까?”
“예. 천하제일인은 천마 영정이 맞아요. 이 대륙의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할걸요.”
론이 고개를 저었다.
“폐하가 이 동대륙에 있는 동안은 아닙니다.”
“……예?”
“폐하가 이 동대륙이라는 땅을 발로 밟고 있는 이 순간, 그리고 발을 떼는 그 순간까지 이 대륙의 천하제일인은 폐하입니다.”
할 말을 잃었다고 해야 할까. 당황스럽기도 했다. 무슨 자신감이지. 이건 도가 좀 지나친 거 같은데.
잠시 머뭇거렸던 유설하가 말했다.
“……모시는 사람으로서 충성하는 건 충분히 이해하는데 도가 지나치군요. 천마 영정은 강해요. 그쪽이 모시는 황제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천마 영정을 그렇게 아래로 보는 건 지나친 오만이 아닐까요?”
“그렇습니까?”
“천마의 세력과 그쪽의 세력은 많이 달라요. 론이라고 하셨죠?”
“예. 제 이름은 론입니다. 론 이그라헬.”
성은 관심 없었다.
“당신의 경지면 동대륙에서는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표현해요. 그리고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는 동대륙에 널리고 널렸죠. 천마신교는 절정 다음의 경지인 초절정에 이른 고수들이 최소 천이 넘는답니다. 그게 세력이에요.”
론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정말로 묘했다. 무언가 말하려던 유설하는 이어지는 론의 말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혹시나 했는데 천마가 목적이셨군요.”
미간이 찌푸려진다.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조금 길어졌다. 그런데 겨우 이 정도로 그걸 알아챈다고? 설마 찍은 건가?
“무슨 소리시죠?”
튕기는 유설하의 모습에 론은 웃었다. 아까까지의 무거웠던 분위기는 사라졌다.
“빙궁에서 좋은 대접 받았고, 미인을 만나서 눈이 호강했습니다. 요리는 좋았고 경치도 좋았고 분위기도 좋았습니다.”
“……예?”
“배에서 나눴던 여러 가지 정보들도 매우 유익했습니다. 폐하가 쉴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
“폐하를 장기말로 두고 쓰려 하신다면 당신은 죽을 겁니다.”
유설하는 조용히 론을 바라보았다. 그 눈을 론은 피하지 않았다.
“당신뿐만이 아니라 그 누가 되었건 죽을 겁니다.”
“경고하는 건가요?”
“예. 경고하는 겁니다. 태극검제가 죽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폐하를 이용하려고 했기 때문이죠. 장기말로 삼아 그 주인이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태극검제가 폐하께 호의를 보였건 보이지 않았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디 같은 길을 걷지는 마십시오.”
한천빙제 유설하는 잭과 론에게 빙궁으로 오라고 권유했다.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잭은 그냥 그 호의를 받았다. 거기까지다.
호의를 받는다는 것은 이용당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유설하는 분명 무언가 원하는 게 있다.
하지만 그게 뭔지 유설하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마에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론은 눈치챘다. 즉,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유설하는 잭과 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태극검제가 그냥 생각만 했다면 태극검제는 살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태극검제는 수라도제를 이간질시켰고 행동했습니다.”
“…….”
“혹여 어떤 일이 벌어질 상황을 만들었고 그 상황을 만드는 데 무언가 일조하셨다면 그 일이 벌어지기 전에 폐하께 가서 설명하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러지 않으신다면.”
“않는다면?”
“미인박명美人薄命, 하게 되실 겁니다.”
* * *
론이라는 남자와 대화를 나눈 지 약 5분이 지났다. 론은 이미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유설하는 조용히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들었다.
요리를 하는 와중에 정천맹에서 전서구가 발에 전서를 매단 채 날아왔다.
그냥 전서구도 아니었다. 특급, 일종의 영물로 불리며 정천맹에서 오직 정천맹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천조.
천조가 보내온 전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황제라 칭하는 남자를 빙궁으로 데려갔다고 하던데 역시 한천빙제답군. 최소 이틀, 그 정도만 그 남자를 빙궁에 잡아 두시게. 잡아 둔다면 내 천마의 목을 그대에게 선물로 주지. 물론 창존이 사용했던 화첨창火尖鎗도 그대에게 줄 것이야.)
엄밀히 말하면 순서가 조금 잘못되긴 했다.
잭 밀로스, 그 남자를 빙궁으로 초대한 이유는 그와 돈독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였다.
천마가 목적이라기보다는 그냥 강하니까.
강자와 연을 맺는 것은 무인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런 강자에게 조언을 받거나 가르침을 받으면 그건 더 성장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빙궁으로 초대했던 거다.
빙조를 조리하던 중에 저 전서를 받고 그때부터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혹시 이 남자와 천마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천마가 아버지의 원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설하는 천마에게 원한이 없었다. 아버지였던 과거의 창존 유운제는 무인이다.
무인이 더 강한 자와 싸웠고 그렇게 죽었다. 무인으로서 죽은 거다.
그런데 정천맹주인 염존 화천대사가 천마를 치겠다고 한다. 그 전에 정천맹을 건드린 서쪽의 황제를 적으로 선포해 정치적인 이득을 얻으려 한다.
그 외에도 아마 또 다른 꿍꿍이가 있겠지만 관심 없었다. 그냥 어울려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구나 생각했다. 사실 그냥 데리고만 있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 이상도 이하도 없었다. 딱 거기까지만 하려고 했다. 그건 무언가를 했다기보다는 그냥 방관한 거잖아. 일조하긴 했지만 뭐라 말을 듣기는 어려운 그런 수준.
정치적으로 보면 무언가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거를 유설하는 했다.
이건 유설하도 나름의 무인이면서 한 단체를 이끌고 있는 나름의 수장이었기에 내릴 수 있던 판단이다.
그런데 방금 론이라는 남자가 선을 그었다.
약간이라도 책임이 있다면, 방관이라도 했다면 그건 잭에게는 죽을죄라고.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하건대, 유설하는 잭 밀로스와 척을 지고 싶지가 않았다. 강자와 친분을 맺고 싶은 그런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조금 위험해 보였으니까.
여자로서의 감이라고 해야 할까.
속에 엄청난 화 같은 것을 삭이고 있는 그런 느낌.
그걸 건드리고 싶지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유설하는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