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prince of the Ossuary RAW novel - chapter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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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조국 (3)
크레이머가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겨울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믿어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비록 「통찰」과 「간파」는 반응하지 않았지만, 크레이머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겨울을 「기만」할 역량을 갖췄어도 이상하지 않다. 또한 대선후보의 언변과 몸짓은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참모들의 조언이 반영된 결과물일 터. 즉 크레이머가 보여준 모든 것이 겨울에게 맞춰진 연출일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다.
어쨌든, 진심이건 아니건, 크레이머는 겨울에게 깊은 호의와 풍부한 관심을 드러냈다.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지난 경험을 묻고, 농담을 건네고, 웃고 떠들면서 천천히 공원을 거닐었다. 그리하여 헤어질 즈음이 되어선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출발지점으로 돌아온 크레이머는 말고삐를 측근에게 넘기고 겨울에게 작별을 고했다.
“참 즐거웠습니다. 중령과는 말이 꽤나 잘 통하는군요.”
“저 역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겨울은 마지막으로 그와 짧은 악수를 나누었다. 예기치 못한 만남이었음에도 그럭저럭 양호하게 대처한 편이었다. 적어도 불필요한 적대감을 쌓진 않았다.
받은 제안을 곱씹어보건대, 크레이머는 겨울이 중립을 지키기만 해도 충분히 만족할 것 같았다. 이는 한편으로 온건한 형태의 경고이기도 했다. 본인은 계산이 확실한 사람이라고. 어차피 모험을 할 생각이 없었던 겨울에게는 불필요한 경고였지만.
사색은 이쯤에서 접는다. 영국 여왕을 배알할 남쪽 공터로 이동하면서, 겨울은 달리 하나 신경 쓰이는 점을 발견했다.
“앤. 외곽 경비인력에 사설 경호업체 소속이 많이 보이네요?”
“아.”
앤은 전보다 훨씬 나아진 승마실력으로 겨울과 기수를 나란히 하며 대답했다.
“네. 이 승마회가 연방정부의 공식행사는 아니니까요. 본질은 여러 망명정부를 포함한 각국 고위관계자들의 사교모임에 불과한걸요. 사고를 예방할 필요는 있지만, 주기적으로 열리는 모임에 매번 대규모의 군경을 동원하기는 어려워요. 우리 수사국만 해도 사람이 항상 모자라잖아요. 다른 부서의 사정도 대동소이한 만큼, 많은 인력을 고정적으로 낭비하기보다는 민간군사기업(PMC)과 계약하는 쪽이 효율적이죠. 비용도 각국 정부가 분담하도록 할 수 있고요.”
“그런가요…….”
“부분적으로는 자존심 문제이기도 해요.”
“자존심?”
의아해하는 겨울에게 앤이 끄덕여보였다.
“아까 크레이머가 언급했던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라예프 대통령이 대표적이죠.”
“그 사람이 왜요?”
“철저하게 자기만을 지켜주는 무장병력을 원하거든요.”
“본국에서 데려온 경호원들은 어쩌고요?”
앤은 경멸 어린 냉소를 머금었다.
“전부 다 해고했어요. 나라를 버린 독재자 입장에선 자국민 출신 경호원들보다는 차라리 생면부지의 외국인 용병들 쪽이 더 신뢰가 갈 수도 있겠죠. 최소한 고국을 잃은 원한은 없을 테니.”
“그럼 그 경호원들은 어떻게 됐는데요?”
“그런 식으로 버려지는 경호원 및 군인들을 가장 반기는 곳이 또 민간군사기업이에요. 국가정상을 호위할 정도면 대개 각자의 나라에서 최고의 경력을 쌓은 실력자들인걸요. 교육만 시키면 훌륭한 상품이죠. 주워다 팔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좋은 장사겠어요?”
이 말을 듣고, 겨울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용병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어깨에 USS라는 회사의 로고를 붙이고 있었다.
‘최고의 고객들과 거래한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유나이티드 시큐리티 서비스. 퇴역 후 영입을 조건으로 겨울에게 5천만 달러를 제시했던 바로 그 민간군사기업이다. 값을 잘 치러줄뿐더러 상품을 제공해주기까지 하는 고객. 지위가 높기까지 하니 다양한 의미로 최고의 고객들인 셈이다.
겨울이 말했다.
“그 사람들을 군으로 끌어들이면 좋을 텐데.”
무엇보다 미국 내 이해관계가 거의 없을 이들 아닌가. 얼간이들의 쿠데타가 우려되는 상황에선 꽤나 괜찮은 인적자원이었다. 앤이 쓰게 웃었다.
“그리 대단한 숫자는 아닌데다, 용병들에게 나름의 쓸모가 있으니 정부도 용인하는 거예요.”
“나름의 쓸모라면?”
“여러 가지 있네요. 우선 군의 손실을 조금이라도 축소하고 싶을 때 유용하죠. 용병 사상자는 군의 인명피해로 집계되지 않잖아요.”
“음…….”
“그리고 민병대 견제에도 효과적이에요. 반역죄가 아닌 한, 군이 시민들을 목표로 본격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할 순 없으니까요. 민병대와 용병기업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진다 한들 기본적으로는 민간인들 사이에서 발생한 사고죠. 치안당국이 비난을 받게 되더라도, 1차적인 책임은 민병대와 용병들에게 미룰 수 있어요. 대부분은 민병대의 잘못이 더 크고요.”
마지막은 실제로 많은 충돌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어조였다.
겨울이 묻는다.
“남부의 민병대들은 여전해요?”
“글쎄요.”
앤은 말에 한숨을 끼워 넣었다.
“오늘 이후로는 다소 진정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중이에요. 중대한 혐의가 확인된 17개 민병대의 거점을 급습해서 600명가량을 연행했다고 하거든요.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이네요. 수사국 내부에서는 최소 하나 이상의 반역모의를 완전히 분쇄했다고 평가하고 있어요. 곧 언론에서도 보도가 있을 예정이고요.”
“와.”
“인내가 길었죠. 괜히 들쑤셔서 경각심을 일깨우기보다는 한 번에 소탕하는 편이 효과적이니까요. 가둬둘 감옥이 부족해서 문제지만.”
그러나 앤의 표정엔 개운함이 없었다. 아직도 꺼야 할 불씨가 많은 것이다. 이 일이 더 큰 사건의 기폭제가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대화를 하다 보니 공원의 남쪽 끝에 이르기는 금방이었다. 일찍부터 야외 오찬을 준비하는 케이터링 서비스의 차량들이 보이고, 그보다 강을 향해 나아간 공터엔 많은 인파가 북적였다.
영국 여왕의 기사 서임식이 열릴 이곳에서 CIA 요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령님!”
이미 겨울과 재회한 탤벗을 제외한 세 사람, 터커, 켈리, 코왈스키는 거의 비명을 억누르는 수준으로 겨울을 반가워했다. 말에서 내린 겨울은 그들의 포옹을 받아주었다. 탤벗과 터커는 참석이 확정이지만 나머지 둘은 불투명하다더니.
마찬가지로 친밀한 인사를 나눈 앤이 다정하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이걸로 그날, 그 바다에서 함께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 모였군요. 다들 잘 지내셨습니까?”
서로를 쳐다본 셋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실소한다. 대표로서 코왈스키가 넌더리를 냈다.
“빈말으로라도 잘 지냈다고 하고 싶지만……. 아시잖아요. 정보국도 같은 처지인거.”
그리고 겨울을 향해 아쉬워했다.
“다시 뵐 땐 휴가를 받고 싶었는데, 결국은 또 임무의 일환이네요. 그나마 이것도 억지로 나온 것에 가깝지만요.”
“힘내요. 언젠간 모두에게 좋은 시절이 오겠죠.”
겨울의 대답에, 코왈스키가 겨울과 앤을 번갈아 보더니 짐짓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흐음. 보아하니 두 분께는 벌써 좋은 시절이 온 것 같은데요? 감독관님만 봐도 알겠어요. 아주 화사하게 꽃피셨네요.”
앤이 정색했다.
“하여간 정보국은 도움이 안 되는군요. 잡담은 그만두고 임무에 집중하죠. 현재 상황은?”
CIA 요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탤벗이 공터 방향을 가리켰다.
“서임식이 끝날 때까진 여유가 있습니다. 한국 대통령은 별도의 팀이 감시하는 중이고요. 저를 제외한 나머지는 놀러 온 거나 마찬가지이니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셔도 무방합니다.”
이에 코왈스키가 태블릿을 들어 보이며 항의한다.
“도청이랑 네트워크 감시 시스템을 누가 관리하는데 이래요?”
“아, 참. 그게 있었지.”
우스갯소리처럼 오가는 회화가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이들과 담소를 나누며, 겨울은 거리를 두고 서임식을 지켜보았다.
‘왜 야외에서 진행하는지 알 것 같네.’
장엄한 건물을 빌리려면 얼마든지 빌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여왕의 건재함을 효과적으로 과시하기 어려웠을 터. 90이 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왕은 본인이 직접 준마(駿馬)를 달려 건강한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복장의 근위기병 두 기가 그녀를 뒤따른다. 주홍빛으로 물들어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벚나무들은 색채가 좋은 배경이 되어주었다.
워, 워. 여유롭게 속도를 줄인 여왕은 상기된 얼굴로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은 박수와 웃음, 예의바른 환호로 영국의 군주를 환영했다. 국운이 기울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본토를 사수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의 수장이었다. 보조단상에 선 궁내장관(Lord chamberlain)이 참관자들을 향하여 여왕을 소개한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캐나다, 그 밖의 국가들 및 영토의 여왕이시며, 영연방의 지도자, 신앙의 수호자이신 엘리자베스 2세 폐하이십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궁내장관은 같은 내용을 프랑스어로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영어를 쓰지 않는 캐나다 국민 일부를 겨냥한 것이었다.
「Sa Majesté Elizabeth Deux, par la grâce de Dieu Reine du Royaume-Uni, du Canada et de ses autres royaumes et territoires, Chef du Commonwealth, Défenseur de la Foi」
취재를 나온 기자들이 연달아 플래시를 터트렸다. 기사서임식이 꽤나 드문 구경거리임에도, 겨울이 가까이에서 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다른 명예훈장 수훈자들이 작위를 받는 동안 겨울이 참관자로 앉아있으면 그림이 무척이나 이상할 것이기에.
영국 정부 입장에선 겨울을 초빙하고자 쓴 돈이 아까울 상황이지만, 따로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이것이 나름의 배려임은 아는 듯 하다.
한편 겨울은 행사의 설계가 양호하다고 생각했다. 명예훈장 수훈자들에게 작위를 하사하는 이 때 이상으로 여왕이 주목을 받을 기회는 드물지 않을까, 하고.
서임을 받을 사람 중엔 레인저 연대 소속 에머트 대령도 있었다. 엘리자베스 2세 앞으로 나아가 가볍게 목례한 그는, 다리가 짧은 의자처럼 생긴 받침대에 한쪽 무릎을 대고 여왕을 올려다보았다. 궁내부장이 그의 공적을 간략하게 알렸다.
「레이 에머트 대령. 영웅적인 헌신과 용기로서 인류 공동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기여한 공로를 기리며, 가장 훌륭한 대영제국 기사단의 명예 기사작위를 수여함.」
여왕은 예식용 검으로 대령의 양 어깨를 한 번씩 두드리고, 기사훈장을 목에 걸어주었다. 이후 일어선 대령의 손을 잡고 잠깐의 대화를 즐겼다.
터커가 겨울에게 타겟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저기, 두 번째 줄에 앉아있는 사람이 우-중-영 대통령입니다. 이걸로 보시겠습니까?”
겨울은 그가 건네는 단안 망원경을 사양했다. 보정을 받으면 맨눈으로도 모공까지 보이는 거리였다.
사전에 CIA가 제공한 정보를 접했으되 실물로는 처음 보는 우중영 대통령은, 좋은 풍채에도 불구하고 피로와 그늘이 선명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증오로 불타는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서임이 이루어질 때마다 의례적으로 박수를 쳤다. 행사 자체보다는 옆 사람과의 진지한 대화에 몰두하는 분위기.
옆에 앉은 사람은 겨울에겐 뜻밖의 구면이었다.
“잠깐. 저 남자, 유나이티드 시큐리티 서비스의 부사장 아닌가요?”
겨울이 지목한 인물을 망원경으로 살핀 터커가 그렇다고 답한다.
“예. 클리퍼드 돈 로빈슨이로군요. 중령님께선 어떻게 아십니까?”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서요. 우 대통령이 저 사람하고 무슨 관계죠?”
탤벗이 나섰다.
“어떤 걱정을 하시는지는 짐작이 갑니다만, 클리퍼드는 사람 장사를 하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한국군 출신은 고평가를 받지요. 중령님 때문이기도 하고, 중국대륙에 붙어있는 한국이 열도인 일본보다 오래 버틴 덕분이기도 합니다.”
“다른 건 없고요?”
“USS는 미국 정부와도 오랫동안 계약을 맺어온 유서 깊은 용병기업입니다. 회사 차원은 물론이고 클리퍼드 개인에게도 반역음모를 꾸밀 동기가 없지요. 물론 안팎으로 감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 코왈스키에게 부탁하시면 불륜 상대와의 비밀스러운 통화내역까지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 말에 코왈스키가 어이없어했다.
“내가 징계 받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요?”
“안 들키면 되잖아. 언제나처럼.”
“……말을 말아야지.”
겨울이 고쳐 묻는다.
“아까 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탤벗. 한국의 형편이 많이 안 좋은가요? 재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했었잖아요. 그렇다고 카라예프 대통령처럼 신뢰를 잃지도 않았을 것 같고.”
“우 대통령의 동기는 그런 노골적인 쓰레기하고 다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데요?”
“장래를 대비해, 외화획득 수단으로 애국자들을 내보낸다는 느낌이죠. 혹은 애국심만으론 더 이상 붙잡아둘 수 없는 이들에게 살 길을 마련해 주는 것이거나. 후자의 경우엔 그걸 미끼삼아 아직 남아있는 병력의 통제를 용이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잘 하면 탈출할 수 있다…….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사니까요.”
“……말이 안 돼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미간을 좁히는 겨울.
“그게 진심이라면 헛된 복수를 꾸밀 리가 없잖아요. 장병들의 앞날을 위탁한 국가를 왜 망쳐놓으려고 하겠어요. 만약 거짓이라면 미국으로 넘어온 그 군인들이야말로 요주의 대상인데, 미국에서 일할 수 있게끔 받아준 것부터가 이상하고요.”
“언제나처럼 좋은 판단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우선, 사람에겐 광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광기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요. 또한 복수의 대상이 미국이라는 국가가 아닌 대통령 개인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
“다음으로, USS가 고용한 한국인 용병들에겐 위협이 되지 못할 역할만 주어집니다. 예를 들면 동남부지역의 군경 보조라든가, 군수국의 민간수송사단(CTC) 호위 업무라든가……. 어느 쪽이든 정치적 중심지와는 거리가 멀죠.”
민간수송사단은 서부 3개주와 방역전선에 물자를 수송하는 민간인 운송기사들을 의미했다. 포트 로버츠의 보급도 그런 체계에 의지하여 유지되는 것이고.
탤벗의 말이 이어졌다.
“그들이 정말로 사고를 친다 해도 고작 트럭 몇 대를 훔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나마 무기나 탄약, 유류 등의 수송임무는 맡기지 않지요. 식량과 건설자재, 기타 보급물자 따위를 털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최악의 경우에도 인질극이나 자살적인 습격 등 국지적인 소요에 불과할 겁니다. 어떤 음모를 뿌리까지 캐내려면 감수할 만한 위험이죠.”
“그런 홀대가 오히려 말썽의 원인이 된다면?”
“신입에게는 수습기간이 있기 마련이다. 사측에선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더군요.”
즉 나중엔 처우가 달라질 거라는 약속으로 불만을 누그러뜨린다는 말이었다.
중앙정보국의 대응엔 빈틈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