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264
264화
‘괜찮아, 이건, 확실히… 우연이야.’
적어도 이온이 라민의 얼굴을 보기엔 그랬다.
정확히 하자면 이온은 라민 솔로스트 무엘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다만 이온 이올데카가 보기에 눈 앞의 요원이 유능하고 대단한 사람인 것은 확실하지만, 첩보국 요원이라기엔 미묘하게 부족해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딱히 사람을 속이려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첩보국에서 심문을 할 때 조차도 그랬다. 특히나 다른 요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와 라민과 이야기를 나눌 때의 온도 차이는 컸다.
물론 그 점이 이 사람의 강점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온이 보기에, 라민은 정말로 놀란 것 같았다.
이온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오라즌은 거대한 도시지만 이온은 오라즌에 충분히 오래 살았다.
이온은 오와델역 부근에 살지도 않고 동선이 겹치는 부분도 없기 때문에 라민이 놀란 것이지만, 이온은 본인이 오와델역에 올만한 근거를 충분히 찾을 수 있었다.
‘…좋아, 할 수 있어.’
이온이 변명했다.
“오와델 도서관에 들렸다가 우주국으로 가는 중이네요. 끝낼 일이 있어서.”
“아, 그렇군요. 주말인데도요.”
이온은 라민이 더 캐묻기 전에 역으로 질문했다.
“요원 님은 왜 이 전철에…?”
“저도 일 때문이죠. 주말이지만.”
“사르쵸 의장 때문인가요?”
“아무래도 그렇죠. 지금 세계에서 제일 주목 받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다보니 제국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기관이 동원 되는 거죠. 첩보국도 예외는 아니고요.”
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방심할 수는 없지만, 라민은 정말로 그냥 전철을 타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제국항공우주국으로 간다고 했으니 꼼짝없이 같이 타고 가야한다는 건데….’
자신이 현실의 힘이라고 말한 준야라는 사람이 말한대로 전철에 가방을 들고 올라타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이상의 일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른다. 분명 전철역에 서 있을 때와 같이 누군가 접근해서 무엇을 하려고 할테지만, 상대가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에게 접근했다가는 라민에게 들통이 날지도 몰랐다.
이온은 라민에게서 어떻게해야 벗어날 수 있을 것인지 잠깐 고민하던 중, 라민이 말했다.
“참, 그렇지 않아도 이온 씨를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언제든지 찾아가겠습니다.”
“아뇨, 현실의 힘과 관련해서 참고인 조사는 거진 끝났으니까요. 좀더 개인적인 직무 목적이 있는데.”
“이상한 말이네요. 개인적인 직무 목적.”
라민이 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저희 처음에 봤을 때 하고 계시던 연구가 있잖아요?”
“달 중력 문제요? 달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더 무거울 가능성 말이죠? 연구라기엔 좀 그렇죠. 그냥 취미 수준의 글이었고. 제가 자료를 좀더 찾아봤더니 제가 찾은 자료들이 미흡하더라고요.”
“그래요?”
라민은 한쪽 눈을 찡그리곤 말했다.
“명백한 증거는 없지만 몇 가지 정황이 있어서요.”
“말씀하시죠.”
“제국항공우주국 내부에 현실의 힘에 소속된 요정이 많았다는 이야긴 했었죠? 중요한 건 왜 그런 사람들이 더 가치 있는 기관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그곳에 있냐는 거죠.”
“그 이야긴 저번에도 하셨던 것 같은데, 제 의견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세속주의자들은, 신 대신 과학을 택한 거죠. 그러니 그 비율이 높다고해서 이상한 건 아니라고 보는데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이해해볼 수도 있죠. ‘세상은 신들의 놀이판에 불과하다’는 말에 대해 아세요?”
이온은 알고 있었다.
세속주의자들이 자주 하는 말 중 하나로, 정확히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신들이 주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인 *승리*라는 개념이, 놀이판에서의 승리와 다를 게 무어냐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이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민이 말했다.
“중요한 건 요정들이 세속주의자라고 해도, 사실은 악신을 따르는 종족이란 말이죠. 종교적인 설파가 없다고 하더라도 악신과 만신전은 대립항에 있고요. 그러니 요정들의 어떤 의도들은 분명 만신전에 대립하게 만들어져 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죠.”
“제국의 과학을 발전시키는 게 악신에게 도움이 된다고요? 악신들이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다면, 검은 교단에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물론 검은 교단은 저 심해 깊은 곳에서 핵폭탄이나 두들겨 맞고 있지만.”
라민이 가로저었다.
“요정들이 과학을 발전시킨다고는 말하지 않았는데요.”
“그럼요?”
라민이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거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리에 있다면, 중요한 연구를 무산시키거나 가치 없는 방향으로 이끌고 갈 수도 있겠죠. 제국항공우주국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장소고, 우주국 내부에 자리를 잡은 요정들도 그럴만큼의 지위가 있었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이온이 황급하게 말했다.
“그분들은 모두 자신의 연구에 최선이었는데요?”
“겉보기에는 뭐든 그럴 수 있지 않나요?”
“저는 그분들의 연구도 직접 봤다고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온은 라민이 자신에게 제대로 된 공부도 해본적 없으면서 알아볼 눈은 있느냐 되물어오면 딱히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라민은 그렇게 공격하진 않았다.
“글쎄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연구가 제국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죠.”
이온이 라민의 말을 정리했다.
“요정들이 태업을 했다는 말이군요?”
“네.”
“…그 말이 다 맞는 가정이라고 하더라도 문제가 있지 않나요? 그런 태업이 부분적으로 일어났을지도 모르지만, 그걸 증명하긴 정말로 힘들텐데요. 그저 다들 각자 이 연구보단 자기 연구가 가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하면, 문외한들은 그걸 믿는 수 밖에 없죠.”
“그래서 제가 질문을 드렸던 건데요.”
“네?”
라민이 이온에게 말했다.
“이온 씨가 하셨던 달 중력 연구요. 리데 씨가 그걸 방해하기 위해서 이온 씨에게 접근했다고 하면요?”
이온은 묘한 적막감을 감지했다.
전철 내부는 처음부터 조용했지만, 그것을 인식한 것은 라민 때문이었다. 조금 어지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라민이 계속 말했다.
“리데 씨와 만난 이후, 실제로 그 연구는 거의 진척이 없었잖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 좋은 연구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이온 씨가 연구를 보는 눈과 그 분야에 더 오래 있었던 학자들이 보는 눈은 다를테니까요. 애초에 이온 씨는 암습을 당하기도 했었죠. 그 이유는 아직까지 모르지만, 그냥 이온 씨가 연구를 그만두게 할 목적이었다면 그걸로 충분히 설명이 되거든요. 게다가 리데 씨가 소개해줬다는 그 고천문학자는 현실의 힘 소속은 아니지만 그리 평판이 좋지는 않아요. 졸속 연구가 많아서 학계의 외톨이죠. 그냥 교수 지위를 유지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고. …듣고 계세요?”
이온이 고개를 들었다.
“아, 네.”
“사실 이온 씨 입장에서 별로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겠죠.”
“그렇긴한데… 저, 그게…”
“저도 의심의 영역에 머물러 있고 마땅히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에요. 증명이 되려면 이온 씨가 열심히 연구를 해서 결과를 증명해내야겠죠. 그게 제국에게 도움이 되는 연구이기 때문에 악신과 요정들이 막으려 했다고.”
이온이 한숨을 쉰 뒤 말했다.
“하나만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네?”
“리데는 괜찮나요?”
라민의 눈동자가 위쪽을 향해 빙글 돌았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할 말을 고르는듯 싶었다. 때문에 이온은 마음이 가라앉았지만, 라민이 입에서 내놓은 말은 기대한 것보다는 좋았다.
“솔직히 말해서 현실의 힘에 소속된 요정들 모두가 비협조적이긴 합니다. 그래서 많은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있죠. 수사는 더 오래 지속 될 것 같아요. …하지만 이 말에서 위안을 얻으실 수도 있죠.”
“위안이요?”
“그 이상으로 압박을 하긴 힘들다는 거죠. 세상은 유기적이거든요. 현실의 힘, 심지어 세속주의자보다 더한 사람이더라도, 사람이 갖춰야하는 기본적인 권리가 있고, 그 어느 곳에서도 지켜져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어요.”
“첩보국은 그런 논리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라민이 눈으로 웃었다.
“하지만 만신전 보다는 아래에 있죠.”
“신들이 그렇게 하길 바란다고요?”
“네. 아직 혼란한 세상이지만 몇 십년 전처럼 나쁘진 않아요. 그만한 적이 없다면, 그만큼 관대해질 수 있는 거죠.”
이온은 감정을 드러내는데 솔직한 것이 라민의 약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리데가 정말로 자신을 속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보여준 라민의 말과 태도는 진짜였다.
준야라고 자신을 밝힌 현실의 힘에 속한 인물은 요정들에게 큰 위기가 찾아온 것처럼 말했지만, 그게 진짜가 아닐지도 몰랐다.
이온이 말했다.
“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이온은 자신에게 쪽지를 쥐어준 노인과 쪽지에서 자신을 준야라고 밝힌 사람, 그리고 이번 전철을 타게 된 경위와 손에 쥐고 있는 가방에 대해서 모두 밝혔다.
라민은 정말로 몰랐던 것 같았다.
“으아, 잠시만요, 이럴 때 어떻게 해야되더라?”
“…상급자랑 이야기를 해야되나요? 아니면 가방을 먼저 확인하거나?”
“아, 그렇죠.”
그렇게 말한 라민이 손으로 전철 안에 타고 있던 엘프 하나를 가리켰다.
이쪽을 힐끔거리던 엘프는 그대로 나자빠졌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마법?”
“비슷한 거죠.”
라민이 손짓하자 엘프가 그대로 바닥에 질질 끌려왔다. 보이지 않는 손이 멱살을 쥐고 당기는듯 싶었다.
“이 사람이 왜 이온 씨를 미행하고 있는지 궁금했었거든요.”
엘프는 황급히 주머니로 손을 넣는가 싶었는데, 권총이 튀어나왔다. 라민과 이온을 제외한 사람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
하지만 첫 번째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권총은 엘프의 손에서 벗어나 핑그르르 돌더니 라민의 손으로 들어갔다. 라민은 권총을 보지도 않고 그대로 슬라이드를 해체해서 부품을 털어내고 바닥에 내던졌다.
라민이 엘프의 가슴께를 밟고 말했다.
“너 뭐야?”
엘프가 씩 웃었다.
“이미 늦었다. 그 폭탄을 처리할 순 없을 거다.”
라민과 이온의 시선이 맞부닥치고, 이온의 손에 들린 가방으로 향했다.
“포, 폭탄?!”
엘프가 계속 말했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첩보국에다가 무슨 말이든 다 털어놓을 거라고.”
라민은 엘프를 놔두고 가방에 귀를 가져다대기도하고 돌아보며 유심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이온이 황급히 라민에게 주려고 하자 라민이 가로저었다.
“쥐고 계세요. 놓으면 터지는 방식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내부에 시계가 있는 것 같군요.”
“다음 역에서 내리면…”
말을 하던 이온은 혀를 찼다. 열차는 급행이었다. 당분간은 서지 않는다.
라민이 담담히 말했다.
“목표는 중앙 공원이겠군요.”
“오늘 사르쵸 의장이 연설하는 거기요?”
“지금 한창 하고 있겠죠. 물론 중앙 공원을 지나치긴해도 거리가 머니까, 직접적인 피해를 주긴 힘들 겁니다.”
“아니, 현실의 힘이 왜 사르쵸 의장을…”
“대외적으로 현실의 힘이 이 정도까지 일을 저지를 거라고 알려져 있지 않으니, 사르쵸 의장의 암살이나 암살 시도는 만신전의 광적인 교도들이 했다고 몰아갈 수 있을테니까요. 그리고 사르쵸는 사실 현실의 힘과 밀접한 관계도 아니에요. 죽어준다면 오히려 고맙겠죠.”
엘프가 바닥에 누워서 큭큭 웃었다.
“잘 알고 있군. 하지만 이 열차는 이미 장악 당했다. 너희는 이 전철에서 내릴 수도 없고… 켁!”
라민이 가볍게 튕긴 순간 엘프가 그대로 혀를 빼물고 기절했다.
이온은 자그마한 스파크가 엘프 머리에서 튄 걸 보았다.
“말 많네, 정말.”
자신을 미행하던 엘프가 자빠져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상황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이온이 라민에게 말했다.
“이, 이럴 때는 어떻게하죠?”
“뭘 어떻게 해요? 전철이 장악 당했으면 다음 역에서 멈추지도 않을테고, 손잡이를 놓으면 가방이 터질 수 있으니 밖으로 내던지지도 못하죠. 물론 이온 씨를 통째로 집어던지는 방법이 있지만, 겁을 먹은 이온 씨가 가방을 놓을 수도 있고요.”
“마, 마음을 다잡아볼까요?”
“자기가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진다, 좋은 태도에요. 하지만 중앙 공원까지 가는 길은 모두 빌딩이죠. 어떻게 하든 피해는 일어나요.”
이온은 라민이 당장 창문을 깨고 자신을 들어 내던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안심했지만 의문이 남았다.
“그럼 어떻게 하죠?”
라민이 말했다.
“이럴 때는… 기도 밖에 없죠?”
그러면서 정말로 라민이 두 손을 잡고 눈을 감자, 이온은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로 가방을 손에서 놓을 뻔했다.
하지만 이온은 과거에 비해서 세속주의자들이 늘어난 이유에 대해서 정확히 몰랐다.
세속주의자들이 늘어난 것은 그저 제국이 부양해야하는 인구의 숫자가 너무 많고, 때문에 신들이 일으키는 기적이 너무 적게 관측되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은 언제나 만신전의 시선 아래 놓여 있었다.
“…!”
불가능한 광풍이 전철 내부의 한 점에서 휘몰아치더니, 이온의 몸이 그대로 전철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