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nly Warlock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237
237화
‘말도 안 돼.’
중년의 왕을 상상하고 있었던 윤준휘는 당혹스러웠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동년배는커녕 윤준휘와 별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저 청년이 왕이라니.
주변에서 단체로 짜고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아버지의 반응을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진짜 왕이 아니라면 저리 식은땀을 줄줄 흘리실 리가 없으니까.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이 세계에 아버지 세대가 넘어온 지 어느덧 20년.
수많은 장비와 수많은 마법이 새로 발견되었고, 선주 종족의 지혜가 전해졌다.
어지간한 기적이라면 나올 만큼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하지만 그 모든 기적 중에서도 회춘하는 기적만큼은 없었다.
그런데 저리 젊은 얼굴이라니.
‘흑마법사의 스킬인가? 아니면 국민들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구나.”
왕의 시선이 윤준휘에게 향했다.
그제야 윤준휘는 자신만 슬쩍 고개를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죄, 죄송합니다!”
“됐다. 왕 얼굴이 궁금하긴 하겠지. 어지간해서는 못 보는 얼굴이니까 말이야. 이참에 잘 봐둬라.”
어차피 내일 연회에서는 실컷 보겠지만.
본인의 실없는 농담이 만족스러운지 왕은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윤준휘는 환상이 살짝 깨지는 걸 느꼈다.
‘이 사람이 우리들의 왕?’
흑룡의 왕, 김종민에 대해서는 참 많은 소문을 들었다.
유일무이한 흑마법사, 가장 높은 레벨을 보유한 인간, 군대를 홀로 전멸시키고 다시 군대를 일으키는 자.
무엇 하나 경외감을 일으키지 않는 게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단순한 소문일 뿐.
정작 왕이 앞에 나서서 무언가 하는 걸 본 적은 없었다.
윤준휘가 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정복 활동조차 삼공작에게 맡긴 채 반쯤 물러나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 업적만큼은 너무도 화려해서 대체 어떤 사람일지 너무도 궁금했건만.
‘가볍다.’
젊은 얼굴도 그렇고, 무게감 없는 말투도 그렇고 관록이랄 게 느껴지질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실망했을 정도였다.
피식거리며 웃던 왕은 이내 실수했다는 듯 턱을 주물럭거렸다.
“거참, 창우가 무게감을 가지라고 했는데 조금만 방심하면 옛날 말투가 튀어나오네. 네가 보기에도 볼썽사납지 않냐?”
“누가 감히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윤준휘 대신 대답한 건 옆에 있던 아버지, 윤도준이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웃는 얼굴이었던 왕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윤준휘가 당황하고 있자 잠시 후 왕의 입이 열렸다.
“주제 파악은 되는 모양이군.”
“….”
“네놈이 빠져서 20년 전 공성전이 어그러졌던 거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다리 한쪽을 잘라버리고 싶다만… 호찬이의 부탁이니 이번만큼은 용서해주마. 다음은 없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쿵쿵 소리가 나도록 윤도준이 바닥에 머리를 찍었다.
격한 아버지의 행동에 윤준휘조차 깜짝 놀랐으나 왕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따위 퍼포먼스로는 이빨도 안 먹힌다는 표정이었다.
“뭐, 호찬이 조카 얼굴이나 보러 온 거니 이쯤 하지. 특실에서 푹 쉬고 내일 만나자고. 이번에도 슬쩍 빠졌다간 가만 안 둔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너도 주인한테 빌붙어서 갑질하지 마라. 배경 든든하다고 같잖게 행동하면 내가 직접 목을 날려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예, 예! 폐하! 뼈에 새기겠습니다!”
“알았으면 됐다. 난 이만 갈 테니 하던 거 해라.”
왕은 갑자기 등장한 것만큼이나 갑자기 떠나갔다.
휘적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점차 멀어졌으나 고개를 드는 사람은 누구 하나 없었다.
인기척이 사라진 후 한참이 더 지나고 나서야 하나둘씩 가슴을 쓸며 일어섰다.
유일하게 주변의 공포에 공감할 수 없었던 윤준휘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방금 전에는….”
“쉿. 가서 얘기하자.”
윤도준은 아들의 말을 막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지금 여기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느껴졌다.
심지어 윤도준만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녀는 말없이 윤도준이 내준 번호표를 받은 후 객실을 안내한 후 조용히 떠나갔다.
인사말조차 생략한 행동은 무례할 정도였으나 정작 그에 대해 윤도준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폐하를 직접 눈으로 본 소감이 어떠냐?”
특실에 들어온 후 내부의 화려함에 감탄할 틈조차 없이 질문이 날아왔다.
윤준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조금 실망했습니다. 얼굴이 젊다는 건 신기한 일이지만, 말투조차 관록이 느껴지시질 않는군요.”
“무서운 분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니?”
“글쎄요.”
절대자인 왕이 화를 내면 무섭기야 하겠지.
그런데 그게 권력에 대한 무서움이지 인간에 대한 무서움은 아니지 않나.
개인이 무섭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애매했다.
그 대답에 윤도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기야 너는 폐하에 대해 잘 모르겠구나. 이번에 데려오길 잘했는지도 모르겠어.”
“무슨 뜻이세요?”
“내일이면 알게 될 거다.”
윤준휘는 아버지의 의미심장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그에 집중한 나머지 아버지의 말투에서 바뀐 점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둘만 있을 때는 항상 그를 ‘왕’이라 부르던 아버지가 어느새 ‘폐하’라는 존칭으로 바뀌어 있었다는 것을.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아무도 듣지 않을 장소에서조차 말을 조심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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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성웅성
“세상에.”
연회 당일, 궁전 내부에 있는 거대한 홀 한중간에서 윤준휘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소라면 얼굴도 못 볼 거물들이 사방에 우글거리고 있었다.
삼공작 중 한 사람이자 삼촌인 윤호찬은 말할 것도 없다.
같은 삼공작인 박상구와 민재윤, 그리고 재상 서창우.
백화, 푸른 매, 창천, 아일랜드를 포함한 주변국들의 지도자들과 그 직속 경호대.
여기에 더해 최근 이름을 날리고 있는 동년배의 신성들까지.
“엄청나군요.”
“그래. 큰일 날 뻔했구나.”
“예?”
“조금만 늦었어도 저기에 합류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호찬이 말을 들은 게 천만다행이야.”
윤도준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작 아들인 윤준휘는 그 반응에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출세를 원하긴 했다만 정말 아버지께서는 자신이 저기 낄 수 있다고 믿으시는 걸까?
“낄 수 있을 거다.”
마치 아들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윤도준이 말했다.
“호찬이가 널 밀어준다는 소리는 소소한 지원만 해주고 끝낸다는 소리가 아니야. 분명 암암리에 폐하의 입김도 들어갈 거다. 그러니 저놈들에게 고개 숙일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아, 그렇군요.”
윤준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왜 이리 다들 폐하를 무서워하는 걸까.
그야 화를 낼 때는 잔혹해지는 것 같았고 그만한 일을 저지를 힘도 있다.
하지만 어째선지 다들 ‘왕의 분노’ 보다는 ‘왕 자리에 있는 그의 분노’를 더 신경 쓰는 느낌이었다.
추측이지만 왕이 왕 자리에서 내려오더라도 사람들의 반응은 바뀌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윤도준이 막 생각났다는 것처럼 말했다.
“참, 가능하면 옥좌 주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라. 무슨 불똥이 튈지 모르니까.”
“불똥이라니요? 그게 무슨….”
덜컹
윤준휘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옥좌 뒤쪽에 있는 후문이 열렸다.
한참 떠들던 사람들은 일제히 멈추고 들어오는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림자의 윤곽이 빛 아래에 드러난 순간, 연회장 전체를 울리는 우렁찬 음성이 퍼져나갔다.
“흑룡의 지배자이시자 왕국의 정당한 주인이신 폐하를 뵙나이다!”
윤준휘 역시 어제 연습한 예법대로 바닥에 엎드렸다.
왕은 인사를 받았음에도 아무 말 없이 터벅터벅 안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풀썩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앉고 나서야 왕의 입이 열렸다.
“일어서도록.”
“예, 폐하!”
엎드렸던 이들이 일제히 일어나자 왕의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났다.
꼭 인간이 귀여운 토끼를 보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가능하면 조금 더 연회를 즐기라 하고 싶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게 되었군. 내가 너무 일찍 왔나?”
“….”
“뭐, 너무 늦어서 긴장시키는 것보단 일찍 오는 게 낫겠지.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고 하니.”
어제처럼 시답잖은 농담을 하던 황제가 한쪽을 바라봤다.
주변국의 지도자들이 있는 장소였다.
“너희들도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예, 잘 지냈습니다.”
“대답이 살짝 늦는 게 신경 쓰이지만, 딴지는 안 걸지. 그나저나 오랜만에 봤는데 선물은 없고?”
“예? 아니, 그게…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농담이니 겁먹지 마라. 내가 선물 안 준다고 처형시킬 사람도 아니고.”
하하하.
왕의 메마른 웃음에 다들 마른침을 삼켰다.
뱅뱅 돌리는 왕의 말투에 답답해진 윤준휘는 슬쩍 시선을 들어 주변을 살펴봤다.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셋으로 갈려 있었다.
하나는 어제 아버지가 보여준 것처럼 공포에 떠는 기성세대.
그리고 윤준휘와 같이 왕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것인지 당황하는 신세대.
마지막으로 뭔가 이를 악문 채 분노를 삼키는 듯한 소수의 몇몇 그룹.
‘…뭔가 이상한데?’
다른 사람들은 둘째치고 마지막에 속하는 이들이 유난히 한쪽에 몰려 있었다.
게다가 슬금슬금 움직이는 게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치를 기세였다.
수상 쩍인 움직임에 윤준휘는 저걸 알려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기껏 알렸는데 자신의 착각이라면 망신 수준으로 안 끝날 게 확실했기에.
“이왕 이리된 거 본론만 빨리 말하고 연회를 계속하지. 그래야 다들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
윤준휘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왕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는 곧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을 풀어놨다.
“대륙 너머에 새로운 세력이 발견되었다.”
“…!”
“벌써 8년이 지났나? 긴 공백이었지. 우리의 정복은 멈췄고, 신천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메인 퀘스트는 그날 이후 본 적도 없고 말이야. 하지만 이제 그 기나긴 공백도 끝났다.”
왕은 다리를 꼰 채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복을 개시하겠다.”
“….”
“더 높은 레벨, 더 대단한 아이템, 그리고 우리들이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다른 것들이 다시 펼쳐지겠지. 참으로 기쁜 일이야. 너희들도 그렇지 않나?”
“폐하의 말씀대로입니다!”
“흑룡 만세! 폐하 만세!”
연회장에 모인 대다수의 흑룡 출신 개척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렸다.
보여주기식 호응이 아니라 진심으로 흥분한 게 느껴지는 음색이었다.
사실 윤준휘 역시 그들과 같은 기분이었다.
미지의 세상, 새로운 전쟁이라면 후발 주자인 윤준휘에게도 공을 세울 기회가 올 테니까.
다만 전혀 호응하지 못한 채 얼굴을 구기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흑룡의 주변국에서 찾아온 지도자와 그 휘하의 개척자들이었다.
왕은 호응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다 주변국 쪽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그런데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더군. 지금껏 우리의 우호국들과 많은 교류를 나누었지만, 본토에서 병력을 빼냈을 때 뒤통수를 맞는 게 아닐까? 만에 하나라도 배반을 당하는 건 아닐까?”
노골적인 왕의 말에 주변국에서 온 지도자들이 얼어붙었다.
그중 유일하게 굳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 푸른 매의 지도자 뿐이었다.
“감히 누가 흑룡을 배반하겠습니까? 그런 배신자는 굳이 폐하께서 나서실 필요도 없이 제가 직접 처리하지요.”
“여전히 든든하군. 흑룡의 최우방다워. 다른 놈들은 못 믿어도 푸른 매는 믿을 수 있지.”
다른 국가들은 왕과 푸른 매의 지도자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눈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푸른 매는 다른 국가들과 달리 대놓고 흑룡의 제후국을 자처했었지.
그 덕에 많은 간섭을 받긴 하지만, 그보다 많은 지원을 등에 업고 주변국들 사이에서 골목 대장 노릇을 한다고 하던가.
왕이 대놓고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망한지 보여주기 위해’ 숨통을 붙여준 백화와 전혀 다른 처지였다.
“하지만 내가 푸른 매는 믿어도 다른 국가는 약간… 그렇단 말이지. 이게 다 믿음을 못 준 탓 아니겠는가. 평소에 더 진심을 보여줬다면 믿었을 텐데.”
“…어떻게 하면 폐하께 믿음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백화의 지도자가 말라붙은 음성으로 말했다.
작작 좀 비꼬고 본론을 말하라는 타박이 느껴졌다.
왕은 그제야 놀리던 걸 그만두고 원하는 바를 꺼냈다.
“별 것 아니야. 기아스 스크롤에 사인 좀 해주면 된다.”
“기아스 스크롤?”
“마법적인 계약서지. 시스템의 검증을 받은 후 양측이 사인하면 계약 내용을 파기한 순간 막대한 대가를 치르는 계약서. 그러고 보니 백화는 나랑 한 번 작성해서 잘 알겠군. 그때 실수로 파기해서 수도를 바쳤지, 아마?”
“과거의 일은 됐습니다. 내용을 말씀해주십시오.”
백화의 지도자가 이를 악물고 왕을 노려봤다.
왕은 계약서로 종이비행기를 접어 그들에게 날렸다.
지도자들은 얼굴을 구기며 발치에 날아온 종이비행기를 폈다.
그리고 이내 안에 적힌 내용을 보고 기겁했다.
“흑룡이 원할 때까지 해당 세력 소속원 간 완전불가침 조약!? 어기는 순간 강제 병합이라고!?”
“이게 뭔… 농담하시는 겁니까!?”
“아니, 진심으로 하는 소린데.”
왕과 지도자들의 대화에 윤준휘는 혀를 내둘렀다.
불가침 조약이 드문 건 아니지만, 흑룡이 원할 때까지란 조건이 악질이었다.
공격당하고 싶지 않을 때는 유지하다가 침공 준비가 완료된 순간 계약을 종료해버리면 그만이니까.
“혹시나 해서 말해주는 건데, 사인 안 하겠다면 나로서는 후방을 안정시키고 갈 수밖에 없어. 무슨 뜻인지 알겠지?”
한마디로 버티면 그냥 너희부터 정복해버린다는 소리였다.
왕의 협박에 지도자들은 일제히 굳어졌고, 푸른 매의 지도자만이 바로 사인을 마친 후 공손히 내밀었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당연히 써드려야죠. 여기 있습니다.”
“고맙군. 푸른 매와 흑룡의 우호는 앞으로도 영원할 거야.”
왕은 시종을 통해 웃으며 계약서를 받고는 다른 지도자들을 바라봤다.
“너희들은 어쩔래? 거부할 권리는 있으니 좋아하는 쪽을 선택해라. 거부해도 여기서는 보내주마.”
“폐하,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하지 않습니까? 최소한 계약 내용을 조정할 시간이라도….”
“이 양아치 새끼. 진짜 선을 모르고 미친놈처럼 날뛰는구나.”
누군가의 걸쭉한 욕설에 연회장이 얼어붙었다.
앞서서 불만을 제기하던 백화의 지도자마저 낯빛이 새하얗게 바뀔 지경이었다.
모두의 고개가 돌아간 쪽에는 ‘창천’ 세력의 지도자가 있었다.
근육질의 중년 남성은 살기를 줄줄 내뿜으며 왕을 노려봤다.
“우리가 네 노예인 줄 아냐? 이전 세계에서는 밑바닥이었던 놈이 여기서 힘 좀 얻었다고 천지 분간을 못하는구만. 네가 뭐라도 된 것 같냐?”
“뭐라도 된 게 아니고 되었지. 내가 앉아있을 때 너는 내 앞에서 서 있으니까. 아까 절하는 솜씨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고.”
심장이 멈출 수준의 원색적인 비난에도 왕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그 와중 반대로 비꼬기까지 하자 창천의 지도자는 시뻘겋게 물든 얼굴로 이를 갈았다.
“그래, 그 착각이 오늘 널 죽이는 거다. 죽어서 저승사자 만나면 이렇게 대답해라. 무적인 줄 알고 병신처럼 굴다가 뒤졌다고 말이야.”
“서론은 그만하고 몸이나 움직여라. 뭘 준비했는지나 보게.”
대놓고 암살을 예고하는 데도 왕은 꿈쩍하지 않았다.
심지어 주변에 있던 삼공작을 포함한 경비 병력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재롱을 피우나 구경 좀 하자는 태도는 분명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창천의 지도자는 그 모습에 입매를 뒤틀었다.
“이걸 준비했지.”
푸욱
“컥!”
“폐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왕의 가슴팍에 구멍이 3개 뚫렸다.
잠시 후, 허공에서 물감이 풀리는 것처럼 누군가 옥좌 근처에서 나타났다.
셋 다 몸을 숨긴 채 창을 들고 왕을 찌른 것이다.
그 모습에 사방에서 비명이 울리고 창천의 지도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새끼, 꼴 좋다! 죽기 전에 좋은 구경하고 가네!”
애초에 살아나갈 생각은 없었다는 듯 창천의 지도자는 가만히 선 채 웃기만 했다.
암살자 세 명도 지도자와 비슷한 심정인지 도망가지 않고 창을 더욱 깊게 쑤셨다.
갈 땐 가더라도 왕은 길동무로 데려가야겠다는 듯.
너무 충격적인 광경에 윤준휘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순간이었다.
“싯팔… 하여간 주인 새끼… 맨날 이런 일에만 써먹고….”
“…?”
갑자기 왕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아까 전과 달리 교활하면서도 날카로움이 느껴지는 음색.
동시에, 다른 방향에서 지금껏 들었던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고했다.”
후우욱
“꺼어어어어억!?”
옥좌 아래쪽에서 드러난 그림자는 싱긋 웃으며 암살자 셋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암살자들의 몸에서 무언가가 맹렬히 빨려들어갔다.
잠시 후, 암살자들의 볼이 홀쭉해지며 미라처럼 오그라들었다.
30초도 되지 않아 바싹 몸이 말라붙은 암살자들은 일제히 먼지가 되어 그 자리에서 옷만 남기고 무너졌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모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무렵, 왕이 소리쳤다.
“임프, 역시 넌 최고의 미끼야! 20년이 지나도 너만한 놈이 없다니까! 네 주인으로서 자랑스럽다!”
“주인… 이 개새끼야….”
지금껏 왕의 모습을 하고 있던 붉은 피부의 소악마는, 한줄기 눈물을 흘리며 풀썩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