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layer who hides his past RAW novel - Chapter 531
◈ 531화. 대리자들 (3)
이거, 의외로…….
“들을 만했잖아.”
어쩌면 나 적성을 뒤늦게 찾은 걸지도?
“막 속이 다 시원해지는 게.”
……진짜, 지금이라도 마법이란 걸 배워 봐?
왜, 마법은 스킬이 아니라고 했었으니까.
단순무식한 광전사라고 해도 하나쯤은 배울 수 있는 거잖아?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레오니.
그녀를 현실로 끌어내린 건.
나란히 걷고 있던 제시였다.
“저런 증명은 처음이었어요.”
“엥? 처음이라고?”
마티스 딘 카를이라고 했었나?
그 양반, 처음치고는 너무 자연스러워 보이던데.
일단, 좌중을 압도하는 여유.
그 느낌이 장난이 아니더만?
“그만큼 화가 나셨던 거겠죠.”
“화가 났다라, 뭐야 그런 거였어?”
내가 그 인간 성격까진 모르겠지만.
취재진을 향한 마티스의 반응은 잔뜩 날이 서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쨌든, 효과는 대단했지. 그렇게 많은 카메라와 취재진이 마탑, 크리스탈 홀에 진입했었건만.
드륵.
“어떻게 된 게 기사 한 줄이 안 났지?”
믿기질 않아서.
연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레오니.
그런 레오니를 바라보며 고깔모자 속 탑주는 말했다.
-진정 몰랐던 모양이구나, 너희의 세계는.
머리가 있다면 능히 생각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몇 번. 아니, 몇십 번씩이나 이 수석에게 구원받았던 모험가들의 세계였다. 그렇다면 이 수석의 변심으로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멸망할 수 있다는 뜻이었거늘.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저러는 줄 알았는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 내가 무지함에 안도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그런 의미에서 마티스 선임, 그대는 친절하군.
청중에 수준에 맞춰서 증명을 진행할 줄도 알고.
내가 탑주였다면 당장 원로 마법사로 추대.
곁에 두고는, 두고두고 부려 먹었을…….
제시가 고깔모자의 말을 끊고 말했다.
“그럼에도 지켜봐야 해요.”
“또 지켜보라고? 아무리 그래도 연강은 쫌…….”
“이번 증명으로 다들 깨닫게 된 게 맞는지를요.”
“……아, 그 얘기였어?”
제시의 말에 탑주는 흠칫했다.
-제시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멍청할 리가…….
있겠느냐.
말하려고 했는데.
기억을 되짚어보니 정말 있던 것 같았다.
제시가 탑주의 기억을 되살려준다.
“레오니 씨는 알고 계시나요? 록스가 샤이닝을 탈퇴한 이후, 샤이닝의 길드 하우스가 몇 차례나 습격을 받았는지요.”
“글쎄다, 기사가 안 떠서.”
도도독.
재빠르게 검색해 봤지만, 샤이닝 관련 기사는 갱신되지 않았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록스를 비롯한 길드원 상당수가 이탈한 샤이닝은 언론에 오르내리지도 못할 정도로. 랭커 그룹에서 뒤처지게 됐다는 것.
레오니가 눈치껏 대꾸했다.
“카밀라가 널 따라다니지 않는 걸 봐선……. 계속해서 습격을 받고 있는 것 같은데? 한 다섯 번 정도? 아니, 일곱 번?”
제시가 다른 단위를 제시했다.
“아뇨, 벌써 일백 번을 넘어섰습니다.”
“뭐, 뭐라고? 백 번이 넘어?!”
잠깐만.
그 말은 제주도가 파이몬의 저주로 불타고 있던 순간에도. 말 그대로 인류가 멸망할 뻔한 순간에도. 플레이어란 새끼들은 샤이닝의 길드 하우스에 군침을 흘리고 습격을 진행했다는 뜻이잖아……?
레오니가 치를 떨었다.
“이거, 진지하게 인간이 혐오스러워지는데. 그 새끼들도 참 대단해? 제시, 네가 샤이닝에 재가입했다는 건 그 멍청이들도 알 거 아냐? 인터뷰로 밝혔었으니까.”
제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제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이유예요.”
매스컴.
지금이야 입을 다물고, 마탑에서의 촬영본도 공개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오늘의 기억이 흐려진다면 언제든지 돌변할 수 있는 그들이었다.
뿐만 아니다.
크리스탈 홀, 객석에는 수많은 플레이어가 있었다. 성전 연합군 소속이 아닌 플레이어는 물론. 어중간한 각오로 이름만 올린 플레이어들도 수두룩했었다.
제시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불나방들은 어디에나 존재하니까요.”
그러니 두 사람은 걸음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마탑의 포탈 앞에서 선 제시와 레오니.
그 행선지는 유스라 왕국이었다.
고오오.
예상치 못한 증명으로 시간이 촉박했지만, 자고로 규율이라는 건 엄격해야 하는 법. 사전에 예정된 성전 연합군 회의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레오니가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 한번 지켜보자고. 누가 통수칠 낌새를 보이는지.”
.
.
.
실화냐.
“……아니, 저 새끼가 이러면 내가 뭐가 되냐?”
레오니는 제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사실상 거대 연합 소속으로 그들과 함께 활동하던 플레이어.
스칼.
그 새끼가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으니까.
남태민.
그리고 히사기.
“…….”
“…….”
평상시답지 않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두 사람의 반응이.
상황의 심각성을 더욱 와 닿게 한다.
정각.
유스라의 국왕, 하쿠나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빈자리가 많군.”
스칼은 시작에 불과했다. 순수 유럽 길드 중 최고의 세력을 자랑하는 보헤미안의 길드 마스터, 가이버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를 대신할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레오니가 이를 갈았다.
“……유럽 망신은 다 시키네, 미친 새끼들이.”
성전 연합군, 그 내부에서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찾는 법.”
뻔뻔한 입방정이 아침을 알린다.
“허나, 오늘은 아침은 생략하겠다.”
오전 10시.
절대 일찍이라고 할 수 없는 시간이거늘.
이게 얼마 만에 늦잠이냐.
그럼에도 우리 그랑펠 님께선 쉽게 인정하지 않으셨다.
“간헐적 단식이라는 것이다.”
하여튼 이상한 데에서 자존심 부리기는. ……어쨌든, 오래간만에 기절한 것처럼 잠들었다. 확실히 육체가 한계에 다다르긴 했었군. 시야 한구석에서 점멸하는 퀘스트 메시지.
‘체력 단련 퀘스트까지 빼먹은 걸 보면.’
물론, [첫 세계수의 축복] 효과는 여전히 대단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수개월은 병실에서 치료만 받아도 모자랄 상태를 고작 하루 치 숙면으로 상쇄한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근데, 마냥 기뻐할 수가 없는데.’
그야 면목이 없었거든.
‘……다들 괜찮으려나?’
떠오르는 마탑 치유학파 별실의 풍경.
뱅그릿 톰.
벤쉬 윌리엄.
커튼 레블.
마이아 데이안.
최소 2~3개월은 집중 치유를 받아야 하는 선임 마법사들로도 모자라서 전(前) 그림자 용병단, 이젠 악크샨의 신입인 키치와 단원들까지.
‘그 상태를 보고도 좋아하면 양심 없는 거지.’
심지어 이번엔 그랑펠 탓을 할 수도 없었다.
‘전부, 내가 멋대로 착각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니까.’
상태이상, [흑화] 발동.
뒷수습만 하더라도 한참이 걸릴 짓을 저지르고 말았잖아?
그 뒷수습하니까 하는 말인데.
큰누나랑 통화할 때도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누님 소리가 쪽팔린 건 고사하고…….’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누나들한테 오히려 응원한다, 힘내란 소리만 잔뜩 들었다니까? 대체 뭘 본 걸까. TV에 송출됐던 내 모습이 대체 어땠길래. 누나들이, 심지어 웬수까지 그런 소리를 했던 걸까?
‘……솔직히 돌려보기도 무섭다 진짜.’
하지만 기록이 있다면 되돌아봐야겠지.
[흑화] 도중엔 그랑펠의 한없이 깊은 어둠 속에 파묻혀 부유하던 나였다. 후에 펼쳐진 결과를 보고, 적합한 마력흔을 보고 모든 상황을 유추했을 뿐.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한다는 것.‘파이몬과의 전투 양상도 확인해야 해.’
물론, 파이몬을 쓰러트린 건 내가 아니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거대한 바알의 팔뚝이었지.
그러니까 더더욱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거다.
‘바알. 결국엔 사냥해야 할 존재니까.’
어디 보자.
옷매무새를 정리하듯.
침구류를 각을 세워 정리한 다음.
스마트폰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때였다.
“모든 일엔 순서가 있는 법.”
……아니, 잠깐 확인만 하는 건데 뭐 어때?
“선약을 잊어선 안 된다.”
선약이라면 설마 그 녹차를 말하는 거냐?
말했잖아. 우린 아직 반전 마법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반전 마법의 한계를 극복해서 제주도 녹차 밭을 반전할 때까지 그 약속은 잠깐 미루자고.
‘우리 합의한 거 아니었어?’
하여튼 뒤끝……!
내가 하나 들어주겠다는 소원을 잊지 않은 건가.
무슨 소원을 빌려고 그러는 거냐, 그랑펠.
흠칫하던 순간.
그랑펠이 오해를 불식시킨다.
“지옥에서 확인해도 늦지 않을 테니.”
……아차.
간과하고 있었다.
지옥 가는 날이 벌써 내일이잖아?
‘뒷수습하다가 뻗어버리는 바람에…….’
아직 만반의 준비를 끝내지 못한 나였다.
더 늦기 전.
가넷 홀에 들러 결전용 마도구를 몇 개라도 챙겨와야 되겠군.
‘사실 나야 뭐.’
악크샨 유일의 네임드 NPC, 가브리엘의 유산. [속죄하는 루시퍼의 사슬]이라는 상당한 아이템을 이미 손에 넣었다만. 이번 지옥 원정은 나 혼자 떠나는 게 아니었다.
플레이어, 킨베르.
엘프, 엘시도어.
마지막으로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까지.
‘엘시도어야 걱정할 거 없지만.’
로렌츠크와 킨베르에게 지옥은 위험할 수 있었다.
특히나 쌓아온 업보와 마주하게 되는 게.
지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초신성 중에서도 네임드였으면 말 다 했지.’
마도구뿐만 아니라 유스라 왕국에도 들러 쓸만한 장비, 소모품을 챙겨야 하겠군. 다른 이유도 아니고, 오직 나를 위해 지옥까지 함께 하겠다고 선언한 이들이었으니까.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네 말도 일리가 있다는 거다, 그랑펠.
내가 인정했으니까, 너도 딱 하나만 양보해서.
기사 하나만 확인해 보자.
아무리 그래도 기이의 탐구.
세상 돌아가는 일에 소홀해선 안 되잖아?
슥.
나는 슬그머니 스마트폰을 들어서 확인했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잠잠하냐?
‘내가 자의식 과잉은 아닌데.’
분명, 나에 관한 기사가 넘쳐날 거라고 생각했거늘. 어째 평상시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큰 위기 없이 파이몬의 습격을 극복해서 그런 게 아니냐고?
그럴 리가 있나.
‘다들 날 보고 기겁했었다니까?’
게다가 이건 조용해도 그 정도가 심했다.
분명, 제주도가 반전 마법으로 복구되었다는 기사는 있는데……. 정작 제주도가 어떤 경위로 그 꼴이 되었는지에 관한 기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딱 그 몇 시간에 관한 기사만 없는데.’
내가 의문을 가지듯 네티즌들도 의아한 모양이었다.
메인 기사를 터치하고 댓글란을 확인한다.
그러자 떠오르는 반응들.
전부 훑어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내가 기절한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건데?!’
마탑에서 증명이라니!
‘그것도 마티스……?’
마탑에, 마티스에게 불똥이 튄 것까지는 이해가 됐다. 적합한 마력에 관해서, 나의 [흑화]에 관해서 답할 수 있는 건 마르셀로나 마티스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각오도 마쳤었다.
이호열 수석님께서 흑화하셨도다……!!
마르셀로나 마티스가 발표했어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노라.
각오하고 침대 속에서 기절했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증명이라니.
그 증명에 세계 각국 언론들이 참관했었다니.
그러고도.
-아니 단체로 짰음? 왜 관련 기사가 안 나옴?!
-내가 말했지? 그 익명이란 새끼 구라라니까ㅋㅋㅋ
-뇌피셜로 써 재끼다가 경고 먹은 거 아님??ㅋㅋㅋ
이렇게 잠잠하다니.
“실로 훌륭한 증명이었나 보군, 마티스.”
아니, 아무리 선약이 중요해도.
그렇게 넘어갈 게 아니라니까?
하지만 나의 애원에도 몸뚱이는 책상으로 향한다.
깃털펜을 들어 올린다.
스스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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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가넷 홀에 방문하겠다.
──────
용건만 간단히.
마법부여학 선임, 키코 아르민에게 글귀를 전달하는데…….
잠깐, 양피지에 떠올라있는 글자들이 보인다.
그런데, 이건 또 뭐냐.
‘바쁜데 뭐가 이렇게 길고, 구구절절해?’
하지만 그러한 성의가 담긴 글귀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게 또 격식이니. 나는 떠오른 글귀를 전부 읽어나갔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했다.
……잠깐만.
시한부라니.
누가?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