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347)
347
간섭.
“마르낙, 있잖아…”
자그마한 목소리. 지젤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아까까지도 그렇게나 신났던 지젤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는 눈이 이렇게나 쏟아지는 와중에도 굵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역시 방금의 그 대규모 공격은 한계까지 쥐어짠 공격이었나. 하긴, 애초에 실체가 없는 그림자에 질량을 부여해서 충돌시킨다는 것 자체가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긴 했지.
“…미안하지만 조금 먼저 돌아가 봐야 할 거 같은데.”
나는 작게 비틀거리는 지젤의 어깨를 붙잡아주며 말했다.
“돌아갈 힘은 있어?”
내 물음에 지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랑 애들도 데리고 갈 만큼은 남겨 뒀어.”
“그럼 걔네만 데리고 먼저 가. 나는 괜찮아.”
이대로 레페를 비롯한 녀석들을 남겨두긴 위험했다. 특히 저 음침한 인상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낸 뒤로 도시 전역에서 산발적으로 날뛰던 이질적인 신성들이 일제히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지젤도 그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기에 억지 부리지 않고 바로 빠지겠다 하는 거겠지.
“근데 레페나 페르카쪽 위치는 알고 있어?”
“내가 이쪽으로 넘어오기 직전에 있던 데 근처에 있겠지. 일단 넘어가서 주변을 우선 살펴보면…”
“저기! 저기 있다! 저기 연 씨가 보여!”
“아.”
결코 여기서 듣고 싶진 않았던 목소리가 제법 먼 곳에서 들려왔다. 문제는 레페와 페르카, 페리토드만이 이곳으로 온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셋을 넘어 수백이 넘는 발소리가 예민한 청각 너머로 레페의 목소리보다 더욱 크게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레페와 페르카네들 뒤로 걸어오는 못해도 최소 수백은 넘어 보이는 남제국군들이 보였다.
아.
괴물들이 전부 이곳으로 향하니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교전 중이던 남제국군들도 이곳으로 모여드는 게 당연했다.
다만, 진짜 문제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는 음침한 인상의 여자였다. 그녀 또한 사도일 확률이 높으니 평범한 병사들 몇백, 몇천이 몰려온다고 하던들 크게 도움이 안 되고 말 터.
애초에 헤일로를 꺼낸 사도에게 평범한 인간들은 그 어떠한 상처도 입힐 수 없었으니.
내가 당장 다 물러가달라고 해도 군의 지휘권도 없는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겠지. 애초에 이렇게 병력을 대규모로 움직이는 것도 전부 이 나라 수상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것이었을 테니.
그러면 일단 포기할 건 포기해야지. 우선은 레페랑 페르카쪽부터 해결해두자고.
“지젤, 쟤들 데리고 당장 여길 떠.”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은데…”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페르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마치 무언가 큰일 해내고 있는 사람들이 짓고 있는 그런 표정.
지젤은 저 멀리서 우리쪽으로 뛰어오는 페르카의 표정을 보곤 인상을 찡그렸다.
“…쟤네한테 내가 돌아가자고 말해도 절대 안 들어먹을 거 같단 생각이 드는데.”
그리고 지젤의 그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예? 돌아가라고요? 지금? 저희가 돌아가면 저기 병사분들은 어쩌고요?”
내가 돌아가라고 말했음에도 페르카는 전혀 납득하지 못한 표정으로 내게 대답해왔다.
“이건 단순한 사도들의 횡포가 아니라, 우리나라 수도의 존망이 걸린 일인데, 저는 한 명의 남제국민으로서 이 모든 걸 내팽개치고서 저만 살겠다고 도망칠 수는 없어요. 아무리 연 형이 하는 말이라고 해도요.”
“하아.”
맞다. 까먹고 있었다. 나야 어디 조국이랄 만 한 것이 없었지만, 이 나라에서 나고 자란 페르카에겐 이 남제국이란 것이 그냥 단순한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이 나고 자란 지켜야만 할 조국이었지.
조국의 위기와 바르고 곧게 자란 청년. 살짝 듣기만 해도 절대 못 물러나지 못하는 조합이네. 이거.
“레페, 네 생각도 같아?”
레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딱히 페르카처럼 애국심으로 불타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녀는 쉽사리 이 수도의 병사들과 아직 떠나지 못하고 피난한 채 남아 있는 수도의 사람들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슬쩍 기습해서 기절이라도 시킨 다음 보내야 하나?
어차피 나중에 내가 원망 몇 마디만 들으면 되는 거니 아직 뭣도 모르는 저 녀석들 목숨을 지키는 값에 비하면…
검집째로 절망을 만지작거리던 와중 문득 페르카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눈치채진 못한 듯 보였다. 그러나 나는 녀석의 눈에서 쉽사리 시선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단 한 점의 미혹도 없이, 순수한 마음 하나로 그 어느 때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는 그 두 눈.
그 맑디맑은 눈은 보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끔찍한 인력을 품고 있었다. 그가 나아가고자 하는 길의 끝엔 비참한 결말만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한 번쯤 그 곁을 뒤쫓아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게끔 하는 그런 끌어당김이.
–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저 아이. 참 좋은 눈을 하고 있네요.
익숙한 속삭임.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상투스는 내 옆에 서서 페르카의 두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붕대로 얼굴을 둘둘 감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도.
– 저런 눈을 한 사람들은 어딜 가도 크게 되는 법이죠. 살아남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그래, 상투스의 말이 옳았다. 크게 될 눈이긴 하지만, 저런 인간들은 보통 단명하기 마련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할 오지랖을 부리다가 너무나 큰 장애를 만나서.
상투스는 페르카에게서 시선을 떼어내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제국의 병사들이 모여드는 그 반대 방향에선 끊임없이 불길한 짐승에 가까운 소리들이 이어지고, 사람의 것이 아닌 발걸음 소리들이 모여들어 오고 있었다.
저 사도가 부리는 게 분명할 괴물들이 처음으로 하나 된 지휘 아래 그저 괴물이 아닌 ‘군대’로서 다시 태어난다.
여태까지 놀 듯이 하나씩 정정당당하게 날뛰던 괴물들이 조직력마저 갖추게 되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잔인한 전장이 펼쳐질 게 분명했다.
– 제가 보기엔 아무래도 페르카가 이곳에서 살아남기는 힘들어 보이는군요.
정말이지 저 가짜 상투스와 만난 이래,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 중에 가장 공감이 가는 한마디였다.
역시 이건 기절시켜서 지젤한테 들려 보내는 게 맞…
마치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상투스의 말이 내 생각을 잘라내며 끼어들어 왔다.
– 아무것도 모르고 순수하게 바르고 올곧은 청년, 그런 청년이 큰 뜻을 품고서 올바른 선택을 하려 하는데, 이런 때야말로 진정 어른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이 자식,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 헛소리가 아닙니다.
입 밖으로 내뱉은 적도 없는 말에 대답을 해온다. 그것이 내 표정을 읽은 건지, 아니면 진정으로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건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상투스는 그저 자신이 할 말을 나열하듯 내뱉었다.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 설령 도와주지 않을 생각이더라도 당신은 페르카에게 그 어떤 강제도 하지 않아야만 합니다. 왜냐, 지금 저 청년은 진정으로 옳다고 생각하기에 스스로의 목숨마저 걸고서 이곳에 서 있고자 하는 겁니다. 연.
상투스는 내 이름을 짧게 부르곤 그 어느 때보다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적어도 당신은 지금의 페르카를 멈춰 세워선 안 됩니다. 지금 당신이 걸어가고자 하고, 또 걸어가고 있는 그 길. 누군가는 억지로 뜯어말려서라도 멈춰 세우고자 하는 그 길. 그런 길을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의지로 계속 걸어가고자 하고 있지 않습니까? 비록 그리 좋지 않은 길임에도.
그는 나직이 말을 덧붙였다.
– 당신 스스로가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듯, 이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의 선택 또한 존중해주십시오. 아직 아무것도 모르기에 더없이 순수하게 옳고 바를 수 있는 그 선택을.
“개 같은 소리.”
기껏 여기까지 살려서 데려왔는데 죽게 내버려 두라고? 내가 그런 꼴을 보려고 데리고 다닌 줄 아나?
상투스의 붕대투성이 입가로 한줄기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는 미소와 함께 말했다.
– 죽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를 지켜내십시오. 연, 당신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지난 5년간 뼈 빠지게 쌓아온 그 힘은 되찾고 지키기 위해 길러온 힘이 아닙니까?
“애초에 지킬 일 없게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게 하는 게 최선이야. 얼간아.”
– 연. 당신은 당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우리 속에 가둬둔 동물처럼 기를 생각입니까? 모든 걸 통제해 외부의 위험엔 전혀 노출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갑자기 무슨 극단적인 비유야. 뭘 내가 사람을 동물처럼 가둬두고 키워?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갓 성년이 된 녀석을 감당 못 할 괴물들이 날뛰는 전장에 내보내는 거야말로 진짜 무책임한 일이지!!!”
– 그럼 감당할 수 있도록 어른인 연이 직접 도와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까부터 말이 계속 빙빙 도는데…”
…마치 시간을 끌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닫혀있던 귀가 뜨였다. 그리고 온갖 소리가 귓가로 터져나갈 듯이 몰아쳐 왔다.
하늘을 지르는 함성과 병기가 피륙을 파고드는 소리. 금속이 우그러지며 무언가 단단한 발톱에 찢겨나가는 소리. 뒤따르는 비명.
“…낙!!!”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가깝고 커다랗게 들려오는 지젤의 목소리.
“마르낙!!! 뭐해!!! 정신 차려!!!”
내 몸을 붙잡고 흔드는 힘에 몸이 흔들린다. 당황 가득한 표정으로 내 멱살을 붙잡고 흔드는 지젤의 모습이 시야에 담긴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어떻게 되긴! 서로 한 번 꽝 맞붙은 거지!!! 너야말로 진짜 왜 그래! 갑자기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면서 사람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조차 안 하고!”
“분명 나는 상투스랑 대화를…”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상투스는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게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마치 제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는 듯이.
나는 지젤에게 물었다.
“페르카네는?”
“…내가 힘이 없어서 못 말렸어. 걔네는 이미 저쪽 전장에 끼어들어서 한바탕 날뛰는 중이야.”
지젤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보자 페르카가 한 괴물의 허리를 깊게 베어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 페리토드와 레페가 다른 괴물들이 페르카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돕고 있는 모습도.
뭐지? 진짜?
점점 상투스가 내게 영향력을 끼치는 정도가 강해지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아무래도 진지한 상담이 필요했다. 내 심상 세계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는 전문가에게.
일단 이번 일이 끝나면 임페트로와 상투스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한 번 해봐야만 했다. 평소 임페트로에게 상투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묘하게 말을 돌려대길래 굳이 더 캐묻지 않았지만, 가짜 상투스가 이런 식으로 내게 직접적으로 관여해온다면 더는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뭐가 됐든 담판을 지어야만 했다.
“지젤.”
“어.”
“너 혼자 먼저 돌아가서 프리무스를 이리로 보내줘. 녀석이라면 충분히 저 셋을 지킬 수 있을 거야.”
“알겠어.”
지젤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빠르게 그림자와 함께 사라졌다. 나는 잠깐 페르카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레페, 페르카, 페리토드 셋의 합이 잘 맞아서 그런지 셋은 충분히 안정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허리춤에 든 절망을 뽑아 들고서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페르카가 있는 방향이 아니라 음침한 인상의 여자 사도가 있는 방향으로.
머리부터 친다. 속전속결로.
병사와 괴물들이 이루는 전선을 즈려밟고서 훌쩍 뛰어오르자, 음침한 인상의 여인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그녀가 작게 손짓하자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날개 달린 괴물이 날 향해 덮쳐들어 왔다.
끼이이이이익!!!
절망이 검집에서 빠져나오고, 푸른 선 하나가 얼기설기 기워진 자국투성이의 괴물을 반 토막을 냈다.
나는 검을 재차 휘둘러 괴물의 머리를 잘라내고서 그대로 그걸 붙잡아 집어던졌다.
퍽!
바닥에서 튀어나온 기워진 손아귀 하나가 머리를 막아낸다. 곤죽이 된 머리의 피와 살점들이 흘러내리고 나는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음침한 인상의 여인은 날 보더니 히죽 웃었다.
“…너. 달인이지? 대, 대답 안 해도 돼. 이미 다 알고 말하는 거, 거니까.”
그녀는 촉촉한 입술을 살짝 부딪치며 입맛을 다시더니 나를 향해 더없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네, 네가 죽으면 네 시, 시체는 내가 가져도 될까?”
안 그래도 상투스 때문에 기분 잡쳤는데. 또 개소리해대네. 그래도 미소엔 미소로 답해야지.
나는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좋아. 가져. 대신 네가 죽으면 네 머리통 속에 있는 사리는 내가 챙긴다? 불만 없지?”
음침한 인상의 여인은 좀 전보다 더욱 밝게 웃으며 한층 더 신이 난 목소리로 답해왔다.
“드, 드디어 말이 통하는 상대가 나타났네! 조, 좋았어!”
바닥들이 갈라지며 기워진 괴물들을 꾸역꾸역 토해내기 시작했다. 여인은 내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얼굴도 잘생겨서 마음에 들어! 네 얼굴은 특별히 등신대 안는 베개에 달아서 쓸 거야!”
잠깐 내 머리 박힌 안는 베개의 모습이 멋대로 떠올랐지만, 간신히 떨쳐냈다.
나는 튀어 나가기 위해 자세를 낮추며 절망을 더없이 굳세게 쥐었다.
“…이거 다키마쿠라가 안 되려면 제법 열심히 싸워야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