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76
4화
불안하지는 않다.
곧 배가 불러오고 고통 속에서 아이를 낳게 되리라는 사실이 두려운 것도 아니다. 그 정도는 그녀에게 시련의 축에도 못 꼈다.
리즈벨은 그저 순수하게 궁금했다. 그녀의 푸른 눈에 무구한 의문이 스쳤다.
“제가 이 아이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면 될까요? 유레인 님.”
책에서는 그런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다. 아이가 생김으로써 삶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고, 또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지. 아이의 존재로 그녀와 아시어스의 관계는 어떻게 변해갈지, 그런 것들을 말이다.
유레인은 잠시 말을 골랐다.
‘헷갈릴 만도 하지.’
막내아들도 그렇지만, 특히나 리즈벨은 정상적인 가족관계를 맺어본 경험이 현저히 적었다.
유일한 혈육인 오라버니와도 제대로 말을 섞어본 지 몇 년 안 되었다고 했었다. 당연히 리즈벨은 어머니의 얼굴도 모른다.
딱히 가족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리즈벨은 여전히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에 서툴렀다.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는 상대와도 친해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아직 존재조차 느끼지 못한 어린 생명과 대번 친밀해질 수 있을 리가 없다.
유레인은 잠시 리즈벨에게 가장 와닿을 조언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답은 금세 나왔다.
“작은 친구가 한 명 더 생긴다고 생각하렴, 리즈.”
“작은 친구…?”
“그래. 아시어스가 만들어 준 네 친구인 거야. 아마도 저 애의 평생을 통틀어 네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 거란다.”
아시어스의 선물.
리즈벨은 그 두 단어를 입속으로 반복해 보았다.
아시어스가 그녀에게 주는 선물.
그의 이름이 들어가고 나니, 뒤따라오는 ‘선물’이라는 단어에도 자연히 무게가 실렸다.
유레인이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그리고 동시에, 네가 아시어스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지.”
서로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
뜻밖의 변화를 몰고 오는 두려운 변수가 아니라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선물이다. 그렇게 정의를 내리니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리즈벨은 아시어스가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고, 줄 수 있는 것도 다 주고 싶고, 그를 위해서라면 신체 부위 몇 군데쯤은 떼어 줄 수도 있다. 그러니 그를 기쁘게 하는 일은 당연히 그녀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고 행운이었다.
리즈벨이 차차 납득하는 사이, 유레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면, 리즈. 이 작은 친구가 너 자신에게도 더없이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도 알게 될 거야.”
“저에게도요?”
“그럼. 장담하건대, 지금까지 네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종류의 행복을 맛보게 될걸?”
“그렇게 될까요?”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것부터는 리즈벨이 스스로 차츰차츰 깨달아 갈 일이다.
유레인은 그쯤에서 조언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래도 리즈벨의 낯이 한결 밝아진 것을 보니 영 쓸모없는 조언은 아닌 듯싶었다. 유레인은 장난스럽게 그녀를 떠 보았다.
“역시 좋은 일이지, 리즈?”
“네. 그런 것 같아요.”
리즈벨의 눈이 그제야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하얀 얼굴 위로 햇빛이 한가득 쏟아진 듯 밝고 눈부신 웃음이었다.
“저도 기대돼요, 유레인 님.”
* * *
그 뒤로 아홉 달은 대체로 평화롭게 흘러갔다.
물론 몇 가지 사소한 일화가 있기는 했다. 맨 처음은 아이가 과연 누구를 더 닮을 것인지에 대한 고찰을 나누던 중이었다.
“이 친구가 네 성질을 닮으면 어떡하지?”
리즈벨은 문득 떠올린 가정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아시어스가 작정하고 반항하던 시절을 떠올리자 그녀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너를 둘은 감당은 못 해, 아시어스. 이건 진심이야.”
“뭘 그렇게까지 또?”
“성격은 무조건 유레인 님을 닮아야 해. 엘제 언니라거나.”
“아니야. 우리의 좋은 점만 닮을 수도 있죠, 왜. 다정하고, 상냥하고, 친절하고.”
“넌 나랑 가족들에게만 그러잖아. 라타에 황실에선 마탑주가 인성 파탄이라는 소문이 자자해.”
“당신이랑 가족들에게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우린 이제 별문제 없잖아요.”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게 문제란 말이야. 정말 큰일 났네.”
“왜 나만 이상한 사람을 만들지?”
아시어스가 대놓고 콧방귀를 뀌었다.
“일이 뜻대로 안 되니까 손목 끊어먹으려던 건 누구시더라.”
말문이 막혔다.
리즈벨이 입만 벙긋거리는 사이, 아시어스가 얄밉게 덧붙였다.
“리즈벨. 당신은 뭐에 한 번 꽂히면 굉장히 극단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어요. 맞가출이라던가, 맞가출이라던가, 맞가출같은 거.”
“그건 원인 제공을 한 사람이 잘못이지. 말없이 외박한 건 너야, 아시어스.”
이번에는 아시어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다지 의미 없는 몇 차례의 공방이 더 지나간 뒤, 리즈벨이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뇌까렸다.
“아무튼 우리는 안 돼.”
로제스를 닮으면 너무 무뚝뚝하고 희생적일 테니 역시 안 되겠다.
제발 상냥한 유레인 님이나 쾌활한 엘제니아 언니, 아니면 진중한 듀엔 님과 라나크 님을 닮기를.
리즈벨은 그날부터 매일 밤 뱃속의 아기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성격은 나를 더 많이 닮자고 말이다.
물론 아시어스도 거의 비슷한 소원을 매일 속으로 중얼거렸는데, 그렇게 섞여 버린 바람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둘 다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다.
* * *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왜 내가 입맛이 없는 거예요?”
아시어스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는 손가락을 딱 튕겨 디저트로 나온 케이크 접시를 테이블 저 너머로 휙 날려버렸다.
“으, 속 안 좋아….”
그는 며칠 전부터 들척지근한 버터 냄새만 맡으면 토가 쏠린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평소 아시어스가 달달한 주전부리들을 무척 좋아했었다는 걸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딱, 딱, 딱. 아시어스가 손가락을 마저 튕겨 접시 몇 개를 공중분해했다. 다른 손등으로는 입가를 가리고 있었다. 그늘진 눈가가 퀭하다.
“그러니까, 이런 건 아이를 가진 여자가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다고 쓰여 있었는데….”
리즈벨이라고 영문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날이 상태가 나빠지는 아시어스에 비해 리즈벨은 지나치게 멀쩡했다.
음식을 가리는 것도 없고, 속이 뒤집히거나 헛구역질을 하는 일도 없다. 평소보다 몸이 나른하고, 이제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는 배가 아직 익숙하지 않을 뿐.
그런 사소한 걸 빼면 그녀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공부 량을 반절로 줄이고 하루 종일 놀고먹는 덕분에 컨디션이 더 좋아진 것 같기도 하다.
“이상하네. 왜 그러지.”
결국 리즈벨은 결국 또다시 백과사전의 도움을 빌렸다. 요즘 그녀는 엘리제가 준 을 맹신하게 된 참이었다. 웬만한 의문에 대한 해결책이 전부 서술되어 있는 덕이다.
이번에도 그녀는 곧 답을 찾았다.
“음, 어떤 부부는 남편이 입덧을 대신해 주는 경우도 있대. 아시어스. 너도 그런 거 아닐까?”
“입덧? 내가?”
“그런 것 같은데.”
오….
아시어스가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그는 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레몬 캔디를 우물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리즈벨 대신이라.
그렇게 생각하니 짜증이 거짓말처럼 옅어졌다. 이런 불쾌한 경험을 리즈벨이 하느니 그냥 저가 대신하는 게 훨씬 낫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리즈벨이 읊어준 대목에서 영 엉뚱한 부분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부부, 남편….’
아시어스는 사탕을 입안에서 혀로 굴리다 말고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거 마음에 드네.”
그들 사이를 어떤 단어로 정의하는 게 큰 의미는 없다고 여겼는데, 막상 그렇게 불리고 나니 상당히 기분이 괜찮았다.
아시어스의 입가에 흡족한 호선이 걸렸다. 속은 여전히 더부룩했지만.
리즈벨은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는 아시어스를 걱정스럽게 지켜보았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도 임신하며 일어나는 변화 중 하나라던데, 설마 저 남자가 지금 그것까지 대신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괜찮은 거야? 너 요즘 하루 종일 그 사탕만 먹고 있는 것 같은데…. 그냥 내가 하는 게 나은 거 아닐까.”
“전혀 아니에요. 막상 해보면 그런 말 못 할걸.”
아시어스가 실실 웃으며 검지로 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원래도 리즈벨에게는 유독 칭얼거리는 모습을 많이 보이던 그였는데, 최근에는 그렇지 않아도 많던 애교가 배로 늘었다. 하루 온종일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아직 충분히 부르지도 않은 배를 만지작거리곤 했다.
“이왕 하는 거 낳는 것까지 내가 하면 좋겠는데. 왜 그런 마법은 없는 걸까요? 아기집을 나한테 옮겨 온다던가. 한번 개발해 볼까?”
“제발 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마….”
그녀가 학을 떼자 아시어스가 대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뭘 상상하는지 모를 일이다.
리즈벨은 약한 한숨을 쉬며 그에게 입을 맞췄다가, 정신이 번쩍 깰 만큼 새콤한 맛에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 * *
아이는 그 다음 해의 10월, 뤼켄 공저에서 태어났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확실히 순탄한 과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리즈벨에게는 딱히 미친 듯이 고통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것이 그녀가 고통에 대한 역치가 높아 그런 것인지, 아니면 객관적으로 아이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태어난 것인지는 구분이 힘들다. 물론 그렇다고 아주 안 아프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아시어스나 엘제니아, 유레인 등 뤼켄 가 식구들을 비롯해 시간선 너머에 있는 로제스의 무수한 걱정이 기우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아이는 큰 위험 없이 세상의 빛을 보았다.
오히려 낯빛이 점점 더 창백하게 질려가는 쪽은 아시어스였다.
내내 리즈벨의 곁에 딱 붙어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그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 뒤에도 리즈벨의 안색을 확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마법을 쓰지 말라는 말에 참고 있었던 초록색 마력이 온 방을 터뜨릴 듯 에워싸며 빛을 터뜨렸다.
리즈벨이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조심스레 갓난아이를 포근한 수건으로 감싸던 유레인이 감탄을 흘렸다.
“어머, 예뻐라….”
으아아앙-. 첫 울음을 우는 아기의 머리칼이 검다.
질끈 감긴 눈꺼풀 사이로 언뜻 보인 눈동자는 청명한 하늘색이었다.
이제 막 세상에 나왔는데도 이목구비 각각이 누구를 닮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가지고 태어난 능력까지도, 누구에게서 왔는지 너무나 명확했다.
특별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