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29
29화
* * *
동쪽 탑 중간층.
작고 황량한 방에 푸른 마법진이 내려앉았다. 마법이 완전히 펼쳐지기도 전에 장신의 인영이 나타났다.
아시어스는 피곤한 눈가를 꾹 누르며 곧장 침대로 다가갔다. 시트에 푹 파묻힌 가는 몸이 약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한 번 깨어났던 모양이었다. 방을 나서기 전과 누운 자세가 달랐다. 왕녀는 옆으로 몸을 돌린 채 둥글게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다.
“……죽지는 않았네.”
반 시간 사이에 갑자기 돌연사할 리도 없긴 하지만.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각성한 성녀가 제힘을 이기지 못해 폭주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각성 직후에는 바로 곁에서 성녀를 제어해 줄 이가 필요했다. 그래서 못내 마음이 쓰이는 것이리라.
아시어스는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왕녀에게로 허리를 숙였다.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이 움찔거렸다. 뺨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이 죽 거슬리던 참이었다.
‘자는 사람을 건드릴 셈은 아니지만…….’
그러나 애초에 그는 생각보다 행동이 더 빠른 남자였다. 저도 모르게 뻗어진 손이 왕녀의 몸을 덮은 시트 끄트머리를 지그시 움켜쥐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성력이 그를 유혹하듯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전신에 가벼운 소름이 일었다. 말려들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표정이 허물어졌다.
흐트러진 금발. 내려앉은 기다란 속눈썹. 콧대와 입술로 이어지는 옆선이 섬세하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헬라르의 딸은 자는 모습까지도 예뻤다. 역대 성녀 중에도 이만한 미색은 없었으리라.
왕녀의 존재가 대륙에 드러나면 여신의 현신이라며 떠받들 족속들이 눈에 훤했다.
역시 숨겨 놓는 게 좋겠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니까.
마탑의 최상층에 침실을 하나 두자. 창밖에는 싱그러운 정원을 만들고, 사철 꽃으로 장식해 눈 돌릴 곳 없도록 하는 거야.
보석은 몇 개가 좋으려나. 드레스는? 뭘 입혀놔도 성에 차지 않으리라. 그깟 반짝이는 돌덩이 몇 개와 이어붙인 천 조각으로 저 미모를 다 담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시어스는 다디단 체향을 깊게 들이쉬며 날카롭게 곤두선 감각으로 그녀를 훑었다.
미동 없이 감긴 눈꺼풀, 섬세한 속눈썹 한 올 한 올, 고르게 오르내리는 몸의 선까지 세심하게 훑다 퍼뜩 깨어났다.
“아…….”
아시어스는 얼떨떨한 숨을 터뜨렸다.
방금 무슨 생각을 했지? 그의 눈썹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돌았군.”
이 정도면 중증이었다. 나르나크 공작의 말이 어쩌면 맞는지도 모른다. 왕녀에게 이렇게까지 목을 맬 필요는 없는데.
왕녀와의 관계에서 그는 언제나 우위를 점하고 있어야만 했다. 맞춰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휘둘리는 수준까지 가면 곤란하다. 아시어스의 낯에 짙은 자조감이 깔렸다.
그가 막 자세를 바로 하려던 찰나였다.
웅크린 자세가 불편했던지, 리즈벨이 뒤척거렸다. 고운 아미가 살풋 찡그려져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불시에 몸을 바로 돌렸다.
그녀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온전히 드러났다. 코끝이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아시어스는 물러날 때를 놓치고 얼어붙었다.
“아……?”
낮은 탄식을 내뱉고 나서야 그는 제가 필요 이상으로 왕녀에게 가까이 고개를 숙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리깔린 속눈썹 갯수를 셀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
고른 숨결이 그의 코와 턱 끝에 닿았다. 살랑이는 미풍처럼 간지러웠다.
아시어스는 숨 쉬는 것도 잊고 고요히 잠든 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얀 피부색과 대비되어 이질적으로 붉은 입술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희고 고른 치아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쿵.
뭔가가 세차게 뛰었다.
쿵. 쿵.
아주 조금만 더 고개를 내리면 입술이 닿을 거리였다. 이대로 혀를 얽고 숨을 나누는 건 일도 아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본능적인 무언가가 세차게 들끓기 시작했다.
‘……먹고 싶다.’
지독하리만치 명확한 음심이었다. 단지 종속을 허락받기 위해 듣기 좋은 말로 살살 얼러내려던 때의 감정과는 명백히 달랐다.
아시어스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빠르게 몸을 물렸다. 이 여자를 가까이서 보고 있으면 생각이 주체할 수 없이 위험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 순간이었다.
자는 사람을 두고 뭐 하는 짓인가.
아시어스는 스스로가 자제력이 강하다고는 절대 생각지 않았으므로, 이번에도 빠르게 그녀에게서 위험 요소를 제거해 버리는 쪽을 택했다. 다시 말해, 도망쳤다.
남자의 모습이 방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마법진의 가장자리를 이루던 빛 조각까지 허공으로 사그라들던 찰나, 죽은 듯 감겨 있던 리즈벨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푸른 눈동자가 텅 빈 침실을 느리게 훑었다. 까슬한 혀끝을 타고 잠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무슨 사람을…….”
무슨 사람을 그렇게, 눈을 감고 있는데도 다 느껴지도록 뚫어지게, 강렬하게…….
눈빛만으로 집어삼킬 것처럼. 그렇게 보나.
‘……이상한 남자.’
깜빡, 깜빡.
눈이 느리게 감겼다 뜨이기를 반복했다. 몸 위로 드리워진 존재감에 강제로 수면 위로 끌려 올라왔던 의식이 다시금 혼몽해졌다.
또다시 끝 모를 암흑이었다.
* * *
리즈벨이 다시 깨어난 것은 꼬박 하루가 더 지나서였다.
깨어난 이유는 분명했다. 이번에도 뜨겁다 못해 타오를 것 같은 시선 때문이었다. 누군가 부산스럽게 주위를 뱅뱅 돌더니 침대 곁에 딱 붙어 그녀를 집요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법사?’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않길래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몇 분 더 지나자 위화감을 들었다.
‘지금 이건 뭔가 좀, 많이 다른…….’
“앗, 깨어났다!”
리즈벨이 눈을 뜨자마자 쨍하니 소리치는 목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여자가 깨어났어! 주인!”
멀찍이서 누군가가 급하게 일어나는 기척이 들려왔다. 쾅. 무언가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부딪혔다.
“……?”
리즈벨은 덜 깬 정신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목격한 것은 막 허공으로 스며드는 푸른 마력이었다.
“응? 뭐야, 주인.”
그리고 두 번째로 본 건, 침대 곁에 바짝 붙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녀였다.
“왜 도망가?”
새빨간 머리칼과 콧잔등에 콕콕 박힌 주근깨가 사랑스러웠다. 프릴이 가득 달린 이국적인 드레스를 입고 있는 것을 보니 발디마르의 아이는 아닌 듯싶었다.
‘누구지.’
리즈벨이 고민하는 사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소녀가 괄괄하게 외쳤다.
“이리 오라고? 싫어!”
“저기…….”
“난 이 여자랑 있을 거야. 가려면 주인이나 가!”
리즈벨은 약간 혼란스러워졌다.
그녀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앉을 때까지 소녀는 계속해서 이곳에 없는 이와 실랑이를 벌였다.
“언제는 옆에 딱 붙어 지키라더니! 주인, 그렇게 말 막 바꾸고 그러는 거 아니야!”
“얘.”
작지만 힘 있는 목소리에 왈왈거리던 소녀가 멈추었다. 리즈벨을 돌아보는 얼굴에 사나운 기색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해사한 웃음이 활짝 피었다.
“응, 응! 나 불렀어, 여자?”
‘여자’라니. 숱한 별칭들을 달고 다녔던 리즈벨이었지만 이렇게 원초적인 호칭은 처음이었다.
“넌 누구니?”
리즈벨은 무심코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열렬히 리즈벨을 보던 소녀의 눈에 충격이 어렸다.
“여자, 나 몰라?”
“응.”
소녀가 양 갈래로 땋아 내린 빨간 머리카락을 양손에 쥐곤 간절하게 물었다.
“이거 보고도 모르겠어? 아무 생각도 안 들어?”
“응.”
“너무해!”
소녀가 단단히 토라진 얼굴을 했다.
리즈벨은 약간 황당한 얼굴로 아이를 보다가 저 불타는 듯한 붉은색을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해 냈다.
“내가 알던 여우를 닮았네.”
“……!”
소녀가 고개를 홱 쳐들었다. 서운한 티를 풀풀 내던 검은 눈이 다시금 해맑게 반짝거렸다.
“헤헤. 기억 못 하면 나 조금 화날 뻔했어.”
예쁘게 함박웃음을 지은 소녀가 재잘재잘 떠들었다.
“내가 몸통에 구멍까지 내 가면서 구해 줬는데. 잊어버렸으면 똑같이 뚫어 주고 싶어졌을지도 몰라.”
목소리는 발랄하고 가벼운데 내용은 영 그렇지 못했다. 리즈벨은 얼떨떨하게 물었다.
“네가 티스야?”
라타에의 마법사가 그녀 곁에 남기고 간 붉은 여우. 그 여우의 이름이 분명 티스였다.
“응! 이거 볼래?”
티스가 입고 있던 앙증맞은 드레스 앞섶을 가리켰다. 가슴 부분에 크고 화려한 분홍 리본이 달려 있었다.
티스가 생글생글 웃으며 리본을 홱 위로 젖혔다.
“쨘!”
“……?!”
리즈벨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리본이 가리고 있던 티스의 몸은 동그랗게 뚫려 있었다. 깔끔한 단면으로 도려내진 구멍 너머로 소녀의 뒤쪽 배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리즈벨은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너 정말 인간이 아니구나.”
“여우라니까?”
티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재잘거렸다.
“몸에 칼집이 나 있으면 보기 흉하잖아. 그래서 주인이 예쁘게 동그라미로 파내 줬어.”
“…….”
“리본도 만들어 줬다!”
제정신들이 아닌 것 같다. 자신이 여우라고 주장하는 이 소녀도, 주인이라는 그 마법사도.
“…….”
검은 머리칼에 잿빛 눈을 가진 남자를 떠올리자 이유 없이 마음이 죄어들었다. 그의 시선과 숨결이 오래 닿았던 입술이 어쩐지 뜨거웠다.
리즈벨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티스의 조잘거림을 들었다.
“사실 엄청 혼났는데, 여자를 제대로 못 지켰다고.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단 말이야. 그때의 여자는 성력을 풀풀 뿜어내서 내가 감당하기가 힘들었다고.”
“그랬구나…….”
“응! 그래서 내가 이 한 몸 희생했지. 너는 거기서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얼굴이란 말이야.”
거기서 죽기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이 선명해졌다.
“그냥 평생 도망 다니면서 살지, 이 멍청한 것아. 대체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응?”
“아.”
눈앞을 가득 채우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랐다.
로제스 발디마르가 지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던 그 표정.
그제야 그날 밤의 기억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