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54
55화
사실 발디마르 왕성에서 벌어진 모든 일은 이미 마무리가 되었다.
그는 처분권을 왕녀에게 넘겨주었었고, 왕녀는 죄인 루시페를 단죄하였으며, 불법 소환된 악마 이고르는 로제스를 되살리는 데 쓰이고 소멸했으므로.
그러니 아시어스가 왕녀와 나눈 영혼의 종속에 대해 불지 않는 이상, 그가 왕녀를 강제할 권한은 없는 셈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아시어스는 그녀를 황제와 귀족들의 손에 넘겨줄 생각은 일절 없었다. 그들은 성녀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에 가득 찬 승냥이들이나 다름없다.
그런 자들에게 왕녀를 넘기면 다시 돌려받기가 몹시 번거로워질 것이 뻔했다. 그러니 앵무새처럼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유스타프가 왈칵 성질을 냈다.
“그 조사란 게 왜 이렇게 늦어지는 건데!”
“그럼 불법 악마 소환이 가벼운 사안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아시어스가 이렇게 뻗대면 유스타프가 반박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다른 중죄도 아니고 무려 악마 소환인 것을.
마탑주가 직접 금지한 검은 마력이 관련된 일은 아무리 황제라 해도 통제권을 빼앗을 수 없었다. 빼앗아봤자 그들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유스타프가 성마르게 지껄였다.
“그녀는 보호가 필요해. 성녀를 노리는 반동분자의 존재를 마탑주 자네도 알고 있잖아.”
헬라르의 성녀가 나타났을 때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이들. 그들은 이단자들이었다.
이단자. 여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성녀에게 반기를 들며, 성녀를 떠받드는 라타에 황실을 적대시하는 무리.
“지난 100년간 그들 종파가 제국 전역을 뒤덮다 못해 마침내는 수도에까지 손을 뻗쳤어. 아무리 박멸해도 수그러들지 않지. 그렇게 세력을 키워 온 놈들인데, 뒤늦게 나타난 성녀를 용납할 생각이 없을 거다.”
“그럼 더더욱 제 밑에 있어야지요. 왕녀를 보호하기에 제 탑보다 좋은 장소가 있습니까? 이 대륙에.”
“뭣…….”
“제 자존심을 걸고, 저 얼음의 땅 아스테르반 이외의 세상에는 그런 장소가 없을 텐데요.”
물 흐르듯 유창한 대꾸에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유스타프가 결국 서럽게 눈썹을 늘어뜨렸다.
“한 마디를 안 지지, 아주!”
“감사합니다.”
아시어스는 무신경하게 상대의 속을 박박 긁으며 시일을 계산해 보았다. 아무리 그의 머리가 어떻게 되어서 왕녀에게 주는 유예 기간을 늘린다 한들 6개월을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전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을 끝내고 말 거니까. 그 정도면 그의 복잡한 속내도 좀 정리가 되겠지.
유스타프가 괄괄하게 외쳤다.
“그래도 내 탄신회에는 참석해야 해! 성녀의 존재는 공표해야 한단 말이다. 이게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 이봐, 듣고 있나?”
“예, 예. 알겠습니다.”
“둘 다 말이야, 둘 다! 왕녀와 마탑주 자네, 둘 다!”
“알겠습니다. 참석하지요.”
아시어스는 혀를 차며 돌아섰다. 은테 안경 속 회색 눈동자에 가득 차 있을 귀찮음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황제의 본심이야 뻔했다.
마탑주와 헬라르의 성녀. 그 두 강자를 제 양손에 쥐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것이다. 황제 자신의 탄신 연회에서.
‘욕심도 많지.’
아시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가끔 황제가 저렇게 건방을 떨 때면 굳이 마탑의 우호국으로 라타에를 선택했어야만 했나 하는 후회가 밀려오곤 했다.
그렇게 다른 생각에 잠기는 바람에, 그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오늘 내일을 재던 유예의 기간이 터무니없이 반년으로 확 늘어나 버렸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쓸데없는 일로 오라 가라 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바쁘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푸른 마력이 튀었다. 아시어스의 모습은 집무실에서 깨끗하게 사라졌다.
“……제멋대로라 이거지, 아주.”
유스타프는 마탑주가 떠난 자리에 대고 콧방귀를 팽 뀌었다. 탄신 연회에 참석하겠다는 답을 받아 내기는 했지만…….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아시어스!”
저 인간 같지도 않은 마법사는 ‘오늘 구름의 모양이 마음에 안 드는군요.’ 따위의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불참할 게 뻔했다. 그렇게 당한 게 벌써 몇 번인데! 이번에도 또 당할 줄 알고!
유스타프의 눈이 화르륵 타올랐다.
“기사단장을 불러와!”
그로부터 약 반 시간 후, 수도 에엘에 불온한 움직임이 슬금슬금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 * *
리즈벨은 거리를 걷고 있었다. 계절은 여름을 훌쩍 넘긴 가을이었고, 시간은 한낮이었다. 따갑도록 강렬한 태양이 바로 머리 위에 내리쪼였다.
사방이 왁자지껄했다. 도로는 굉장히 반듯하고 깔끔하게 포장되어 발 닿는 어느 곳으로 걸어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었다.
푹 덮어쓴 로브 밖으로 금빛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조금 튀어나왔다. 그녀의 손을 잡고 발맞추어 걷고 있던 소녀가 손을 당겼다.
“리즈벨. 리즈벨.”
“응?”
주위 풍경 하나하나를 눈에 담느라 여념이 없던 리즈벨은 티스가 한 번 더 맞잡은 손을 흔들고 나서야 시선을 내렸다.
“왜, 티스?”
“숙여.”
리즈벨은 순순히 티스의 말을 들어주었다. 오만한 표정의 소녀가 손을 뻗어 튀어나온 금발을 로브 속에 쏙 집어넣었다.
“이제 됐어.”
리즈벨은 잠시 고개를 기울이다 이내 신경을 거두고 허리를 폈다. 라타에로 넘어온 뒤 그녀 주위의 인물들이 불쑥불쑥 일삼는 기행들에 적응된 지 오래였다.
그녀는 지금 그들 중 가장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인외 존재와 함께 수도 에엘의 중심가로 나온 참이었다.
마법사는 종종 탑을 비웠다. 마탑주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라나. 물론 그가 자리를 비웠다 해서 그녀에게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리즈벨은 그의 허락 없이는 마탑을 나설 수 없었다. 원칙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수도 나들이를 나오며 그녀는 한 번도 그의 허락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를 이끄는 건 티스였다. 마법사도 그녀가 제멋대로 마탑을 들락날락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게 분명하지만, 그들을 제지한 적은 없었다.
‘무언의 허락인 걸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런 연유로 리즈벨이 라타에의 수도 에엘의 중심가를 거니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리즈벨은 다시 관심을 거리의 풍경으로 돌렸다. 라타에는 여러모로 발디마르와 다른 나라였다.
수도 에엘은 대륙 서부에서는 첫 번째로 손에 꼽히는 대도시였다.
도로와 구획이 반듯하게 짜인 계획도시이며 모든 신문물의 중심지이자 대륙을 휩쓰는 유행의 선두주자이기도 했다.
거리를 활보하는 마법사들의 수만 수십이었다. 골목골목의 가판대에는 마법 물품을 늘어놓고 팔았다.
푸른 눈이 상대방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영상구, 커다란 장롱이 통째로 들어가는 손바닥만 한 아공간 주머니, 각종 마법 스크롤들을 훑고 지나갔다.
퐁.
가까운 곳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터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이제 막 장사를 시작하는 듯한 상점 주인이 문의 결계를 해제하고 있었다.
“……신기해.”
리즈벨은 멈춰 서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마법사를 처음 본 건 아니다.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 남자가 마탑주니까.
그러나 이렇게 많은 마법 물품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길가에 널려 있는 것을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라타에는 마법의 나라였다.
“마탑주가 늘 곁에 붙어 있는데 저런 조잡한 게 신기해?”
티스가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랬다.
“하지만…….”
리즈벨은 잠시 대꾸할 말을 찾으며 침묵했다.
“한 사람만 겪어보는 것과 수도 전체가 마법으로 뒤덮여 있는 걸 보는 건 느낌이 전혀 다른걸.”
“무슨 소리야.”
티스베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도시 전체가 다 아시어스인 것이나 다름없는데.”
“응?”
“이 땅의 마력이 다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해?”
답이야 뻔했다. 마탑. 이 땅에 흐르는 모든 마력의 원천이자 집결지이며, 마법사들의 마음의 고향이라 불리는 마탑을 보유한 수도 에엘은 당연하게도 대륙에서 마법이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도시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한 달이나 함께한 남자는 바로 그 탑의 주인이다. 이 대륙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마법사. 모든 마법사의 스승. 마탑의 마력을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그래, 그랬지.”
아시어스 뤼켄은 그런 남자였다. 그 사실을 종종 잊어서 문제지만.
완연한 가을로 뒤덮인 수도의 번화가는 아름다웠다. 산사람들이 공유하는 역동적인 생기가 넘쳐흘렀다.
리즈벨은 정교한 대리석 분수대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은 오거리를 지나, 길가 양쪽으로 일정하게 심긴 낙엽 지는 가로수들 사이를 걸었다.
리즈벨의 손을 잡고 있던 티스가 어깨너머로 시선을 흘끗 던졌다. 무엇을 보았는지 소녀의 미간이 살짝 모였다.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티스가 리즈벨의 팔에 달라붙었다.
“있잖아, 리즈벨.”
“응?”
“너, 악마의 힘을 사용해 볼 생각 없어?”
“뭐?”
뜬금없는 물음에 리즈벨은 발을 멈추고 티스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을 앙증맞게 땋은 소녀는 천진난만하게 싱글거리고 있었다.
“답답하지 않아? 이렇게 묶여 있는 거.”
묶여 있다는 건, 종속을 뜻하는 게 분명했다. 아시어스가 그녀에게 건 마법은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종속의 마법이었다.
하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마법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종속’은 영혼 간의 계약이다. 상대의 정신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유일한 방법.
헬라르가 리즈벨의 정신을 지배하려 했듯, 아시어스는 리즈벨의 영혼을 강한 사슬로 옥죄어 놓았다.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갈 수가 없다. 사슬이 끊어지면 타격을 입는 건 양쪽 모두이기 때문에.
티스가 은밀하게 눈을 찡끗했다.
“너도 힘을 가져야 할 필요는 있을걸, 리즈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