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staurant where the fox waits RAW novel - Chapter 32
제32화
32화
하.
절로 한숨과 헛웃음이 뒤섞인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래, 이럴 줄 알았지.
“다음 달에 미애 만나는 날에, 애한테 다시 물어볼 거야. 만약에 그때도 바뀐 거 없으면, 양육비고 나발이고 다 끊어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뭐?”
“돈 안 준다고. 아까워서 못 주겠다고. 나한테 돈 받고 싶으면, 애 잘 키워. 알아들어?”
“…….”
대답 대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쉰 시원이 잠시 숨을 고르며 감정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최대한 밝은 표정으로 트럭으로 가 조수석에 있던 미애를 데려왔다.
“아빠, 이제 가게요?”
“응. 아빠는 또 일하러 가야지. 나중에 또 보러 올게. 엄마 말 잘 듣고 있어.”
“우웅, 조심히 들어가세요.”
대답 한마디 없이 미애를 데리고. 그녀는 그렇게 떠나 버렸다.
돌아가는 동안에도 미애는 계속 고개를 뒤로 돌려 힐끔힐끔 시원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아쉽다는 듯 웃었다. 내 딸이.
‘X발.’
이렇게 하면 후련해질 줄 알았는데, 개뿔이.
그냥 거지 같았다. 가슴에 너무나도 큰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봉투가 된 것만 같은 감정이었다.
“허허.”
공허하게 웃고 있자니 눈가가 시큰거렸다. 몇 방울 흘러나온 눈물을 누가 볼까 빠르게 닦아 냈다.
이제 돌아가야지. 집에 가서 자고, 다시 내일 일할 준비 해야지. 돈 벌어야 하니까. 미애를, 내 딸을 위해서.
그렇게 생각하며 급하게 트럭에 올라타려던 찰나.
“총각, 이거 하나 사 줘.”
“예?”
테이프를 칭칭 감은 바구니에 껌이며 초콜릿 같은 것을 담아 들고 다니시던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잠시 고민하던 시원이 이내 지갑을 꺼내 들었다.
“날도 추우신데 고생 많으십니다. 초콜릿이랑, 껌 하나 주세요.”
“삼천 원만 줘. 고맙구먼, 끌끌.”
“아니에요. 많이 파세요. 더 못 사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상한 할머니라고 생각했다. 보통 식당 같은 데 들어가서 파시는데, 길거리에 있는 자신에게 말을 거셨으니.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시원이었다. 그렇기에 이쁨을 받는 것일지도 몰랐다. 착하고 선한 이들을 사랑하는 삼신에게.
“일하느라 수고 많을 텐데 달달한 거 먹으면서 혀. 당 떨어지면 힘들어.”
“그래야죠. 예.”
“지금은 고생 좀 할 수도 있어도, 조만간 볕 들 날이 올 거여. 네 딸애도 마찬가지고. 아빠 닮아서 얼마나 똑 부러지는데.”
“……네?”
“머리가 총명한 아가여. 나중에 공부 잘해서 변호사 될 거야. 어려운 사람도 많이 도와주고, 넉넉히 오래 살다가 효도 많이 할 효녀여. 그러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견디라고.
분명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처음 보는 비루한 행색의 할머니에게, 참 이상한 소리를 또.
“어?”
불어온 밤바람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할머니는 어디로 가신 건지 보이지 않았으나, 손에는 초콜릿과 껌 한 통이 들려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며 트럭에 올라탄 시원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의 밤을 달려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삼신이 작게 중얼거렸다.
“따뜻한 밥 한 끼에 따뜻한 말 한마디. 이게 참, 별것 아닌데 힘이 센 법이지.”
태규.
소멸한 줄로만 알았던, 구미호와 정을 나눈 새하얀 영혼.
그 아이와 함께라면 앞으로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삼신은 확신했다.
“참, 대단한 아이야.”
밤이 추웠다.
하지만 태규가 있는 소반의 낮은 따뜻한 것이었다.
추워하는 다른 이들에게 그 온기를 나눠 줄 수 있을 정도로.
* * *
정말 중요한 일들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때에,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일어난다는 말이 있다.
아주 작은 우연들이 모여서 나중에 큰 결과로 돌아온다는 뜻일 거라고 태규는 해석하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미호가 유치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의 새벽.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유치원에 다녀와서 아빠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놀다가 푹 잠이 들었다.
저녁에 물을 많이 마신 탓인지, 아니면 자기 전에 아빠랑 먹은 딸기가 문제였던 것인지. 고요하고 고요한 새벽 3시에 미호가 벌떡 일어나 버린 것이다.
“우움…… 쉬야…….”
화장실이 급했다. 미호는 어른스러운 아이였기에, 아빠랑 같이 자는 이불에 지도를 그리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아빠를 깨우지 않게 조심조심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왔다.
집 안에 있는 전등 앞에는 미호도 불을 켤 수 있도록 태규가 발 받침대를 만들어 두었으니까. 초보 아빠답지 않은 따뜻한 배려였다.
시원하게 일을 보고 왔지만 잠은 별로 오지 않았다. 화장실을 다녀오니 정신이 말똥말똥해져 버린 미호가 단잠에 빠진 태규 옆에 털썩 앉아 자신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엄마가 남겨 준 마지막 유품, 조금이지만 그리운 엄마 냄새가 나는 복주머니.
미호는 엄마가 보고 싶어질 때면 복주머니 냄새를 맡았다. 아빠에게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빠도 엄마가 보고 싶을 터였으니까.
하지만 요새는 그마저도 신통치 않은 게 문제였다.
“엄마아…….”
어쩌면 당연하게도. 특별할 것 하나 없이 비단으로 만들어졌던 복주머니는 시간이 지나며 본래의 냄새를 잃어버렸다.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민감했던 미호의 후각이었기에 지금까지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이지, 평범한 아이였다면 진작에 사라졌을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렇게 될 거라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막상 직접 마주하니 서럽고 슬펐다. 이 냄새가 아니라면 이제 엄마가 보고 싶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흐윽.”
새벽이라서 더 그랬던 걸까. 어린 마음에 괜스레 울음이 나왔다.
소리 내서 울고 싶긴 했지만 혹시라도 아빠가 깰까 그럴 수는 없었다. 소리 죽여 잠시 동안 훌쩍거리던 미호의 흰색 여우 귀가 얼마 지나지 않아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우움?”
목걸이의 냄새가 완전히 옅어진 덕일까. 혹은 고요한 새벽이라 감각이 더 날카로워진 덕일까.
아주아주 약하긴 하지만, 분명히 어딘가에서 엄마의 냄새가 났다. 목에 걸고 있던 복주머니는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곳, 이 집 안 어딘가였다.
이제부터 미호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누가 여우는 갯과라고 했던가. 킁킁킁, 공항의 마약 탐지견에 빙의한 미호가 집 안 구석구석을 뒤지며 엄마의 냄새를 좇기 시작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발견했다.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던 서랍장. 그 안에서 엄마의 냄새가 났다.
태규는 여기에 숨겨 놓으면 미호가 찾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이 작은 여우를 너무 얕본 것일지 몰랐다.
아빠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식탁 의자를 끙끙대며 옮긴 뒤, 그 위에 기어 올라가 밟고 섰다. 살짝 아슬아슬하지만 확실히 손이 닿았다.
드르륵-!
서랍장 문을 열자마자 아주 진하게 풍겨 오는 그리운 엄마의 냄새.
그제까지도 울먹거리고 있던 미호의 입가에 햇살 같은 미소가 잔뜩 번져 나갔다.
“이게 머지?”
서랍장 안에는 한지에 둘둘 싸인 동그란 구슬 세 개가 있었다. 분명 엄마의 물건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가져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아빠한테 들킬 수 있었으니까. 미호는 양심적으로 구슬을 딱 하나만 챙겨 목의 복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다시 엄마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게 너무나도 기뻐서, 미호는 하마터면 평소처럼 ‘꺄아아!’ 하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이내 헙! 하고 입을 막았다.
꼼꼼한 녀석은 티가 나지 않도록 뒷정리까지 완벽하게 마쳤다. 그러고는 다시금 이불에 누워 태규의 품속으로 쏘옥 들어왔다.
“히히, 엄마아.”
세상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은 미호. 아빠의 팔을 베고 있으면 너무 편안해서 잠이 솔솔 왔다.
그 나이 아이들이 거의 그렇듯, 미호 또한 눈을 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쌔액쌔액 다시 깊은 잠이 들었다.
그렇게 새벽에 있었던 자그마한 도난 사건은 완전범죄로 묻히는 듯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이 일이 엄청난 나비효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 * *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는 평화로운 일요일.
소반의 유일한 휴일이었기에 보통은 미호랑 어딘가에 놀러 가거나 집에서 빈둥거리며 쉬는 게 보통이었지만, 미호가 유치원에 들어간 지 시간이 조금 지난 요새는 미옥 아주머니나 민규와 함께하는 일이 많아졌다.
미호와 민규는 운 좋게도 같은 유치원의 같은 반으로 배치되었었으니까.
특유의 활발한 성격 탓에 벌써부터 친구들을 많이 만든 미호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친한 친구는 물론 민규였다.
미옥 아주머니 또한 큰딸이 고3이라 집에서 편하게 공부하라고 주말에는 집을 비워 주었기에 시간 맞는 두 가정이 같이 놀기로 한 것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히 어디를 가기로 한 건 없었고, 그냥 느지막이 만나 점심을 같이 먹었다.
“압빠, 구래서요. 금요일에 받아쓰기 시험을 봤는데, 선생니미 미호 잘한다구 칭찬해 줘써요!!”
“정말? 우리 미호 멋지다. 몇 점 받았는데?”
“70점!! 겨우 세 개밖에 안 틀려써요. 잘해찌!”
“……잘했어. 우리 딸 최고다. 하하하.”
도대체 70점 받은 걸로 칭찬을 받은 거면 이전에는 몇 점을 받았던 건지 죽어라 물어보고 싶었지만 애써 참아 냈다.
그래, 이제 유치원 첫 입학인데 공부가 뭣이 중요하냐. 아빠는 그저 우리 미호가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음.
적당히 인지도 있는 프랜차이즈 패밀리 레스토랑.
입 주변에 토마토소스를 잔뜩 묻힌 채, 스파게티를 먹으며 유치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주는 미호에게 장단을 맞춰 주고 있자니 미옥 아주머니가 넌지시 물어 오셨다.
“근데 민규는 받아쓰기 몇 점 받았어? 엄마한테 시험 봤다고 말도 안 해 줬잖아.”
“어…… 잘못해써요.”
“괜찮아. 다음부터 말해 주면 되지. 그래서, 몇 점인데? 못 봤다고 혼 안 낼게. 엄마도 공부 잘 못 했는데, 뭐.”
“마자! 민규 나한테도 점수 안 알려 조써!”
갑자기 민규에게로 쏟아지는 모두의 시선. 그게 조금 부담스러웠는지, 잠시 멈칫거리던 녀석이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90점…….”
“응? 90점? 그럼 민규 너, 하나 틀린 거야?”
“우응.”
“어머나, 어머나. 우리 아들 머리가 이렇게 좋았어? 대단하네. 진작에 자랑하지 그랬어, 엄마한테.”
“그냥…….”
점수 이야기하는 걸 엄청 꺼리기에 되게 못 본 건가 싶었는데, 미호보다 무려 20점이나 더 높았다.
물론 유치원 받아쓰기 점수가 뭐 얼마나 큰 의미가 있겠나 싶긴 하지만. 그래도 겨우 하나 틀린 거면 진짜 잘한 건데 말이다.
녀석 자신감도 올려 줄 겸, 태규도 한마디 보태 주었다.
“민규 그렇게 안 봤는데 머리 엄청 좋았네. 멋있다.”
“웅! 민규 머시써! 나두 머리 좋은 사람 조아. 대다내!”
“그, 그래?”
“웅!”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엄마인 미옥 아주머니나 태규가 칭찬해 줄 때에는 미동도 없던 녀석이, 갑자기 미호가 거들고 나서니 얼굴이 새빨개져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