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186
186화 성 모 씨 생일 (4)
“이것으로 세 번째로군. 이번에는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성현제가 퍽 관대한 듯이, 마치 내게 선택권을 주겠다는 듯이 말했다. 찍어 누르며 대답을 강요했던 주제에.
“이미 설명드린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날은 넘어가 주었지.”
의심하면서도 깊게 캐묻지 않기는 했다. 또다시 도망칠 거냐는 듯이 금빛 도는 눈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여름이라기엔 서늘하게 식은, 짠 내를 품은 바닷바람이 새삼스럽게 짙게 느껴졌다.
그 바람이 성현제의 머리카락을 연신 가볍게 흔들리게끔 했다. 옅은 색조의 머리카락 위로 옅은 달빛이 내리비친다. 서로 뒤섞여서, 언뜻 은빛으로도 보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느긋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만하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망할 세성 길드장님께서는 그럴 자격도 능력도 갖추었다. 거만 떠는 게 아니라, 그냥 당연한 태도였다. 잘났으니까.
반면에 나는.
“…잘 대해 줄 거라더니, 빈말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로만 묻고 있지 않나.”
상냥도 하시네. 어떻게 변명하지. 무슨 핑계로 넘어가지. 무심코 마른침을 삼키는 그때, 등 뒤에서 유현이의 팔이 뻗어 왔다.
“형.”
나를 보호하듯이 감싸 당기며 동생이 말했다.
“나 여기 있어.”
날 섰던 조금 전과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전신을 조여 오던 불안감이 느슨해졌다. 우리 유현이는 꿀릴 거 없잖아. 그리고, 믿고 있다고 내 입으로 말했으니까. 받아 줬으니까. 의지해도 괜찮다. 내 동생은 날 버리지 않을 것이다. 버린 적도 없었고.
“…성현제 씨.”
유현이에게 반쯤 기대듯 한 채 성현제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내려다보는 시선도 여전했다.
어디까지 괜찮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성현제가 내게 관대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귀하고 꽤나 흥미롭고 쓸모 있으니까.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에게 있어 나는 대체로 무해하다.
물론 남의 손에 쥐어지면 위협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유용한 아이템이 타인의 손에 넘어갈까 두려워 앞서 부숴 버릴 정도로 겁쟁이가 아니다. 설사 아예 빼앗긴다더라도 가능한 온전히 되찾을 궁리를 할 타입이지.
심지어 이미 반쯤 제 손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혹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다거나.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받아 주는 것일 터였다. 집에서 키우는 이도 덜 난 강아지가 뒤꿈치를 물어 봤자 마냥 귀엽기만 한 것처럼.
“그렇게나 원하시니까 사실대로 말씀드리죠.”
하나 실은 이미 이갈이가 끝났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크게 물린 적이 있었다면.
“그쪽과 연관된 거 맞습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별다른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성현제 씨의 그 기시감, 권태로움과 관련이 있지요.”
드디어 나를 향한 눈빛이 바뀌었다. 습관처럼 띠고 있던 눈웃음이 서늘해졌다. 손을 뻗어 유현이의 한쪽 팔을 잡았다.
공포 저항에 가로막혀 있다 해도, 내가 지금 선 바로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내디딜 수도 있고 물러날 수도 있다.
성현제에게 그냥 계속 숙이고 들어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더럽게 잘났으며 같은 편이기만 하면 든든하고 무척이나 도움도 될 테니까. 여태까지도 꽤나 편했었다. 이쯤에서 물러나면 앞으로도 계속 편할 것이다.
굳이 거슬릴 필요 없다. 썩 괜찮은 관계다. 기억을 되찾고 내게 흥미가 떨어진다 해도 스킬은 유용하니 기본적인 대접은 해 줄 것이다. 패륜아들과의 관계까지 더하면 지금과 큰 차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럴 필요 없다. 없는데.
“기억은 못 하겠지요. 내가 가져갔으니까. 성현제 씨의 집에 찾아갔을 때, 그때 사라진 기억들. 아니, 기억만이 아니라 그때의 당신 자체입니다. 마석을 조합하는 데 필요했거든요. 그렇다고 되찾을 생각 하지 마세요. 극히 일부일 뿐이고, 이건 이미 내 거니까.”
내가 네놈 물어뜯어서 삼키기까지 했다. 어쩔래.
캉!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성현제의 손이 움직이고, 유현이가 칼을 들어 막았다. 긴 장검의 날이 내 앞을 비스듬히 가로막고 있다. 내게 뻗어 오던 손은 별 타격 없이 다시 물러났다.
그를 막은 것은 유현이었지만 금빛 도는 눈은 여전히 내게 꽂혀 있었다. 그 색이 날카롭게 짙다. 나를 꿰뚫기라도 할 것 같다.
“싸울 겁니까. 마침 스킬 대기시간 딱 지났는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내가 더 이상 무해하지 않다면 어쩔 거냐.
목소리는 다행히 멀쩡하게 흘러나왔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만약 이대로 성현제가 돌아서면 그걸로 끝이다. 더 봐주는 것 따위 없이 내게서 마석을 되찾으려 든다면 막아 내기 버거울 것이다. 이제껏 쌓아 올린 것도 엉망이 되고 말겠지.
“왜 갑자기 이를 드러내는 것일까.”
“계속 숙이고 있자니 목이 아프더라고요. 원래 한 번씩 고개 들어 스트레칭 해 줘야 하는 겁니다.”
괜한 짓 같다. 그냥 적당히 넘기려고 했어도 받아 줬을 거 같은데. 하지만 언제까지. 언제까지 계속 성현제의 발치에 얌전히 앉아 있기는 싫었다. 상대가 끝내자고 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새기듯 속에 넣어 둔 채 눈치 살피는 건 충분히 겪었다.
“저 그쪽 거 아닙니다. 이번처럼 물 수도 있고, 제가 먼저 잘라낼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나를 감싼 동생의 팔에 힘이 좀 더 들어갔다.
“그리고 그 기시감에 대해서 도와줄 수도 있겠지요. 그쪽이 가져다 쓰는 게 아니라, 제가 주는 도움입니다.”
성현제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하다가 다시 다문다. 그리곤 소리 없이 웃었다.
“정말… 예상외의 생일 선물이로군.”
“…생일 선물이요? 뭐, 생일날 엿 먹여 드려서 정말 죄송하지는 않군요.”
원래라면 그냥 뇌물이나 가져다 바치고 물러나려고 했지.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뜻대로 가는 법은 아니니까. 어쩔 거냐는 듯 성현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가 기억 못 하는 그에 대해 알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 나쁠 터인데 제 일부까지 모르는 새 빼앗겼다고 말했다.
…좀 과했나. 너무 대놓고 싸움 건 거 같기도 하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한유진 군, 지금 당장 그 가슴의 마석을 꺼내어 확인해 보고 싶기는 하다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린이 유현이의 칼로 올라탔다. 칼날 위의 도마뱀이 불꽃을 날름거린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약간 좋지 못한 수단을 쓰고 싶은 생각도 들고.”
그 좋지 못한 수단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말이 긴 거 보니 진짜 할 마음은 없으신가 봅니다.”
“그야 나는 한유진 군을 무척이나 아끼고 있으니까.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그 아낀다는 거, 어차피 댁 거일 때나 해당되는 거 아닙니까. 저 그쪽 소유 아니고 줄 생각도 없습니다.”
“생각이야 언제든 바뀔 수도 있는 거라네.”
“안 바뀝니다. 그래서 어쩌실 겁니까.”
“글쎄, 어째야 하나.”
성현제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대고 싶지만 동시에 손대기 싫으니.”
사슬이 작게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고민에 빠진 얼굴이다. 그것을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웃음도 슬쩍 나왔다. 고민할 정도는 되나 보네, 내가.
“앞으로 성현제 씨를 피해 다녀야 하나 말아야 하나가 달렸으니 이왕이면 빨리 결정 내려 주시죠.”
“…피해 다닌다니, 그것도 별로군.”
“술래잡기도 나름 재밌긴 하겠지만 금방 질리겠죠.”
“이런.”
그가 두 손을 살짝 벌려 보였다. 이어 한쪽 팔을 안으로 접으며 머리를 숙여 정중한 인사를 했다. 차림새도 차림새인 탓에 오래된 고전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고작해야 S급이 어찌 감히 한유진 군을 해칠 수 있겠나.”
“…그거 슬슬 질릴 때 안 됐습니까.”
“질릴 만하면 누군가가 새롭게 되새기게 해 주어서 말이야.”
답지 않게 해맑게 웃으며 성현제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스킬 대기시간, 아직 지나지 않았지 않나.”
“그러게요. 제가 잘못 봤네요.”
역시 알고 있었구나. 하지만 공격 스킬 효과 두 배 공유 외에도 성현제를 상대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우리 애가 이렇게나 잘났다, 스킬. 키워드를 들은 주위 지성체의 숫자만큼 스킬 효과와 능력치를 올려 주는 스킬이 남아 있었다.
마침 구경꾼이 오십 명쯤 되지. 최대치인 100퍼센트에는 못 미치지만 50퍼센트만으로도 충분할 터였다. 들통나기 쉬워 보이는 스킬이라 가능하면 아끼고 싶지만 여차하면 써야지 어쩌겠어.
성현제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입술 끝을 올렸다.
“내가 숙이고 들어간 적은 정말로 없었는데.”
“새롭고 좋네요. 어차피 마음 바뀌면 곧장 제 목 조일 거 아닙니까.”
줄타기는 여전했다. 그저 내가 조금 더 나아갔을 뿐, 언제든지 떨어질 수 있다.
“그래도 성미에 맞지 않는 짓을 했으니 풀어야 할 필요는 있겠어.”
불길한 느낌에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콰과광!!
배 아래쪽에서 무시무시한 폭음이 들려왔다. 아직 성현제와 선생님 스킬로 연결되어 있기에 알 수 있었다. 저 인간, 내가 기절하기 전에 전기분해 마력 조절법을 조금이나마 알아챘구나.
커다란 배가 풍랑 만난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미리 말해 뒀던 대로 사람들은 대장간으로 대피했다.
“생일 선물을 몇 개나 받아 가는 거야! 내년엔 없습니다!”
“제대로 된 것도 아닌데 뭘 그러나. 앞으로 연습이 많이 필요하겠군.”
그 말대로 위력은 확실히 약하다. 마력이 제대로 섞여 있지도 않은 듯하고. 그럼에도 거대한 크루즈선을.
쾅! 퍼엉, 펑!
침몰시키기엔 충분했다. 연속으로 터져 나가는 폭발이 화염과 함께 선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갑판 또한 쩍쩍 갈라진다.
“형, 피해야겠어. 폭발력은 감당할 만해도 휩쓸려 좋을 건 없으니까.”
“아, 응.”
그때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예림이다.
“넌 왜 안 피하고!”
“공중에 미리 떠 있으면 괜찮을 거 같아서요. 엄청 높이 있었어요. 야, 한유현! 잡아 줄게.”
“필요 없어.”
푸른 버들잎을 쓴 유현이가 나를 안아 든 채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성현제 또한 아이템을 사용했다. 비행까지는 아니지만, 허공에 뜰 수 있게 해 주는 아이템인 듯했다. 보통 1회용이라 효과 대신 너무 비싸긴 하지만 저 인간은 돈 많으니까.
…크루즈선을 화풀이로 박살 낼 만큼. 내가 다 아까워서 눈물이 날 거 같다.
기이이잉, 연이어지는 폭음 속에 선체가 일그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라앉기 시작하는 배 위로 또다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만 좀 하시죠?”
“방금은 내가 한 게 아니라, 원래 수소폭발에 섞였어야 할 마력이 한발 늦게 폭주하는 모양이야.”
“예?”
뭔 소리냐고 묻기 전에 뜨거운 공기덩어리가 몰아쳤다. 회오리에 가까운 그것에 네 사람 모두 순식간에 휘말려 버렸다.
“아, 진짜 망할 인간.”
어딘지 모를 바닷가였다. 비행 스킬을 쓰는 예림이는 물론이고 유현이와 성 모 씨도 허공에서는 밀려오는 돌풍을 버티기 힘들었다. 덕분에 방향도 제대로 못 잡은 채 한참을 떠밀려 나가고 말았다.
바다 한가운데서 앞뒤 분간도 안 가고 휴대폰은 전기가 날뛴 가운데 죽어 버렸고. 속성 저항 가지고 있는 성 모 씨는 하필 휴대폰이 없었다. 있었어도 통신 불가능한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결국 별 보고 대충 방향 찾아 육지를 향해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성현제야 비행 스킬 없고 유현이의 푸른 버들잎은 계속 쓰기엔 마력 소모가 너무 심했다. 단순 비행이 아닌 마력으로 만든 잎을 실체화하는 거니 오래 사용하긴 힘들었다.
반면에 단순 비행 스킬은 상대적으로 마력 소모가 적었기에 마나포션은 예림이에게 몰아주었다. 그리곤 셋은 바다에 빠져 둥둥 뜬 채 줄을 잡고 예림이가 육지까지 이끌어 준 것이었다.
“다행히 한국이에요.”
예림이가 문 닫은 횟집 간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와 유현이, 성 모 씨는 당연하게도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물에 닿는 것이 싫은지 내내 유현이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던 이린이 꼬리를 탁탁 쳤다.
“피곤해 죽겠네. 이봐요, 성 모 씨, 꼭 그 난리를 쳤어야 했습니까?”
“시험해 보기 딱 좋은 환경이었지 않은가.”
이름도 부르기 싫은 성 모 씨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바다 한가운데 버리고 왔어야 하는 건데. 바닷물을 뚝뚝 흘리며 도로 위로 올라가려다가 미끄러졌다. 유현이가 얼른 나를 붙잡아 주었다.
“괜찮아?”
“…솔직히 괜찮다면 거짓말이지. 지금이 대체 몇 시야. 저녁도 제대로 못 먹었고, 어디 가게 연 곳 없나.”
해연이나 협회에 전화도 해야 한다. 하지만 드문드문 보이는 횟집은 다 문을 닫은 상태였다.
“저기 편의점 불 켜져 있어요!”
공중에서 주위를 살피던 예림이가 말했다. 다행이네. 일단 편의점 가서 전화 빌리고 배도 대충 채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