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187
187화 성 모 씨 생일 (5)
“아저씨, 그러다 감기 걸리는 거 아니에요? 요새 날씨도 덜 더워진 데다가 여기 바람 꽤 찬데.”
예림이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9월이 코앞이니 더위가 꽤 누그러지긴 했다. 어째 옷 버리는 일이 잦아서 인벤토리에 여분의 옷을 넣어두긴 했지만, 밖에서 갈아입긴 좀 그렇지. 상의라도 갈아입을까.
“어떻게 좀 해 봐, 길드장님아. 불 조절해서 못 말려요?”
예림이의 말에 유현이가 눈썹 끝을 치켜올렸다.
“형에게 화염 저항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단숨에 말리는 건 힘들어. 그러는 박예림 넌 물만 빼낼 줄 모르는 거냐.”
이린을 내게 건네주며 하는 말에 이번에는 예림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인형 빤 거 가지고 시도해 봤는데 산산조각 나서.”
“쓸모없네.”
“그러는 한유현 너는! 나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
둘이서 투닥거리다가 나한테 괜찮냐고 물어왔다가 또다시 투닥거리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오고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둘 다 꼬박꼬박 앞다투어 아침 인사를 해 왔다. 함께 밥을 먹고 배웅해 주고, 별다른 일 없으면 점심도 같이 먹었다. 유현이가 박예림 보충수업이야, 하고 혼자 오기도 하고 예림이가 한유현 바쁘대요, 하고 혼자 오기도 했다. 둘 다 오지 못할 때면 전화라도 빠뜨리지 않고 걸어왔다.
몬스터 새끼들을 돌보거나 노아와 함께 명우에게 가거나 석하얀 팀의 현장 실험 보고를 듣는 등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 되면, 다시 집이 떠들썩해졌다.
항상 나를 바라보며, 항상 웃고 있고, 항상 행복해 보이는 얼굴들이 있었다. 그것이 하루, 이틀, 다음 날, 또 다음 날. 계속해서 이어졌다.
여전히 짐은 많고 앞날은 불안하며 또, 절대 놓을 수 없는 것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슬금슬금 풀어졌다.
그래서였을까, 성현제에 대한 내 태도가 싫어진 것은.
‘숙이는 건 진짜 익숙했는데.’
이번에도 나 혼자였더라면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들 내가 좋다잖아. 성현제가 잘난 건 사실이지만 나 좋다 하는 사람들도 밀리진 않는다. 그런데 나 혼자 멋대로, 심지어 유현이가 바로 뒤에서 버텨 주고 있음에도 나를 가볍게 내던지고 싶진 않았다.
충동적인 반항심이라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불안감은 있지만.
‘그래도 물러나 주었지.’
나름 각오했는데 좀 의외이기도 했다. 확실하게 긁으려고 성현제의 파편을 합의해서 가져온 게 아니라 빼앗은 것처럼 말하기까지 했건만. 내 반발을 이렇게 쉽게 받아 줄 줄이야.
문득 뒤로 고개를 돌리자 바다에 시선을 두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푹 젖었으면 좀 초라해 보일 법도 한데 그런 유의 단어와는 인연이 없다고 주장하는 듯한 모습이다.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소리 없이 웃는다.
그 모습이, …뭐라고 해야 할까. 처음으로 성현제가 사람으로 보였다. 물론 여전히 가까운 거리라고는 할 수 없었다. 나와는 끝과 끝이라 해도 좋을 만큼의 차이가 있는 인간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약간, 새롭게 느껴졌다.
조금 궁금해지기도 했다. 저 사람은 뭘까, 하는. 스킬, 능력, S급 헌터, 길드장 등등. 그런 쪽으로는 꽤 잘 알지만 다른 쪽으로는 깜깜하다. 그래도 두어 달쯤 자주 보고 나름 가깝게도 지냈건만 평범한 부분은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저 사람도 부모가 있기는 했겠지. 어린 시절도 있었을 거고. 살면서 나름 힘들었던 일 하나쯤은 겪지 않았을까. 어울리진 않지만.
“웃지 마세요, 정들라.”
“이미 꽤 든 거 아니었나.”
“전혀 아니거든요.”
“나는 들었는데.”
무슨 헛소리야 또. 웃는 낯에 뭐라 하진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 진짜 여러모로 피곤하다.
어둑어둑하고 한적한 길가에서 유독 환히 불이 들어와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작은 편이었지만 한쪽 벽에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테이블이 붙어 있었다. 매대를 정리하고 있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우리를 보고 흠칫 굳었다. 좀 당황할 만하겠지. 계산대 안쪽으로 들어가서는 안 보는 척 힐끔힐끔 눈길을 던져왔다.
“늦어서 그런가, 남은 게 별로 없네요.”
예림이가 핫바를 집어 들며 말했다. 도시락은 하나도 없고 삼각 김밥도 몇 개 안 남았다. 삼각 김밥을 쓸어 담는 사이에 예림이가 우동에 컵라면을 꺼내며 치즈가 없다고 아쉬워했다.
다행히 지갑은 잃어버리지 않았지만, 당연히 물에 젖었고 휴대폰도 죽었으니 카드도 멀쩡할 가능성은 낮았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 오만 원권 지폐 두 장을 찢어질세라 조심조심 꺼내 계산대 한쪽에 펼쳐놓았다.
“잔돈은 청소비로 생각해 주세요. 전화 한 통 쓸 수 있을까요?”
알바생은 친절하게 휴대폰을 빌려주었다. 해연으로 전화를 걸자 이내 석시명과 연결되었다. 이쪽 상황을 알리고 대장간으로 피신한 사람들에 대해 물었다.
[네, 구조는 이미 다 되었습니다.]배가 침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조대가 보내진 모양이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어쨌나 싶었는데 리에트가 드래곤으로 변해 태워 줬다고 했다. 날개를 가진 노아도 있으니 따로 구조대가 가지 않았더라도 쉽게들 육지로 나왔을 것이다.
알바생에게 여기 위치를 묻고 석시명에게 알려 주었다. 다행히 서울에서 그리 멀진 않았다.
“한 시간 내로 올 거라네요. 세성에도 연락해 주겠답니다.”
우리가 움직이기보단 편의점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예림이가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받는 사이 삼각 김밥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성 모 씨에게도 하나 건네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업자득이니 굶으세요,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생일이니까.
‘…근데 삼각 김밥 먹을 일이 있었을까.’
혹시나 싶어서 다시 성현제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손에 들린 삼각 김밥이 무척이나 어색해 보였다. 역시 없겠지. 처음이겠지. 포장 벗길 줄 모르는 거 아니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먹을 만하니까 드세요.”
얼른. 나를 쳐다보던 성현제가 삼각 김밥으로 시선을 내렸다. 자, 빨리 비닐을 뜯어라. 팝콘 하나 렌지에 돌릴 걸 그랬나.
성현제의 다른 쪽 손이 삼각 김밥으로 향했다. 한쪽 끄트머리를 잡고는 천천히 방향을 돌려, 밑바닥의 설명서 그림을 드러냈다. 이럴 수가.
“치사하게 설명서를 보다니!”
“보라고 있는 게 아니었던가.”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여기서 그걸 진짜 보냐! 내 배신감 어린 시선 속에서 성현제가 포장지의 설명대로 빨간 끈을 당겼다. 그리곤 비닐을 양쪽으로 당겨 깔끔하게 벗겨낸다. 아, 진짜 실망이다. 아쉬움을 금치 못하는데 예림이의 신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유현 삼각 김밥도 제대로 못 먹냐!”
아니 우리 유현이가 왜. 얼른 고개를 돌리자 김 없이 드러난 하얀 밥이 눈에 들어왔다. 유현이가 조금 당황한 눈빛으로 삼각 김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내가 해 줄게.”
“어떻게 모르지? 길드장님 삼각 김밥 먹은 적 없어요?”
“형이 식사는 제대로 챙겨 먹으라고 했으니까.”
신기해하는 예림이의 말에 유현이가 대답했다.
“그래도 각성 전에는 평범한 고등학생 아니었어요? 편의점 삼각 김밥이야 간식 삼아 먹기도 하고 그런데. 딴 거는? 설마 컵라면도 안 먹어 본 건 아니지?”
“안 먹어 봤어.”
유현이의 말에 예림이가 입을 딱 크게 벌렸다. 세상에, 하고 호들갑스럽게 웃는다.
“와, 아저씨! 진짜예요? 한유현 진짜 라면도 안 먹어 봤어요?”
“아예 안 먹은 건 아니고, 봉지 라면은 집에서 가끔 끓여 준 적 있어. 몸에 좋은 거 아니잖아. 게다가 청소년기엔 역시 제대로 잘 먹어야지.”
한창 자랄 땐데. 이왕이면 제대로 챙겨 먹는 편이 좋지 않나.
“…그래도 궁금하지도 않나? 다 팔리고 없는 게 많아서 내가 우리 길드장님한테 제대로 된 편의점 음식 맛을 못 보여 주네.”
예림이가 아쉬워하며 우동을 내 쪽으로 밀었다.
“따뜻한 국물 좀 드세요.”
“고맙다.”
“한유현 너도 라면 먹을래? 내가 특별히 물까지 부어 준다. 컵라면은 물 붓고 기다려야 한다는 거 아냐?”
“됐어.”
“비빔면의 존재는 아십니까. 물 따라낸 뒤에 스프를 넣어야 하는 어려운 조리법을 가지고 있다고. 라볶이는? 떡볶이 먹어 봤어? 아, 설마 햄버거도 안 먹어 본 건 아니지?”
햄버거… 먹어 봤던가. 일단 내가 사 준 기억은 없는데. 그래도 피자나 치킨은 가끔 시켜먹었다.
“성 모 씨도 라면 드실래요?”
댁도 컵라면 같은 거 먹어 본 적 없을 분위기인데. 삼각 김밥은 그래도 먹긴 다 먹었다. 차려 놓은 생일상 제 손으로 뒤엎긴 했다만 어쨌든 생일은 생일인데 아주 약간 손톱만큼 안타깝네. 생일에 라면과 삼각 김밥은 좀 그렇지. …생일날을 대충 흘려보내는 건 얄미운 인간 상대라 해도 편치가 않다. 생일 당사자가 신나게 말아먹은 뒤라지만, 음.
“잠깐만요.”
성현제의 대답을 막고 몸을 돌렸다. 진열대에 케이크가 남아 있었는데. 티라미스 조각 케이크를 집어 들고 알바생에게 혹시 초가 있냐고 물었다. 생일 초는 없었지만 양초는 있었다. 초면 됐지 뭐.
케이크 포장을 풀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양초를 가운데 꽂았다. 유현이가 내켜 하지 않으면서도 촛불을 켜 주었다. 웃기는 모양새지만 어쨌든 케이크에 촛불이다.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짜증 나는 성 모 씨의, 생일 축하 합니다~”
왜 아무도 안 불러 주냐. 민망하게. 예림아,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지금도 충분히 쪽팔리니까.
“소원 빌고 촛불 끄세요.”
“소원이라.”
“없어요?”
“글쎄.”
“대충 지금 하고 싶은 거든 뭐든 적당히 속으로 생각하고 후 부십쇼.”
성현제는 나를 잠깐 바라보다가 촛불을 불어 껐다. 얘들아, 박수 좀 같이 쳐 줘. 내가 지금 정말 많이 민망하구나. 괜한 짓 했나.
오래 지나지 않아 차들이 줄줄이 도착했다. 해연에 세성, 그리고 협회 측까지. 그 사이로 송태원의 얼굴을 보자 죄책감이 절로 밀려들었다. 물론 내가 터뜨린 건 아니지만, 평소처럼 넘어갔으면 별일 없었겠지 아마도. …없었을까. 시험 삼아 터뜨려 보고 싶어 했을 거 같기도 한데.
“너무 자주 말하게 되는 것 같지만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내 말에 송태원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일단 비각성자의 피해는 없기에 제가 나설 일은 별로 없습니다. 현장 기록을 보고하면 협회에서 적당한 징계를 내릴 예정입니다.”
“바다 위라서 정말 다행이네요.”
“…다행이지요.”
무덤덤하던 송태원의 얼굴 위로 순식간에 피로가 짙어졌다. 그의 시선이 성현제에게로 향했다. 네, 마주치기만 하셔도 피곤하겠지요. 이해합니다.
“송태원 실장님께서는 세성 길드장에 대해 저보다 잘 알고 계시겠지요?”
문득 물었다. 근 삼 년을 엮여 왔을 테니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겠지. 그리고 나중에는 스킬까지 건네주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여전히 알 수 없었고 여전히 궁금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봐오신 것이 있는데요.”
“삼 년이 아니라 십 년을 더 지켜본다 해도, 안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송태원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향하였다. 언제나처럼 깊게 가라앉은 눈이었다.
“한유진 씨 또한 다른 의미로 어렵습니다.”
“저는 비교적 평범한데요. 저쪽에 비한다면 말입니다.”
내가 바라는 건 단순하고 평범하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특별한 건 없었다. 항상 그랬다. 단지 내가 끌어안고 싶은 사람들이, 특별해서. 어떻게든 따라가려 발버둥치는 것뿐이지.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한유진 군.”
성현제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한쪽 손에 휴대폰을 든 채였다. 그가 휴대폰을, 내 번호가 찍힌 화면을 보여 주었다. 이름 부분이 텅 비어 있었다.
“원하는 것이 있나.”
“…저한테 묻는 겁니까?”
“그럼 누구에게 물을까.”
아이템이라 적힌 자리가 지워졌다. 성현제의 시선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가벼운 어조와 다르게 무겁게 느껴지는 눈길이었다. 그가 소유하는, 소유할 예정인 물건이 아니라면 대우는 전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한 번의 실수로 가차 없는 보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나란히 선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아량을 베풀고 관대함을 보여 주는 것은 아랫사람에게 해당되는 일이다.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만약 여기서 내가 다시 원래의 명칭을 적는다면, 다시 돌아가게 되겠지.
고개를 돌렸다. 석시명과 대화 중인 유현이가 보였다. 그 옆에서 땅을 발로 툭툭 차고 있던 예림이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 방긋 웃는다.
“자요.”
자판을 몇 번 두드리고, 휴대폰을 성현제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비즈니스 파트너쯤 되겠죠, 우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성현제 씨.”
“나야말로 기대하겠네.”
기대라니, 무서운 소리구만. 성현제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명칭을 약간 고쳤다. 내 파트너.
“…왜 또 붙습니까, 그거.”
항의해 봤지만 들은 척도 않고 돌아선다. 한숨을 내쉬는 나를 송태원이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봐 왔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그는 조용히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