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475
473화 서랍 속
“유…….”
아니, 동생이 여기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저택 대문 너머에서 나타난 자는 유현이와 똑 닮아 있었다. 그것도 바로 어제 만찬장에서의 차림새였다.
“안녕하세요, 주인님.”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 모습을 하고서! 목소리도 완전 똑같아! 동생과 닮은 무언가가 미소를 머금었다.
“저는 71번입니다.”
“어, 여기 관리시스템, 뭐 그런 건가? 그보다 왜 그런 모습인 건데!”
“외관의 기본 세팅은 주인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것입니다.”
내가 물론 동생을 좋아하긴 하지만─! …잠깐만.
‘지금의 유현이, 인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어릴 때도, 좀 더 나이 들었을 때도 아닌. 그럴 만은 했다. 동생 녀석, 많이 바뀌었지. 이제는 잘 웃고 어리광도 종종 피우고 불안해하는 기색도 별로 없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좋아졌다고도 했으니까.
한유현은 여느 인간과는 다르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음에도 정말로 괜찮을까 하는 걱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동생이 살고 있고 살아가야 할 곳은 인간 사회니까.
하지만 스스로를 꺼리고 억누르며 모른 척 덮어씌워 가며 살게 하는 것은, 못 할 짓이 분명했다. 그렇잖아. 남한테 피해만 안 입히면 됐지 억지로 맞춰 줄 필요까지야 있겠냐고. 무엇보다 함께 살기 위해 맞춘다면 어느 한쪽이 아닌 양쪽 모두가 양보해야지.
그러니 지금의 유현이가 확실하게 더 좋았다. 아마 갈수록 더 좋아지지 않을까. 이따금 뒷걸음질 치거나 옆길로 새는 경우도 생기기야 하겠지만,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고. 저 옷도 잘 어울렸지.
아무튼 말이야.
“다른 모습으로 바꿔 줘. 그러니까…….”
예림이는 당연히 안 되고, 명우나 노아 씨도 좀 그렇고. 현아 씨가 나한테 저렇게 공손히 말하는 건 진짜 어색할 거 같다. 송 실장님은 평소에도 정중하지만 주인님 소리는 좀……. 부담 없이 하민이 놈 할까. 아님.
“성현제로도 변할 수 있어?”
바로 어제 주인님 소리도 하셨겠다 세성 길드장님 좀 부려먹어 보자. 내 말에 71번이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현재 주인님의 능력으로는 설정 변경이 불가능합니다.”
“…뭐? 주인이라면서 왜 그 정도도 못, 안 되는 거니.”
동생 얼굴이라 말을 험하게 하기 힘들었다.
“주인님의 공간 이해도 및 장악력이 무척이나 낮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돈데?”
“0.01퍼센트 미만입니다.”
…주인이라며. 월세 살아도 그것보다는 높겠다. 완전 남의 집인데요. 슬그머니 대문 안쪽으로 발을 들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법 너른 정원에는 처음 보는 꽃나무들이 가득이었다. 다만 식물만 보일 뿐 새나 벌나비 같은 동물의 움직임은 조금도 없었다. 눈앞의 71번도 살아 있는 생명체는 아닌 듯하고.
“그럼 호칭이라도 바꿔 봐. 그냥 이름 부르든가.”
형은 좀 그렇고.
“주인님의 공간 이해─”
“네, 안 된다고.”
얼굴이라도 가려 볼까. 마스크를 씌운다거나.
“넌 정확히 뭐지?”
“71번 서랍 관리용 인형입니다.”
“살아 있는 건 아니고?”
“인조 정령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나 생명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인조 정령은 또 뭐야.
“혹시 저 안에 위험한 게 있을까? 스탯 F급 기준으로 말이야.”
“먼저 손대지 않는다면 안전합니다.”
해파리 녀석 서랍 관리 잘해 놓고 있구나. 위험하진 않을까 의심한 게 살짝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래, 돌이켜보면 썩 괜찮은 녀석이었어. 도마뱀 새끼에 비하면 야 양반이었지. 채터박스 놈이 문제지만.
이제 한 십 분쯤 지났으려나. 조금쯤 늦어져도 괜찮겠지. 너무 오래 머무는 건 그렇고, 한 삼십 분 정도만 구경이나 해보자.
“내가 들어오고 삼십 분 지나거든 말해 줘. 그건 돼?”
“네. 가능합니다.”
“아, 밖이랑 여기 시간 차이는 없지?”
“없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주인님의 공간 장악력이 80퍼센트 이상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 것도 가능해지냐. 하긴 신입도 던전 속 시간 흐름을 다르게 만들어 줬었지. 젖은 양말을 신은 채로 길을 가로질러갔다. 으, 축축해. 기분 나빠. 71번이 조용히 내 뒤를 따라오다가 현관 계단을 앞서 올라 문을 열어 주었다. 무심코 고마워, 유현아 소리 나올 정도로 진짜 똑같았다. 행동이나 말투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길게 뻗은 복도의 오른쪽 문을 열자 너른 거실이 나타났다. 통유리창 너머로 정원이 훤히 내다보였다. 바닥은 대리석 비슷하게 반들거리고 높은 천장에는 다양한 크기의 빛의 구가 조명 대신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여기엔 아이템 같은 건 없어 보이는데.”
“휴식을 위한 장소입니다. 소파와 의자에 체력회복 기능이 있으며, 조명은 안정감을 가져다줍니다. 또한 테이블에 놓인 음식은 사흘간 신선도와 온도를 유지합니다.”
좋은데. 소파에 앉아 볼까 하다가 너무 젖어 있어서 관뒀다. 체력회복이라니 여러모로 유용하겠지만 저걸 가지고 나가는 건 아깝지.
“내가 여기서 가지고 나갈 수 있는 물건은 세 개뿐인 거 맞아?”
“네. 그렇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 공간 장악력이라는 게 올라가면?”
“71번째 서랍의 완전한 주인이 되신다면 모든 제한이 사라집니다.”
제한이 전부 없어진다니! 그럼 뭐든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건가? 가슴이 크게 뛰었지만.
“완전한 주인은 어떻게 될 수 있는 건데?”
“공간을 완벽하게 이해하여 개조 해체 생성을 자유롭게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초월자 수준이 되란 소리였다. 내가 그걸 어떻게 하냐. 명우는 신입 던전에서 마력의 구조인가 뭔가가 보인다고 했지만 내 눈에는 그냥 나무요 하늘이요 땅이었다. 그래도 명우에게 물어라도 볼까.
거실을 나가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 방은 책으로 가득한 서재였다. 71번에게 안전을 확인한 뒤 책 한 권을 뽑아 펼쳐 보았다.
“음… 좋은 내용이겠지.”
어느 나라 글씨냐, 이게.
“서재에는 집중력을 향상시켜 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저 책상에서 책을 읽을 시 내용을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예림이 가져다주고 싶다! 서재 통으로 가지고 나가면 수험생들이 줄 서서 찾아오지 않을까.
“물건 가지고 나가는 건 세 개 제한이지만 쓰는 건? 여기서 사용하는 건 괜찮아?”
“네. 다만 몸에 흡수되어 소모하는 형식의 아이템은 세 개에 포함이 됩니다.”
“…아까 물 좀 먹었는데.”
“호수 물은 아이템이 아닙니다.”
그럼 애들 여기 데리고 와도 된다는 뜻이구나. 다만 신입 말로는 마력을 보충해 주지 않는다면 서른 번 정도가 한계라고 했다. 그것도 한 명 기준이니 유현이와 예림이를 데리고 오면 고작 열 번이다.
아까워. 정말 아까워. 아이템만 챙기고 서른 번이야 비상 대피소 정도로 쓰면 되겠거니 했는데 생각보다 좋잖아, 여기!
“이 공간 마력 보충은 어떻게 할 수 있지?”
“주인님으로부터 보충이 가능합니다. 다만 지금은 연결이 끊긴 상태입니다.”
“…연결 하려면 공간 장악력인지 뭔지가 필요하고?”
“네. 단순 마력 보충은 5퍼센트 이상을 요구합니다. 또한 1회 충전량은 SSS급 마석 열 개분입니다.”
엄청 먹는구나. 다행히 내겐 마나의 샘이 있었다. 아니었으면 미라처럼 쪽 빨리고도 백분의 1도 못 채웠겠지.
이번에는 복도를 쭉 가로질러 가장 끝에 있는 문을 열었다. 동시에 새파란 물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3층 높이쯤 되는 전면 벽이 틀이나 이음새 하나 없이 통으로 투명했다. 그 너머에 호수 위로 만들어진 테라스도 있었다.
“진짜 휴양지 같네.”
“71번 서랍은 휴식 장소에 가깝습니다. 또한 최근 주인님의 세계 기준으로 리모델링되었습니다.”
71번이 대답했다. 혹시나 싶었는데 정말로 쉬는 곳이었구나. 리모델링은 나한테 건네주기 전에 한 것일까. 친절도 하시지. 어쩐지 익숙한 구조더라. 무해의 왕의 하체를 생각해 보면 평범한 의자보다는 와인 잔처럼 움푹 팬 형식이 편할 듯했다. 또한 촉수 친화적인 인테리어가 되었겠지. 그게 어떤 건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보관 중인 아이템의 등급은 물론 서랍 자체의 등급 또한 낮은 편입니다.”
SSS급 정도 될 거라고 했었지. 내 체감은 L급 뺨치는데 말이야. 내 L급 스킬 하나와 얼마든지 교환… 은, 바꿀 만한 게 없구나. 저항 스킬들 처음에는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 아니냐고 투덜거렸었는데 정말 유용하게 잘 써왔다. 저주와 독은 물론이요 공포 저항도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었지. 내 새끼 스킬이야 말할 것도 없고. 딱 하나, 마지막 보은은.
‘그건, 없어도 되지 않을까.’
그냥 영영 없는 셈 치고 싶었다. 복수는 할 수 있겠지, 복수는. 이미 한 번 사용했고 덕분에 얻은 것도 많았지만… 또다시 스킬이 적용될 일은 없기를 바랐다.
“…휴양지에 있는 아이템이라면 쓸모도 별로 없을 거 같은데.”
무기나 방어구 같은 게 아니라 이상한 능력치와 옵션 붙어 있는 거 아니냐. 형태도 소풍 바구니나 비치로브, 선글라스, 오리튜브 뭐 이런 거고.
“등급이 높으면 더 넓은가?”
“네. 공간이 확장되며 보관 가능한 물품의 등급 또한 상승합니다. 탐지와 추적, 파괴 또한 더 어려워집니다.”
“뭐야, 찾아내서 부술 수도 있어?”
“탐색 능력을 지닌 SSS급의 존재라면 가능합니다.”
그럼 초월자 상대로는 대피소로 쓸 수 없을 듯했다. 아쉽네. 그래도 우리 세계에는 SS급도 없으니 말이야. 몬스터나 가끔 SS급이 튀어나오는 정도였지. 명우네 대장간은 어느 정도일까. 신입이 대장간에 비해 적당히 만든 거라고 했으니 최소 L급에서 신화급이려나.
비교하자면 황금대장간은 특수 전문 시설이고 여긴 그냥 별장이자 창고 정도인 듯했다.
“1층에는 또 뭐가 있어?”
“식당과 카페, 욕실이 있습니다.”
“2층은?”
“거실과 세 개의 침실, 세 개의 욕실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3층.”
“수영장과 휴게실, 오락시설이 있습니다. 또한 다락방과 지하실이 있습니다.”
1층부터 3층까지는 그냥 평범한 듯했다. 다락방도 별거 없을 것 같고, 메인은 역시 지하실이겠지.
“지하실로 가자.”
그리고 명우에게 배워서라도 어떻게든 공간 장악력을 5퍼센트까지 끌어올려야겠다. 몇 번 들어오고 끝내기엔 너무 아깝잖아. 완전 휴대용 별장 아니냐고.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쓸 수 있게는 못 만드나. 애들 던전 갈 때 휴식용으로 쓰면 딱인데. 초월자들은 이런 것도 척척 만들어 내고, 좋겠다.
아, 어르신 제외. 인어여왕도 신입이나 해파리 같은 연구자 스타일은 아닌 듯했어. 사슴이랑 늑대도. 나무는 약간 이런 쪽인 것 같던데.
‘신입은 이제 내 편 많이 들어주는 듯한데. 다른 패륜아들은 어떠려나.’
우리 편은 하나라도 많을수록 당연히 좋다. 다음에 신입 만나면 인어여왕에 대해 물어볼까. 개중 제일 우리와 많이 엮였으니까. 예림이에게 스킬도 줬고 신입도 예림이를 작은 물방울이라고 부르고 있고.
지하실은 계단을 통해 내려갈 수 없었다. 정확히는 건물 내부에 계단이라곤 장식용 정도밖에 존재하질 않았다. 대신 포털이 있었다.
“공간 장악력이 높아지면 어디로든 바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71번이 말했다. 그놈의 공간 장악력. 포털을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흔히 떠올리는 지하 연구실과는 달리 훤하게 밝고 화사한 방이 나타났다. 줄줄이 늘어 선 장식장 안에는 사각 큐브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저거 다 아이템 맞지? 응?”
겉보기엔 똑같은 모양새였지만 제각각 다른 아이템이 들어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를 눌러 잡으려 애쓰며 묻자 71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이 닮아서 더 예뻐 보이네! 아 왜 세 개밖에 못 들고 가. 그래도 좋다.
“카탈로그 같은 건 없나. 그냥 막 꺼내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큐브 상태로는 안전합니다.”
“그래?”
얼른 가까운 장식장을 열었다. 큐브가 놓인 선반에 이름표 같은 게 붙어 있었지만 읽을 순 없었다. 큐브를 꺼내들자 속에 든 아이템 정보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A급, 칠색 거북이 등껍질.’
이건 재료 아이템이네. 재료도 많은 건가. 아, 명우 데리고 와서 연습용으로 쓰라고 해도 되겠다. 완성품 가지고 나가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그 옆의 큐브도 들어 보았다. S급 필로올 나무열매. 이 장식장은 다 재료인가? 건너편 장식장을 열어 큐브를 확인했다.
“SS급 신발!”
장비다! 옵션, 옵션까지 자세하게는 안 알려 주네. 꺼내서 착용해 봐야 하나? 일단 내려놓고 옆의 것도 잡았다.
“이것도 SS급이네! 근데 스푼……?”
뭐지. 설마 무기는 아닐 테고 이걸로 음식을 떠먹으면 더 맛있기라도 하나. 장비도 있었지만 별 희한한 아이템도 섞여 있었다. 진짜 잡다하게 넣어 둔 중요하지 않은 창고인 모양이었다. 가방도 있고. 그때 솔렘니스에서 산 가방 유용하긴 했는데.
장식장을 몇 칸 넘어가 확인해 보자.
“스킬이잖아!”
A급에서 SS급까지 스킬 큐브로 가득 차 있었다. 아, 진짜 아까워! 스킬! 헉, 이쪽은 스탯? 기본 스탯을 올려 준다고? 아니 이래도 돼? 영구 적용이라서인지 한 자릿수 상승이 S급이었지만 그래도!
“세 개라니, 왜 세 갠데! 해파리! 무해의 왕님! 너무하잖아!”
그림의 떡이냐! 절로 발이 동동 굴러졌다. 동시에 위기감도 번쩍 들었다. 무해의 왕만이 아니라 다른 초월자들도 이런 걸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이잖아.
‘…채터박스가 이런 아이템으로 각성자들을 성장시켜 준다면.’
우리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도 금방 아닐까. 물론 제한은 있겠지만 방심해선 안 되겠다 싶었다.
근데 진짜 여기서 어떻게 고르냐. 뭐가 이렇게 많아.
“추천해 줄 만한 거 없어? 아니, 그냥 애들을 데리고 와서……. 근데 30분 아직 안 지났나?”
잠시 넋 놓고 뒤진 지 한참 된 거 같은데 왜 말이 없지. 71번을 돌아보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직 27분 45초 남았습니다.”
“…뭐? 잠깐만!”
고작 2분 15초 지났을 리가 없잖아! 물에 빠졌다가 기어오르는 데만 해도 10분 가까이 걸렸을 텐데?
“밖이랑 여기 시간흐름 같다며? 진짜 2분 지났다고?”
“정확히 2분 16초 지났습니다.”
“…말하는 사이 10초는 흐르지 않았어? 진짜 2분 16초밖에 안 지났다고? 그러니까, 내가 있는 세계에서 말이야!”
71번이 잠깐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2분 16초는 무해의 왕의 시간 단위입니다. 주인님 세계의 시간 단위로는 1시간 27분 19초가 흘렀습니다.”
역시 한참 지났잖아! 무해의 왕의 시간 단위라니, 그 동네 시간의 단위가 우리와 다르구나. 그래도 고작 한 시간 반이니까 괜찮겠지. 아쉬운 마음으로 큐브를 내려놓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