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586
584화 재료 손질 (6)
수십 개의 점이 이리저리 움직였던 지도가 이제는 잠잠해졌다. 문현아가 사라지고 성현제가 리에트에게 접근한 뒤 이내 리에트 또한 사라졌다. 노아는 다른 헌터들을 두엇 더 공격한 뒤 기권한 듯했다.
‘리에트가 성현제에게 당한 건 아니겠지.’
노아가 그것을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을 린 없으니까. 그리고 예림이는 송 실장님과 한참 동안 같이 있다가 사라졌다. 저번 성현제와 싸웠을 때처럼 끈질기게 대련을 요청한 모양이었다.
“아이템에다 속성저항 템 붙일 줄은 몰랐다, 정말.”
굵직한 나무 두 그루 사이에 대롱대롱 매달린 헌터가 혀를 찼다. 빠른 속도가 특기, A급 화염 창 스킬, 근력은 낮은 편, 시각과 질주, 점프스킬, 활과 창을 쓰며 S급 감지 스킬에 의존도가 높음, 목표 명중 보정으로 피하기 힘듦, 근접전에 약하지만 그래서 만만한 상대에게는 도리어 근접공격을 하는 경향이 있음.
함정을 설치한 뒤 감각을 속이기 위해 안개를 흩뿌렸다. 함정의 마나는 감추어지지만 농도는 옅게, 함정 너머에서 어슬렁거리는 내가 보일 정도로. 그리고 결과는 보다시피 굵은 거미줄 같은 함정에 휘감겨 매달리게 되었다. 함정에는 화염 저항 아이템을 달아 놓아 A급 화 속성 스킬로는 바로 태워 버릴 수도 없었다.
헌터가 크게 몸을 흔들었다. 아래위로 줄이 움직이긴 했지만 바닥에 닿을 정도는 아니었다.
“발이 땅에 닿질 않으니 스킬로 힘을 더하지도 못하고. SF 씨, 다 알고 이래 놓은 건가? 어떻게 함정을 눈치 못 채게 한 거지?”
치이익, 불길이 일며 줄에 시커먼 그을음이 생겼다. 시간을 끌려는 듯 헌터가 열심히 종알거렸다. 길어야 3분이면 힘으로든 스킬로든 끊어낼 수 있겠지. 좋은 아이템이긴 하지만 S급 헌터를 잡아두기엔 모자랐다. 지금처럼 조건을 맞추지 않았다면 바로 벗어났을 것이다.
“헌터 능력치야 당연히 비밀이랍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풀 충전한 총을 헌터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헌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탕, 소리와 함께 헌터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시 지도를 바라보았다.
“…성현제.”
다수의 헌터를 해치우고, 송태원과 마주쳤다. 송태원 또한 이내 사라졌다. 기권을 권유한 걸까.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헌터들을 전부 제거할 생각인 걸까.’
그가 뭘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남은 헌터는 우리 둘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 성현제게 그에게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리 빠른 움직임은 아니었다. 산책로에서 마주치기라도 한 듯 두 사람이 가까워지고, 깜박. 헌터의 표시가 사라진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나도 이런 상황을 노리고 있었다.
‘리에트 혹은 성현제. 이 둘이 가장 걸맞으니.’
내가 마지막까지 무사히 살아남는다면 말이다. 유현이는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내 동생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형제니까 봐준 거 아니냐, 짜고 친 거다 라는 말이 분명 나올 테니까. 방송 내내 우리 사이가 워낙 좋게 비춰지기도 해서……. 예림이는 너무 어려 S급이니 뭐니 해도 보기에 좋지 않고, 송 실장님은 또 공무원이시니. 현아 씨와 노아 씨는 잘만 연출하면 꽤 괜찮겠지만, 리에트와 성현제에 비하면 아쉽긴 했다.
‘현아 씨는 마지막 보스보다는 보스를 잡는 영웅 쪽이 더 어울리기도 하지.’
어쨌든, 성현제였다. 그리고 성현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만 남겨 두려 하고 있었다.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성현제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주먹이 절로 꽉 쥐어졌다. 다른 헌터들 상대로는 안개를 통한 은신 스킬이 효과적으로 통했다. 하지만 성현제는 감각을 가린다더라도 전투예지로 접근을 알아챌 것이다. 급습은 불가능하다. 함정도 같은 이유로 사용하기 힘들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 목록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일단 독은 통하겠지. 하지만 독 저항 아이템도, 해독제도 분명 있을 테고. 실레키아를 가지고 있으니 그걸 입고 오려나.’
전기 저항 아이템을 꺼내 손목에 찼다. 은혜가 있다고 해도 약한 전류로 나를 방해하는 것은 가능했다. 포션 병도 깨뜨릴 수 있을 테고. 유현이의 예장이 조금 아쉬워졌지만, 내가 반쯤 탈취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검과 달리 예장까지 받으면 싫은 소리 나올 게 분명했다. 게다가 그 상황에, 예장까지 없으면.
‘…그새 키가 많이 커서.’
유현이와, 유현이는 달라졌지만, 그러면서 또 비슷해져 가고 있었다. 지금의 유현이가 더 커질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 전에 한 번은 똑같아질 때가 있을 것이다.
…눈을 한번 꽉 감았다가 떴다. 이런 생각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지.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대비는 해두어야 했다. 안개 아이템을 사용하고 지팡이도 꺼내 들었다.
[붉은 안개 나무의 잎가지 – SS(복제품)]금속성 붉은 줄이 치렁하게 늘어진 하얀 지팡이였다. 예전 무해의 왕이 사용했던 무기의 복제품으로 성능은 훨씬 떨어졌다. 검붉은 줄칼은 공간이동이 아닌 순간이동만 가능했다. 아마 전투예지를 무시하는 효과도 없지 싶었다.
내게 등록되어 있고 이번 일정이 끝나면 사라질 지팡이를 땅에 박아 넣었다. 그러는 사이 성현제가 점차 가까워졌다. 안개가 발목 넘게 깔린 숲 너머에서 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옷차림이 다르신데.”
“피가 튀어서.”
성현제가 대답하며 장갑을 마저 손에 끼웠다. 안쪽의 셔츠와 바지는 그대로이니 방송 중에 모자이크 처리될 짓은 하지 않은 듯하지만, 겉옷이라도 이 와중에 갈아입고 오다니 살짝 짜증이 났다.
“더럽게 여유로우시네요.”
“그렇게 보인다니 다행이로군.”
“실레키아는 어디다 팔아먹으셨는지.”
“빌린 아이템으로 주인을 상대하는 것은 도의가 아니지 않나.”
가늘게 뜬 눈으로 하얀색 코트를 노려보았다. 혹시 저거 독 저항이 높은 건가. 내가 독을 쓸 거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을 테니. 코트와는 반대되게 검은 장갑이 색 바랜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올린다. 손길이 스쳐 지나가고 이마 위로 흐트러져 내리는 머리칼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군.”
성현제가 코트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코트 자락이 일으키는 바람에 안개가 술렁, 움직거린다.
“채터박스인가.”
“예.”
“한유진 군은, 이런 식으로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 텐데.”
“그쪽처럼 여유 만만한 층들이나 그런 한가한 소리 하는 거고요. 전 원래 닥치는 대로 씁니다. 수단방법 가리다간 머리 날아가요.”
급하면 흙모래라도 집어 뿌려야지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성현제가 한 걸음 내디뎠다. 동시에 내가 한발 물러섰다. 금색 눈에 웃음기가 어렸다. 꽤나 다정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현재 저 인간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쯤은 그간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도련님이 화내지 않던가.”
“댁이 무슨 상관입니까.”
“사랑해 마지않는 형님이라 해도 너무 봐줬군.”
“…뭐라는 거야.”
말을 내뱉고, 바로 땅바닥에 몸을 던졌다. 동시에 지팡이의 줄들을 뻗어 내 앞을 막았다.
카가강!
사슬과 줄이 뒤엉킨다. 전류가 가볍게 파직 튀었다. 안개 안으로 몸을 굴리며 성현제를 향해 선생님 스킬을 썼다.
“……!”
강한 거부에 숨이 콱 막혔다. 눈앞이 어찔하다 못해 순간적으로 의식이 흐려진다. 간신히 놓지 않는 끈을 따라 성현제의 시야가 비추어졌다. 그는 아직 원래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줄에 묶인 사슬이 찰랑, 고리고리 흩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며 나를 향해 날아든다. 피하려고 했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큭!”
사슬이 목을 조이고 그대로 끌어당긴다. 억지로 일으켜진 채로 성현제와 시선이 마주쳤다.
“말해 보게.”
“…이럴 때마다 재수 없는 거 알아요? 세상에서 자기만 잘났지.”
“나만, 이라고까진 하지 않겠지만 잘난 건 사실이지 않나.”
너무 그렇게 타박하면 억울하다는 소리에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욕도 같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진짜 내가 미쳤다고 그쪽 걱정을 다 했지.”
“그렇지만 한유진 군은.”
장갑 낀 손길이 다가왔다. 내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고 귀 쪽으로 내려와 살핀다. 은혜를 찾는 것일 터였다.
“지금도 나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겠지.”
“그거야! 성현제 씨도 휘말린 건 사실이니까요. 댁 잘난 것처럼 그냥 사실이잖습니까. 납치고 당하고 도둑질도 당하고.”
사슬에 휘감긴 목에 손이 닿았다. 은혜는 찾지 못한 채 통역 아이템을 뚝, 끊어낸다.
“그건 왜!”
“다른 아이템인 척 감출 수도 있지 않나.”
…아이고 똑똑도 하셔라. 내 셔츠 목깃 단추를 손가락 끝으로 눌렀다가 탁, 뜯어냈다.
“혹은 아이템이 아닌 척도 가능하겠지.”
“와, 그것 참 좋은 방법이로군요. 그냥 코와 입을 틀어막으셔도 될 텐데.”
“한유진 군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좋아해.”
지랄.
“그래서 설명은.”
“엿 먹으세요?”
“예전에 한유진 군이 내 옷을 벗기겠다며 협박했던 적이 있었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 미친? 내가 언제? 지금 음성 끈 거 확실하지?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외치려다가 퍼뜩 떠올렸다. 설마 그, 털실? 실 풀어 버리겠다고 했던 그거?
“양심도 없지!”
“분홍색의 작고 귀여운 양심은 먼저 내보냈다네.”
단추가 하나 더 뜯겨 나가고 사슬이 움직이며 내 몸을 빙그르 돌렸다. 성현제의 눈을 통해 사슬 틈으로 비치는 각인이 보였다. 그리고 저 망할 인간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예감할 수 있었다.
“야!”
지팡이의 줄을 움직였다. 순간이동 한 줄이 성현제의 발 근처 땅을 콱, 파고들고.
콰앙!
폭탄이 터졌다. S급 헌터에게 피해를 입힐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땅 아래서 치솟아 오르는 압력을 인간의 몸으로 버텨내기는 힘들었다. 성현제가 한발 먼저 뒤로 물러나 쏟아지는 토사를 피하고, 내 몸은 사슬과 함께 붕 떠올랐다.
휘익!
동시에 남은 줄들이 성현제를 향해 날아들었다. 순간이동을 하는 수십 개의 줄. 제아무리 전투예지가 있다더라도 연속적으로 뻗어가는 공격을 전부 피하기란 힘들다. 수색자의 사슬이 나를 버리고 주인을 지키기 위해 차그랑, 아래로 떨어진다.
사슬과 줄이 얽히는 사이 빙그르 몸을 돌려 착지했다. 성현제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내 설명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눈썹을 조금 들어 올리며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이런 방식은 한유진 군에게 좋지 않아.”
“…누가 모른답니까. 채터박스 그 미친놈이 저한테 무해의 왕을 덧씌우려는 건, 대충 알고 있어요.”
루가 폐야의 유산을 좀 더 완벽하게 다듬기 위해서. 정확히는 채터박스가 생각하는 무해의 왕의 모습에 가까워지도록 만들기 위해서. 이번 파티를 통해 내 위치를 높였다. 루가 폐야는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왕이니까.
그리고 지금 이 지랄은, 장식 정도겠지. 무해의 왕의 아이템으로 나를 꾸미고 승자의 자리에 앉히려는 수작이었다.
“짐작하고 있겠지만 조건으로 제 주변 사람들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성현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역시나 예상하고 있었다는 투였다. 뭐, 그거 말고 날 움직이게 할 만한 조건이 있겠냐마는. 성현제가 아니라 우리 삐약이도 쉽게 추측했을 거다.
“제가 이렇게 헌터들을 이기고, 최종 우승까지 한다면 채터박스는 제게 있어 소중한 이들을 먼저 해치진 못하게 됩니다.”
“대신 한유진 군은 채터박스가 원하는 모습이 된다, 라는 것이겠군.”
“그런 셈이긴 한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성현제를 똑바로 마주 바라보았다.
“계약이 없었더라도 저는 이기려고 발버둥 쳤을 겁니다.”
채터박스와 무관하게.
“그냥, 저를 위해서요.”
안개가 흔들렸다. 하얀 지팡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자 입안이 씁쓸해졌다.
“…지금은 이 꼴이긴 하지만.”
채터박스의 손이 뒷덜미에 닿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시작은 분명 이런 게 아니었는데. 어째서인지 조금 추워졌다.
[하지만 당신의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을 겁니다.]그렇게 말했었다. 계약에 따라 도움을 주겠노라 하면서. 분명, 나 혼자 힘으로는.
“그렇군.”
성현제가 짧게 말했다. 건조한 목소리였다. 파지직, 전류가 튀어 오르고.
콰르릉!
“…윽!”
사방이 새하얗게 빛났다. 순간적으로 폭발한 전격에 사슬을 휘감고 있던 줄들이 단숨에 튕겨 나간다. 차르르, 맑은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괜찮았던 선생님 스킬의 저항감이 또다시 밀려들었다. 이를 악물며 간신히 버텨냈다.
숨을 몰아쉬는 나와는 다르게 성현제는 여전히 여유로워 보였다. 숲의 그늘이 드리워진 장신의 몸 위로 사슬과 전류의 빛이 어지럽게 얼룩진다. 눈부시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우선은 전부, 치워내도록 할까.”
거슬리는 것들을. 사슬이 지팡이를 향해 날아들었다. 카가가각, 금속성 마찰음이 요란하게 울린다. 줄들이 마구 얽히는 것도 아랑곳없이 황금빛 사슬이 지팡이를 완전히 휘감았다. 그리고 또다시.
콰과광!!
빛이 터졌다. 하얀 지팡이에 금이 가고, 쩌저적 갈라지며, 파편이 높게 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