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590
588화 기억의 안개 (2)
내 어깨에 손이 얹혔다. 인간의 것과 같았다. 이마에 하나 더 달려, 원래 세 개였던 루가 폐야의 눈도 인간처럼 둘뿐이었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상체 아래는 흐릿한 안개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어쨌든, 무해의 왕이었다.
“…너, 어떻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입이 움직였다. 루가 폐야가 흘러넘치는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대답했다.
“나는 기억의 안개니까.”
“기억?”
“네게 남긴 건 그저 메시지야. 하지만 그것 또한 내 기억의 조각이지. 원래라면 한마디만 전하고 흩어졌을 조각이지만~ 지금 이걸 보렴!”
새하얀 손이 또다시 저 너머의 사람들에게 인사하듯 흔들린다.
“무해의 왕! 루가 폐야! 안개는 기억을 삼키며 기억은 내 양분이자 힘이야. 이토록이나 많은 사람에게 나를 알리고, 씨앗이 깃든 화분에 그 힘이 깃들었는데 어떻게 싹이 트지 않을 수가 있겠어?”
…내가 화분이라는 건가. 채터박스는 파티 내내 나를 향한 사람들의 인식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식을 무해의 왕으로 뒤바꾸려고 하였다.
“안개바다의 주인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 말을 이해하는 아이가 가장 먼저 듣는 이야기였어. 안개의 주인을 기억하렴. 안개를 잊어버리면 아빠도 엄마도 잊게 된단다~”
노래처럼 흥얼거리던 무해의 왕이 내 정수리에 턱을 얹었다. 그리곤 채터박스를 바라보았다.
“들려줘!”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루가 폐야는 순수하게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 뭐냐. 날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
“응? 내가 왜?”
…그렇게 물으니 할 말이 없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식으로 부활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터였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얌전히 당하고만 있을 순 없기에 여전히 루가 폐야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채터박스를 향해 소리쳤다.
“네 안개가 여기 있으니─”
“내가 왜 쟤 안개야?”
루가 폐야가 내 머리에 턱을 콕콕 두드리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미안해졌다. 무해의 왕이 저 미친놈 소유는 절대 아니지.
“채터박스가 주장한 거고 나는 동의 안 해. 아무튼 루가 폐야, 일단 내가 널 죽인 게 아니라고 말 좀 해줘.”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을걸? 내가 누구 손에 죽었다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거야~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된 건데? 채터박스는 왜 저 꼴이야? 넌 왜 나로 변하고 있는 거고? 방송은 뭐야? 이 세상에는 아직 초월자에 대해 알리지 않기로 한 거 아니었어?”
재밌을 거 같은데 얼른 들려줘! 하고 루가 폐야가 내 어깨를 손으로 찰싹찰싹 쳤다. 글러먹은 것 같았다. 해파리는 자기 재미에만 신경 쓰고 있었다. 원래 그런 인간, 초월자긴 했지만.
“…루가 폐야.”
침묵하고 있던 채터박스가 입을 열었다. 그가 경배하듯 두 손을 펼쳐 들어올렸다.
“완벽해.”
“왜 둘 다 딴소리만 하는 거람.”
루가 폐야의 말조차 무시한 채 채터박스가 활짝 소리 없는 웃음을 머금었다.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던 안개가 다시 나를 향해 모여들고 마력 또한 내 몸을 파고들었다.
“채터박스!”
“사랑하는 나의 안개를 내 손으로 다시금 이곳에 탄생시킨다!”
“얘들아, 나 재미없어지려고 해.”
무해의 왕의 것이 아닌, 내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닿았다. 채터박스는 기뻐하고 있었다. 환희에 가까웠다. 그래, 당연히 기쁘겠지. 모조품 만들려고 다듬던 재료에서 돌연 진품이 튀어나왔으니. 정확히는 복제품쯤 되겠지만, 그래도 모조품보다는 훨씬 진짜에 가까운 것이다.
“루가 폐야, 윽, 가 네 말을, 따를 것 같아? 이런 식으로 만들어 내면, 네놈을 죽이려 들지도 모르지!”
“그것 또한 완성의 하나입니다.”
“…이 미친 새끼야!”
무해의 왕의 손에 죽어도 좋다는 건가. 그리고 되살아난 무해의 왕은, 분명 유현이를 가만 두지 않을 터였다. 자기 즐거움을 위해 손대겠지. 흥미를 보였던 성현제와 송태원 또한 무사하긴 힘들 것이다.
“젠장, 나는 한유진이야!”
무해의 왕이 아니다. 나를 어떻게든 붙잡고 있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침식은 확실하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채터박스가 버티려고 발버둥 치는 나를 무감하게 바라봐왔다.
“지금 사람들은 온전한 한유진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맞거든.”
“파티에서 만들어진, S급을 누른 F급을 보고 있지요.”
“그게, 나야.”
툭, 채터박스의 구두 끝에 군림자의 검이 걸렸다. 손잡이를 눌러 밟으며 미소를 띤다.
“이것 또한 한유진의 것이 아닙니다.”
“내, 가 샀어!”
내 포인트로! …비록 성현제가 준 포인트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원래의 당신은 들 수조차 없는, 그런 등급의 검이지요. 들어 휘두른다고 해도 생채기나 났을까요.”
“…….”
내가 군림자의 검으로 성현제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유현이의 힘이다. 그래도 내 동생이고, 내가… 잃어버린.
“이것도, 이것도.”
검이 밀쳐지며 살쾡이 세트와 은혜, 이어링을 툭툭 건드렸다.
“이 모든 것을 전부 벗겨 놓는다면. 한유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얻었어. 내가 노력해서!”
“F급은 S급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당연한 사실을 말한다는 듯이,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이 순간, 사람들이 지켜보는 한유진은 채터박스가 만들어 낸 완성품입니다.”
아니다.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지만 동시에 저 말에 흔들리고도 있었다. 이만하면 잘했다. 내가 가진 능력 이상으로 해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한유진은, 처음부터 실패를 끌어안고 있었다. 쌓아 올린 그 기둥의 가장 아래가 푹 파헤쳐져 있었다.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유현이 덕분이, 맞으니까. 나는 지키지도 못하고 되찾지도 못한 채 받기만 했다. 그것만큼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한유진은 사라져야 합니다. 더 많은 이들이 보고 느끼는 것이야말로 진실이지요. 언제나 그렇듯이.”
“…개소리.”
진실은, 무슨. 입술을 깨물었다. 따끔함에 조금쯤 정신이 들었다.
“그래, 다들 그러더라. 그렇게 생각하더라. 그래도! 그래도 아니었어!”
내 동생은 마지막까지 나를 지켰고 나도 동생을, 사랑했다. 너희들이 틀린 거야. 너희들이 틀려서, 내가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는 거라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는.”
그 말에 화들짝 음성을 켜려고 했다. 초월자에 대해서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무해의 왕이 SSS급 정도의 힘만 가져도 세상은 엉망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음성은 켜지지 않았다.
“아무런 소용이 없지요. 조용히 묻혀 버릴 뿐입니다.”
“이건, 계약과 다르잖아!”
“파티는 이미 끝났습니다. 한유진이 무어라 외치든 사람들은 들어주지 않습니다.”
“…….”
회귀 전과 같았다. 내 말을 들어주는 몇몇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무시하고 왜곡했다. 허탈했다. 왜 이번에도…….
“…아니, 네가 막은 거잖아. 이번에는 들어줄 거야!”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내 목소리를 듣고 믿어 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를 응원해 주던 사람들이 분명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음성을 켜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채터박스!”
“당신은 지금 이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방법이 없다. 그런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안개가 성큼, 더욱 깊이 파고들어왔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입술을 짓씹다가 무해의 왕을 돌아보았다.
“한 가지만, 약속해 줘.”
“응?”
“내게 소중한 사람들, 알잖아. 제발 손대지 마.”
최소한 그것만이라도. 무해의 왕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시시해라. 그러니까 채터박스가 방송을 하고 있다는 소리지? 나를 위해서.”
“…그래. 수많은 사람이 지금 이 장면을 보고 있어. 너도 느낀 모양이지만.”
루가 폐야가 내 어깨 위를 피아노라도 치듯 톡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목소리 대신.
[한유진이 사라지는 건 재미없어.]머릿속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 너도 보여 줘!]“뭐, 뭘… 어떻게.”
작게, 거의 입만 움직여 대답했다. 루가 폐야가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을 감싸는 안개를 손끝으로 휘저었다.
[네 기억.]“……?”
[사람들에게 너를 보여 주는 거야! 지금 이 방송은 나를 위한 내 것이니, 그들은 나와 연결이 되어 있어. 기억을 보여 주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지~]“그…….”
기억을 보여 준다니.
[한유진이 한유진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채터박스가 무슨 짓을 해도 흔들리지 않을 확고한 인식을!]무해의 왕이 내 뺨을 가볍게 건드리다가 쓸어내렸다.
[나도 궁금하니까. 자, 어떻게 할래? 네 기억을 내게 건네주겠어? 전부 먹혀 사라지기 전에 대답해!]“…다는, 안 돼.”
[음, 좋아. 정말로 안 되겠다 싶은 몇 부분 정도는 넘어가 줄게. 그럼~]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해의 왕이 손뼉을 짝 쳤다.
“잘 먹겠습니다!”
눈앞이 새카맣게 물들었다가.
“다녀오세요.”
익숙한 집이 나타났다. 열두어 살쯤 되었을까, 내가 현관에서 인사하고 있었다. 안개에 뒤덮인 듯 흐릿한 부모님이 도망치듯 집을 나선다. 나는 돌아서서 방에 있던 동생에게 달려갔다. 유현이가 나를 보고 웃었다. 나도 마주 웃었다.
“이제 거실에 나와도 돼.”
“응, 형.”
유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을 방해하면 안 돼. 그런 핑계를 대고, 그 핑계를 믿었었다. 엄마아빠가 우리를 싫어하는 게 아니야. 두 분 사이가 너무 좋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야. 집에 덩그러니 버려졌지만 형제의 얼굴은 밝았다.
장면이 바뀌고 장례식장이 나타났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우리 둘만 남게 되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퇴했다.
“나도 형 도와줄 수 있어.”
중학생인 유현이가 내게 말했다. 나는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괜찮다니까. 신경 쓸 거 하나도 없어!”
진심이었다. 정말로 괜찮았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내가 봐도 행복해 보였다.
“제 동생 진짜 착하다니까요. 그래서 가끔은 걱정이 될 정도예요. 너무 착하고 얌전해서 누가 괴롭히는 건 아닌지.”
“요즘 애들 사이에선 잘생긴 것도 권력이야. 괜찮아!”
“정말로 그러면 문제없을 텐데요. 이것 보세요.”
대체 몇 번째냐며 타박을 들으면서도 나는 웃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이었다. 여름, 가을, 겨울.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내 생일도 지나간다. 어느 기억을 보아도 좋지 않을 때가 없었다. 유현이도 나도 밝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한유현!!”
내가 소리쳤다. 휴대폰을 쥔 손이, 표정이 간절했다.
“위험하다잖아! 네가 왜 던전엘 들어가! 유현아, 그런 건 어른들에게 맡기는 거야… 응?”
동생이 각성하고 나는 동생을 붙잡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화도 내고 애원도 하고 울며 빌기도 했었다.
“이건 전에 본 거네.”
무해의 왕이 내 어깨에 팔을 기댄 채 말했다. 몇 번을 봐도 속이 아팠다. 내 표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TV에 비치는 동생의 표정도 완전히 달라졌다.
“한유진 씨가 한유현 헌터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한유현 헌터는 S급이니까요.”
헌터 협회 사람이 내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동생 잘나가고 있는데 왜 저러냐면서 혀를 찼다.
“동생이 그렇게 걱정되었어? 태생 S급인데?”
“…애 얼굴을 봐라.”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진짜 잘나가고 있고, 정말로 자기가 하고 싶어서 집 나간 거였으면, 표정이 밝아야지. 사람들은 해연 길드장 성격이 원래 그렇다고 말했지만, 십여 년간 봐온 내 동생은 그렇지 않았다.
“…총은 안 통한다던데요.”
무장한 내가 칙칙한 얼굴로 선임에게 물었다. 선임이라고 해봤자 몬스터를 상대해 본 경력은 달 단위였다.
“그건 등급 높은 몬스터고 하급은 통하긴 해. 효율이 나빠서 그렇지. 관통은 안 되어도 밀려 나가기는 하고.”
당시 군대는 외적이 아닌 국내의, 던전 브레이크 대응에 주력하고 있었다. 덕분에 입대 기간도 짧았다. 위험한 시기에 끌려왔기 때문에, 라고 했지만 실상은 군대가 더 안전했다. 부대마다 헌터가 일정 수 배치되었고 무기도 소지할 수 있었으니까.
…돌이켜 보면 군대에 끌려간 덕에 오히려 던전 브레이크가 잦은 시기를 무사히 보낸 것일지도 몰랐다. 유현이 헌터 일 못 하게 하겠다고 여기저기 위험한 곳도 많이 찾아다녔었지.
“…나쁜 놈.”
제대하고, 텅 빈 집에 발을 들였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문을 연 순간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내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홀로 남은 집에서 결국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듯 이사했었다.
그리고 각성. 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나도 보기 싫은 내 꼴이 모두의 눈앞에 드러났다.
회귀 전의 내가.
“뭐? F급?”
나를 후원해 주겠다던 남자들 중 하나가 비웃음을 던졌다.
“그놈의 동생, 동생 하더니! 이거 어쩔 거야! 해연 길드장한테 받아내기라도 해야 하나!”
“무, 무슨 소리야! 계약 취소하면 되잖아! 장비고 뭐고 안 받아!”
헌터로서 자리 잡기 위해 도와주겠다, 라는 계약이었다. 갓 헌터가 되면 원래 주머니가 넉넉한 것이 아니고서야 장비를 갖추기가 힘들다. 던전 공략권을 구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계약은 취소되지 않았고, 내겐 장비 대여비와 공략비라는 명목의 빚이 얹혔다.
중급만 되었어도 평범한 계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F급, 그것도 보조계였고.
– 캬르르륵!
“야, 신입! 어디 갔어!”
바위 뒤에 웅크린 채 떨고 있는 내가 보였다. 아무런 교육도 없이 들어간 던전은 공포 그 자체였다. 겁에 질려 도망치기만 바빴던 내게 당연히 보상은 주어지지 않았다. 한유진은 그렇게 F급 헌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