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752
751화 속삭임 (2)
잘랑 잘랑- 달빛이 운다. 무수한 은빛 실이 느릿이 흔들리며 어긋난 듯 어우러지는 노래를 하고 있다. 달이 떴으니 밤이나 하늘도 땅도 훤하였다. 말 그대로 백야였다. 그 모습이 마치 초승달의 행보를 비추는 것만 같았다.
완벽하게 차올라 해를 대신하여 세상을 비출 달. 근원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오르게 될 새로운 신.
초승달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게 된다면 모든 세상이 뒤바뀔 것이다. 근원에서 비롯되는 법칙 자체가 사라질 터이니. 어쩌면 보다 나아질지도 모른다. 초승달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근원이 너희들을 삼키는 일이 사라질 것이라고.
[단 하나만 포기한다면.]방울 소리가 속삭여 왔다. 지금이라도 물러난다면 네가 바라는 일상을 손에 쥘 수 있단다. 언제나 그렇듯 달게 울렸다. 한 걸음만 뒤로 디딘다면 나는 편히 살 수 있었다. 바로 그 너머에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바라는 욕망들이 모두 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그 밖의 많은 것들이.
“당신이 이곳에서 가져갈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초승달을 바라보았다. 은빛 형체가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미동 없이 서 있는 듯하지만 무수히 변화하는 달빛이.
“나는 물론이고 박하율도.”
그리고 성현제도.
[너는 매번 나를 방해하는구나.]초승달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나만을 향한 속삭임이 아니었다. 성벽 아래에서 유현이가 검을 고쳐 쥐며 몸을 일으켰다. 문현아 또한 부서진 창을 꿈을 빚어 다시 만들어 낸다. 인형술사가 한 발 앞으로 나서고는 옆에 송태원이 버티고 섰다. 예림이와 성현제도 각자의 무기를 들었다. 피스의 으르렁거림이 나직이 들려왔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겁니다.”
[그래.]“그쪽으로선 무척 거슬리겠지만요.”
짧게 숨을 삼켰다. 저건 초승달의 본체는 아닐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종속이 있다 해도 초월자가 본래의 힘을 지닌 채 난입할 수는 없는 세계니까.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리도 없었다.
초승달의 두 눈이 살짝 휘었다.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한 너 또한 사랑스럽단다.]“…….”
[네가 어떠한 방식으로 어떠한 길을 걸어가더라도, 그 하나하나가 전부.]숨이 탁 놓였다. 옳은 일도 그른 일도 그 모든 것이 달 아래 같았다. 이미 알고는 있다. 그럼에도 허탈하기도 하고 갑갑하기도 했다.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 아무런 차이를 두지 않으면서 말하는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그 답답한 화조차 닿지 않을 상대였다.
“…그러하다시니 끝까지 발버둥 쳐 드리죠.”
[나 또한 설득하겠다. 물러나렴.]“싫습니다. 그쪽이야말로 물러나시죠. 어차피 박하율의 절반은 제 것이고, 전 이미 소유의 계약을 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초승달의 지배가 박하율의 씨앗이 심어지기 전부터 있었다 해도 시그마와 내 계약보다는 늦을 것이다. 고작 반년 전임과 동시에 도플갱어 인형이 자아를 갖추고 초월자로 성장한 그 긴긴 시간 전의 계약이니까.
초승달의 손길이 박하율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박하율이 내게 집착하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좀 정상적인 호의를 보였다면 나도 고마워했을 텐데 말이야. 초승달의 시선이 나를 지나쳐 인형술사를 향했다. 인형술사가 가볍게 고개 숙여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해야 하나. 애 데리고 스카우터들 눈길 피하느라 나름 고생했어.”
[풀려 나간 한 가닥. 내게 돌려주렴.]“싫어. 그 애도 내 거야.”
[네가 쥐고 있을 수 없는 것이란다.]인형술사는 대답 대신 차갑게 웃었다. 달빛이 다시금 잘랑거린다. 초승달의 모습이 흩어지며 달빛 사이로 안개처럼 섞여 든다.
[그러나 머지않았다.]목소리와 함께 방울 소리가 희미해져갔다. 이윽고 옅어진 달빛 아래 고요함만이 남았다. 침묵이 흘렀다.
‘정말로… 갔나?’
이렇게 쉽게? 넋 놓고 주저앉아 있는 박하율이 보였다.
“일단, 박하율 가까이 다가가지는 마세요!”
내 외침에 몇몇 사람들이 막혔던 숨을 토했다. 에밀리가 평소와 달리 서늘해진 표정으로 초승달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감히 신이라 칭할 수 있겠군요. 그 존재감 이전에, 태도가 말입니다.”
모든 것에 공평하며 사랑을 말하면서도 결코 변화시킬 수 없는 존재.
“그런 신은 사양입니다만.”
필요 없다. 성벽의 담 위로 올라섰다. 송 실장님이 급히 내게 다가왔다.
“위험합니다!”
“괜찮아요. 저 지금 박하율 힘 절반을 가지고 있거든요.”
지금은 내가 제일 강할걸. 가볍게 돌 벽을 박찼다. 아래로 뚝 떨어진 몸이 아무런 타격 없이 땅을 디딘다. 은혜의 도움도 필요치 않았다.
“괜찮아?”
“…응. 형은.”
유현이가 약간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 왔다.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아. 박하율은 아직 초승달의 지배하에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여기서 기다려. 현아 씨도요.”
“조심해, 형님.”
“제가 구른 게 얼만데요.”
동일한 힘이라면 박하율 정도야 얼마든지 잡아 누를 수 있다. 경험의 차이가 얼만데. 그래도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박하율을 향해 걸어갔다.
‘정말로 초승달이 포기하고 물러 난 거라면.’
한쪽 손을 가볍게 주먹 쥐어 보았다. 반토막 난 힘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에서 깨어난 탓인가, 지금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래도 SS급 정도는 될까. 바깥에 알려 다시 모두들 최대한 잠들어 달라고 부탁한다면 박하율의 능력도 다시금 강화 될 것이다.
‘우선 애들부터 돌려보내야지.’
그리고 남은 힘으로… 동생을 데려온다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만 가능해진다면 정말로 끝이다. 완벽하게. 박하율을 어떻게 설득하나 고민했는데 그게 해결된 거나 다름없었다. 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하율아.”
박하율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멍하던 눈에 빛이 조금 돌아온다. 그래, 그래.
“혀엉!”
“야! 달라붙지 말고! 아직 초승달이 너 조종할지도 모른다고!”
“지, 진짜 무서웠어요!”
녀석이 훌쩍거렸다. 내 앞에서는 강한 척하더니 제 주인인 초월자와 마주치니 엄청 겁먹은 모양이었다.
“근데 형은, 이번에도 절 구해 주시고!”
“뭐, 그렇게 되었지.”
“역시 전 형이 좋아요! 으허헝!”
박하율이 아예 펑펑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거참.
“아니 네가 좀 평범하게 굴었으면 나도 밀어내진 않았겠지.”
“하지만, 형이, 형이─!”
“일단은 내가 좋아하는 걸 존중해 줘. 사람이든 취미든 물건이든.”
“…위험해도요?”
“그걸 너 혼자 정하지 말라는 말이야! 대화를 해야지, 대화. 내가 설사 줄 없이 번지점프를 하겠다고 나서도 일단 대화부터 해야 한다고. 날 납치해서 가두고 번지점프대를 박살 내는 게 아니라.”
“…줄 없이 번지점프 하려고 들면 경찰이 출동할 거 같은데요.”
주제에 쓸데없이 상식적인 소리를 하네.
“예시야, 예시. 그리고 아이템 써서 멀쩡히 착지할 수도 있는 거잖아. 무슨 사정인지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한다는 거지. 나도 너와 똑같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고 성인이야. 어린애라더라도 대화를 해야 하고.”
“그치만…….”
“박하율, 날 제대로 봐.”
녀석이 똑바로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F급이고 약한 것도 사실이지. 하지만 어떠냐. 초승달로부터 널 구해 줬잖아. 예전에도 나보다 강한 헌터들 상대로 너를 구해 줬었고. 그 밖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난 이렇게 네 앞에 서 있어.”
박하율이 눈을 끔벅거렸다. 손등으로 젖은 눈가를 비비더니 고개를 끄덕거린다.
“형이 저보다 더 대단해요.”
“아니 뭐, 음. 그렇긴 하지.”
그래, 박하율보다야 내가 더 대단하긴 한 거 같다. 아무튼.
“자, 그럼 하율아. 내 일행들 말이야, 우리 세계로 돌려보내 줘야 하거든. 지금은 안 되겠지?”
“네. 많이 약해져서 안 돼요.”
“사람들에게 다시 잠들어 달라고 부탁할 거야. 그리고 네 힘 절반도 돌려줄 거고.”
“진짜요?”
“그래야 하니까.”
애들 돌려보내는 것과 유현이를 되찾아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세계를 유지할 필요도 있었다. 적어도 한 달 이상, 이왕이면 그보다 오래 안전하게. 성현제가 보호받게 되면 초승달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으니 방어막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이렇게 계약서를 쓰는 거야. 박하율은 한유진으로부터 힘을 돌려받는 즉시 한유진 일행을 원래 세상으로 보내 주고 한유진의 소원을 하나 들어준 뒤 10년간 잠든다.”
“…10년이요? 잠든다고요?”
“깨어 있으면 초승달이 다시 노릴 테니까. 야, 그리고 10년 정도면 그리 긴 것도 아니잖아. 너 살인미수에 상해에 납치 공조에 납치에 죄목만 해도 몇 개인데. 정식으로 재판 받으면 10년쯤은 가볍게 나와. 상급 각성자인 셈이니 특수 붙어서 더 길 수도 있어.”
상급 각성자는 보통 가둬 두기보다는 여러모로 부려 먹지만. S급쯤 되면 살인도 아니고 미수 정도야 그간의 공과 사회적 어쩌구로 벌금만 거하게 내고 말겠지만. 박하율이 시무룩한 얼굴로 끄덕거렸다.
“그래도 진짜 10년이나 자요? 너무 긴데…….”
“많이 봐줬다, 상황 봐서 깨울 수 있다는 조건도 달아 주마. 초승달이 널 쉽게 포기하진 않겠지만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신입이나 어르신에게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초월자로 완전히 각성하면 우리 세상에 머물긴 힘들 테니까 신입에게 신입 받으라고 하고 말이야. 신입에게 미안해지네. 그래도 근본이 나쁜 놈은 아닌… 듯하니 의외로 잘 지낼지도 모르지.
“…형이랑 같이 있고 싶은데.”
“꿈꾸면 너 있는 데 찾아가 주마. 초승달 때문에 어쩔 수 없어.”
“근데 지금은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요.”
박하율이 두 팔을 크게 흔들며 말했다.
“이 세계에서 막 깨어났을 때부터 뭔가 간섭하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요. 진짜로요.”
“그렇게 느끼도록 한 걸지도 모르지. 방심하게끔.”
아무렴 박하율을 그냥 놓아 줄까. 인형술사가 등급 높은 계약서 한 장쯤은 들고 있을 거 같은데. 성벽을 향해 이젠 괜찮은 거 같다며 손을 흔들었다. 달빛에 얼마 밀려나지 않아 근처에 있던 예림이와 성현제가 우리 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성문도 활짝 열렸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야.]긴장이 풀어졌다. 몸도 마음도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마지막으로.
[성현제만 죽이면.]가볍게 날아오던 예림이가 코메트를 탄 강소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성현제가 보였다. 그에게 다가갔다. 나를 바라보던 금색 눈이 희미하게 커졌다. 우리는 동시에 느꼈다. 내 손이 그의 심장을 향했다. 그것을 둘 모두 알아챘지만 나는 멈춰야 할 필요성을 몰랐으며 그는 피할 수가 없었다. 너무 가까웠고 내가 더 강하고 빨랐다.
그러하였기에.
우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팔을 따라 피가 흘러넘쳤다. 금색 눈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속의 빛이 점차 흐려진다.
“아, 아저씨?”
“길드장님!”
예림이와 강소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쓰러지는 몸을 붙잡았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외쳤다.
“오지 마!”
훅 들이켜는 공기가 새빨갛게 비렸다.
“전부 물러나!”
아직 따뜻한 몸뚱이를 끌어안았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어깨 너머로 박하율의 당황한 얼굴이 어른거렸다.
…박하율의 말이 맞았다. 초승달은 박하율을 완전히 놓아주었다. 대신 그 모든 지배력을 쏟아 내게, 속삭였다.
하지만 대체 왜. 피에 젖은 팔로 멍하니 성현제를 붙잡고 있었다. 달이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멈추었던 숨소리가 귓가에 닿아 왔다.
초승달은 손님을 맞이하였다. 오래된 인연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냐.”
어린 혼돈이 물었다.
“그 녀석의 정체가 드러나는 걸 막고 싶어 할 줄 알았건만.”
달빛을 통해 초월자들의 눈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래 쌓이고 쌓여 근원에 닿아 가는 힘이 드러났다. 감추어진 일부가 들추어지고 잠깐이나마 그 깊은 속을 내보였다. 모든 초월자들이 눈치챈 것은 아닐 터였다. 그러나 상당수가 술렁이고 있었다.
패륜아든 그 반대에 서는 이든 중립에 서는 이든, 누구나가 품고 있는 근원을 향한 갖가지 열망. 모든 것의 시초와 유사한 존재가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존재한다.
“오랜만이야.”
초승달이 미소 지었다.
“한 번도 찾아오질 않더니.”
“그럴 이유가 없었지. 가는 길이 다르니까.”
어린 혼돈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하였다. 반대로 초승달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여러 초월자들을 이끌고서.
“역시 눈치챘구나. 그럼에도 두었어.”
“그 녀석도 사람이고자 하고, 사람이라 말하는 아이가 있으니. 그래서 무슨 속셈이냐. 이제 와서 손 놓을 리도 없고.”
“마지막이거든.”
달빛이 내리는 꿈을 떠올리며 초승달이 말했다.
“채워 낼 마지막 한 잔. 원래는 내가 심어 놓은 씨앗을 주려고 했어.”
여러모로 부족한 점은 있으나 그래도 초월자의 씨앗이었다. 그것을 작은 달이 삼키게끔 하려 했었다.
“실패하였지만, 대신 할 물방울들이 넘쳐 나니.”
제 몸을 던지고 싶어 안달 난 초월자들이. 내리는 빗방울 속에서 잔은 채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