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hortstop hits a home run too well RAW novel - Chapter 92
92. 데이트
지금 백유진은 숙소였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호텔 로비에서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백유정은 물론 유행운 역시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친누나인 백유정에게는 큰 기대감이 없었다.
답장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예상했기에, 읽씹을 당했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유행운은 다르다.
같은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현재 프로야구 데뷔 동기였다. 그런데 지금 까톡을 보고도 답장을 하지 않는다.
아예 답장할 가치가 없다는 듯 굴고 있었다.
“포기해라, 이 자식아.”
옆에서 구경하던 강우성이 잔소리를 한다.
“원래 남녀 관계는 타인이 어떻게 할 수 없어. 네가 아무리 방해하려고 용을 써도 소용없다니까?”
“제가 왜 타인이에요.”
“피를 나눈 남매여도 좀 가까운 남일 뿐이야.”
야구선수는 대체로 일찍 결혼한다.
강우성도 마찬가지였다. 강우성은 프로야구 데뷔하던 해에 신인왕은 물론 각종 타이틀과 함께 MVP까지 휩쓸었다.
젊은 나이에 성공한 그에게 여자가 따라오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강우성은 순정파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알았던 소꿉친구와 오래 연애를 했고 2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다.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고 지금도 알콩달콩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유행운이 지금 연애를 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안정감을 찾을 수 있다.
문란하게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는 게 아니라면 진지한 연애는 야구에 도움이 되었다.
“아무튼 싫어요.”
“뭐가 그렇게 싫은데?”
“저는 유행운하고 가족으로 묶이고 싶지 않다니까요.”
“행운이 사람 괜찮잖아.”
“그거와는 별개예요.”
“나는 내가 여동생이 있었으면 행운이 같은 남자 만났으면 좋겠는데.”
진심이었다.
항상 강우성은 후배가 들어오면 천천히 뜯어보았다.
미국 생활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비시즌에는 한국에 돌아와 신인 선수를 둘러보는데, 확실히 올해 입단한 백유진이나 유행운이 진국이었다.
유행운은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한 유망주였다.
지금은 유망주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데뷔 첫해부터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고 있었고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낼 거라고 단언한다.
물론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유행운은 근면 성실한 선수였다. 재능도 갖고 있는 노력파.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연습했고 그 누구보다 노력하는 선수였다.
성격도 진중했으니 이런 남자라면 사랑하는 가족을 맡길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당연히 1등 신랑감이었다.
“형은 없잖아요, 여동생.”
“없지. 그래서 아쉽지.”
“없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거예요.”
백유진은 제 편을 들어 주지 않는 강우성에게 약간 삐친 느낌이었다.
이럴 때 백유진은 역시 막내티가 났다. 물론 아직 20살, 만으로는 19세였으니 어린 건 당연했다.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을 해도 애는 애였다.
“너무 과하게 신경 쓰지 말라고.”
백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강우성이 말했다.
“네가 반대하면 반대할수록 둘은 더 찰싹 붙을걸? 그런 거 모르냐? 남이 안 된다고 하면 더 불타오르는 거. 네가 지금 기름을 붓고 있는 거라니까.”
* * *
지금 이 시각.
백유정은 아예 핸드폰을 무음으로 돌려놓았고 유행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유행운은 외출을 허락받았다. 내일도 선발 출장은 없었고 손목이 정상적으로 회복되기 전까지는 단순한 타격 훈련도 금지하고 있었다.
해서, 유행운은 특타를 할 이유도 없었고 컨디션 조절을 위해 잠을 푹 잘 필요도 없다. 내일도 대타 출전을 할 확률이 농후한데, 어제 경기 중도에 교체되었고 오늘은 아예 선발 출장을 하지 않았기에 몸 상태가 굉장히 좋았다.
“여기 맛있죠?”
“네. 너무 짜지도 않고 너무 헤비하지도 않고.”
원래 가볍게 커피 한 잔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늦은 시간인 데다 살짝 허기짐을 느낀 유행운이 패스트푸드를 이야기했고, 자연스럽게 백유정이 자주 오는 음식점으로 이동했다.
미국에서 건너온 수제버거 브랜드 패스트푸드점이었다.
백유정은 핫케이크와 커피를 주문했다. 유행운은 연어 샐러드와 미니버거를 주문했는데, 당연히 결제는 유행운이 잽싸게 해결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유행운은 관심이 있는 여자에게 얻어먹는 성향은 아니었다. 만약 이보다 어릴 때 만났다면 돈이 없어서 얻어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유행운은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생각해 보니, 아니다.
돈이 없다면 애초에 연애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 너무 염치없는 거 같다. 계속 이렇게 얻어먹기만 하고.”
백유정은 오늘은 기필코 결제에 성공하려 했다.
이미 테이블석 티켓도 받았고 주차권도 신세를 졌다. 가끔 이렇게 얼굴을 보면 유행운은 뭔가를 해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 관심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호감 가는 사람이었기에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계속 그렇게 저한테만 얻어 드세요.”
“네?”
“저한테만.”
유행운이 샐러드를 포크로 쿡 찌르며 강조했다.
“남자 중에는 저한테만 얻어 드세요.”
그 말과 함께 씩 웃는다.
순간, 백유정이 멈칫하며 유행운을 바라본다.
‘설마 선순가……?’
능숙한 말 한마디에 이런 생각이 즉각적으로 떠오른 탓이었다. 하지만 유행운은 선수는 아니다. 그저 지금 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뿐이었다.
“저 선수 아니에요.”
“헉, 어떻게 알았어요?”
“표정에 다 드러나요.”
“아…….”
백유정이 당황하며 제 입을 가렸다.
목소리를 내어 이야기한 건 아니었지만, 속마음을 들키고 나니 뭔가 굉장히 멋쩍었다.
“진짜 스무 살 맞아요?”
“네, 맞아요.”
“만으로 하면 열아홉, 맞죠?”
“네, 생일은 다음 달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만 열여덟.”
“근데 왜 그렇게 능숙해요?”
“제가요?”
백유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 생각을 처음 하는 게 아니었다. 유행운은 아직 어린 나이에도 여자가 좋아하는 걸 안다. 어떻게 하면 호감을 얻을지 아는 남자였다.
그게 바로 세심함이었다.
오늘 백유정이 직관하는 걸 알고 미리 티켓을 준비하는 준비성. 그 이후에 차를 끌고 온다는 정보를 듣고 바로 주차권을 준비하는 세심함.
이 모든 것은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가?”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말이 없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순수하게 스무 살로 보이겠지만, 속은 서른이 넘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간.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도 없었고 알게 될 사람도 없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인데, 이 일을 믿어 줄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장난기가 발동한다. 뭔가 놀리고 싶은 마음.
백유정은 보면 볼수록 놀리는 맛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면은 백유진과 비슷했는데, 서로 비슷하다고 말하면 표정이 싹 굳을 것이다. 그 모습마저도 재밌었다.
“속은 서른하나거든요.”
“네?”
“누나, 제가 회귀자라면 믿으시겠어요?”
“…….”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러다.
“풉.”
백유정이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유행운 역시도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자, 백유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장난도 할 줄 아는구나?”
“그럼요. 나도 사람인데.”
“신선해요. 진지한 사람이 그런 농담 하니까, 더 매력적이고.”
백유정 역시도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다.
유행운은 말없이 그저 백유정을 바라보았다. 야구를 하면서 중간중간 백유정과 대화를 한다. 가끔은 통화도 하는데, 그 순간이 휴식처럼 느껴졌다.
과거로 회귀한 유행운의 인간관계에는 엄마가 있었으며 그다음은 대부분 야구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모든 것이 야구가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야구가 중심이다.
야구가 없는 삶은 상상해 본 적 없는 유행운이었다.
“저 선물 있어요.”
적막을 깨고 백유정이 가방에서 박스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뭐예요?”
“진짜 고민했거든요?”
선물 포장된 박스를 유행운에게 밀어 주며 백유정이 말했다.
“매일 고민했어요. 행운 씨에게 필요한 게 뭘까. 오늘도 나 얻어먹고 또 티켓도 받았는데, 뭔가 보답이 하고 싶었거든요.”
그니까.
“얼른 열어 봐요.”
“지금요?”
“응, 반응 궁금해요.”
포장을 뜯는다.
유행운도 궁금했다. 포장을 뜯으니 상자가 보였다. 이것도 따로 산 건지, 무슨 선물인지는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상자를 연다.
그러자 커스텀 작업이 들어간 워치가 보였다.
“어.”
“따로 커스텀 맡겼어요.”
유행운은 국내 제품 핸드폰을 사용하는데, 그 업체에서 제작된 워치였다.
일반적인 워치였지만 뭔가 달랐다. 시곗줄에 네잎클로버가 귀엽게 그려져 있었다.
“이거?”
“네. 예쁘죠? 제가 직접 그린 네잎클로버예요.”
“와, 엄청 귀여워요.”
예상 밖의 선물이었다.
사실 유행운은 물욕이 없었고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고가의 워치가 없었다. 사과 워치니, 블랙홀 워치니, 그다지 중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운동선수들 이런 거 사용 잘 하더라고요.”
“마음에 들어요. 뒤에 각인도 했네요? 제 영문 이름.”
“네! 맞아요!”
“나 너무 비싼 거 받은 거 아니에요?”
“전혀.”
백유정은 부잣집 딸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학벌을 내세워 고액 과외도 하고 있었다. 돈이 충분히 있었고 이 정도 선물은 충분히 가능했다.
“여자에게 선물 받는 취미는 있죠?”
“글쎄요. 이제라도 그런 취미 만들어 볼까요?”
“거봐, 선수라니까.”
바로 맞받아치는 유행운을 보며 백유정이 볼멘소리를 냈다.
“누나에게만 받을까요? 선물?”
유행운이 장난스럽게 묻는다.
“네, 선물은 나한테만 받아요.”
“그럴게요.”
백유정이 미소를 지으며 유행운이 들고 있는 워치를 보았다.
“잠깐만요.”
조심스럽게 시계를 받아 든 백유정이 직접 유행운의 손을 잡아 끌어왔다. 손이 맞닿는 그 순간, 유행운의 표정이 굳었지만 최대한 떨림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백유정은 손을 잡은 채 시계를 직접 손목에 채워 주었다. 조심조심, 적당히 줄을 조절하여 워치를 채워 준 백유정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흡족했다.
고민한 보람이 있을 정도로.
“잘 어울린다.”
고개를 든 백유정이 유행운을 바라본다.
유행운이 가만 백유정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떨어뜨렸다. 여전히 손가락 끝을 잡고 있는 백유정이었다.
“누나.”
조심스럽게 백유정의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끼운다.
천천히 손바닥을 마주하고 그대로 손을 잡았다. 고개를 든 백유정의 눈이 서서히 커진다.
미소를 지은 유행운이 살짝 몸을 일으키며 백유정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입술을 맞추고.
“저랑 사귈래요?”
* * *
꿈을 꾼다.
백유진은 일찍 잠에 들었다.
그 꿈에서는 유행운이 나왔고 그 옆에는 친누나가 서 있었다. 그리고 유행운의 뒤에는.
“엄마! 아빠!”
아장아장 걷는 귀여운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삼촌!”
그 아이가 달려와 백유진에게 안겼다.
백유진은 아무 생각 없이 아이를 안았다. 그 아이는 모자이크 처리되어 얼굴을 인식할 수 없었지만, 꿈에서 움직이는 백유진은 조카를 몹시 귀여워했다.
그리고.
“처남. 우리 애 좀 부탁해.”
유행운이 제 친누나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 우리 애?’
서서히 자각이 된다.
지금 제 품에 안고 있는 아이는 백유정이 낳은 아이. 그리고 누나는 유행운과 결혼을 했다. 백유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게 무슨 개같은 소리야?”
“개같은 소리라니, 유진아.”
유행운의 손을 놓고 백유정이 다가온다.
백유진이 뒷걸음을 친다. 서서히 다가온 백유정의 손에는 베개가 들려 있었고 풀스윙을 당기며 소리쳤다.
“매형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으아악!”
그 순간, 백유진이 악몽을 꾼 사람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벌떡 일어났다.
불길한 꿈이었다. 그 내용은 다시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였다.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낸다.
“아니야. 꿈은 반대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여전히 심장이 매섭게 뛰고 있었고 손발이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그의 잠을 설치게 한 꿈은 백유진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악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