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orage member of the mandol has returned RAW novel - Chapter (235)
235화 이해해 줄 단 한 사람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한 발짝만 다가서면 그토록 갈구하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요?”
그 물음을 끝으로 재하는 곧게 뻗은 복도를 지나 공허한 리빙 룸에 당도했다.
나는 홀린 듯 재하를 뒤쫓았다.
“그게 아니면 확신이 필요해요?”
재하는 리빙 룸 한가운데 놓인 그랜드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
마디가 얇은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를 가볍게 오르내렸다.
“만일 내가 결단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호사는 누릴 수 없었겠죠.”
재하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쾅. 불협화음이 울려 퍼지며 그랜드 피아노 위로 몸이 기울었다.
재하는 내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가슴팍을 짓눌렀다.
한동안 나를 내려다보던 재하가 입을 열었다.
“결국 선우 씨도 나하고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거예요.”
“…….”
“선우 씨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에요.”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재하를 올려다봤다.
그는 몹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선우 씨하고 나야말로 진정한 운명 공동체예요. 우리는 절대로 적이 될 수 없어요.”
“소름 돋는 말만 골라서 하는 재주가 있네요.”
“와, 방금 그 말은 조금 상처받았어요.”
“기분 좋아지라고 한 말은 아니니까요.”
재하는 훌쩍이는 시늉을 하며 왼쪽 가슴을 어루만졌다.
나는 그제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선우 씨의 다정함은 그쪽 멤버들 한정인가 봐요. 나한테 조금만 나눠 주지 그래요?”
“싫은데요.”
재하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한참을 웃어 젖혔다.
이윽고 턱을 괸 채로 말했다.
“뮤지컬 《바이러스》의 원작 소설은 읽어 봤어요?”
“오디션 보기 전에 도서관에서 잠깐 훑어보긴 했어요.”
“우리에게 꼭 걸맞은 서사라고 생각해요. 선우 씨가 아이작 배역을 맡게 되어서 기뻐요.”
아리송한 말이었다.
재하는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어 눈가에 가져다 댔다.
“무대에 오르면 아이작의 눈으로 나를 바라봐요. 원하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 * *
창고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쾌적한 방에서 눈을 떴다.
시곗바늘은 오전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망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휴대 전화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뒤늦게 확인한 휴대 전화는 배터리가 방전된 상태였다.
나는 서둘러 와이셔츠에 팔을 꿰고 방 밖으로 나섰다.
다이닝 룸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던 재하가 아침 인사를 건네 왔다.
“잠은 잘 잤어요?”
“너무 푹 자서 문제예요. 좀 깨워 주지 그랬어요.”
“달리 스케줄도 없다면서요. 앉아서 커피나 들어요.”
“아뇨. 돌아가 봐야 해요.”
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재하는 내 몫의 커피를 내어주었다.
나는 가던 길을 돌아서 다이닝 테이블 앞으로 향했다.
“다 마시면 가도 되는 거죠?”
“역시 선우 씨는 다정하네요. 실은 숙소에서 여럿이 지내다가 혼자 있으려니 적적했거든요.”
“거짓말을 숨 쉬듯 하시네요.”
“티 났어요? 하하.”
그도 그럴 게 재하는 싱글 라이프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70평이 훌쩍 넘는 집에 좋아하는 물건을 가득 채워 넣고 유유자적한 삶을 살다니.
“선우 씨도 누릴 자격이 있어요.”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재하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지금 숙소, 다섯이 지내기에는 많이 좁죠?”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만 가 볼게요.”
커피잔을 내려놓고 등을 돌렸다.
아파트 단지에서 벗어나 지하철에 오를 때까지 덴 혀의 얼얼함은 가시지 않았다.
* * *
노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귀가했더니만, 환영 대신 윽박이 돌아왔다.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이 멱살을 붙잡혔다.
“한선우 너 이 자식, 메시지 한 통만 띡 남겨 놓고 휴대 전화 전원을 꺼? 누구 도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놓고 말해. 전원은 내가 일부러 끈 게 아니고 배터리가 방전된 거야. 그리고 사정은 충분히 설명했잖아.”
“지하철 끊겼다고 택시도 같이 끊기던? 네가 그러고도 아이돌이야?”
“왜, 날마다 네가 택시비 기부라도 하게? 그럼 고맙고.”
내 멱살을 거머쥔 지호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보다 못한 병철이가 싸움을 중재했다.
“둘 다 그만해. 서로 사과하고 끝내.”
“사과는 내가 받아야지. 다짜고짜 멱살부터 잡혔는데.”
“지호 형, 어제 걱정된다고 현관 앞에서 날밤 새웠어.”
“잠 안 자고 기다리라고 한 적 없어.”
내 말에 지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이내 사과 한마디 없이 작은 방에 틀어박혔다.
“선우 형하고 지호 형 둘 다 피곤해서 날이 섰나 봐요. 진정되고 나서 다시 이야기할까요?”
“아니, 씻고 다시 나가 봐야 해.”
하준이를 지나쳐 욕실로 향하려는데, 누군가 명령조로 일렀다.
“앉아.”
거실 한편에서 도겸이 형이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숙소에 있었네요. 바쁘다면서요.”
“그래, 누구 때문에 나가지도 못했네.”
“다 같이 내 탓 하기로 말 맞췄어요?”
“일단 앉아. 이야기 좀 하자.”
현관 앞에서 서성이던 병철이와 하준이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나는 구겨진 와이셔츠를 벗어 내리며 거실 바닥에 앉았다.
“선우 너, 이런 식으로 계속 멤버들하고 싸울 거면 뮤지컬 그만둬.”
언성을 높일 힘도 없어서 덤덤하게 받아쳤다.
“제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했나요? 형이 보기에는 다른 방안이 있었어요?”
“대표님한테 들었어. 네가 먼저 사무실 지원 없이 활동하겠다고 했다며.”
“네.”
“지금 네 태도를 봐. 네 입으로 말해 놓고 불만이 아주 많은 것 같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왜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유명 디렉터까지 고용해 가며 편하게 솔로 데뷔 준비하는 형한테만큼은 그런 말 듣고 싶지 않네요.”
“한선우.”
“입씨름하고 싶지 않아요. 불화를 일으키는 건 제가 아니라 형이에요. 멤버들하고는 알아서 풀 테니까, 이 이상 관여하지 말아요.”
더 들을 가치가 없어서 몸을 일으켰다.
도겸이 형은 허탈한 듯 웃음을 흘렸다.
“선우야, 네가 너무 낯설다.”
“그게 아니죠.”
나는 볼 안쪽을 꽉 깨물며 형을 내려다봤다.
“그게 아니라 형은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요.”
제각기 엇나가는 멤버들을 제자리에 붙들어 놓은 것도.
블랙시즌의 인지도를 현재 수준까지 끌어올린 것도.
전부 나였다. 오롯이 내 힘으로 일궈 냈는데.
그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형을 응원하겠다고 한 마음마저 변하게 하지 말아요.”
* * *
뮤지컬 《바이러스》 연습 이틀째.
잠자고 먹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연습에 투자하고 있다.
노래, 안무, 대사…… 끝나지 않는 연습으로 머릿속은 이미 포화 상태였다.
재하를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오디션을 치른 것이 얼마나 무모한 행위였는지 체감됐다.
“선우 씨, 지하철 막차 끊긴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도 절망하고 있던 참이니까 말 걸지 말아 주세요.”
“오늘도 우리 집에서 자고 가요. 이참에 아예 눌러앉으면 더 좋고요.”
“……사양할게요. 오늘은 택시를 타서라도 숙소로 돌아가야 해요.”
아침에 그 난리를 쳐놓고서 이틀 연속으로 외박할 수는 없었다.
지금쯤 현관 앞을 지키고 있을 멤버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가 봐야겠어요.”
“데려다줄게요. 그 대신 한 시간만 더 연습하다 가요.”
재하의 제안에 발목이 붙잡혔다.
“여기서 더요?”
“뒤처지는 거 알고 있잖아요.”
하긴, 재하와 나를 제외하곤 모두 베테랑이라 불리는 뮤지컬 배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종일 연습에 전념해도 그들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게 현실이었다.
“그래요 그럼. 딱 한 시간만 더 연습하다 가요.”
“1막 엔딩이요. 아까 보니까 감정 전달이 잘 안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 부분 먼저 짚어 봐요.”
눈을 감았다가 뜨면 텅 빈 연습실은 고요한 장례식장으로 변한다.
재하와 나는 닥터 노아와 연구원 아이작으로 다시 태어났다.
“아버지에 이어 루시까지…… 이제 내 곁에는 아무도 없어.”
노아의 약혼자인 루시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일어난 일이었다.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그 누구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오직 노아와 그의 소꿉친구인 아이작만이 장례식장을 지켰다.
– 손끝에 그녀의 체온이 머무르네
귓가에 그녀의 음성이 메아리쳐
늘 외로움에 젖어 있던 그녀를
혼자 떠나보낼 수 없어
노아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루시를 뒤따라가고자 한다.
나는 팔을 뻗어 노아의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노아, 내가 있잖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너와 나는 형제나 다름없어.”
“너마저 내 곁을 떠나면 그땐 정말 나 혼자 남게 되는 거야. 나는 그게 너무 무서워.”
“약속할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네 곁을 지키겠다고.”
노아의 등이 잘게 떨려 온다.
한동안 숨죽여 흐느끼던 노아가 고개를 들었다.
“너를 잃기 전에 내 손으로 그 살인귀를 찾아내겠어.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
나는 노아의 뒤통수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내 노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살인귀라고 매도하지 마. 어쩌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잖아.”
“아이작,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살인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어.”
“들어 봐. 그자가 나타난 이후로 범죄율이 급감했어. 바이러스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자의 모든 행위가 범죄인데. 손에 피만 안 묻혔을 뿐, 미치광이 살인귀인 것은 변함없어.”
나는 노아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있던 팔을 놓았다.
한 발짝, 두 발짝. 뒤로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그자는 이따금 타 버린 숲에 나무를 심곤 해. 또 굶주린 짐승에게 먹이를 내어주기도 하지.”
“아이작…….”
“그리고 하나뿐인 소중한 형제에게 기꺼이 품을 내어주는 사람이야.”
“너 설마…….”
마침내 노아가 살인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나는 노아에게 손을 뻗었다.
– 모두가 나의 잔혹함을 욕해도
나를 이해해 줄 단 한 사람
내 삶의 빛 오직 너만이
이 계획을 완성할 수 있어
굳어 버린 노아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눈을 맞추며 대사를 이어 나가려던 찰나.
“일일 매니저 최하준 등장!”
“너만이 온전히 나를 느낄 수…… 응?”
“한 배우님, 모시러 왔는데…… 엑?”
“허억!”
연습실 문이 쾅 닫혔다.
마지막으로 본 건 입을 떡 벌린 하준이의 얼굴이었다.
재하가 턱을 어루만지며 퍽 심각한 어조로 읊조렸다.
“어떡하죠. 우리 들켰나 봐요.”
“그러게요…… 가 아니라, 들켰다고 말하지 마요! 이상하게 들리잖아요!”
그로부터 정확히 30초 뒤, 연습실 문이 끼익 열렸다.
하준이는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두 분 한창 중요한 대화 중이었던 것 같은데 10분 뒤에 다시 올까요?”
“가, 가지 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30분 뒤에 다시 올게요.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시간 더 늘리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