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32
(31)
아놀드 남작가의 타운하우스는 한산했다.
사육제 이후로 느끼는 간만의 평화.
타운하우스의 고용인들은 다들 탈력감과 나른함에 취해 있었다.
사육제를 즐기러 올라온 남작은 일주일이 멀다하고 지인을 초대해서 연회를 즐겼다.
남작부인은 수도에서 만날 수 있는 사교 행사에 참석하느라 매일같이 치장을 했다.
그래도 이번 사육제는 좀 나았다.
남작부부가 예전보다 덜 예민했기 때문이다.
사교계에서 돌고 있는 소문이 좀 가라앉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남작부부의 ‘유일한 걱정거리’가 해결된 것일까.
어느 쪽이든 고용인들에게는 행운인 일이었다.
아놀드 남작의 타운하우스를 관리하는 집사는 조용해진 집 분위기가 만족스러웠다.
연회 준비도 슬슬 힘에 부치는 나이니.
그는 흰머리가 희끗한 제 머리를 만졌다.
집사는 고요한 저택을 살피고는 제 집무실로 향했다.
이렇게 시간이 남는 것도 오랜만이다.
그러니 이 시간을 현명하게 쓰고 싶었다.
책을 읽는다던가, 장부를 점검한다던가.
그러나 집사가 계단을 올라가기도 전, 밖에 나갔던 하녀 하나가 그에게 달려왔다.
“집사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예정된 손님은 없을텐데. 혹시 남작님을 찾아왔는가?”
“아닙니다. 남작님이 아니라, 그게…….”
망설이던 하녀는 결국 실토했다.
“하르트만 공작가에서 아멜리아 아가씨를 찾으십니다.”
하르트만에서, 아멜리아 아가씨를?
두 개의 이름이 같이 거론된다는 건 폭탄이나 다름 없었다.
집사는 어쩔 줄 모르는 하녀에게 일렀다.
“내가 직접 맞이해야겠다. 응접실로 뫼시거라.”
아무래도 오늘은 쉴 날이 아닌 모양이다.
* * *
아른트와 레안드로스는 응접실로 안내를 받았다.
아른트와 레안드로스의 신분만 두고 보면 작위가 없는 아른트 대신 레안드로스가 전면에 나서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공작’이 직접 보낸 시종을 호위하는 호위기사일 뿐.
응접실 앞에 선 시종은 레안드로스에게 공손히 말했다.
“기사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바로 옆이니 바로 오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다과를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야.”
레안드로스는 별도로 준비된 다른 방으로 향했다.
아른트는 레안드로스의 뒷모습을 봤다.
확실히 얄밉긴 하지만, 그래도 쭉 펴진 등이나 자세를 보면 당당해보였다.
그를 보던 아른트는 말쑥한 제 옷을 잘 매만지고 어깨에 힘을 줬다.
나는 오늘 도련님을 대신해서 온 거야.
명예가 내 어깨에 걸려 있다고!
지금 아렌하이트가 여관 옆 땅바닥에서 말이랑 같이 사과를 먹고 있는 줄도 모르는 아른트는 결심을 다졌다.
응접실의 문이 열리자마자 아른트는 자동적으로 얼굴에 미소를 장착했다.
안에 앉아 있던 집사 역시 마찬가지로 사람 좋은 미소를 띠었다.
“갑작스런 방문에도 이리 환대해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공작가에서 직접 보낸 손님을 돌려보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참, 공작님의 복권에 대한 축하가 늦었습니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래 전부터 잘 알던 사이처럼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집사의 눈은 하나도 웃고 있지 않았고, 아른트의 주먹은 꽉 쥔 채로 펴지지 않았다.
“아멜리아 아가씨를 찾아오셨다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안타까운 말씀입니다만, 사육제는 한참 전에 지났을 뿐더러……. 아멜리아 아가씨께서는 지난 몇 년간 몸이 좋지 않아 영지에서 요양을 하고 계십니다.”
“저런. 아놀드 영애의 쾌유를 기원합니다. 혹시 건강이 많이 편찮으신지요?”
“하하. 아닙니다. 이리 신경써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른트는 집사가 교묘하게 아멜리아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피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짐짓 모르는 척 다시 물었다.
“심각 일인가요? 영지로 돌아갈 때 수도원에 헌금을 하고 아놀드 영애를 위해 기도를 드릴 수도…….”
“이리 걱정을 해주시니 금방 쾌차하실 겁니다.”
역시.
아른트는 집사의 표정이나 분위기를 기억하려 노력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당연히 그러실 겁니다. 제가 기억하는 영애께서는 무척 심지가 곧으신 분이셨으니까요.”
“그렇군요. 혹시 폐가 되지 않는다면 이리 발걸음 해주신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혹시 아멜리아 아가씨와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신 건.”
“아, 다름이 아니라.”
공수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하르트만의 비참한 사정은 왕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른트는 그걸 잘 포장해야만 했다.
부디 도련님의 명예를 지켜라, 아른트!
그의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한편.
응접실 옆에 마련된 대기실.
찻잔이 레안드로스의 앞에 놓였다.
게다가 호위기사에게 주기는 약간 과한 다과도 함께.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말씀 주세요.”
다과와 차를 놓아준 하녀가 선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직 앳된 얼굴에 발그레한 빛이 돌았다.
남자라면 으쓱해 할 법도 하건만, 레안드로스는 감흥 없이 고개를 까닥였다.
“고맙소.”
“네, 네! 필요한 게 있다면 꼭 불러주세요!”
몇 번이고 강조한 하녀는 사뿐사뿐 방을 나섰다.
하지만 문이 닫히고, 복도를 빠르게 뛰어가는 발소리는 숨길 수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 섞인 ‘꺄아!’ 하는 소리도.
차만 대접 받았는데 벌써 지친다…….
레안드로스는 익숙치 않은 옷을 걸친 채 어깨를 한 번 돌렸다.
하지만 이렇게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여기 오기 전 아렌하이트가 신신당부 했기 때문이다.
-아른트도 노력하겠지만, 가능하면 경도 같이 나서줬으면 해.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십니까?
-가문에 도는 소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누구겠어?
-그게 누굽니까.
-하녀지.
-그렇다면.
-하녀라도 꼬드겨봐.
아렌하이트는 좋게 말하면 수단을 가리지 않았고, 나쁘게 말하면 사람을 막 굴리는 유형이었다.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성정은 모친에게서 물려 받은 건가.
레안드로스는 일부러 느릿느릿 일어나 문을 슬쩍 열었다.
내다본 복도는 한산했지만, 복도의 모퉁이 뒤에서 숨죽인 키득키득 소리가 들렸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로군.
“거기 아무도 없소?”
그가 모른 척 말하자, 잠시 후 웃음소리가 들리던 쪽에서 하녀가 하나 도도도 달려왔다.
얼굴에는 수줍은 미소와 장난기를 담은 채였다.
“네, 기사님.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레안드로스는 하녀의 뒤로, 저쪽에서 고개를 빠끔 내밀고 저를 보며 웃는 하녀들 몇 명을 볼 수 있었다.
저 나이대면 한창 이성에 관심이 많을 나이기는 하지.
레안드로스는 하녀에게 가능한 친절하게 보이려 애쓰며 말했다.
“혼자 있으니 다 먹을 자신이 없어서. 혹시 괜찮다면 말동무를 해주지 않겠소?”
뜻밖의 요청에 저 뒤에서 지켜보던 하녀들의 입이 벌어졌다.
레안드로스의 앞에 있던 하녀는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제, 제가요?”
“바쁘다면 거절해도 좋소.”
“아뇨, 아뇨! 하나도요. 저, 하나도 안 바빠서. 어머. 이게 웬일이야. 그럼요, 당연히 말동무라도 해드려야죠…….”
얼굴이 빨개져서 손부채질을 하던 하녀는 레안드로스의 얼굴을 흘금거렸다.
하녀와 하급 기사가 눈이 맞는 이야기는 흔히 있지만.
그걸 지금 여기서 이루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저 뒤에 있는 친구들도 함께 불러오는 건 어떻지? 다과는 많으니.”
이번에는 저 뒤에 있던 하녀들과 레안드로스의 앞에 있던 하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녀들은 앞다투어 달려와서 몸을 배배 꼬았다.
“지나가다 이런 요청을 들을 줄은 몰랐어요.”
“심심하면 사람이 많을수록 즐거운 법이잖아요!”
“혼자만 이야기하면 뭐가 좋으니, 얘는. 우리 다 같이 있는 게 좋지? 기사님도 그렇죠?”
“그런데 기사님, 너무 멋지세요. 하르트만 공작가에서 오셨다고 들었는데.”
“이 옷은 어디서 주문하신 거예요? 여기 망토에 제가 수를 놔드릴까요?”
“이상한 수작 부리지마, 마사! 기사님, 신발이 약간 더러워지셨어요. 제가 닦아드릴까요?”
제 주변을 둘러싼 하녀들을 보던 레안드로스는 경련이 이는 입꼬리를 올렸다.
하녀들 사이에서 ‘꺄악!’ 하는 함성이 울렸다.
레안드로스는 생각했다.
공작부인만 아니었다면 하르트만에서 나가는 게 좋았을지도 몰랐겠다고.
* * *
아른트와 레안드로스는 생각보다 빨리 돌아 왔다.
나는 까만 말이랑 사과를 나눠먹고 바닥에서 퍼질러 앉아 있다가 마중을 나갔다.
둘은 피로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가 내 꼴을 보고 경악했다.
“도련님! 저희가 없는 동안 뭘 하신 겁니까!”
“아무것도 안 했어. 사과 먹었는데.”
“사과를 지푸라기에 싸드셨나요?”
“아, 이건 저기 말이랑 나눠 먹는다고.”
“말? 무슨 말? 설마 저희 말이요?”
“본 사람 없었어. 아무도 없어서 그냥 앉아 있기만 했어.”
아른트는 기절하고픈 얼굴로 내 옷에 붙은 지푸라기를 하나하나 떼어주었다.
레안드로스도 상당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그건 그렇고, 어땠어?”
“들어가서 말씀 드릴게요. 아니, 들어가서 도련님부터 씻으시고 말씀 드릴게요.”
아른트는 더러운 곳에서 뒹굴었으니 씻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나는 찬 물로 빡빡 씻은 후에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선 타운하우스의 집사 쪽에서는 아멜리아 아놀드의 건강이 안 좋아 영지에서 요양하고 있다고만 하더군요. 정확히 밝히진 않았지만, 단순히 몸이 안 좋은 게 아닌 것 같았어요. 제 생각일 뿐이지만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치부가 생긴 게 아닐까요.”
“아멜리아 아놀드에게?”
“그렇지 않으면 외부인에게 숨길 이유가 없으니까요.”
공작저를 나간 후 사고를 당했다던가.
그럴 수도 있기는 하지.
생각하던 차에 레안드로스가 말을 이었다.
“하녀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으로는 남작 부부가 직접 아멜리아를 영지에 감금시킨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건 왜?”
“공작저가 몰락하고 난 이후부터 남작부부가 몹시 예민해졌었다고 하더군요. 매년 수도의 행사 일정에 맞추어서 올라왔는데, 2년간은 영지에서 머물러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아멜리아 아놀드의 탓이다?”
“공작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아놀드 남작가는 1남 1녀로, 아놀드 영애의 한참 아래로 아놀드 영식이 하나 있습니다.”
아. 그것까진 몰랐는데.
설정이 안 나왔다 보니 그냥 무남독녀인줄.
레안드로스는 말을 이었다.
“2년 후 수도로 올라왔을 때는 아놀드 영식만 대동했다고 합니다.”
“아멜리아는 영지에 두고.”
“그렇습니다.”
뭔가 이상한데.
“아른트, 어떻게 생각해? 결혼해서 모습을 안 보인 건 아닐까?”
“결혼을 했다면 좋든 싫든 소문을 피할 수는 없었겠죠. 정보 길드에서도 알고 있었을 거고요.”
나는 침대 맡에 둔 양피지를 끌어 왔다.
거기에는 아멜리아 아놀드의 행적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아멜리아 아놀드] [나이 32, 특이 사항, 아놀드 남작가의 장녀, 여자로는 드물게 1년간 학술원 등록 이력] [가문 내에서 영지 경영을 일부 습득한 것으로 확인.이후 하르트만 공작가의 공작부인 전담 시녀로 이동.
약 6년 후, 부집사장으로 승격……]
말 그대로 커리어우먼.
이 시대상 여자들의 삶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었다.
신분제가 있는데, 여자들의 삶이야 뻔하지.
그런 걸 보면 아멜리아의 이력이 특이한 편이었다.
남작가의 장녀로서, 동생이 태어나고 가문을 물려받지도 못하게 된 상황에서 공작저로 이동했다.
그리고 공작부인의 전담시녀를 거쳐 부집사장까지.
똑 부러져서 자기 앞일을 스스로 설계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아멜리아 아놀드만 잡으면 뭔가 줄줄이 딸려 올 것 같은 느낌이 난다, 나.
여기를 중점으로 캐야 이 놈들과 유릭 사이에 있던 일을 알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야 그걸 빌미로 삼아 보상을 요구하든, 유릭의 약점을 캐내든 할 거 아냐!
고민하던 차에, 그런 나를 보던 레안드로스가 입을 열었다.
“결혼은 아니지만, 아놀드 영애의 애정사 이야기가 또 있던 듯합니다.”
“애정사?”
“단순히 하녀들의 추측일 뿐입니다만, 아놀드 영애가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 때문에 아놀드 영애에게 치부가 생겼을 거라고도.”
“왜 치부가 생기지?”
“그 상대가.”
아른트가 잽싸게 레안드로스의 말을 가로 챘다.
“귀족이 아니라 평민…… 아니면 그 이하의 상대였을지도 모르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