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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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하이트 공작이 공작저를 떠났을 때부터 아른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시종장이 되고 나서부터 공작저의 온갖 일들이 그에게 몰아닥쳤다.
자잘한 일부터 향방을 도저히 결정할 수 없는 큰일까지, 아른트가 맡는 일은 다양했다.
어쩌면 아멜리아를 그의 보좌로 붙여준 아렌하이트의 결정이 현명한 걸지도 몰랐다.
‘도저히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양이기는 하지.’
늘어난 식솔들이며,
성의 살림살이며, 갓 시작한 사업이며.
게다가 지금은 귀족 세력이며 신흥 부르주아며 많은 세력들이 등장하고 있는 데다가, 왕성에서도 별다른 방책을 취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정국이지만 어떻게든 공작저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꾸려나가야만 했다.
물론 공작님은 충분히 잘해주고 계시지만, 가끔 보면 공작저를 통솔하는 부분에서 미흡한 점이 눈에 띄었다.
크게 문제 될 부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개선된다면 더 좋아질 것이다.
더 좋아진다면, 더 큰 영지를 다스릴 수도 있을 테고.
‘이러다가 왕실에서 공작령을 불시에 반환해준다면 큰일이 나겠어.’
현재 공작령의 대부분은 아직 왕실의 손에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다행이었다.
공작령을 반납받기 전에, 아렌하이트에게 교사라도 붙여서 적극적으로 영지를 운영할 수 있도록 가르칠 시간이 있을 테니까.
너무 마음을 조급하게 가질 필요는 없지.
아른트는 잉크로 까맣게 물든 손날을 만지며 어둑어둑해진 바깥을 내다봤다.
공작 일행이 북부로 떠난 이후로 아른트에게 새롭게 생긴 습관이었다.
늘 그렇듯이 순찰하는 하인들 말고 아무도 없겠거니, 싶었는데.
늦은 시간인데도 횃불 두어 개를 들고 달려가는 이가 보였다.
그 뒤를 따르는 하녀들도.
이만한 인원이 한꺼번에 성문 쪽으로 간다는 건…….
아른트는 벌떡 일어나 개인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아른트가 성문 앞까지 도달했을 때 하인들이 당황한 모습으로 뒤돌아봤다.
“시종장님.”
“공작님께서 오셨는가?”
검은 말은 틀림없이 아렌하이트의 것이었다.
하지만 말은 한 필 뿐이었고, 짐을 따로 싣고 있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하인들 사이를 비집고 나오며 말했다.
“접니다, 시종장.”
“루셀 경? 공작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데 경께서만 공작님의 말을 타고 오신 겁니까?”
루셀의 몰골은 꽤 꾀죄죄했다.
북부에서 여기까지는 거리가 한참 있을 텐데, 황금색 머리카락 끝과 갑옷의 틈새가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수염마저 거뭇거뭇하게 나서 상쾌한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진 그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공작님께서는 북부에 계십니다.”
“네? 아직까지 북부에?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공작님 외에도 레안드로스 경, 그리고 아멜리아 양이 북부에 머물고 있습니다. 북부의 상황이 심각합니다. 불신자들은 모조리 죽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없고, 괴물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아른트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미스릴 광석을 구하기 위해서 북부의 상단과 교섭하러 갔다고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괴물이라니. 불신자들이라니.
북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 그렇다면. 공작님께서는.”
“아직 무사하십니다. 전투로 인해 부상을 입으셨지만, 레안드로스 경과 아멜리아 양이 돌보고 계십니다.”
“신이시여.”
이제 어떡하지?
아른트는 사병을 미리 구하지 않은 것을 지금 와서야 뼈저리게 후회했다.
지금이라면 북부로 용병이라도 보내야 하나?
하지만 지금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가는 데만 한나절, 실력 좋은 용병을 구하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
하지만 북부까지 용병들이 잘 가줄까?
의뢰비만 받아먹고 도망간다면?
차라리 지금이라면 다른 신흥 귀족가에게…….
“시종장님!”
루셀이 아른트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아른트는 그제야 자신이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셀은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공작님으로부터의 전언이 있습니다.”
그래.
아렌하이트는 다 생각이 있어서 루셀을 보낸 것이다.
아른트는 양손을 모아쥐고 루셀을 쳐다봤다.
“공작님께서 말씀하시길, ‘가능한 한 빨리 왕성으로 향해 유릭을 접견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잠시만요.”
유릭?
유릭의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거지?
“유릭 왕세자 전하가 북부와 연관이 있다구요?”
“수도로 가면서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말을 탈 줄 아십니까? 간단하게 준비하고 서둘러서 나오십시오.”
북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하르트만이 왕가와 엮여서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
아렌하이트가 굳이 루셀을 통해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자신이 수도에서 해야 하는 역할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아른트가 옆에 있던 하인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몇몇이 마구간과 성으로 향했다.
루셀은 성에 들른 지 30분도 되지 않아,
아른트와 함께 다시 길을 떠났다.
* * *
최근 왕세자의 기분이 저조하다는 소식은 왕성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었다.
덕분에 모든 궁인이 발소리, 숨소리 하나도 내지 않고 다녀야 했다.
유릭과 함께 행정 업무를 보는 성의 관리들까지 덩달아 예민해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정작 성을 침묵하게 만든 장본인인 유릭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무실을 오갔다.
“곡창지대 쪽은 담당 관리에게 위임하지.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면 다시 보고하도록 하게.”
“받들겠습니다, 왕세자 전하.”
“남부 해적들은 제독에게 맡기도록 하게. 밑도 끝도 없이 호소해대는 꼴을 보아하니 무역선이 제법 털렸나 보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오늘 잡혔던 알현은 내일로 변경하고, 그 대신 곧 다가올 폐하의 탄신일 행사에 대한…….”
왕성의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걷는 유릭의 뒤로 신하들과 행정 사무관들이 뒤따랐다.
종종걸음치면서 두꺼운 서류 뭉치를 뒤적거리는 그들은 유릭이 쏟아내는 일정을 받아적거나 서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 바빴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재빠른 발놀림으로 다가와 유릭에게 허리를 숙였다.
옷을 보아하니 왕세자 궁에서 일하는 궁인이었다.
“전하. 긴급한 알현 요청이 있습니다.”
“정무가 한시라도 바쁘니 중한 객이 아니라면 물리도록 해라.”
“하르트만 공작가에서 오셨습니다.”
유릭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하르트만 공작이 왔나?”
“아닙니다. 하르트만 공작의 호위 기사와 보좌관이 대리인의 신분으로 찾아왔습니다. 돌려보내시겠습니까?”
“호위 기사? 검은 머리던가?”
“금발이었습니다.”
아. 그 나빌 어쩌고.
살짝 기대했건만 김이 팍 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의 용건이 궁금하기는 했다.
아렌하이트 하르트만 공작.
최근 들어서 레안드로스를 제외하고 가장 신경 쓰이는 사람이다.
그 어미의 능력을 이어받아 미래를 엿보는 눈을 가진 데다가, 묘하게 유릭 본인을 잘 아는 듯한 언행까지.
유릭은 공작위를 받던 순간의 아렌하이트를 떠올렸다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모욕을 당하고도 항의조차 못 하며 발발 떨던 사람은 어딜 가고 목이 뻣뻣한 놈이 나타났담?
사람이 갑자기 바뀌기라도 한 건지.
건방진 하르트만 공작 덕분에 유릭의 목은 아직도 허전한 채였다.
그는 목걸이가 사라진 제 흰 목을 버릇처럼 쓸어보다가 답했다.
“안으로 모셔라. 곧 갈 테니.”
왕세자에게 대리인을 보낸 무례함은 잠시 눈감아주도록 할까.
대신 재미없는 용건이면 보좌관과 호위기사의 손목을 자르고 작은 함에 담아 공작저로 보내야지.
유릭은 안색이 새파래진 아렌하이트를 생각하며 남몰래 히죽거렸다.
10분가량이 지난 후,
유릭은 느긋한 미소를 무기처럼 두르고 왕세자 궁의 접견실에 나타났다.
파리한 안색의 남자와 초췌한 금발머리 나빌 어쩌고가 그를 맞이하며 일어났다.
유릭은 손을 내저으며 그들 맞은편에 앉았다.
“하르트만 공작의 건강에 안 좋은 일이 생기기라도 했는가? 대리인을 보내다니, 답지 않군.”
“하르트만 공작저의 아른트입니다. 먼저 갑작스러운 방문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인사는 됐네. 그 옆의 기사는 일면식이 있어. 그래서 무슨 용건인가? 본론만 빠르게 말하게.”
아른트라고 하는 이와 나빌 어쩌고가 머뭇거렸다.
최근에 하르트만 공작가의 행보가 어땠더라.
서로 딱히 건드릴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용건이 없나?”
“아닙니다, 왕세자 전하. 다만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조금 정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가 모시는 분께서 최근 북부로 향하셨습니다.”
북부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유릭은 잠시 생각을 멈췄다.
“북부에?”
“예.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북부는 자치령 선포 후 오랜 시간 교류가 드문 지역이었습니다. 공작님이 북부에 가시자 북부에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무슨 현상이지?”
“그건.”
“괴물입니다.”
루셀이 아른트의 말을 가로챘다.
그의 눈은 단호했다.
“믿지 못하시겠지만, 괴물이 나타나서 무지한 사람들을 해쳤습니다. 북부에는 영원히 차가운 불에 불타는 이들과 더불어 괴물로 화한 이들이 가득합니다.”
“내가 듣기로는 꼭 북부에 사는 마수처럼 들리는데. 북부의 기후에 끌린 마수들이 모이는 거야 어쩔 수 없지.”
“전하, 변경백의 성에서는 거대한 괴물이 있었습니다. 한 번 우는 것만으로 유리창을 박살 내고 사람의 고막을 찢는 것 같았습니다.”
“계속해보게. 그게 날 찾아온 이유와 연관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레안드로스 경과 공작님께서 간신히 괴물을 격퇴시켰지만, 그로 인해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잠시만, 경이 공작과 같이 있던 게 아니었나? 레안드로스 경까지 함께 있었다고?”
“그렇습니다.”
“그대만 간 게 아니었나? 레안드로스 경은 성에 있지 않았고?”
“아닙니다, 전하. 함께 동행했습니다.”
만일 지금 아렌하이트가 유릭의 눈앞에 있었다면 뺨을 몇 번이고 내리쳤을 것이다.
이래서 좋은 건 남의 손에 맡기면 안 된다니까.
그 가치도 모르고!
유릭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루셀이 말을 이어 나갔다.
“공작님께서 변경백의 성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교도와 불신자들이 한때 북부를 점령하고 그러한 괴물을 불러냈다고 합니다.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북부에서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사교 무리를 한시라도 빨리 축출해야 합니다.”
“공작이 그렇게 말하던가?”
“예. 공작님은 사안이 위중하니 왕성에 먼저 상황을 보고하길 바라셨습니다.”
루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걸 듣고 있던 아른트가 거들고 나섰다.
“북부가 비록 자치령이긴 하나 엄연히 나라에 소속되어 있으니 전하께서 외면하지 않으시리라 믿고 그런 판단을 내리셨을 거라 여겨집니다.”
“허.”
아른트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그는 유릭이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유릭이 레안드로스 경에게만 미묘하게 반응이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이단이 세력을 확장하면 신전의 세력이 약화 될 것입니다. 부디 일국의 공작과…….”
아른트는 유릭의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고 바로 말을 바꾸었다.
“……레안드로스 경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지원 병력을 보내달라?”
“북부 경계까지 활로를 열 수 있다면 그저 무한히 감사드릴 뿐입니다.”
“신전은 이 소식을 알고 있나?”
“수도에 오기 전에 휴식하러 들렀던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 치밀한 자식들.
알현하기 전에 신전부터 들렀나!
유릭은 속된 말로 환장하기 직전이었다.
아른트의 말처럼, 신전과의 공생을 위해서는 보여주기식으로라도 북부에 병력을 파견해야 했다.
그중 얼마나 살아나올 수 있느냐 같은 건 관심 밖의 문제였고.
다른 때 같았으면 자신만 은밀히 가서 공작을 크레바스에 떨궈버리고 레안드로스만 데려오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렌하이트가 목걸이를 가져간 바람에 유릭은 꼼짝없이 성에 묶인 신세가 되었다.
물론 목걸이가 없어도 비야키를 부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유릭이 가지고 있는 마력이 부족했다.
당장 왕에게 먹일 감로주도 조제 해야 하고, 불러내야 할 것들도 있는데 비야키 하나 부르자고 마력을 끌어다 쓰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아냐, 눈 딱 감고 비야키를 부를까?
일주일 정도만 두통에 시달리면 되는데.
하지만 그러기에는 처리해야 하는 정무가 너무 많다.
유릭은 머리를 쓸어올리려다가 150년 전 읽었던 왕족 예법서의 내용을 복기하고 멈췄다.
“병사를 내어주지. 북부의 사정을 상세히 설명하도록. 그 후 상황에 따라 신전과 협의해 조사단을 파견하겠네. 하지만 어디까지나 최우선 사항은 공작과 그 일행의 구조에 있음을 명심하게.”
“황송합니다, 전하.”
그래, 어디까지 가나 보자고, 하르트만 공작.
그래봤자 나는 놈 밑에서 뛰는 놈밖에 더 되겠어.
뛸 듯이 기뻐하는 루셀과 안도하는 아른트를 보며 유릭은 속으로만 칼을 갈았다.
그 칼을 들어내기도 전에 아렌하이트가 한 번 더 뒤통수를 치리라는 것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