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88
(87)
루셀 나빌로프는 타고 난 무인이었다.
그가 두 살에 검을 잡았을 때 주변 사람들은 다들 놀라워했고,
그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는 이미 주변에 꽤 알려진 신동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기계적으로 검을 수련하는 데에 싫증을 느꼈다.
검이란 무엇인가?
검은 개인의 성취 외에는 용도가 없는가?
고작 여우나 사슴을 잡자고 하루 열세 시간씩 목검을 휘두르는 건 아닐 텐데.
그렇다면 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는 스스로 답을 구하고자 부러 궁색한 벽지까지 찾아가 신성기사단에 입단했다.
그곳에서 수련하며 루셀은 검의 의의는 사람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휘두르는 것은 인간.
그로 인해 구하는 것도 인간.
사방에서 몰려오는 위협에 무력한 양 떼를 지키는 목장견처럼,
자신은 평범하고 나약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것뿐이다.
검이 누군가의 구원이 될 수 있다.
지극히 평범하고 선량한 답을 선뜻 내린 루셀은 지금까지 줄곧 그렇게 살아왔다.
지금 이 순간도 그랬다.
루셀은 덤벼오는 마수들을 보며 눈을 감았다.
“주가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그의 뒤에는 약한 자들이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깨질 것같이 가엾고 사랑스러운 인간.
루셀의 손이 그립을 꾹 쥐었다.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하셨다.”
예티가 짐승같이 달려들었다.
눈밭을 달리는데도 전혀 느리지 않은 녀석이 높게 뛰어오르자, 루셀이 드러난 놈의 배를 걷어찼다.
멀리 나가떨어지는 놈을 대신해 안개 속에서 다른 놈이 누런 이를 세우고 달려들었다.
거대한 클레이모어를 방망이처럼 휘둘러 머리를 쳐내고 그대로 검의 날을 세워서 내리꽂는다.
뼈가 으스러지는 감각과 절명하는 야수들이 지르는 단말마가 하얀 설원을 더럽혔다.
찌르고, 베고, 긋는다.
피가 튈 때마다 알 수 없는 흥분이 들끓었다.
수세로만 따지자면 명백히 밀리는데도, 루셀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털가죽은 질겼지만 예리한 마수 무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아렌하이트 공작은 그가 썰매에서 내리기 전 귀띔까지 해주었다,
-보르미보다 더 작고 약한 개체다. 추위에만 강하지, 지능은 낮은 편이야. 가죽이 두껍긴 해도 새로 받은 검이라면 무리 없어.
공작님은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있었을까.
루셀은 휘두르는 앞발을 피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발톱을 막아냈다.
발톱이 검날에 미끄러지며 키이잉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뒤에서 막스가 어어, 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루셀은 조금 웃었다.
약한 사람들을 지키는 건 역시 그의 성미에 무척 잘 맞는 것 같았다.
* * *
루셀의 싸움은 마치 자신을 보라는 듯 크고 화려했다.
거대한 클레이모어를 사용하니 동작이 커지는 건 당연하겠지만.
설원 위 부연 안개를 배경으로 휘날리는 망토, 태양을 대신하는 황금색 머리카락, 번득이는 검, 무서운 마수들에게 맞서면서도 한 치 물러섬도 없는 용맹한 모습.
어린아이에게 깊은 인상을 심겨주기엔 충분하겠지.
사방에 깔린 예티 시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루셀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고르다가 검을 한 번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클레이모어는 지저분한 피를 스스로 뱉어내는 것처럼 금세 깨끗해졌다.
루셀은 썰매로 돌아오며 보고했다.
“전투 종료했습니다. 당분간 더 전진할 수 있을 걸로 보입니다.”
“고생했어.”
“기사님,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그렇게 큰 검을 어떻게 하면 나뭇가지 휘두르듯 가볍게 하실 수 있습니까?”
“평소보다 왠지 몸 상태가 좋더군요.”
루셀은 빙긋 웃으며 썰매에 올라탔다.
썰매는 다시 천천히 움직이며 나아갔다.
막스는 흥분해서 루셀에게 이것저것 물었고, 루셀은 친절하게 답해주고 있었다.
그걸 구경하다가 문득 내게 안겨있던 요나스가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게 보였다.
루셀이 전투를 마친 이후 내내 주눅이 들어서 불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무슨 일입니까?”
아프냐는 물음에 루셀과 막스의 고개가 이쪽으로 돌아왔다.
루셀을 보고 움찔하던 요나스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 혹시 졸린 건가? 그럼 나한테 잠시 기대있어도 돼. 여기가 더 따뜻하지?”
확실히 내 망토는 막스가 걸친 것보다 훨씬 더 도톰하고 따뜻해보였다.
요나스는 그런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가, 루셀의 곁에 있는 제 아빠를 보더니 그냥 내게 푹 기대 눈을 감았다.
어쩐지 저쪽에 가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에이, 설마.
나는 생각을 떨쳐내고 달리는 썰매 바깥을 구경했다.
우리가 최초로 봤던 ‘거인’이 향했던 방향, 위쪽으로 올라가는 내내 자잘한 대치 상황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새로운 지역의 괴물들도 아래에서 봤었던 놈들과 비슷한 종이 많았다는 거였다.
하지만 가끔씩은 그렇지 않았다.
“아. 미친. 저거 뭐 하는 놈이지.”
고통스런 비명소리가 칼바람을 타고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것들은 반쯤은 떠 있고 반쯤은 땅에 서 있었다.
그들의 주변으로 공기나 눈이 얼어서 땅으로 내리고 있었다.
투명한 몸은 일렁거리면서 계속해서 모습을 바꾸고 있었지만, 몸이 하나의 집합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치 눈과 바람으로 이루어진 유령 같았다.
베어도 베이지 않을 것 같은 놈들은 음산하고 소름끼치는 비명소리와 함께 눈썰매로 다가왔다.
슬레이 역시 앞발을 쳐들며 그들을 말발굽으로 쳐 냈지만, 유령들은 잠시 흩어졌다가 다시 형체를 갖출 뿐이었다.
“이건 대체 뭐야! 이 녀석들, 저리 꺼지지 못해!”
막스의 도끼질도, 루셀의 거대한 검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무기를 통과할 뿐인 유령이 썰매로 다가오자 저절로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히기 시작했다.
차가운 냉기가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유령들은 단순히 썰매 근처를 맴돌 뿐이었지만 점점 손발이 얼어서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뼛속까지 시리다는 말이 뭔지 이제야 깨달을 만큼 차가웠다.
요나스도 마찬가지로 덜덜 떨면서 하염없이 내 품에 파고들 뿐이었다.
“이, 이놈들 좀 어떻게 해보십쇼! 이 녀석들은 대체 뭡니까, 아무것도 통하지 않아요!”
막스가 외쳤다.
그의 얼어붙은 손가락이 곱아들며 도끼가 썰매 바닥에 요란하게 떨어졌다.
너무 추워서 뇌까지 얼은 기분이었다.
생각해, 제발 생각해내!
“부, 불! 불을 피, 피워봐! 누, 눈과 증기로, 만들어져 있, 있으니까!”
루셀이 달달 떨리는 손으로 휴대용 부싯돌을 꺼냈다.
하지만 둔해진 손 때문에 돌이 자꾸 미끄러지기만 했다.
몇 번이나 주워보려다가 실패한 루셀은 이제 아예 망자를 위한 기도문을 외고 있었다.
이 미친놈아!
“달려, 슬레이! 그대로 달려!”
-히히힝!
썰매가 내달렸다.
슬레이의 얼어붙은 검은 발굽에 붙어있던 서리가 깨져서 떨어졌다.
동부의 진흙 위에서 달리던 것처럼, 슬레이는 얼은 설원 위에서도 새처럼 날아갔다.
유령 무리는 쫓아오나 싶더니 썰매가 내는 바람에 조금씩 흐릿해지거나 날아가 버렸다.
“불! 불!”
급조한 횃불에 겨우 불이 붙었다.
날씨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았지만 뒤쫓아오던 유령들에게 휘두르기에는 충분했다.
유령은 원한에 찬 비명소리를 뱉으면서도 썰매를 더 이상 쫓아오지 못했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우리 전부 다리가 풀려 주르륵 주저앉았다.
“저, 저놈들은 대체 뭐였습니까? 혹시 공작님께서도 아시는 겁니까?”
“아래쪽에 출몰하던 것과는 다른 놈들인데. 정확히는 나도 모르고. 하지만 으레 이런 곳에 사는 놈들은 불을 싫어하더라고.”
“베어도 죽지 않는다니.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군요.”
내 말이.
다들 진이 빠져서 한숨을 내쉴 때, 안겨있던 요나스가 훌쩍거렸다.
“요나스? 왜 그래?”
요나스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이를 감싸고 있던 담요를 헤치자 웅크리고 있던 요나스의 벌건 피부가 드러났다.
작은 얼굴의 왼쪽 절반과 귀, 왼쪽 목이 온통 빨갛게 되어서 조금씩 붓고 있었다.
담요 말고는 모자나 옷으로 덮이지 못한 부분이었다.
귓바퀴를 따라 작은 수포가 잡히기 시작했다.
요나스의 상태를 본 루셀이 깜짝 놀랐다.
“공작님, 이건 동상입니다. 당장 처치하지 않으면 피부가 괴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야?”
“웬만큼 강한 추위에 오랫동안 노출되지 않으면 잘 걸리진 않습니다. 방금 조우한 유령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유령들이 근처에 왔을 때 엄청나게 추워지긴 했다.
입고 있었던 옷이 전부 소용없어진 기분이 들었지.
이게 그 유령들의 능력인가.
“그럴 수도 있겠어. 불을 쬐면 나아지나?”
“불보다는 따뜻한 물로 피부를 적셔야 하는데요. 그것도 응급처치에 불과할 뿐이라, 의원을 빠르게 찾아가야 합니다.”
파티에 힐러가 없으면 금세 전멸하고 만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요나스를 막스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조금만 더 가서 내리고 다들 쉬기로 하자. 썰매 위에서 물을 끓일 수는 없으니까. 아이를 잘 덮어주게.”
막스가 허둥지둥 요나스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부풀어 오르는 피부에 손도 못 대고 제가 두른 망토며 담요 밑으로 아이를 넣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잠시 바람을 헤치며 달리다가 울퉁불퉁한 골짜기 아래로 내려갔다.
바람을 막아주는 눈 언덕 옆에서 작게나마 굴을 파고 임시 캠프를 마련한 후 불을 피울 수 있었다.
사방에 널린 게 얼음덩어리라 물을 끓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막스가 요나스의 동상을 물로 씻겨 주는 동안, 우리는 저녁을 준비했다.
그런 후에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기로 하고 교대로 휴식을 취했다.
불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은 저마다 꾸벅꾸벅 졸거나 불을 응시했다.
루셀이 조용히 말했다.
“공작님, 조금이라도 쉬시죠.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원래 이런 얼굴이었어. 우리가 지금 어디까지 왔지?”
“아까 요나스가 마지막으로 기록한 걸 봤는데, 변경백의 성에서 북서쪽으로 올라온 것 같습니다. 국경까지는 한참 남았죠.”
“그런가.”
“혹시 이 부자를 돌려보내려 하십니까?”
“……그게 옳은 선택이 아닐까?”
루셀이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이들의 의견을 물어보시지요. 따라오겠다고 한 건 그들이었으니, 돌아가는 것 역시 그들의 선택입니다.”
“자식이 이렇게 되는 걸 보면 누구라도 돌아가고 싶어 하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식이 자신보다 약하니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동시에 함께 살아남으려 노력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요나스는 나이가 어려도 어엿한 용병 단원이다.
그의 부친과 함께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는 용병인 것이다.
그러니 루셀이 은근히 돌려 말한 것처럼, 용병이 의뢰를 수행하다가 다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아이들은 좀 더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해.”
요나스는 나와 달랐다.
최소한 이 아이는 자신의 의지로 아빠와 함께 세상을 떠돌겠다고 선택했었다.
하지만 그 선택이, 정말로 자신의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죽은 어머니와 자신을 두고 떠날 것 같은 아버지, 그리고 말을 못 한다며 비웃는 마을 사람들과 또래 어린이들 사이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지금 입은 동상은 누구의 잘못이 될까.
루셀은 말없이 모닥불을 들쑤셨다.
모닥불 옆에 있던 냄비가 눈을 영 녹이지 못하고 있어서, 냄비 위치를 옮기려 일어나던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바람과 죽음의 소리가 들렸다.
스산하고, 차갑고, 폭풍과도 같은 소음이.
저 높은 회색 상공에서 불길한 별처럼 빛나는 눈을 가진 존재가 바람을 타고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