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98)
◈ 198화. 적당히 썩지 그랬소
천하가 잠에 빠진 이 시각.
개봉의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수천 리 떨어진 회남에선 숨 가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크아악!”
거칠게 터져 나오는 쇳소리와 비명이 끊이질 않고 터져 나왔다.
얼어붙은 장원마저 집어삼킨 화마가 매캐한 연기와 함께 밤하늘로 솟구친다.
타오르는 표국을 향한 표두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시산혈해의 참담한 현장에서.
핏발 선 표두의 절규가 불길을 등진 사내에게 쏟아진다.
“국주께서 돌아오시면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하하하!”
잿가루와 함께 치솟는 광소의 주인공은 백채륜이었다.
“하동교호 나명도?”
붉게 물든 입술을 혓바닥으로 핥은 백채륜은 뱀 같은 눈동자를 희번덕였다.
“그는 죽었습니다. 그와 함께했던 자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오대표국은 머지않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며 그대들은 세상에 혈겁을 일으킨 자들의 잔당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말이 끝나는 순간 백채륜의 검신이 전광석화같이 표두의 가슴을 꿰뚫었다.
“컥!”
희미해지는 사내의 귓속으로 백채륜의 섬뜩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지켜보십시오. 우릴 미끼로 던져두고 추악하게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그대의 뒤를 따르게 될 겁니다.”
“그분께서 반드시 복수를…….”
피에 젖은 백채륜의 입꼬리가 길쭉하게 올라갔다.
“물론 누군지 모를 그분도 보내드려야지요.”
“크흐흐.”
쓴웃음을 흘린 표두가 마른 짚단처럼 쓰러졌다.
그를 끝으로 저항하던 표사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상천의 무위를 처음 목도한 신노군은 흠칫 몸을 떨었다.
‘이것이 상천의 힘.’
적표대와 흑살대가 없는 회남표국은 백채륜과 부곡채 무인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고작 오십에 불과한 부곡채 무인들은 열 배가 넘는 상대를 반 시진 만에 도륙했다.
검을 회수한 백채륜이 고개를 돌렸다.
“국주님. 그쪽은 어떻습니까?”
“아.”
눈이 마주치자 정신이 번쩍 든 신노군은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말했다.
“태산표국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두각주와 태산표국 출신 표사들이 그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이곳 회남에서 대량표국 표사들과 합류한 백채륜은 가장 먼저 진실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를 분리했다.
이번에도 두용청의 역할이 컸다.
발이 넓은 두용청은 친분 있는 표사들에게 접근해 산동의 일을 포함한 진실을 알려주었다.
덕분에 전투가 벌어진 순간 반수에 달하는 표사들이 전장을 이탈했고 백채륜은 한결 수월하게 표국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회남표국의 재물은 대량표국에서 접수하시고 일부는 떠나는 표사들에게 여비로 지급하세요.”
“예. 채주님.”
“곧 총사께서 오실 겁니다. 남은 일은 두 분께 맡기고 먼저 가보겠습니다.”
신노군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쉬지도 않고 돌아가신다는 말입니까?”
중상자가 없다곤 하나 전투가 끝나고 일다경도 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노군이 백채륜의 소매를 잡으며 만류했다.
“상처도 수습할 겸 조금 쉬었다가 가시지요.”
“휴식 말입니까?”
백채륜의 뱀 같은 눈매가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여유가 없습니다. 그럴 여유가.”
* * *
제갈문과 적모개의 구금은 짜여진 각본대로 철저하게 비밀리에 이뤄졌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 형옥.
음산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복도에 불빛과 함께 조용한 발자국들이 울려 퍼진다.
“갑자기 형옥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오?”
백발이 성성한 선풍도골의 노인, 원로원주 제갈무용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가보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앞에서 그를 이끄는 명가홍은 머릿속으로 설지량이 알려준 나머지 계획을 되새겼다.
‘공현지검(恭賢智劍) 제갈무용. 이젠 그대가 내 말이 되어줄 차례요.’
원로원주 제갈무용은 천하십대고수 바로 밑에 속하는 칠경의 일원이었다.
제갈무용의 뒤로 집행부의 일원인 금도문주 염창도와 양척방주 목충이 따르고 있었다.
‘중원삼가는 뒷방으로 물러날 때가 되었지.’
은은한 어둠 속에서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후, 네 사람이 두꺼운 철문 앞에 멈춰 섰다.
“다 왔습니다.”
명가홍이 횃불을 앞으로 비추자 제갈무용의 눈이 부릅떠졌다.
“문아! 네가 왜 거기 있단 말이냐?”
일렁이는 불빛 속에 차분히 앉아있던 제갈문이 고개를 든다.
“원로원주님.”
제갈무용의 두 눈에 불길이 일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범인이라면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오싹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으나 명가홍은 냉정을 잃지 않았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비각에 일러 저를 감시하라고 명한 것이 혹시 원주님이십니까?”
제갈무용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물었다.
“감시라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뒤에 서 있던 염창도가 입을 열었다.
“제갈각주는 사사로이 비각의 힘을 이용해 명대협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소이다.”
“저희 둘뿐만 아니라 맹의 수장들을 비롯해 홍월루의 사람들까지 목격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제갈무용은 제갈문에게 물었다.
“이들의 말이 사실이더냐?”
지그시 눈 감은 제갈문이 체념한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당숙.”
이런 상황에서 거짓을 고하는 것은 그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제갈무용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 네가 정녕……. 정녕 중검문주를 감시했단 말이냐?”
그때 뒤에 서 있던 명가홍이 버럭 호통을 쳤다.
“중원무림맹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할 비각입니다! 어찌 사사로이 권력을 이용해 아군을 사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어서 양척방주 목충이 말했다.
“원주님께 묻고자 합니다. 이게 정말 비각주가 홀로 계획한 것이란 말입니까? 아니면 상천이라는 대적을 앞둔 지금, 중원삼가가 우리를 적으로 간주하고 있단 말입니까?”
제갈무용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그럴 리가 없지 않소!”
그때 제갈문이 입을 열었다.
“그만두십시오. 모든 것은 제가 독단으로 벌인 일입니다. 당숙께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계십니다.”
“문아.”
뒤에 선 세 사람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스치듯 사라졌다.
제갈문은 자세를 고쳐 무릎을 꿇었다.
“모든 죄는 제가 달게 받을 것입니다. 더는 제 주변 사람을 추궁하지 마십시오.”
제갈무용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패였다.
자신이 아는 제갈문은 이유 없이 이런 일을 벌일 아이가 아니었다.
‘여기서 문아를 잃을 수는 없다.’
돌아선 제갈무용은 애써 차분히 말했다.
“명문주.”
“설마 본인이 실토한 내용을 원주께서 부정하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오.”
제갈무용은 세 사람을 응시하며 말을 덧붙였다.
“출정을 앞둔 시기에 비각주의 죄를 묻는다면 맹 내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오. 본인이 죄를 인정하고 있으니 처벌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뤄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소. 비각주의 자리를 비워두고 전쟁을 벌일 수는 없는 일 아니오?”
명가홍이 물었다.
“아군을 사찰한 비각주입니다. 행여 그가 앙심을 품는다면 제대로 전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가 전하는 정보를 믿을 수 있으리라고 보십니까?”
그 단호한 태도에 제갈무용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일이 이렇게 되다니.’
삼십여 년 전.
속세에 관여치 않는 소림과 무당을 대신해 중원삼가는 중원의 모든 방파를 발밑에 두고 자신들만의 성을 구축했다.
그러나 그들의 오만한 자신감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었다.
적의 이간계로 인해 내분에 빠진 삼가는 팔황문의 발호를 막지 못했으며 중원무림 수십 개의 방파가 불타올랐다.
천하대전이 끝난 직후.
중원삼가는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며 가진 것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개방과 협력해 중원무림의 모든 방파가 공평하게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연맹을 창설했다.
그것이 지금의 중원무림맹이다.
삼가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발언을 자제하며 다른 이들을 배려해왔다.
사대거파 위주로 운영되다 분열된 사천맹을 보며, 중원삼가는 더욱 몸을 낮추고 발언을 자제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으니 제갈무용은 참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짧은 침묵 끝에 명가홍이 말했다.
“원주께서 계속 비각주를 감싸려 드신다면 저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저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등 뒤에 비수를 들이미는 자와 어찌 함께 싸울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갈무용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라면 중원무림맹은 사천맹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야. 그건 막아야 한다.’
종령문이 멸문한 이상 상천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
여기서 저들이 이탈한다면 중원은 천하대전 이후 최대의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우선 이들의 마음을 달래고 생각해보자.’
그는 뼈를 깎는 심정으로 결단을 내렸다.
“알겠소. 그대들의 뜻대로 하시오.”
제갈문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은 저들의 계략을 간파하지 못한 자신의 실수였기 때문이다.
명가홍은 미소를 감춘 채 철문을 나섰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비각주가 순순히 조사에 응한다면, 모든 일은 공정하게 처리될 것입니다. 그럼 나가시지요.”
그들은 저마다 복잡한 내심을 감춘 채 형옥을 나섰다.
무거운 어둠 속, 제갈무용이 나직이 물었다.
“맹주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시오?”
“믿었던 비각주의 비리가 드러나면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아직은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이 일이 알려진다면 전쟁을 앞둔 무인들이 혼란스러울 것이오. 맹주께는 내가 직접 보고드리겠소이다.”
목적을 달성한 명가홍은 공손히 고개 숙였다.
“원주님의 뜻대로 하시지요.”
제갈무용이 떠나자 염창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맹주께서 아시면 일이 복잡해지지 않겠습니까?”
명가홍의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독단으로 일을 처리할 인사였으면 애당초 의화전을 소집하지도 않았겠지. 설령 안다 해도 이쪽은 확실한 명분을 쥐고 있으니 별다른 방도가 없을 것이오.”
일인전승의 무공을 익힌 검제 위사영은 확실히 무서운 무인이다.
그러나 그를 뒷받침해줄 조직이 없을뿐더러 본인 또한 권력에 큰 욕심이 없다.
명가홍은 뒤에 시립한 부하에게 물었다.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출정 준비를 마치고 모두 휴식 중입니다.”
“중천대와 원무대는?”
두 부대는 중원삼가의 무인들로 구성된 부대.
특히 선우세가의 소가주 선우빈과 황보세가의 소가주 황보춘이 이끄는 중천대는 중원무림맹에서 가장 강한 부대였다.
“평소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은 전쟁에 나설 삼천의 무인 중 가장 주의해야 할,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처리해야 할 자들이었다.
어둠 속, 명가홍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이제 두 시진이다. 이대로 출정한다면, 머지않아 우리 중검문은 중원 최강의 문파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벽에 기댄 제갈문의 귀로 옆방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각주.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이제껏 침묵을 유지해온 적모개의 목소리였다.
두 사람은 구금과 동시에 내력이 봉인된 상황.
행여 누가 들을까 우려해 모든 것을 말하지는 못했으나 적모개는 확신했다.
육군명이 부탁을 제대로 이행한다면 무너진 하늘에서 솟아날 구멍을 찾을 수 있다.
‘소공자가 있는 이상 태산표국은 오래 버티지 못할 거다. 조금만 시간을 벌면 소공자가 분명 타개책을 가져올 거야.’
그것을 모르는 제갈문은 말없이 실소를 흘렸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전쟁을 막기 위해 걸었던 모험은 완벽히 실패로 돌아갔다.
설령 누군가 이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자신들을 도울 명분이 없다.
‘어쩌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제갈문의 입에서 나직한 한탄이 새어 나온다.
“부각주. 공정이라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천맹과 중원무림맹.
서로 정반대의 방식으로 맹을 운영했으나 결과는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모개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이라도 저들을 모두 쳐내고 삼가 위주로 맹을 재편한다면 되겠지만.’
중원삼가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천하대전을 겪은 그들이 독선과 오만으로 가득했던 과거의 자신을 병적으로 경계하는 까닭이다.
삼가의 무인 중 그래도 제갈문은 융통성 있는 인사였다.
비록 실패로 돌아갔으나 움직이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니까.
‘중원삼가의 고루한 어르신네들. 의(義)와 협(俠)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적당히 썩지 그랬소. 답답해서 내 속이 썩을 것 같잖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억지로 삼킨 적모개는 생각을 돌려서 말했다.
“애당초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무림에서 완전한 공정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제갈문에게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문득 적모개의 머릿속에 진무립의 당당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지금의 나라면 앞으로 어떻게 할까?’
분열된 사천무림을 하나로 통합해 공위맹을 세운 영웅.
사천의 빛이라 불리는 광룡(光龍) 진무립이라면 어떤 대답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 * *
같은 시각, 적모개의 부탁을 받은 육군명은 내부로 침투할 길을 찾고자 비각의 암도에 도착했다.
‘횃불이 모두 꺼졌다.’
비각으로 통하는 암도의 출입구는 양쪽에서 동시에 기관을 작동시켜야 열린다.
횃불이 꺼졌다는 것은 안에서 문을 열어줄 사람이 없다는 의미다.
‘암도를 이용하지 않고도 맹주의 무운전(武云殿)까지 갈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육군명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무운전과 지척에 있는 비각이라면 모를까 외부에서 무운전까지 침투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은무대의 감시를 눈치채고 역으로 계략을 펼쳐 비각을 위기에 몰아넣은 자들.
적모개는 가능할 거라고 했으나 한 번 들킨 은무대가 두 번 들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조금만 참아라. 한 시진 안에 반드시 방도를 찾아서 돌아오마.’
차가운 벽을 쓸어내린 육군명은 빠르게 암도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