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319)
◈ 319화. 신뢰
마인들이 물러나자 긴장이 풀린 태종무단의 무인들이 하나둘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결국 살아남았는가…….”
“그렇군.”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진다.
무려 하루에 걸쳐 이어진 치열한 혈전으로 태종무단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임무가 무엇인지도 망각한 채 눈앞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무작정 병기를 휘두른 그들이었다.
곳곳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쓰러지는 가운데 돌아서던 진무립이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주군.”
서진환이 다급하게 곁을 부축했다.
진무립은 혼미해진 정신을 가까스로 가다듬으며 명을 내렸다.
“괜찮다. 부상자부터 수습해라.”
그나마 살아있는 자들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여력이 없을 것이다.
지금은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 저들을 도와야 한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제갈경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단주. 괜찮으십니까?”
진무립을 대하는 제갈경의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 공손하다.
나이를 떠나 진무립은 자신의 존경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진무립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피를 흘려 좀 어지러울 뿐입니다.”
“뒷일은 내게 맡기고 그만 쉬십시오.”
“부탁합니다.”
진무립을 부축한 서진환이 한쪽 구석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주군. 시간을 버는 것은 성공했으나 그 시간이 그리 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장천무가 말한 성조는 상천의 흑조와 같은 영물이 분명할 터.
생각보다 사태 파악이 빠르다면 아직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
절벽 위의 장천무를 슬쩍 쳐다본 서진환이 나직이 전음을 보냈다.
[명하시면 탈출로를 확보하겠습니다.]절벽 아래 도착한 진무립은 벽에 기대앉으며 고개 저었다.
“부상자들을 전부 데리고 저들의 눈을 피해 탈출하는 게 가능할 거라고 보느냐?”
“최악의 경우 주군…….”
“진환.”
진무립의 미간에 실주름이 패인다.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서진환은 초조함을 애써 감추며 고개 숙였다.
“……죄송합니다.”
천하 무림을 향한 대의도 중요하다.
그러나 역시 서진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무립의 안위였다.
그 마음을 잘 아는 진무립이었기에 더는 타박하지 않았다.
진무립은 힘겹게 가부좌를 틀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수세에 몰려있던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이제 시간은 저들이 아닌 우리의 편이니까.”
왠지 그 말에 마음속 걱정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매사에 철저한 진무립이 방도가 있다면 분명 그럴 테니까.
그때 저 멀리서 피투성이가 된 단려화와 위사영, 그리고 추영당원들이 달려온다.
진무립을 발견한 단려화가 토끼 눈을 하고 외쳤다.
“무립!”
그 자신도 피에 흠뻑 젖었으면서 피투성이가 된 진무립을 보자마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것이다.
선두의 단려화를 확인한 진무립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었다.
“진환. 호법을 서라.”
더는 말할 힘도 없다.
동료들을 지키고자 모든 것을 쏟아부은 진무립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예. 주군.”
협곡의 무인들이 부상을 추스르기 시작할 때, 천경봉에서 내려온 단소룡이 장천무의 뒤에 도착했다.
“보기 좋게 당했군.”
고개 돌린 장천무의 눈빛이 사납게 빛났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시오?”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당연하지.”
불쾌한 듯 고개 돌린 장천무의 귀로 단소룡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대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
단소룡은 침묵하는 장천무의 곁에 나란히 섰다.
“따르는 자들이 피를 흘렸다면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네.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주군이라면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를 자격이 없지. 자네에겐 그런 자격이 있는가?”
대답을 거부했던 장천무가 이번에는 입을 열었다.
“당신과 다르지 않을 것이오.”
냉랭한 말을 남긴 장천무가 몸을 돌려 부하들에게 향했다.
멀어지는 장천무의 등을 가만히 응시하던 단소룡이 마른 풀잎을 꺾어 입에 물었다.
“안타깝군.”
자신은 천하의 그 누구도 화령의 가족을 넘보지 못하도록 이 무림에 철옹성을 세웠다.
그것이 바로 화령도다.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장천무 역시 천산의 교인들을 위해 싸운다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상대였으니 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가 사라지자 국영승이 조용히 단소룡의 뒤로 다가왔다.
“자네가 올 줄 알았네. 이런 싸움에 자네가 빠져선 안 되겠지.”
뒤를 돌아본 단소룡이 씩 웃었다.
“오랜만이로군.”
과거 북경의 왈패였던 시절 맺었던 인연은 무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와는 달라.”
“그런가?”
“나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끌려다닌 적이 없었네. 언제나 모든 싸움을 내가 주도해왔지.”
과거를 반추하던 국영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군.”
“이 전쟁을 만든 자는 내가 아니라 광룡이라는 아이일세. 내가 처음으로 남이 만든 판 위에서 말이 되어 움직인 전쟁이지.”
“말이 되어 움직인 소감은 어떤가?”
“짐 하나를 내려둔 기분이로군.”
국영승은 그 짧은 말에 내포된 많은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천하무림은 알게 모르게 단소룡이라는 존재에게 의지해왔다.
단소룡이라는 거목의 그늘 밑에서 평화를 영위해왔고 화령이 있는 그 어떤 것도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만큼 천하대전을 승리로 이끈 단소룡의 존재감은 무림 전체를 지배할 정도로 공고했다.
그런데 자신이 아니어도 자신과 같은 역할을, 자신보다 더욱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인재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반갑지 않을 리 없다.
진무립은 자신이 수십 년을 짊어져 온 짐을 나누어도 될 만큼 뛰어난 기재였다.
국영승은 문득 궁금해졌다.
“광룡이 없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훨씬 더 많은 피가 흘렀겠지.”
생각해보면 정말 기적과도 같은 전쟁이다.
무려 수만 명의 목숨이 사라졌던 천하대전에 비하면 이번 전쟁의 피해는 극도로 미미하니까.
이 모든 것을 계획한 진무립은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내였다.
‘이 또한 운명인가.’
만일 자신이 그날 포광사로 향하던 길에 초이린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자신도, 진무립도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신이라는 존재를 믿어본 적이 없는 단소룡이었으나 어쩌면 진무립과 자신의 만남은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단소룡이 이어서 말했다.
“싸움이라면 모를까 저 녀석의 머리는 확실히 나보다 나아.”
“화윤이라면 모를까 딱히 자네 머리가 좋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네만.”
“……돌아가게.”
피식 웃은 국영승이 몸을 돌렸다.
천천히 언덕을 올라가는 그의 귀로 단소룡의 진심 어린 전음이 파고들었다.
[고맙네.]무슨 의미인지 안다.
단소룡의 능력이라면 자신들이 움직여 단려화를 도왔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간 빚을 받으러 화령도로 찾아가지.]마지막 말을 남긴 국영승이 소화산을 벗어났을 때, 임무를 수행하고 은밀하게 복귀한 흑전원 무인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영승이 부하들을 치하했다.
“모두 수고했다.”
부원주 번호기가 말했다.
“대목을 만나고 왔습니까?”
“그렇다. 너도 가서 만나보겠느냐?”
번호기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따로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보다 말입니다.”
번호기는 마교도들이 진을 친 소화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투를 잠시 멈춘 것은 좋으나 휴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생각보다 저들이 천산의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다면 전멸을 면키 어려울 겁니다.”
“광룡의 계책보다 더 좋은 방도가 있었나?”
“차라리 성화령을 방패 삼아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낫지 않았겠습니까?”
“저들이 성화령을 탈취하고자 마음먹는다면 태종무단은 전멸했을 거다. 광룡의 판단은 최선이었다.”
“아.”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번호기가 다시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떡합니까? 우리야 후미에 있던 탓에 운 좋게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태종무단은 완전히 적진 한복판에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진무립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떠올린 국영승이 작게 읊조렸다.
“걱정할 것 없다. 당연히 뒷일도 염두에 두고 있을 테니 말이야.”
말을 내뱉은 국영승은 새어 나오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마음속에 진무립이라면 뭐든 해낼 것만 같은 확신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단소룡. 네 말대로 그놈이 다르긴 한 모양이다.’
국영승과 헤어진 단소룡이 언덕을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절벽을 타고 오른 제갈경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참으로 적절한 시기에 와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친 곳은 없는가?”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제갈경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이런 추위라면 중상을 입은 자들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무림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영웅들이다.
죽은 자는 어쩔 수 없으나 숨이 붙어있는 이들은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
“한 명이라도 더 손이 필요할 테니 일단 가지.”
“예.”
절벽을 내려온 두 사람의 눈에 곳곳에 쓰러진 채 신음하는 무인들이 보인다.
어느새 소주천을 마친 진무립도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단려화와 부상자를 치료하고 있었다.
자리를 옮긴 단소룡은 의식을 잃은 채 신음하는 무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틀만 버텨주게. 그럼 반드시 살 수 있네.”
사내의 가슴에 장심을 붙인 단소룡이 부드러운 내기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창백하던 사내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삼 장 밖에서 황보한과 함께 다른 무인을 치료하던 선우진이 진무립의 지친 등을 쳐다봤다.
진무립은 서진환이 바쁘게 움직여 구해온 나무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응시하던 선우진이 나직이 읊조렸다.
“잘도 타는구나.”
앙상한 나무는 분명 겨울의 한기에 꽁꽁 얼어붙었을 텐데 마른 장작처럼 금세 불이 붙었다.
흰 천으로 환부를 닦아낸 황보한이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결국…… 살아남았구려.”
선우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해냈구나.”
비로소 실감이 난다.
복령천주 황천패를 죽이고 성난 황소처럼 짓쳐 들던 마교를 멈춰 세웠다.
진무립의 계획만 믿고 따라온 백여 명의 영웅들은 결국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일을 해낸 것이다.
황보한의 지친 얼굴에 미소가 깃든다.
“이대로 돌아가면 정말 역사에 이름이 남을 텐데.”
“돌아갈 수 있다.”
“저들이 순순히 보내주겠소?”
“그 전에 단주가 방도를 마련할 것이다.”
진무립을 쳐다본 선우진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우린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
“…….”
가만히 생각하던 황보한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형님의 말을 듣고 보니 왜 또 그렇게 될 것만 같은 거지.”
마주 본 두 사람의 얼굴에 똑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너도 지쳤을 게다. 그만 쉬거라.”
“형님도 좀 쉬시오.”
“그러마.”
허리를 곧게 편 선우진이 진무립의 곁으로 다가갔다.
“단주. 좀 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진무립이 창백한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이 전쟁을 마무리하면 평생 푹 쉴 생각입니다.”
가만히 끄덕이던 선우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단주.”
“말씀하십시오.”
“이 전쟁이 과연 어떻게 끝날 것 같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