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320)
◈ 320화. 싹이 트고, 만개하고
곳곳에 흩어져 있던 부상자들이 하나둘 타오르는 불길 앞으로 모여든다.
“전쟁의 끝이라…….”
그들에게 자리를 내준 진무립이 선우진과 나란히 섰다.
“천하를 구한 영웅들을 무사히 가족 품으로 돌려보내는 게 이 전쟁의 끝이 될 겁니다.”
그 이상 바라는 것은 없다.
자신에게 상천의 가족들이 목숨보다 소중한 것처럼, 저들에게도 집에서 오매불망 기다리는 가족이 있을 테니까.
그 말을 남긴 진무립이 다른 부상자를 옮기러 발을 돌린다.
우두커니 선 선우진은 멀어지는 진무립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진무립에게 전쟁의 승리는 중요치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사욕은 없다.
상천을 세운 이유도 한평생 숨어 살아온 이들에게 밝은 태양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그가 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모두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만일 천하가 혼란에 휩싸이지 않았더라면 진무립이라는 존재는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룡에서 싹이 트고 광룡에서 만개한 무림인가.’
천하를 오시하는 두 명의 절대자와 함께한 이 전쟁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진무립의 손에서 만개한 불꽃은 추위에 몸서리치던 부상자들의 몸에 따스하게 스며들었다.
치열함으로 가득했던 소화산에 어둠과 함께 고요함이 깃들었다.
타오르는 불씨는 점점 더 강렬한 빛을 뿜어내고 다친 이들의 거친 숨소리도 점점 고르게 낮아진다.
한쪽 구석에 누운 유대하가 잔뜩 인상을 쓰며 돌아누웠다.
“크…….”
육군명이 불에 장작을 넣으며 물었다.
“아프냐?”
곧장 대답하려던 유대하의 눈에 빈사 상태로 실낱같은 숨을 이어가는 주초가 떠오른다.
이런 상황에선 엄살을 부리는 것조차 사치다.
유대하는 시선을 밤하늘로 옮기며 고개 저었다.
“이 정도는 견딜만해.”
빙그레 웃는 육군명의 눈동자에 은은한 모닥불이 일렁거린다.
팔로 두 무릎을 감싼 육군명이 읊조리듯 나직이 묻는다.
“넌 무립과 만난 것을 후회한 적이 있나?”
대답은 간단했다.
“아니.”
“난 있다.”
“그러냐.”
“그래도 난 제법 내 무공에 자신이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녀석의 본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였지. 나 따위는 진짜 고수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에 내가 걸어온 길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유대하는 그의 말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누구라도 넘지 못할 벽과 만난다면 한 번쯤 비슷한 생각을 할 수도 있을 테니까.
육군명은 못다 한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무립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난 언제까지나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이름 모를 전쟁터에서 쓸쓸하게 죽었을지도 모르지. 지금은 그와 만난 게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네가 머물 곳도 찾았고 말이야.”
육군명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오른다.
“그렇지.”
마주 웃은 유대하가 하늘을 응시하며 말했다.
“설령 이 전쟁에서 죽었더라도 우린 무인으로서 이보다 값진 삶을 살지는 못했을 거야.”
천하의 운명을 판가름 낼 전투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무인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런 전쟁의 중추에서 활약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
육군명이 그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제법 잘 싸우더구나.”
커다란 장작을 한 아름 들고 온 진대천이 두 사람의 곁에 앉았다.
“이름이 뭐였지?”
유대하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앉았다.
“유대하입니다.”
“사천의 무인이었던가?”
“예전엔 그랬었지요. 지금은 상천의 무인입니다.”
유대하를 유심히 쳐다보던 진대천이 의아한 듯 물었다.
“네 녀석 정도의 무인이라면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법도 한데 도무지 기억에 없군.”
육군명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으나 유대하라는 이름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유대하는 실소를 흘렸다.
듣고 보니 자신의 처지가 과거와는 천양지차라는 게 실감이 난다.
“당연합니다.”
고개 돌린 유대하가 어둠 속 어딘가에 있을 진무립을 바라보았다.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귀농을 꿈꾸던 자신의 운명을 바꿔준 사람.
그와 함께해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대하는 진대천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분과 만나기 전까지 사람들은 나를 마도림의 식충이라고 불렀으니까.”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모닥불을 슬며시 흔들더니 이곳의 온기를 건너편 모닥불에 전해준다.
무릎을 꼭 끌어안고 있던 탁소혜가 슬며시 콧물을 훔쳐 바지에 닦는다.
투백비가 떨떠름한 얼굴로 슬쩍 물러나자 그녀가 곱게 눈을 흘겼다.
“혹시 봤어?”
“코 닦는 건 못 봤어요.”
“좋은 태도야. 살인멸구는 하지 않아도 되겠어.”
“…….”
마주 앉은 단소룡이 피식 웃으며 장포를 벗었다.
“입거라.”
싱긋 웃은 탁소혜는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양천이 작게 입을 열었다.
“령주님.”
“그래.”
“이렇게 느긋하게 쉬고 있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숨통을 조여오는 칼날이 지척에서 우릴 겨누고 있는데 어찌 저들은 저렇게 태평한 겁니까?”
진무립의 안배로 전투가 멈췄다곤 하나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지금의 평화는 저들이 천산의 소식을 확인하기 전까지만 이어질 터.
다른 이도 그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단주의 명이 내려왔다는 이유로 누구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잠시 생각하던 단소룡이 웃으며 말했다.
“염려하지 마라. 이틀 뒤면 알게 될 것이다.”
굳이 어린 무인들에게 진무립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려줄 필요는 없다.
자칫 정보가 새어 나간다면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를 일이니까.
단소룡은 천진서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네가 처음에 그와 같이 천경봉에 올라갔다고 들었다. 진무립을 어떻게 보았는지 묻는 게다.”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강합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적의 호위들을 도륙하고 당당하게 수장들과 맞서던 그 눈빛.
황천패와 협곡에서 떨어지며 벌였던 경천동지할 전투.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좁은 협곡에서 수천 명의 무인에 단신으로 맞서던 그 당당함.
그의 전설적인 활약은 어느 하나 쉽게 지워질 기억이 아니다.
잠시 고민하던 천진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존경스러울 정도로 강합니다.”
그 외의 단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화령만이 천하의 전부인 줄 알았던 자신에게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알려준 무인.
자신에게 진무립은 그런 존재였다.
쉬이 잠들지 못하는 이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절벽 아래 움푹 꺼진 바위 밑에선 진무립과 단려화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추워요?”
진무립이 창백한 얼굴로 싱긋 웃었다.
심법을 운용해 내력을 보충했다곤 하나 과도하게 흘린 피가 한순간에 채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춥군. 옷 좀 벗어주겠나?”
문득 단려화의 시선이 자신의 의복으로 향한다.
찢겨나간 장포는 벗어버린 지 오래.
지금 입고 있는 무복을 벗으면 속곳이 드러나고 말 것이다.
“혹시 수의(壽衣)를 입고 싶어졌나요?”
“……아니.”
진무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단려화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추위에서 자유로운 진무립이 파르르 입술을 떨고 있다는 것은 몸 상태가 그만큼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려화는 진무립에게 바짝 붙으며 자신의 체온을 나누었다.
“무립.”
“응.”
진무립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정말 고생했어요.”
아직 이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지금의 진무립에게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었다.
따스한 위로가 추위를 밀어내듯 진무립의 귓속에 스며든다.
그녀의 말에 그간의 고생이 눈 녹듯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
고맙다고 답을 하고 싶었지만 먹먹해진 가슴은 입을 여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가슴의 동요를 느낀 단려화가 진무립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진무립은 열리지 않는 입을 어렵게 열었다.
“고마워. 당신도…… 고생 많았어.”
고개 돌린 단려화가 진무립을 올려보며 배시시 웃는다.
“우리 모두 고생했네요. 이제 마무리만 남았어요.”
시선을 피한 진무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의 끝을 알려오듯, 뿌연 달무리 아래로 작은 눈송이가 하늘거리며 떨어져 내린다.
눈송이를 눈에 담은 진무립이 작게 입을 열었다.
“그래.”
짙어지는 밤과 함께, 곳곳의 대화가 잦아들며 고요한 적막이 협곡을 사로잡는다.
잠든 단려화를 슬며시 벽에 기댄 진무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녘 차가운 공기와 함께 협곡이 새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동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는 가운데 기운을 차린 태종무단의 무인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며시 눈을 뜬 주초가 창백한 얼굴로 침음했다.
“으음.”
곁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풍연이 눈을 부릅뜨며 쳐다봤다.
“정신이 든 거냐?”
주초가 힘겹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한경이 반갑게 웃으며 풍연을 타박한다.
“그것 봐. 쉽게 죽을 놈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안도한 풍연은 머리를 긁적이다 문득 눈앞의 모닥불을 쳐다봤다.
“불이…….”
주변을 돌아보는 이는 비단 풍연만이 아니었다.
화령의 천진서도,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한도, 이제 막 잠에서 깬 남궁세가주 남궁검도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이 소복하게 쌓여감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피워진 모닥불은 여전한 열기를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궁검은 문득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눈에 젖은 장작을 털어 모닥불에 집어넣는 단소룡이 있었다.
“설마 맹주께서 밤새…….”
단소룡이 밤새 불을 지폈다면 그보다 송구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소룡은 고개를 저었다.
“내게 이런 눈 속에서 불을 지키는 능력은 없네.”
이어서 그가 가리킨 곳에는 불가에 누워 잠이 든 진무립과 곁을 지키는 서진환이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진무립에게 닿는다.
누구보다 힘든 싸움을 했을 진무립이 밤새 불까지 지폈다고 하니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진무립이라는 무인이 어째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지, 그의 동료들이 어째서 그를 목숨 걸고 따르는지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조용히 일어난 제갈경이 검지를 입술에 붙이며 나직이 말했다.
“부상자의 상태를 살피고 위중한 이들은 가운데로 옮겨주십시오.”
일련의 지시를 내린 그가 단소룡에게 다가갔다.
“마교의 동태를 살피고자 합니다.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좌우의 절벽, 그리고 앞뒤를 슬쩍 쳐다본 단소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단소룡과 제갈경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을 때.
장천무는 부교주 군도, 그리고 살아남은 천산육마와 조촐한 아침 식사를 들고 있었다.
먼저 식사를 마친 장천무가 화마 염자성에게 물었다.
“지시한 것은?”
염자성이 그릇을 내려두며 말했다.
“이행했습니다. 쥐새끼 하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포위했습니다.”
지친 태종무단이 부상자의 치료에 여념이 없는 사이 염자성을 비롯한 마교도들은 간격을 두고 완벽한 포위망을 갖춘 상태였다.
장천무의 시선이 서쪽 하늘로 옮겨간다.
“좋은 소식을 가져와라. 성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