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24
승준이 몸을 바짝 앞으로 기울이더니 속삭였다. 키스라도 하려는 줄 착각하고 커졌던 초원의 눈이 이어지는 말에 또 한 번 커졌다.
“격리3팀 팀장.”
격리3팀이라면 현우가 오늘 ‘사고’를 친 위험 등급 격리소를 담당하는 팀이었다.
“그럼 그분이 다 뒤집어쓰시는 건⋯.”
그렇지 않아도 그 팀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 격으로 문책을 당할 텐데. 하필이면 그 팀 팀장의 신원으로 개체를 탈출시킨 건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괜찮아요. 그 사람도 한패니까.”
그렇다니 입속에서 돌던 쓴맛이 순식간에 고소한 맛이 되었다.
“근데 같은 편이면서 개체를 구해 준 건 말이 안 되지 않나요?”
“그것도 걱정 안 해도 돼요. 출입 기록에서 그 사람 이름 보면 그쪽에서 사건 덮을 거예요.”
“어째서요?”
“누구도 못 건드리는 사람이니까. 모 국회의원의 아들이자 청장이 아끼는 조카거든.”
“아⋯, 그 사람이구나.”
능력도 안 되는데 낙하산으로 격리팀 팀장 자리를 꿰찬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몇 년 전에 들었다. 그러고 보니 유독 위험 등급 격리소 보안이 허술했던 게 이제야 이해가 됐다.
초원은 마주 앉은 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모든 수를 다 읽을 줄 아는 사람답지 않게 어리둥절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새겨졌다. 다른 건 다 알아도 눈앞의 여자만은 모르겠다는 듯.
‘팀장님, 진짜 똑똑하고 미련하시네요.’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왜 다 뒤집어쓰겠다는 미련한 소리를 했을까? 누구도 못 건드릴 사람까지 함정에 빠트리려 했던 걸 들켰더라면 본인의 무덤만 더 깊어졌을 텐데. 하긴, 이 똑똑한 분이 그걸 몰랐을까? 다 알고도 했겠지. 그러니까 왜 미련하게 그런 짓을⋯.
‘그래도 초원 씨가 밤에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테니까.’
‘아니야, 설마.’
초원을 좋아해서 그런 미련한 짓을 했더라면 키스를 안 받아 줬을 리가. 근데 키스는 안 받아 줘 놓고 왜 갑자기 오늘은 딴 사람으로 돌변한 걸까? 귀엽다는 둥, 예쁘다는 둥 헛소리까지 하면서.
팀장으로서의 조승준은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속을 헤아릴 수 없어도 그게 당연한 사람이었고. 하지만 가까이서 보는 지금, 남자로서의 조승준은 더더욱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왜? 무슨 생각 해요?”
승준도 초원의 속을 알 수 없긴 매한가지였다.
어제 먼저 입술을 덮칠 땐 언제고 오늘은 왜 선을 긋는지. 유머 감각 있고 다정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니까 애써 쑥스러움을 참고 말로 표현해 주고 있는데 왜 뚱한 반응인지 말이다.
‘하긴, 그때도 속을 모를 여자였으니까.’
집에 가기 전에 화장실을 다녀온 초원은 승준이 카드 영수증에 사인을 하고 있는 걸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팀장님, 제가 사기로 했는데요.”
“다음번은 초원 씨가 사요.”
직원에게 영수증을 넘겨주며 그가 씨익 웃었다. 다음번이라니. 바보같이 음흉한 계략에 단단히 말려들었구나.
초원은 차 뒷좌석에 앉아 옆에 앉은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대리기사를 부르는 그를 보자 입 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인데⋯.’
몸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미치겠네.’
집으로 가는 길, 초원은 몸과 마음의 2차 대전을 벌이고 있었다. 대리기사가 오고 차가 출발하자 긴장을 놓은 것도 잠시, 아무렇게나 늘어뜨려 놨던 오른손을 승준이 덥석 쥐더니 깍지를 꼈다. 단단한 엄지가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초원은 이성을 놓을 것 같아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속으로 애국가를 불렀다.
‘진짜 미치겠네. 오늘은 술 마시고 폭주하는 개체 없나?’
1절밖에 기억이 안 나 이것만 다섯 번쯤 불렀을 때 집 앞에 무사히 도착했다. 차에서 도망치듯 내린 그녀는 대충 인사를 하고 건물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초원 씨.”
아, 진짜 그냥 좀 보내 주지.
“네?”
마지못해 몸을 돌렸더니 승준이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선 채로 아쉬운 듯 웃었다.
“이번 주말에 뭐 해요? 이번엔 초원 씨가 밥 사야지.”
“아, 친구 애기 돌잔치 가기로 했는데요.”
상상 속의 친구도 친구지.
“언제?”
아, 진짜⋯.
“토요일이요.”
“그럼 일요일은?”
“엄마 생신이라 집에 가려고요.”
내년 3월에요.
승준이 피식 웃더니 초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엽네.”
역시나 거짓말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남자였다. 초원은 속이 뜨끔해서 고개를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내일 뵐게요.”
그대로 뒤 돌아 건물 입구에 서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어째선지 승준은 등 뒤로 바짝 따라와 있었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아침에 힘들 거 없으니까 내일 정시 출근하세요, 홍 주임.”
온몸을 더듬는 듯한 그의 낮은 웃음소리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 노래는 누가 이렇게 눈치 없이 썼나.
“@#%^&하는 아름 씨, 생일 축하합니다.”
다들 ‘사랑’은 얼버무리고 민망한 듯 웃었다. 작은 고깔모자를 쓴 아름이 손뼉을 치더니 촛불을 후 불어 껐다.
“소원 안 까먹고 빌었어, 아름 씨? ‘박 주임님 로또 1등 돼서 다음 주부터 출근 안 하게 해 주세요.’하고.”
“그런 건 박 주임님이 직접 비셔야죠.”
아름이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고깔모자를 벗었다.
“그래서 되면 내가 좀 떼 준다니까?”
“거짓말.”
“선배, 꼭 로또 1등이 돼야 회사를 때려치울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초원은 숫자 2와 6 모양의 초를 뽑으며 보란 듯 얄밉게 웃었다.
“그래, 박 주임. 오기 싫으면 그냥 내일부터 쭉 쉬어. 팀장님, 박 주임 오늘 중으로 퇴사 처리 가능하실까요?”
초원은 신이 희경을 만들다가 손이 미끄러져서 얄미움을 드럼통째로 들이붓는 장면을 상상했다.
뒤에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서 있던 승준은 무심한 얼굴로 주머니에 꽂혀 있던 펜을 집어 들었다.
“안 될 거 있나요. 어디 사인하면 되죠?”
얼른 사인 못 해 안달 난 듯 볼펜이 딸깍거리고 초원은 저도 모르게 풋 웃고 말았다.
‘아, 이런 거에 웃어 주면 안 되는데⋯.’
으뜸이 케이크를 하나씩 잘라 나눠 주었다. 원래 팀원들 생일 축하는 아름이 챙기지만, 본인 생일을 직접 챙기게 할 수 없으니 오늘은 초원이 맡았다. 아름이 요즘 다이어트를 한다며 글루텐 프리 비건 케이크를 사 달라고 해서 좀 귀찮긴 했지만 멀리까지 가서 사 온 케이크였다.
초원은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 입에 넣었다.
‘흠⋯.’
혀가 아릴 정도로 달았다.
‘맛은 있는데⋯. 그래, 글루텐 프리 비건 케이크지 슈가 프리가 아니니까. 근데 이게 다이어트랑 무슨 상관이지?’
“홍 주임, 뷔페 예약은 했지?”
케이크를 한 입만 먹고 내려놓은 병훈이 물었다.
“네, 6시 반이요.”
“아, 팀장님. 저희 오늘 퇴근하고 아름 씨 생일 축하 겸 용산에 있는 뷔페로 가기로 했는데 혹시 안 바쁘시면⋯.”
병훈이 이렇게 예의상 물으면 이쯤에서 승준이 “아니, 난 됐으니까 여러분들끼리 재밌게 노세요.”라고 하는 게 정해진 시나리오였다.
“그러죠.”
틀을 벗어난 대답에 초원은 승준에게서 등을 돌리고 몰래 한숨을 쉬었다.
‘왜 저래, 진짜.’
“한 조각 남았는데 더 드실 분 있으신가요?”
으뜸이 테이블 위를 정리하며 물었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너무 달다, 그치? 왜 이렇게 단 걸 사 왔어?”
희경이 인상을 쓰며 초원에게 핀잔을 줬다.
“생일인 사람 먹고 싶은 거로 사는 거니까요.”
초원은 일회용 접시가 희경의 척추라고 상상하며 꼭꼭 접었다.
“아름 씨 생일인데, 아름 씨 먹어요. 집에 가져가든가.”
초원의 말에 아름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다이어트 중이라서⋯. 주임님이 멀리까지 가서 사 오셨는데 드세요.”
“어머, 홍 주임도 다이어트해야지.”
갑자기 희경이 초원의 팔뚝을 붙잡더니 이 살 좀 보란 듯 흔들자 초원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진짜 상사만 아니었어도⋯.’
“여기서 홍 주임만큼 다이어트 필요 없는 사람도 없지 않나?”
초원의 바로 뒤에서 중저음이 울렸다.
‘너무 가까운데⋯.’
초원은 반 발자국 앞으로 옮겼다.
[박병훈: 팀장님 갑자기 왜 그러시지? -_-]주무관급 이하 단체 채팅방에 불이 붙었다.
[이으뜸: 심심하신가 봅니다.] [박병훈: 아니, 심심하시면 여자를 만나시든가 하면 되지.] [차현우: ㅎㅎㅎ] [박병훈: 여튼 팀장님 오시면 팀장님이 사시는 거네? 돈 굳어서 좋다만⋯.] [정아름: 오+_+] [박병훈: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비싼 데로 갈걸⋯.] [홍초원: -_-] [박병훈: 취소하고 딴 데로 예약 안 되나?] [홍초원: 안 됩니다.] [박병훈: 그냥 취소하고 소고기나 소곱창 같은 거 먹으러 가지?] [홍초원: -_-] [정아름: 그냥 가요. 나 다이어트 중이라 뷔페 가는 건데⋯.] [박병훈: 이건가? 아름 씨 요즘 살 빠지고 예뻐져서 팀장님이 그러시나?]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겠다고 초원은 속으로 푸념했다.
[정아름: 뭐예요⋯. 기분 나빠. 글고 저 원래부터 예뻤거든요?] [박병훈: 내 말은 ‘더’ 예뻐졌단 거지. 아니, 왜? 팀장님 잘생기셨잖아. 키도 크고⋯. 여자들이 좋아하는 타입 아닌가?] [정아름: 팀장님이랑 내 나이 차가 얼만데⋯.] [차현우: 홍 주임도 있잖아요.] [홍초원: -_-] [박병훈: 에이, 홍 주임은 뭐랄까 팀장이 키우는 후계자 같은 느낌이지. 남자들은 아름 씨처럼 사근사근한 여자를 좋아한다니까.] [홍초원: 내가 진짜로 팀장님 뒤를 이으면 선배부터 자르려고요.] [박병훈: 아이고 왜 그러세요, 우리 홍 팀장님.] [홍초원: 만년 주임 박 주임님, 진급은 언제 하실 생각입니까?] [차현우: ㅋㅋㅋㅋㅋㅋ] [박병훈: 와 진짜 너무한다. -_-]초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머그잔을 들었다. 상처받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병훈에게 목 긋는 시늉을 하고 탕비실로 향했다.
커피 머신 버튼을 누르고 카운터에 허리를 기댔다. 생각할수록 숨이 막히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여우 앞의 토끼가 이런 기분일까?
초원은 갑자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세상에 잡아먹히고 싶어 하는 토끼도 있을까? 마음은 ‘안 돼!’라고 외치는데 몸은 ‘돼’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다 내 잘못이지. 키스는 왜 해 가지고⋯.’
대체 그 짧은 입맞춤이 뭐가 그리 대단했길래 그 돌부처가 이러는 걸까?
요즘 팀장은 어떻게든 초원과 단둘이 있으려고 기를 썼다. 평소엔 혼자 가던 외근에 초원을 데리고 가는가 하면 팀장실에서 종일 자료 정리를 시키지 않나. 또 저번 토요일에는 그녀가 사 주는 닭갈비가 먹고 싶다고 불러내더니 느닷없이 춘천으로 차를 몰았다.
승준은 초원이 그어 놓은 굵은 선을 넘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굴고 있었다.
‘차라리 대놓고 사귀자든지, 자자든지 말이나 하면 거절이라도 할 텐데. 상사니까 눈치껏 잘 거절해야겠지만⋯.’
이 남자가 원하는 게 어느 쪽이든 받아 준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가벼운 흥미라면 실망이고 진지한 감정이라면 곤란하니까.
곤란한 것보다는 실망이 낫다. 진지한 관계를 원한다면, 그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이 부담스러웠다. 사실, 가지지 못한 것이 훨씬 부담스러웠다. 하필이면 가족이 없는 남자니까.
토요일에는 어쩌다 조카 사진을 보여 주게 되었는데 한참을 부럽다는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었다.
‘입매가 초원 씨를 닮았네.’
‘제가 낳은 거 아닌데요.’
승준이 조용히 웃더니 초원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초원 씨 아기는 훨씬 예쁘겠지.’
지나가는 말로 하는 투도 아니고 기대감이 담긴 말투. 하지만 초원에게 그런 것 기대해 봤자다.
그러니 안 될 관계, 괜한 여지를 주지 말아야 했다. 차라리 가정을 꾸리는 데 관심이 없어 보이는 현우와 장산범이나 쫓아다니는 게 덜 아픈 거다.
팔짱을 끼고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탕비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심장 소리가 귓속을 울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초원을 보고 귀여운 아기 고양이라도 본 듯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안녕, 초원 씨.”
오늘 종일 봐 놓고 왜 인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초원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는 머그잔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승준이 앞을 막아섰다.
“잠깐만⋯.”
그는 초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오른손을 서서히 그녀의 뺨으로 가져갔다.
‘사람들 왔다 갔다 하는 곳인데⋯.’
대체 여기서 뭘 하려는 건가 싶어 손이 닿기 직전에 고개를 살짝 반대쪽으로 틀었더니 이젠 왼손이 덥석 얼굴을 감쌌다.
“가만히 좀 있어요.”
초원은 지금 후다닥 도망가고 싶은 건지 와락 안기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승준은 엄지로 뺨을 살짝 매만지더니 눈앞으로 내밀었다.
“속눈썹 붙어 있어서⋯.”
“아⋯.”
초원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탕비실 밖으로 도망치듯 나왔다.
아름의 접시를 보는 초원의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회만 홀라당 발라 먹고 남은 밥이 접시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쌀 아깝게⋯.’
이 광경이 기분 나쁜 건 초원만이 아니었나 보다.
“정아름 씨는 그럴 거면 횟집으로 가지 그랬어요?”
무뚝뚝하게 뱉은 승준의 말에 아름이 민망한 듯 배시시 웃었다.
“제가 다이어트 중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