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rminally Ill Young Master of the Baek Clan RAW novel - chapter (442)
442화 멸문한 청림 (1)
“도, 도령 사조!”
유수린이 시신의 얼굴을 쓸어 보며 울부짖었다.
그녀는 한평생을 이곳 청림에서 살아왔다.
청림의 문도 수가 많다 하나, 그들은 분명 가족과도 같은 이들이었다.
가족들의 시신이 온 사방에 가득했다.
“유영아, 기정아.”
나이 많은 이들만이 죽은 것은 아니다.
유수린과 같은 연배의, 그녀보다 어린 삼대제자들도 여럿 죽어 있었다.
시신들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 일그러진 표정이 얼마나 큰 공포와 고통을 겪었는지 설명해 주는 듯했다.
유수린은 절규하듯 처절하게 울었고.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준명도 쉰소리를 내며 끅끅댔다.
손희일은 무릎을 꿇은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무너진 전각의 잔해 속에서 그들의 울음소리가 서글피 울렸다.
이강은 그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
삼대제자들과 달리 이강은 울지 않았다.
청림에서 머물던 시간이 길지 않아 슬퍼하는 마음조차 잊었을까.
아니, 분명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강은 깊은 우울함을 느꼈다.
백씨세가에서도 그랬다.
오랜만에 돌아간 그의 집은 다른 이들에게 빼앗겨 있었다.
좋은 추억이든 나쁜 추억이든 어린 시절을 보내 온 곳이다.
이강은 그 가주전을 직접 불태우고 나왔다.
진짜 집은 그렇게 쉽게 불탔다.
그리고 두 번째 집.
이강이 백씨세가 다음으로 오래 머물렀던 청림 역시 무너졌다.
‘……내가 머문 곳마다 피가 흐르는군.’
문득 이강은 그리 느꼈다.
실제로 그러했다. 세상이 요지경이라고 하나 이강의 주변에선 늘 피가 흘렀다.
그는 마치 역마살이라도 낀 것처럼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백씨세가에서 청림, 무림맹, 무당파, 곤륜, 마교, 포달랍궁, 황궁.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 평화롭게 지나간 적이 없었다.
‘뭐, 제 기가 나쁘거나 한 걸까요.’
이강은 씁쓸하게 그리 물었다.
하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랬지.’
장삼봉과 천마가 사라졌다는 것을 잠시 잊었다. 지금의 천마패는 평범한 금속조각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의 곁에 있던 혼백들도 모두 떠났다.
불사신검도, 장삼봉도, 천마도, 달마마저.
그래도 청호가 남아 있으니 다행일까.
청호는 귀를 쫑긋대며 이강의 곁을 맴돌았다.
이강은 더욱 울적한 마음이었다.
아니, 이것은 우울함이 아니라 막막함이었다.
이강은 절대지경에 올랐다.
놀라운 재능이었으며, 그만큼의 노력이 소요되었다.
아직 젊은 청년의 몸으로 절대지경에 올랐으니, 그 옛날의 장삼봉이나 천마에 비견할 만한 성과였다.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이강은 인간 중에서 가장 강한 이도 아니었다.
장삼봉과 천마의 진짜 힘은 이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천하제일인들이 말해 주었다.
인간에게는 결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인간이 인고의 시간을 견뎌 얻어 낸 초극절기를, 태어날 때부터 숨 쉬듯 쓸 수 있는 괴물들이 있다고.
이강은 마치 떨어져 내리는 낙엽이 된 기분이었다.
거세게 부는 삭풍에 휩쓸려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그런 무력한 낙엽.
“모두 죽었나…….”
하준의 중얼거림이 천둥처럼 들렸다.
청림은 멸문했다. 틀림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이강은 어찌해야 할까.
와룡분지에 갇혀 있는 팔만 명의 사람들을 지금의 인원으로만 구해 낼 수 있을까.
몇 안 되는 이들이 참사교에 대항할 수 있을까.
그 막막함이 이강의 눈앞을 흐리게 했다.
마음이 꺾이면, 그것이 곧 심마(心魔)가 된다.
이강의 마음속 한구석에 검은 응어리가 지려는 순간이었다.
“킹.”
청호가 울음소리를 냈다.
탁해진 이강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청호야?”
청호는 어지간해서는 말로 뜻을 전하지 않았다.
청호는 그저 땅을 팠다.
작은 주둥이와 앞발로 흙을 헤쳐 봤자 속도가 빠를 리 없었다. 이강이 땅 파는 일을 도왔다.
곧, 땅속에서 나타난 것은 흙 묻은 시신의 손이었다.
청호는 나머지를 부탁한다는 듯 이강을 올려다봤다.
이강은 쓰게 웃었다.
“이미 죽은 이다.”
청호는 살아 있는 사람이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일까.
이강은 그리 말하면서도 건물의 잔해 속에 묻힌 사람을 꺼냈다.
역시 죽은 지 한참 된 시신이었다. 도화제자의 옷이었다.
이강은 시신을 바로 뉘었다.
이렇게 땅에 묻힌 시신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강은 청호가 하는 일을 반복했다.
묻혀 있거나 흩어져 있는 시신들을 바로 눕히고 정리했다.
그러곤 귀를 긁고 있는 청호에게 중얼거렸다.
“……네가 나보다 낫구나. 포기하지 않으니.”
이강은 제 말에 흠칫 놀랐다.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그 예전 어두운 통로 속에서 함께 대화했던 소화였다.
그때 이강은 그녀에게 다짐했었다.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끝까지 살아남아 참사교에게 복수하겠다며.
이강은 자신이 오랫동안 소화에 대해 떠올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잊고 있던 것이다. 그런 다짐을.
이강이 눈을 빛냈다.
“엉?”
역시 울적한 얼굴로 앉아 있던 담현이 고개를 들었다.
“유수린, 손희일, 준명. 모두 내 앞으로 모여라.”
밀려오는 슬픔이 멎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별다른 말 없이 모두 이강의 앞에 모였다.
이강은 사질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사문이 멸문된 것으로 보인다. 살아남은 것은 우리뿐일지도 모른다.”
유수린이 눈물을 닦았다.
이강의 말은 담담하기 그지없어서 차갑게까지 들렸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울고만 있을 시간은 없다.”
이강은 이대제자다.
적어도 삼대제자들 앞에서는 손윗사람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혹시 모를 생존자를 찾고, 사문의 물건들을 챙긴다. 우리들이 살아 있는 동안은 청림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전각이 무너졌다고, 장문인과 장로들이 죽었다고 문파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사문의 무공과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문도들이 살아 있다면 청림은 완전히 멸문한 것이 아니다.
“사숙의 말씀이 옳습니다.”
손희일이 시뻘게진 눈을 부릅떴다.
그 단단하고 묵직한 목소리에서 비장함이 느껴졌다.
그는 삼대제자들의 대사형이었다.
그 어깨에 짊어진 책임을 잊지 않은 듯했다.
이강은 고개를 끄덕이고 수색을 지시했다.
“손희일과 준명은 이곳을 수색해 보아라. 특히 연학관을 중심으로 장서들이 무사한지 보고.”
“유수린과 하준, 너희는 오화대서고를 살펴보도록.”
그러면 이강과 담현은 무엇을 할 것인가.
궁금증을 알아챈 듯 이강은 엄지를 들어 자신이 갈 곳을 가리켰다.
“나는 백운봉에 가 보겠다.”
백운봉이라 함은 수직 절벽처럼 솟아오른 높은 봉우리다.
저곳 위에 있는 전각이 바로 림주의 거처였다.
청림이 참사교로부터 지키고 있는 봉신함이 숨겨져 있는 곳이기도 했다.
“흩어진다.”
이강의 말과 함께 일행이 흩어졌다.
이강과 담현은 백운봉을 슬쩍 올려다봤다.
청림 어디서든 백운봉은 보인다.
벽에 박아 둔 계단으로 그곳에 오를 수 있었는데, 그 계단은 전부 철거된 뒤다.
이유는 뻔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백운봉을 지키려는 시도였으리라.
오를 길이 없어 보이지만, 이강이나 담현에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이강은 발바닥의 용천혈에 흡자결의 기공을 운용했다.
그러자 수직이나 다름없는 벽면을 평지 달리듯 할 수 있었다.
이강과 담현은 얼마 걸리지 않아서 백운봉 꼭대기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타난 광경에, 이강의 표정이 굳었다.
백운봉 위에는 큼지막한 전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전각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벽력탄을 터뜨려도 저 정도로 큰 구멍을 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구멍은 꼭 사람의 손바닥 모양 같았다.
“장법으로…… 저런 구멍을 냈다고?”
장법 때문이 틀림없었다.
사람이 장력을 내뿜어서 전각을 박살 냈음이 틀림없었다.
이런 짓이 가능한 사람은 호교사령밖에 없었다.
누군가 차력을 써서 한 일일 수도 있으나, 이강은 어째선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술법들이 모두 파훼되었어.”
백운봉의 전각에는 침입자를 막아 낼 수많은 방비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기관진식과 기문진법, 다양한 술법 방벽들.
하지만 그중에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놈들도 많은 희생을 치른 듯하지만…….”
참사교도들의 시신이 많았다.
가슴에 화살이 박힌 자도 있었고, 새카맣게 불탄 이도 있었다.
그들 중 평교도들은 보이지 않았다.
적색 수실, 금색 수실, 심지어는 푸른 수실의 흑립인들도 있었다.
“림주님이 기거하시는 곳이니, 이자들도 모든 수단을 다 썼겠지요.”
이강과 담현은 조용히 걸었다.
이곳의 전각은 사실 수장고(收藏庫)의 역할 또한 했다.
금기보패들과 봉신함을 숨겨 둔 곳이다.
시신은 수장고로 향하는 동안에도 계속 늘고 있었다.
이강은 마침내 한철을 섞어 만든 수장고의 대문 앞에 도착했다.
“……문을 찢어발겼군요.”
검강을 사용하더라도 베어 낼 수 없는 한철 문이 반쯤 뜯겨 나가 있었다.
거대한 충차로 수백 번을 들이박은 듯한 모습이었다.
중간중간 움푹 들어간 흔적은 분명 손자국이었다.
전각의 입구에 거대한 구멍을 뚫은 자가 이곳 수장고의 문을 열었음이 틀림없었다.
이강과 담현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무참하다시피 파괴된 수장고 내부.
이강이 경악했다.
“……이런!”
한쪽 벽면에 누군가가 기대듯 앉아 있었다.
틀림없는 시신이었다.
가슴팍에는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 옆에는 도저히 사람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 하나가 잘려 뒹굴고 있다.
시신의 정체는…….
“림주님…….”
청림주 임기학.
거대한 별이 떨어진 것이다.
림주의 죽음을 확인한 이강은 이를 악물었다.
임기학이야말로 청림의 최고수였다.
이강은 림주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도 알지 못했다. 게다가 그 지식의 깊음이란 또 어떠했나.
세상의 비밀들을 품고 있을 것 같았던, 도저히 죽을 것 같지 않았던 림주였다.
헌데, 그가 이토록 쓸쓸하게 죽어 있었다.
호교사령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왼손 하나를 잘라 냈지만…… 그것뿐이다.
어쩌면 그 괴물들은 잘린 왼손 또한 재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담현은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렸다.
림주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이강은 눈을 부릅뜨고 림주의 시신을 살폈다.
“흑암이라는 자 같습니다.”
앞에 있는 것에서 눈을 돌려선 안 된다.
이강은 림주의 눈을 살폈다.
주름진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눈은 감기지 않았다.
탁하게 변한 눈빛은 바닥의 어떤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강은 그곳을 살폈다.
바닥에는 핏자국이 가득하다, 림주와 호교사령이 흘린 피일 것이다.
그 덕에 발자국이 확실히 보였다.
역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발자국.
오른손의 주인임이 분명했다.
아마도, 흑암은 이곳에 서서 림주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죽어 가는 림주는 벽에 기대고 있었고, 무언가 대화를 나누었을 터.
그러고는 걸어서 봉신함을 가져가고 밖으로 떠났으리라.
시신을 훼손하지 않은 것은 적에 대한 경의라도 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이 그러할 테니 그다음에는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된다.
“뭐 하는 거야?”
“쉿, 조용히 있어 보십쇼.”
이곳, 피가 가장 많이 튄 곳.
부스러진 내장 조각이 있다. 흑암의 손목이 잘린 곳은 아닐 테니 림주가 치명상을 입은 곳이리라.
이강은 그렇게 수장고 전체를 훑듯 움직였다.
눈이 놀랍도록 빠르게 움직이고, 식은땀이 그의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재차 물어보려던 담현은 심상찮은 점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강이 우뚝 멈춰 섰다.
이강은 허겁지겁 봉신함이 담겨 있던 우물로 달려갔다.
우물을 덮어 둔 철판은 바닥에 떨어져 있고,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강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저곳에도 칼자국과 부서진 자국이 여럿 있었다.
담현이 당황한 얼굴로 이강의 말을 기다렸다.
이강은 잠시 고민하더니 중얼거렸다.
“뭘 찾은 것 같아요.”
이강은 대답하는 대신 림주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림주의 오른손을 가리켰다.
평범하게 바닥에 늘어져 있는 손이었다.
“그게 뭐.”
“여기, 보십쇼.”
이강은 림주의 손을 치웠다.
그러자, 마루에 새겨져 있는 문자가 나타났다.
손톱으로 급하게 긁어 새긴 듯 조악하게.
위(上).
그리 적혀 있었다.
담현과 이강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동시에 천장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