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rminally Ill Young Master of the Baek Clan RAW novel - chapter (58)
58화 가면 사내 (2)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
모든 인간이 잔뜩 가지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흘리지 않도록 꽁꽁 숨기는 것.
가지고 있는 양의 약 3분지 1만 잃는다고 해도 사람은 죽어 버리는 것.
그것은 피다.
흑귀장의 바닥에는 끈적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흑귀장 무인들이 스물은 넘게 죽어 있었다.
베인 형태로 보아, 모두 한 사람에게 죽은 흔적이다.
저 앞에 고고히 서 있는 가면 사내의 소행이 분명했다.
“저 앞에 등을 찔려 죽은 것이 흑귀장주입니다.”
정구가 작게 속삭였다.
“별 대단한 자는 아니겠으나, 이곳 근처에 대기시킨 수하들이 비명을 듣지 못했다는 게 수상하군요.”
비연대에게도 흑귀장은 위협적인 상대가 아니다.
마음만 먹었다면 간단하게 멸문시킬 수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비명이나 고함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등에 난 상처가 많습니다.
이번에는 전음으로, 정구가 무중에게 말했다.
무중의 눈이 날카롭게 장내를 살폈다.
과연, 쓰러진 시체 중에는 등을 찔린 사람이 많았다. 특히 흑귀장의 핵심 무인들로 보이는 자들이 그랬다.
-면식이 있던 사이였나 보군.
-그런 듯합니다.
상처의 단면들이 무척이나 날카롭다. 팔다리를 무 베듯 잘랐다는 것만으로도 칼에 내력을 담을 수 있는 고수임을 의미한다.
-누군지는 모르고?
-가면을 쓰고 있어서 저도 잘…….
-음, 실력은 분명 상(上). 손속에 자비가 없군.
그러나, 비연대원들이 겁을 먹지는 않았다.
그들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너는 누구냐.”
무중이 대표로 나서서 가면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는 피 묻은 검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잠깐의 침묵 후, 가면 너머로부터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무중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목소리는 동굴 속에서 말하듯 울려 퍼졌고, 불쾌하게 갈라졌다.
“가면을 쓰고 목소리까지 바꿨나. 뒤가 구린 놈이군.”
“흠.”
목소리를 변조할 정도로 정체를 숨기려는 자다. 그런데도 흑귀장은 저 사내를 경계하지 않았다.
정구의 말대로 흑귀장에는 수상한 점이 있었다.
그런데 흑귀장을 몰살시켰다면, 증거를 인멸하기 위함일 것이다.
무중은 백하준을 살짝 돌아봤다. 하준은 고개를 끄덕여서 허락했다.
“우리는 백씨세가의 비연대다. 흑귀장을 조사하러 왔다만 이렇게 수상한 선객이 와 있을 줄은 몰랐군.”
“비연대가 무슨 참견인가.”
가면 사내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음울했다. 하지만 얼굴을 가린 가면이 우는 표정이었기에 무척이나 어울렸다.
“가문의 일이다. 검을 집어넣어라, 묻는 말에 대답만 하면 좋게 넘어갈 수도 있어.”
“그럴 수는 없군.”
그러더니 검을 집어넣지 않고 천천히 하준 일행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스르릉-
비연대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깔끔한 자세.
“하, 멈추지 않으면 묶어 놓고 물어봐야겠는데.”
“백씨의 밑구녕이나 닦으며 사는 놈들이…….”
어쩐지, 경멸에 찬 목소리였다.
하준과 비연대원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사내는 분명 백씨세가에 적의를 품고 있었다.
“……곧 죽을 것도 모르고 건방지구나.”
“비연대, 팔다리 몇 개는 베어도 좋다.”
무중이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왼손이 없는 그였지만, 검법은 여전히 매서웠다.
다가오는 가면 사내는 분명 약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장을 헤쳐 온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걷는 품새만 보아도 충분히 감당할 만한 상대다.
비연대 셋 정도면 무리 없이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중은 왼발을 들어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동료들에게 하준을 지키라는 신호였다.
-조금 물러나 계십시오.
전음을 들은 백하준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다가오는 가면 사내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빨라졌다.
동시에, 비연대원 세 명이 방진을 짰다.
비연대는 다수로 소수를 상대하는 합격진을 익혔다. 자연스러운 삼재진(三才陣)이 펼쳐졌다. 상단, 중단, 하단으로 나뉘어 쇄도하는 비연대의 검. 가면 사내의 몸은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길 듯했다.
그리고 그때, 백하준의 눈이 크게 떠졌다.
비연대원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백하준의 몸에 흐르는 백씨의 피가 경고하고 있었다.
‘놈은 실력을 숨기고 있다.’
찐득하게 피가 말라붙은 저 검은 비연대와 하준 일행을 기만하고 있었다.
그리고 본능은 이성보다 빨랐다.
백하준이 검을 뽑아 드는 동시에, 가면 사내의 검이 순간적으로 가속했다.
채채챙-!
그가 비연대원의 검 세 자루를 쳐 내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어찌나 검에 깃든 힘이 강력한지, 비연대원들의 상반신이 훌쩍 노출되었다.
가면 사내의 얼굴이 기괴한 각도로 비틀렸다.
그의 검은 뚝 떨어지듯 하강하더니, 마치 독사가 튀어 오르듯 비연대원 하나의 턱으로 솟구쳤다.
콰악-!
턱 아래로 박힌 검이 뒤통수를 뚫고 빠져나왔다. 피와 뇌수가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그리고.
삐이이이이익-
그 핏물을 뒤집어쓴 정구가 호각을 불었다. 바깥에 대기 중인 비연대원과 하오문도들에게 알리는 소리였다.
“이런!”
무중이 이를 악물고 검을 내질렀다. 동료의 상태를 살필 겨를도 없었다. 틀림없는 즉사였으니.
‘어떻게…… 기세가 확 변했다.’
무인의 기세라는 것은 쉽사리 숨길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 비연대 같이 날카로운 눈을 가진 자들에게는.
그런 비연대가 속절없이 속아 넘어갔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한다.
상대의 실력이 비연대를 크게 압도한다는 것을.
카각-!
분명 조금 전까지 동료의 머리를 꿰뚫고 있던 가면 사내의 검이 무중의 검을 막았다.
불똥이 튀어서 무중의 시야가 순간 가려졌다. 동시에 가면 사내의 검이 사라졌고.
“크아아악!”
비명은 바로 옆에서 들렸다.
또 한 명의 동료가 이번에는 가슴을 베였다.
가면 사내의 검은 여전히 피에 목마른 듯했다. 이번엔 피할 수 없는 검로로 무중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왔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느리군.”
무중은 꼼짝없이 죽음을 직감했다.
그때, 뒤에서 짓쳐들어온 검 한 자루가 그의 목숨을 연장시켰다.
까아앙!
금속성과 함께 가면 사내의 검이 처음으로 밀렸다.
“이놈.”
“넌 누구냐!”
검을 쳐 내고 난입한 사람은 다름 아닌 하준이었다.
가면 사내는 대답 없이 검을 휘둘렀고, 백하준은 또 한 번 막아 냈다. 검과 검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놀랍게도, 하준은 비연대원보다도 훌륭한 검술을 보였다.
겨우 열둘의 소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위용.
동년배인 모용진과 함께 지낸 몇 달이 백하준의 실력을 껑충 뛰게 한 것이다.
하준의 검이 가면 사내의 손등을 훑고 지나갔다. 처음으로 가면 사내의 몸에 상처가 났다.
하지만 무중은 감격스러운 기분을 누릴 수 없었다.
“이럴 계획은 없었다만…….”
가면 사내의 음울한 목소리에서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죽어라.”
또 한 번 가속하는 가면 사내의 검. 백하준을 가로막아서 그 검을 대신 받아 낸 것은 무중이었다.
카가각-!
그러나 가면 사내의 검은 무중의 검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리고, 무중의 남은 오른손을 뎅겅 베었다.
하지만 무중은 오른손 따윈 신경도 쓰지 않으며 지금 막 들어온 비연대원들에게 외쳤다.
“대원들은 공자님을 지켜라!”
가면 사내의 검이 무중의 배에 박혔다.
“안 돼! 무중!”
하준이 아찔하게 외쳤다.
그러나 무중은 대답하지 못했다. 스스로의 혀를 깨물었기 때문이다.
입안에 가득 고인 선혈. 무중은 쓰러지기 직전 그것을 가면 사내의 얼굴에 내뿜었다.
“큭-!”
눈구멍에 핏물이 들어갔을 것이다.
가면 사내의 시야가 가려진 그 틈을 타, 분노한 백하준이 몸을 던졌다.
‘지금이 바로 가면 사내의 목을 벨 기회다.’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백하준은 감각은 있었으나 경험이 부족했다. 게다가 경고해 줄 무중과 비연대원들은 모두 죽었다.
반면, 가면 사내는 시야를 잃었어도 대단한 고수였고, 분노로 이성을 잃은 하준의 검에는 날카로움이 부족했다.
그 대가는 가혹했다.
푸욱!
사내의 검이 빛살같이 움직여, 하준의 가슴을 찔렀다.
‘심장이 꿰뚫렸다.’
하준은 그리 느꼈다.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정구가 하준의 옷깃을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검이 얕게 박히자 가면 사내가 혀를 찼다.
“쯧.”
그 짧은 사이에 검을 내리그으면서, 하준의 가슴팍이 쭉 갈라졌다.
하준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가슴팍에서 피가 주욱 솟구치면서 시야가 흐려졌다.
“도련니임!”
“죽여!”
뒤늦게 난입한 비연대원들이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하준을 끌어당긴 정구가 무언가를 던졌다.
펑 소리가 나면서 누런 연기가 솟구쳤다.
독탄이었다. 하준의 코에 물로 적신 천을 덮은 정구가 그의 몸을 껴안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비연대원 한 명이 따라붙었다.
나머지 둘은 이곳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가면 사내에게 덤벼들었다.
“도련님,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끄윽, 끅.”
대답을 하려 했지만 하준의 입에서는 피거품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득하게 울리고, 가슴팍이 스스로 흘린 피로 뜨겁게 젖었다.
하준은 죽어 나간 비연대원들을 모습을 떠올렸다.
“으극.”
정신이 점점 혼미해진다.
의식이 어둠 속으로 휘말려 들어 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하준은 생각했다.
‘……형이 화내려나.’
곧 이강이 돌아올 것이다.
맡겨 둔 일에 실패하고,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는 동생을 보면 이강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준은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이강은 서안에 돌아왔다.
따듯한 호남 지방에 비해서 섬서성은 훨씬 춥다. 엊그제 내린 눈이 녹지 않아서 세상이 희게 보였다.
하지만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고향의 향기가 느껴졌다. 기와를 덮은 흰 눈이 마치 솜이불같이 따듯하게 보인다.
총 석 달이 걸린 여정이었다. 초반에 쌍두귀호를 만난 것 외에는 순탄한 여정이었지만, 능지평과 비연대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서안에 돌아와서야 그들의 표정이 훈훈해졌다.
이강 역시 마음이 편안했다. 본가로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집은 집이었다.
아버지 백류산을 만나서 홍백하수오로 만든 내단을 드릴 생각이었다. 하준도 만나서 본가를 비운 사이 있었던 일을 들을 것이다. 황금제일루에 가서 매콤한 궁보계정과 달콤한 팥떡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면 좋을 것이다.
그렇기에, 본가의 대문을 지날 때만 해도 이강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세가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이강을 반기는 사람들도 없었다. 하인들은 긴장으로 굳은 얼굴이었으며, 가신들은 바삐 뛰어다녔다.
일행이 상황을 알게 된 것은 비연대원 한 명이 나타난 이후였다.
피 묻은 붕대를 둘둘 감고 있던 그가 모든 일을 설명해 주었다.
이강의 표정은 시시각각 굳어 갔다.
“아버지는 쓰러지셨고.”
며칠 전, 가주는 각혈을 심하게 하더니 병상에 누웠다고 한다. 추운 겨울이니, 가주의 폐병이 도지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허나 백하준의 이야기는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준이가 비연대 인원들을 끌고 나갔다가 괴한에게 칼을 맞았다. 그래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것이냐.”
“……예, 공자님”
그저 하오문도들에게 보고나 받으라고 시켰던 일이다.
그런데 대체 왜 직접 나섰으며, 게다가 비연대 인원들을 끌고 간 것인가.
비연대가 나섰으면 잘 처리되었어야지. 무려 비연대 여섯 명이 죽고 괴한의 행방은 놓쳤다고 한다.
“저와 함께 하준 공자님을 데려온 하오문도는 현재 장로원에서 심문 중입니다.”
비연대원이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떨궜다.
“장로원이라…….”
이강은 그의 어깨를 툭 두드리고 몸을 돌렸다. 장로원이 있는 방향이었다.
「심문이라니. 뻔하겠군.」
‘정구가 고문을 당하고 있겠군요.’
백씨세가, 특히 적룡단의 심문은 악명높다. 이강의 명을 받아 조사를 착수했던 정구는 지금 험한 꼴을 당하고 있으리라.
「서두르는 게 좋을 것이다.」
곳곳에서 하인과 가신들이 인사를 올렸지만, 이강은 묵묵히 계속 걸었다.
내원의 문을 지나, 더 안으로.
마침내 장로원 앞에 도착했을 때. 문을 지키던 무사들이 처음으로 이강을 가로막았다.
“이강 공자님. 지금은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이강은 말없이 문지기를 노려보았다.
그 살벌한 눈빛에 찔끔한 문지기가 설명을 덧붙였다.
“장로회의 중입니다. 출입을 엄금하라 하셨기에…….”
“비켜라.”
문지기가 어쩔 줄 모르고 머뭇거렸다. 이강은 개의치 않고 걸음을 옮겼다.
문지기가 반사적으로 그 앞을 가로막으려는 순간.
이강의 뒤를 따르던 능지평이 그 문지기의 몸을 막았다.
“어느 안전이라고 길을 막느냐.”
“느, 능 대주님.”
“비키거라.”
능지평의 눈 역시 이강과 똑같이 충혈되어 있었다.
이강은 능지평의 비호를 받고 계속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