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rminally Ill Young Master of the Baek Clan RAW novel - chapter (57)
57화 가면 사내 (1)
서안부에는 산하(滻河)라는 강이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강물이 누렇게 변해서 황하가 되어 버리지만, 평소에는 맑은 물이 흐른다.
시인 묵객들이 찾는 명소는 아니지만 보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길가에는 차를 파는 다루(茶樓)들이 즐비했고.
하준은 그중 한 곳에 있었다.
다루라고 해도 백씨세가의 공자가 찾을 만치 고급스러운 곳도 아니었다. 술과 음식을 함께 파는 그런 허름한 곳이었다. 다만 창가로 보이는 경치가 제법 운치 있어 차 맛이 좋았다.
후릅-
뜨거운 차를 마시자 그런 소리가 났다.
하준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선이 확실한 눈썹에 차갑지만 올곧은 이목구비. 자라나면 뭇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 듯한 외모지만 영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형이 차를 마실 때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강이 차를 마시는 모습은 마치 다도(茶道)의 정석과도 같았다. 백하준 역시 똑같은 교육을 받았을 텐데, 형과 비교하니 영 부족하게 느껴졌다.
하준은 그냥 포기하고 편하게 차를 마셨다.
이강은 떠나기 전에 백하준에게 임무를 맡겼다.
‘하오문도에게 자객들의 조사를 맡겼으니 그 과정을 잘 감독할 것.’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하오문이었다. 이강 덕택에 목숨을 건진 정구와 서안 지부장 금화는 열과 성을 다해 조사했다.
정보력으로 유명한 하오문답게 그들의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적룡단이 대목방의 목수들에게 실마리를 찾은 것과 달리, 하오문은 자객들이 사용한 물품과 이동 수단 쪽으로 파고들었다.
‘그것도 신기해. 분명 하오문도를 만난 것도 나랑 함께였는데.’
처음 고문당한 하오문도를 구해 줄 때만 해도. 이강이 정말 그들의 충성을 받아 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이강은 장원에서 돌아온 지 몇 달도 안 된 상황이었다.
그런 형이 백하준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준은 자신이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주변의 평가는 좋았지만 그저 허상일 뿐. 형과 비교할 때마다 한참 모자라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
그렇기에 어깨가 더 무거웠다.
‘내가 잘 해내야 해.’
조사를 실시하던 하오문도들이 백하준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럴 만한 사항이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지금 백하준이 평범한 옷을 입고, 신분까지 숨겨서 이곳을 온 것이다.
“도련님, 이것 좀 드시죠. 하하.”
하준의 앞에 있는 수염 난 사내는 꼭 상인처럼 옷을 차려입었다. 하지만 그 정체는 비연대 무사였다.
“이게 뭔가요?”
“요즘 다루에서 유행하는 간식거리라고 합니다. 찹쌀가루와 밀가루로 만든 반죽을 튀긴 유조(油條)라고 하지요. 소젖에 꿀을 넣고 졸여 만든 요것에 찍어 먹어 보세요.”
비연대 사내의 이름은 무중. 그는 한쪽 손이 없었다. 이강과 함께 떠났다가 호랑이에게 손이 뜯겼다고 했다.
백하준은 그의 권유에 따라 유조를 연유에 찍어 먹었다.
뜨끈한 유조의 식감은 쫀득했다. 튀긴 음식을 달콤한 것에 찍어 먹으니 맛없을 수가 없었다.
빙긋 웃은 무중은 술잔을 홀짝였다.
하지만 그저 술을 마시는 척일 뿐이었다. 아직도 저 첫 잔을 계속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긴장되십니까?”
“긴장이요?”
“도련님의 표정이 많이 굳어 있는 듯해서요.”
무중이 그렇게 말하자 다른 비연대원들 역시 빙글빙글 웃었다. 백하준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표정으로 속내가 드러나진 않는 편이지만, 비연대원들은 알아보았을 것이다.
능지평과 비연대는 백하준이 세가에서 가장 믿는 자들이었다. 그만큼 가깝기도 했다.
이번에 세가에는 비밀로 함께 나서 주겠냐는 말에도 비연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제가 긴장을 풀 만한 이야기를 해 드리지요.”
“이야기?”
“이강 공자님이 쌍두귀호를 향해 달려들었을 때 말입니다. 그때 저는 손목이 물어뜯겨 필환을 지키고 있었는데요…….”
그러자 다른 비연대원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거 좀 똑같은 이야기 좀 그만해. 귀에서 피 나겠다.”
“뭘 얼마나 했다고 그래?”
“필환이 그놈은 말 안 하는 줄 알아? 맨날 이강 공자님하고 호랑이 이야기 듣느라 지겨워 죽겠다.”
비연대원들이 떠드는 소리에 하준도 비로소 웃었다.
세가에서 이강을 좋아하는 가신들은 거의 없었지만 비연대는 달랐다.
이강이 가문으로 돌아와서 노력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았다. 무엇보다도 호랑이에게 물려서 돌아온 필환과 무중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이강의 무용담을 뿌렸다.
덕분에 이강의 평판도 좋아졌으니, 그가 돌아온다면 곳곳에서 호의의 시선을 받고 당황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하준도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계단을 올라와서 일행에게 다가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하오문의 정구였다. 그는 마치 일행이었던 것처럼 하준의 옆자리에 앉았다.
백하준과 함께 온 비연대원 세 명 중 대표로 무중이 인사를 받았다.
“하하하, 얼마 안 됐지.”
“하하…… 엇.”
정구는 마주 웃다가 순간 움찔 굳었다.
탁상 아래로, 차가운 검날이 들이대졌다.
무중의 옆에 있던 비연대원이 검을 뽑은 것이다.
“도련님께 듣긴 했지만, 똑바로 설명하게. 우리가 누군지는 알 것 아닌가. 하하.”
눈이 반달 모양이 되도록 웃고 있지만, 무중의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피 냄새가 났다.
정구 역시 진흙 속에 한 발 담그고 있기에 알았다. 백씨들을 지키는 비연대가 얼마나 위험한 자들인지.
정구는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하오문 서안 지부가 소유하고 있는 다루다. 2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곤 말했다.
“이강 공자께서 머물던 장원을 습격한 자객들. 그들과 접촉했던 방파를 찾았습니다.”
잠시 호흡을 한번 가다듬고 말을 덧붙였다.
“정확히는, 그 자객 중 몇이 그 방파의 소속인 듯합니다.”
하오문은 성과를 내었다. 백하준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 * *
이강을 습격한 자객의 규모는 스물이 넘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자객이라 할 수도 없었다. 잠입과 암살을 전문으로 훈련받은 기색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강이 벤 적표를 비롯해서 몇몇의 수준은 높았지만 다른 자들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무공이 어디서 근원됐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만한 자들이 움직였다면 분명 눈에 띄었을 일인데 그렇지도 않았다.
시장이나 객잔에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식량 보급 또한 필요치 않을 만큼 가깝거나 이미 지니고 있단 뜻이 되었다. 그러던 와중 장원 인근 산에서 다수의 말발굽 자국을 발견했으니, 이는 곧 말을 타고 먼 곳에서 왔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하오문의 마방(馬房)에는 정보가 기록되었어야 한다.
백씨세가라고 해도 그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근방의 마방(馬房)을 이 잡듯이 뒤졌고 하오문에게 정보를 내놓으라 요구했다.
그러나, 하오문 마방조차 자객들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거기서 착안했습니다.”
정구는 그렇게 덧붙였다.
“흔적을 숨긴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흔적까지 없다면 결론은 두 가지죠. 정말 하늘에서 떨어졌다거나. 누군가 흔적을 지웠다던가.”
“그러면, 자객들의 정보를 하오문 당신들이 숨겼다는 건가?”
“그렇다고밖에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비연대원들이 제각기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수 있지만 정구가 죽여 달라고 저리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우선 기다려 보았다.
“전대 서안 지부장님은 지병이 있으셨죠. 지병으로 돌아가신 다음 날부터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사파에서는 흔한 일 아닌가. 권력 쟁투라는 것이.”
“그렇지요. 저희도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더군요.”
새로 취임한 서안 지부장 금화는 전대 지부장의 딸이었다. 그녀는 이강 덕택에 무사히 지부장의 자리를 이을 수 있었다.
“독살(毒殺)이었습니다. 지병으로 인해 돌아가신 게 아니었어요.”
“그러면…….”
“전대 지부장님은 마방에 남아 있는 자객의 흔적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백씨세가에 전하기 전에 독살당하신 겁니다. 반란한 문도를 고문하다가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정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한 살기(殺氣)였다. 비연대원들인가.
아니었다. 농밀한 살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아직 약관(弱冠)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이 뿜고 있었다.
“하오문이 형님을 습격한 자들과 연관이 있던 것인가.”
백하준은 몹시도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정구라고 해도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하나, 감히 그런 참람된 자들은 저희가 모두 잡아 가두거나 죽였습니다. 현 지부장이신 금화 님과 저희는 최선을 다해 백씨세가에 협조하고 있습니다. 자, 자비를…….”
“그래서.”
무중이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그놈들이 누구지?”
정구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갔다.
“외곽 지역에 흑귀장(黑鬼莊)이라는 문파가 있습니다. 사도련의 말단에 속하는 문파인데. 증언에 따르자면 말을 빌린 것이 흑귀장입니다. 신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문도 몇이 그들의 얼굴을 알아봤다는군요.”
“조사는 해 봤나?”
“저희 인원을 세 차례 보냈습니다만…….”
하오문이 하준에게 도움을 청하고. 하준이 비연대원들에게 부탁을 전한 이유.
“모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조사를 보낸 하오문도들이 모두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저희 하오문의 무공이 보잘것없다곤 하나, 모두 죽은 것은 분명 수상합니다. 무리를 한다면 더 알아볼 수 있겠으나 보고부터 드리는 것이 옳을 듯하여서 말씀드렸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아무리 그래도 도가 지나치게 건방진 놈들이군, 이곳 서안에 배짱 좋게 남아 있었다니.”
비연대 무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살기를 뿜었다. 검을 쥔 하준의 손에도 핏줄이 솟았다.
“그래서, 준비는 다 되었나?”
“예, 관원들의 시선을 돌려놓았습니다. 근처의 양민들은 시간이 되면 물러날 겁니다.”
“그놈들을 깨부숴서 족치면 나오겠지.”
하준과 비연대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지요.”
“예, 공자님.”
하준이 계단을 내려가자 1층에서 대기하던 나머지 비연대원들까지 뒤따랐다.
흑귀장 정도는 단숨에 불태울 무력이었다.
* * *
정구는 조용히 길을 안내했다.
산하강 다리를 건너면 외곽 지역. 그곳에 흑귀장이 있었다. 그들을 상대할 전력은 충분했다.
하준의 곁에 세 명. 그리고 마치 평범한 양민인 것처럼 뒤따르는 비연대원들이 넷 더 있다.
흑귀장은 무시무시한 이름과 달리 보잘것없는 문파이다. 낡은 건물 하나에 허접스러운 필체로 걸린 현판이 나타났다.
그 주변에 지나다니는 양민부터, 길가에 노점을 펼치고 앉아 있는 노인까지. 그들은 모두 신분을 숨긴 하오문도였다.
“비연대원 한 명은 이곳에서 대기하지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하니까.”
하준이 문득 그렇게 말했다.
과한 조심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무중은 감히 되묻거나 하지 않았다.
그가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자 수신호를 알아본 뒤편의 비연대원 한 명이 물러났다.
“나머지 셋은 주변을 막겠습니다.”
“도망치는 사람이 없도록.”
무중의의 말과 함께, 뒤따르던 남은 세 명의 비연대원들이 사방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들이 흑귀장의 대문 앞에 멈춰 섰다.
하준이 눈짓하자 정구가 대문을 쿵쿵 두드렸다.
“안에 누구 있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쯧, 아무리 작은 사파라고 해도 문지기 하나 두지 않다니.”
무중이 한심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구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손님이 왔으니 당장 나와서 맞이하시오!”
제대로 된 문파라면, 적어도 이 무례한 인사에 몽둥이라도 들고 뛰쳐나올 것이다.
하지만 흑귀장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무중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코를 벌름거리더니.
“이런.”
얼굴을 찡그리고 검을 뽑아 휘둘렀다.
쩌억-
매서운 쾌검이었다. 검은 낡은 대문의 틈 사이를 정확히 가로지르더니, 그 너머에 걸려 있던 빗장을 반으로 갈랐다.
그리고 옆에 있던 비연대원이 합이라도 맞춘 듯 대문을 걷어찼다.
쾅!
부서져라 활짝 열린 대문 안에서, 지독한 냄새가 확 밀려 나왔다.
피 냄새였다.
“……미친.”
흑귀장은 피바다였다.
곳곳에 흑귀장 무인들로 보이던 자들이 피를 흘리며 절명해 있었다.
팔다리가 잘린 자들부터 가슴이 쩌억 갈라진 사람까지. 베인 곳은 제각각 달랐지만, 공통점은 죽은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정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백하준을 만나러 가기 전부터 근처에 하오문도들을 대기시켜 두었다. 흑귀장에서 싸움이 벌어졌다면 수하들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저기 누가 있습니다.”
무중이 백하준에게 조용히 말했다.
흑귀장 깊숙한 곳에서, 누군가가 시체들 속에 서 있었다. 울고 있는 얼굴이 조각된 가면을 쓰고 있는 사내였다.
“수상하군요.”
무중과 비연대원들이 검을 뽑았다.
가면에 뚫린 눈구멍으로 하준과 가면 사내의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이 마치 짐승같이 벌개서, 하준은 본능적으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