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rminally Ill Young Master of the Baek Clan RAW novel - chapter (98)
98화 교정치료 (3)
협의소설(俠義小說)이나 옛 고수들의 무용담을 들으면 곧잘 나오는 장면이 있다.
사악한 방파의 본거지에 구금된 협객이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다. 이빨을 뽑고 채찍을 아무리 쳐도 협객은 이를 악물고 버틴다.
협객이 되고자 하는 문도들은 그런 장면을 보고 생각한다. 자신도 언젠가 고문을 당하게 된다면, 끝까지 입을 다물겠다고.
물론 그것은 덧없는 상상일 뿐이다.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사람의 의지는 무너지게 된다.
뻑! 퍼벅!
이강의 주먹은 마치 쇠망치라도 된 것처럼 매웠다.
어느 순간부터 담현은 반항을 포기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강을 역으로 때려눕히려 했지만 이제는 가만히 맞고 있었다.
욕이나 저주를 퍼붓는 것도 그만두었다. 그럴 때마다 주둥이를 한 대씩 더 얻어맞았기 때문이다.
비명도 멈췄다. 고통의 연속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마침내, 세상이 캄캄해지고 담현의 의식이 가라앉았다. 무자비한 폭력은 담현의 머릿속에 있는 암기(暗氣)까지 닿았다.
삼원성화의 구근으로 변한 이강의 체질은 영력은 물론이고 그 암기까지 끌어당겼다.
뇌(腦) 속에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던 암기가 떨어져 나가면서 담현의 깊은 기억을 자극한 것은.
그래서 담현이 어린 시절의 그날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필연일지도 몰랐다.
* * *
짜악-!
담현은 뺨을 맞는 고통과 함께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의 눈앞에는 울고 있는 누나의 얼굴이 있었다.
누이는 어렸을 적에 죽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누나가 말했다.
“제발, 정신 차려…… 흐윽, 여기, 여기에 숨어 있어야 해.”
누나는 막내인 담현보다 여덟 살이나 더 많았다. 행동거지가 어른스러웠고 가족 중 누구보다도 담현을 귀여워 해 줬다.
그런 누나가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죽여 가며 담현에게 속삭였다.
“무서운 소리 나도, 절대 나오지 마. 소리도 내면 안 되고.”
“누, 누나. 나 나가고 싶어.”
어린 담현 또한 울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 전 마적 두목에 의해 아버지의 머리통이 잘린 것을 보지 않았던가.
분노해서 달려들었던 작은형은 마적 한 명의 창에 꿰여 죽었다. 마치 개구리처럼 팔다리를 쫙 펴더니 부르르 떨며 절명했다. 어머니의 비통한 울음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는다.
살아남은 것은 담현과 큰누나뿐. 화전민 마을의 모두가 아마 죽었을 것이다.
“절대 안 돼. 나는 다른 곳 가서 숨을 테니까. 꼭, 꼭 조용히 있어야 해.”
누나는 자기도 울고 있으면서 어린 담현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진작 쌀이 동나서 뒤주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담현은 그곳에 숨을 수 있었다.
“밤이 되어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나오지 마. 누나가 다시 올 테니까.”
“꼭, 와야 해.”
누나는 벌벌 떠는 담현의 이마에 입을 맞추곤 뒤주의 뚜껑을 닫았다.
쿵-
순식간에 시야가 캄캄해졌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래되어 비틀어진 나뭇결의 틈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담현은 본능적으로 그 틈에 눈을 가져다 댔다.
뒤주가 있는 광에서 나가려는 누나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문밖 동향을 살피려던 순간.
콰앙!
빗장이 부서지며 문이 열렸다. 누나는 맥없이 밀려 넘어졌다.
난입한 것은 흉악한 마적들이었다.
“꺄아악!”
혼비백산해서 비명을 지르는 누나. 담현은 필사적으로 입을 막아 비명을 억눌렀다.
“흐흐, 여기 있었구만.”
“얘가 아까 그 새끼들 딸내미야? 괜찮은데?”
두 명의 마적은 빛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손에 들고 있는 날붙이만은 명확히 보인다.
아버지의 목을 베고, 어머니를 때려죽였으며 형을 찔러 죽인 자들.
공포로 몸이 덜덜 떨리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러면서도 뒤주 틈새에 눈을 대고 있던 담현은 흠칫 놀랐다.
마적 하나가 누나의 손목을 콱 움켜잡았기 때문이다.
“놔줘요……!”
“사미령이 비싼 값을 쳐 주겠어.”
누나는 몸부림치며 발악했지만 마적의 손아귀 힘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누나의 비명이 들리지 않는 듯 낄낄거리며 웃었다.
“건드리지는 말고.”
“얘 동생은 또 어디갔어.”
그 시점에서 담현은 틈새에서 눈을 뗐다.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가족을 전부 죽인 마적들이 무서워서.
저 마적들이 상냥한 누나한테 어떤 해코지를 할지가 두려워서.
그리고 무엇보다 뒤주의 틈 사이로 시선이 마주칠까, 저들이 숨어 있는 담현을 찾아낼까 봐 겁이 나서.
그는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달달 떨고 있는 담현의 귀에 누나의 비명이 들렸다.
“손 치워!!”
“아악! 이게, 내 눈을 찔렀어.”
담현의 등이 움찔움찔 떨렸다.
비명과 고함, 사람의 몸을 퍽퍽 걷어차는 소리.
누나는 불의를 참지 않는 성격이었다. 아마 담현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죽은 작은형처럼 마적들에게 괭이라도 들고 덤볐으리라.
담현은 눈물과 콧물을 흘리면서 울음을 끅끅 참았다.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몸을 부들부들 떨다 보니 밖이 조용해졌다. 그 고요함이 더욱 무서웠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할까.
밤이 올 때까지? 이미 누나는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숨죽여서 끅끅대는 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들렸다. 아무리 입을 막아도 소용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무공을 익힌 마적들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듯했다.
콰작!
뒤주의 상판이 부서지면서 억센 손이 들어왔다. 그 손은 담현의 옷깃을 붙잡고 그대로 끌어올렸다.
담현의 코앞에 마적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마적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역겨운 냄새가 훅 치밀었다.
“쥐새끼가 한 마리 숨어 있었네.”
“계속 여기 있었던 거야?”
마적 둘 뒤로는 누나가 쓰러져 있었다. 마적에게 저항하다가 맞아 쓰러진 것이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의 마적이 단도를 뽑아 담현의 배에 들이밀었다.
“이거 완전 비겁한 새끼네. 저 혼자 살겠다고 계속 숨어 있고.”
“뭐 달린 놈이면 식도라도 들고 덤볐어야지.”
온몸에 차가운 소름이 돋았다.
감히 마적들이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 말은 담현의 가슴을 비수로 찌르는 듯했다.
담현은 비겁자였다. 혼자서 살려고 누이를 외면하던.
“겁도 없이 대장한테 짖다가 뒤진 너네 집 개보다도 못하구나.”
그 반면 집 지키던 누렁이는 얼마나 용감하게 대항했던가. 동물보다 못한 것이 담현이었다.
마적은 장난이라도 하는 듯 담현의 뱃가죽을 단검으로 그었다.
“겁쟁아. 네 이름을 새겨 주마.”
“흐아아악!”
슥, 슥, 살을 가르며 ‘겁쟁이’라는 낙인을 새긴다.
뜨거운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담현은 아랫도리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겁쟁이였고, 가족을 버린 비겁자였다.
그날부터 어린 담현의 마음에는 인간에 대한 혐오가 새겨졌다.
악인들에 대한 증오와 그보다도 혐오하는 무력한 자신에 대한.
그 오랜 옛날의 기억이 하반신의 축축함과 함께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일어나요.”
담현은 희미하게 눈을 떴다.
통증 때문에 머리가 띵 울렸지만, 다 터져 나간 입 안의 상처도 아물어 가고 있었다.
“일어나라니까요……. 이제 다 된 것 같은데.”
실핏줄이 터져 새빨갰던 시야가 점차 돌아왔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것은, 이강의 얼굴.
“사형!”
“으허어억!”
담현은 숨이 넘어갈 만큼 놀랐다.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지만 이강은 더 이상 구타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런 짓 안 할 거죠?”
“아, 아, 아, 안 해.”
“제 영력을 가져가겠다니, 말도 안 되잖아요. 아무리 사형이라고 해도.”
“그, 그, 그치!”
말을 자꾸 더듬거렸다. 이강의 얼굴만 보면 자꾸 이가 딱딱 부딪쳤다.
머릿속의 암기가 많이 빠져나온 덕도 있겠지만, 불사신검의 조언은 정말 효과가 있었다.
“얘도 말하더라고요. 어차피 사형이 영력을 넘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고.”
바닥에 고여 있던 영력은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전부 이강의 몸에 흡수된 것이다.
“얘? 아, 청호야!”
담현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여우 인형을 알아차렸다. 그는 왈칵 눈물을 흘리며 청호를 안아 들었다.
이강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스러운 과정이었지만 괜찮은 결과였다.
“으흐흐흐흑.”
담현이 엉엉 울자 이강이 확 얼굴을 찡그렸다.
“그만 우십쇼.”
“으, 응.”
조금 사람이 과하게 소심해진 것 같기도 했다.
이강은 담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
“잡아요.”
악수였다. 그는 담현의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사형.”
담현의 겁먹은 눈동자에 웃고 있는 이강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 * *
림주가 결계를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그가 빌려 든 유정신의 검은 분명 훌륭한 검이었다. 하지만 결계를 벨 수 있는 천하의 보검은 결코 아니었다.
림주의 검술도 평범해 보였다. 검기가 이글거리는 것도 아니었고 환하게 빛나는 검강이 아롱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유정신과 금침의괴이기에 알아볼 수 있는 현묘함이 있었다.
검을 들어 올릴 때는 깃털처럼 가벼워 보이던 것이, 떨어질 때는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듯 뚝- 하고 추락했다.
서걱-
무언가 베이는 절단음이 울렸다.
그리고 담현이 천신촉대를 이용해서 만든 결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림주님, 그 검은……!”
“오늘 불초제자가 크게 개안하였습니다!”
참았던 숨을 터트리듯 유정신과 금침의괴가 감탄했다.
고수인 그들의 눈에도 림주의 경지는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감히 어떤 원리였는지 짐작할 수도 없는 정도였다.
단 한 번의 종베기로 유정신의 검은 이가 숭숭 나갔다.
“검이 망가졌구나. 미안하다.”
“아닙니다, 림주님.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유정신은 결계를 깨뜨린 일에 만족하였다.
곧, 새카만 결계가 흩어지듯 무너졌다.
당장 담현을 제압하고 누워있을 이강을 구하겠다고 결심했던 유정신.
하지만 그는 움찔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너, 너희들.”
담현과 이강이 나란히 서 있었다.
온몸에 침이 박혀서 혼절해 있던 이강도 깨어나 있었다. 그는 스스로 침을 다 빼고 옷까지 차려입은 상태였다.
담현은 어떠한가. 분명 이강의 영력을 빼앗겠다고 난입했던 주제에 사이좋게 서 있었다.
아주 어색해 보이지만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당황한 그들 중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금침의괴였다. 그는 의원의 본분을 지켜 이강의 몸 상태부터 살폈다.
그리고 경악했다.
“허어, 끊어져 있던 대맥이 이어져 있어. 영력을 홀로 흡수한 거냐?”
“예.”
“천운이구나. 그렇게밖에는 말할 수 없어.”
담현의 난입 이후로 사실상 포기했는데, 이강의 오른손 장심부터 하단전까지의 대맥이 훌륭하게 이어져 있었다.
이강이 멀쩡한 것을 확인한 금침의괴는 곧바로 담현을 보고 얼굴을 구겼다.
“담현 이놈! 대체 무슨 짓이냐!”
자신의 환자를 위험하게 한 원흉에 대한 분노였다.
담현은 본능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이강이 옆구리를 쿡 찌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형.”
“죄송합니다!”
담현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심지어 화를 내던 금침의괴 본인도.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면 안 됐는데.”
“그으…… 어어. 그래, 실수지.”
규율당주 앞에서도 대놓고 반항하던 담현이 이토록 저자세를 보이다니.
림주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분명, 이강이 허리를 콕 찌른 뒤부터 담현이 온순해진 것 같았다.
“담현.”
“림주……님.”
천하의 담현이라고 해도 림주에게는 함부로 굴지 못했다.
림주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사제의 것을 뺏으려는 짓은 사형으로서 할 일이 못 되는구나.”
“……죄송합니다.”
“인형에게 영력을 주려 했다고?”
담현의 몸이 움찔했다.
“대답하거라.”
“그렇……습니다.”
림주는 담현의 의도를 모두 꿰뚫고 있는 듯했다.
“그 아이가 너를 많이 도와주긴 했지. 네가 보패에 당해 쓰러졌을 때부터. 하지만 지금 보니 오히려 너를 홀린 것 같구나.”
“아닙니다! 청호는……. 다 제 잘못입니다.”
“천뢰백미호, 그렇게 생각한 것이냐?”
“……!”
“오해를 했구나. 나는 단 한 번도 그 인형에 깃든 것이 요괴라고 하지 않았거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줘 보아라.”
림주는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명령했다.
“그 인형을 내게 다오.”
“…….”
담현이 머뭇거렸다.
“사형.”
“담현아.”
하지만 이강과 유정신이 그렇게 말하자. 그는 머뭇거리는 태도로 인형을 림주에게 건넸다.
청호는 의식이 깨어 있었지만 도망치거나 하지 않았다. 얌전하게 림주의 손 위에 앉을 뿐이었다.
“내가 설명하기보다는 직접 말해 주는 것이 좋겠구나.”
림주가 그렇게 말하고 꺼낸 것은 사각형의 북 같은 물건. 혼령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혼명판(魂鳴板)이었다.
담현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청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던 그에게, 이렇게 갑작스러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목소리가 어떨까? 귀여운 동생 느낌으로 여겼으니, 어린 소년이나 소녀의 목소리일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요괴가 사람의 말을 잘할 수 있을까? 이강은 분명 청호가 말을 할 수 있다고 했지만…….
“크흠.”
혼명판이 울리고, 담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안녕, 이렇게 말하니까 좀 어색하네.”
조금, 기대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나한테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오해를 풀 수 있는 기회가 없었어.”
“무, 무슨 오해……요?”
생각보다도 유창한 말. 그리고 분명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나, 요괴가 아니라 사람이야.”
담현의 얼굴이 그대로 굳고. 옆에서 림주가 헛기침을 하며 정정을 요구했다.
“아, 정확히는 귀신이지. 예전에 죽었거든.”
그가 천뢰백미호가 깃들었다고 믿고 품속에 안고 다녔던 인형.
그 정체가 사실 인간의 혼령이었다는 것이다.
“조금 놀랐으려나……?”
담현은 제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우욱!”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너, 너무하네. 그래도 같이 지낸 정이 있는데.”
청호가 민망한 듯 그리 말했지만, 담현은 정신이 혼미해져 픽,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