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such thing as a war in France RAW novel - Chapter 45
045화
베르게르는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 착각하지만, 사실 그는 단순히 ‘일개 소령’ 따위가 아니었다.
전장에서의 소문은 비눗방울처럼 커진다 하더라도 비눗물조차 없다면 비눗방울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소문은, 당사자의 진지보다 적 진지에서 더욱 퍼졌다.
아르덴의 악마.
마른의 처형자.
누가 들으면 칼 들고 잔인무도하게 사람의 목을 따는 악귀를 상상하겠다만 실제로 독일 병사들은 그리 생각했다.
어디 모헬뿐인가. 그 아래 병사들조차 전장에서 마주하고 싶지 않아 했다.
야전 사냥개.
마치 포수의 총소리가 들리면 달려 나가 먹잇감을 물어뜯는 게 모헬과 그 아래 병사들의 모습과도 같았기에 야전 사냥개란 별명이 딱 들어맞았다.
실상은 기관단총의 사거리가 짧아서 어떻게든 거리를 좁히려는 애절한 움직임이었다만 이를 일개 병사들이 알 리 없었다.
총검으로 적의 심장을 꿰뚫으며 비릿하게 웃는 베르게르와 야전 사냥개들.
정작 사진으로도 베르게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는 게 코미디지만 적어도 당사자들이 느끼는 공포는 진짜였다.
그리고 이는 상부에게 공포가 아니라 자존심의 상처로 다가왔다.
적을 두려워하는 아군. 이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패배한 당사자라면 더더욱 진창으로 처박히는 자존심이었다.
“모헬 소령이 속한 6사단이 아라스에 배치되었답니다!”
“사실인가?”
“예, 오늘 들어온 정보입니다. 다만 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군도 이를 딱히 숨기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되려 알리려 했겠지. 그래야 사기가 올라가니.”
“바로 배치되지 않은 이유는 휴식, 또는 패배를 염려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막스 폰 파벡.
그는 평생 자신이 일개 소령한테 복수심을 품을 날이 올 줄 몰랐다.
‘나를 밟고 올라가게 둘 거 같더냐.’
아르덴 숲 이후로 다시는 이 거대한 전선에서 마주할 일이 없다 생각했거늘 하늘이 이런 기회를 내려줄 줄이야.
차라리 포슈와 같은 자에게 패배한 거라면 억울하지도 않다. 아니, 직접 자신이 군을 이끌고 싸워보기라도 했다면 말이다.
그저 아르덴 숲에서 잠시 활개 친 게 전부인 주제에 마치 막스 폰 파벡 위에 베르게르 모헬이 있는 것처럼 알려졌다.
천금 같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다음을 기약하기엔 전보다 전선은 더욱 넓어졌고 제 손으로 오명을 씻을 기회가 또 올 거 같진 않다.
이는 마냥 개인적인 복수심이 아닌 합리적 판단까지 더해진 결론이었다.
아라스를 무너트리는 것.
설령 과한 병력 투입이 될 수 있어도 성공한다면 전선 중앙을 끊어버릴 수 있다.
그리되면 랑스와 릴은 자연스레 고립. 솜의 프랑스군은 측면 노출 위험으로 아미앵을 중심으로 위축되어 쪼그라들 거다.
“우리 13군단은 아라스로 향한다. 루프레히트 사령관님껜 내가 직접 말씀 드리지.”
“솜에 합류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우리 하나 빠진다고 약해질 솜 공략이 아니야. 단지 무너지는 순서만 달라질 뿐이네. 그리고 아라스를 무너트린 뒤에 얼마든지 솜에 합류할 수 있지 않은가?”
루프레히트의 사령부는 가장 빈약한 윗가지부터 순차적으로 무너트릴 생각이지만 중간에 먼저 부러트려도 문제 될 건 없다. 되려 북부 전선 공세가 가속화되면 가속화되었지.
파벡은 아라스를 랑스와 릴 같은 아주 빈약한 나뭇가지라 생각했다.
실제로 같은 군단급이라고 비교하기도 민망한 11군단은 페르디낭 포슈의 명성에 편승했을 뿐, 바이에른 근위사단 둘이면 충분히 격파할 수준이었다.
‘베르게르 모헬. 네놈과 페탱의 허명은 내 손으로 직접 벗겨주마.’
이건 자신이 묶은 매듭을 스스로 푸는 행위가 아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매듭을 칼로 자르는 알렉산더의 해결책이다.
파벡은 6사단이라는 매듭 따위 13군단으로 잘게 끊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
10월 1일. 아라스 외곽 진지.
“더럽게도 많이 오네.”
정찰조가 알려주지 않아도 망원경으로 저 멀리 희끄무레한 것들이 보인다.
현재 우리를 포함해서 아라스 외곽 전선에 있는 전력은 사단 둘, 예비 사단 하나. 그 외로는 외인연대 하나랑 끝내 남은 기병연대 하나 정도다.
아라스 외곽만이 전선이 아니다. 전선이 긴 만큼 그 사이의 전초기지들은 수없이 많았고 당연히 아라스가 중요하다지만 그 사이의 전초기지들도 밀리면 안 되는 곳들이다.
패배한 11군단은 대부분 주위 전초기지들 쪽으로 빠졌다.
반대로 대충 예상되는 적은 정예 군단 하나에 여러 예비 사단 및 기병 사단 하나 정도로 본다.
파벡이 아라스 최전선을 무너트리며 흡수한 군이 그 정도 될 테니까.
“혹 적이 시간을 들여 아라스 포위전을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런, 파비앵 상사. 자랑스러운 육군 장교가 되기엔 너무 머릿속이 꽃밭이군? 자네가 파벡이라면 포위전을 하겠나?”
뭐가 부족해서? 11군단 만나서 찍먹해보니 ‘쓰읍, 상했나?’라고 판단했을 텐데.
근데 바로 뒤에 더 먹음직한 6사단, 그중 33연대가, 데코레이션으로 베르게르 모헬이 있네? 아, 이건 파벡도 못 참지.
어서 후딱 먹어 치우고 그 뒤 아미앵까지 포크로 콕콕 찔러봐야 하지 않겠나.
“승리를 확신하는데 왜 시간을 끌려고 하겠어.”
“하긴, 시간 들여 공략할 이유도 없긴 하죠. 압도적이라면.”
만약에, 정말 만약에. 우리 파벡이 어젯밤 뒤숭숭한 꿈이라도 꿔서 아라스를 차근차근 소화하려 했다면 지금 내 눈앞에 저리 나타나지도 않았을 거다.
우리가 대비한 걸 알면서도 굳이 왜 오겠나. 그냥 아라스 인근 전초기지부터 하나씩 부수면서 우릴 끌어내도 될 텐데.
물량 앞에 장사 없다. 그 말은 전선에서 진리나 다름없다.
단, 기관총과 참호 앞에선 보병을 제외하고.
“저들은 지금 자기들이 아라스로 찾아온 줄 알겠지.”
내 눈에는 아직 죽지 않은 시체들일 뿐이다.
“무지의 결과야.”
“문득 드는 생각인데, 이 모든 게 파벡 중장의 책임일까요?”
“그러지 않나.”
판돈으로 건 게 남의 목숨이면 최소한 책임이 있지 않을까 싶다.
뭐, 이런 논리라면 그 책임감에 안 짓눌릴 지휘관이 존재하겠냐마는.
죽음을 향해 다가오는 적. 살기 위해 그를 필사적으로 죽여야 하는 아군. 그 속에서 착잡함을 숨기지 못한 파비앵의 모습이 엿보였다.
그런 그에게 난 가볍게 내 생각을 던졌다.
“파비앵, 우리 너무 이성적이지도 감성적이지도 말자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간단해지자는 말이야. 적어도 이 전장에 관해서는. 이념도 신념도 잠시 내려놓는 거지.”
파비앵은 어엿한 군인이나 전장은 멀쩡한 사람마저 미치게 한다. 난 그리 내 부관을 잃고 싶지 않았다.
나 같은 경우는 철저히 우선순위 속에서 움직인다.
가장 위에 내 목숨, 그다음에 내 주위 사람들의 목숨.
그리고 리스트의 스크롤을 내리고 내리다 보면 진충보국(盡忠報國), 견위수명(見危授命)이 있지 않을까 싶다.
없음 말고.
“간단하게라. 때론 소령님이 이십 대라는 게 안 믿깁니다. 특히 이럴 때 말이죠.”
“말 안 해줬나? 내가 윤회를 통해 군대에 관해선 해탈의 경지에 들어섰어.”
“…다르마 신자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윤회해보시니 군의 끝은 어떻답니까?”
“몰라, 시발.”
내가 군의 끝을 제대로 봤어야 말이지. 죽기 직전 싸제 공기 한번 들이쉰 게 전부라고.
“크흐흐흐.”
“후후.”
우린 서로 웃기 시작했다.
아무리 무거워도 가볍게. 깃털보다 더 가벼워서 아무런 생각이 머릿속에 남지 않게.
그래야만 우린 스스로를 잃지 않은 채 돌아갈 수 있을 거다.
곧 우리의 웃음소리는 묻혔다.
쾅.
콰광.
꽤 거리가 있어 제대로 맞히기도 쉽지 않을 텐데 벌써 쏴대기 시작하는 적의 화포.
최후 아라스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포성이었다.
***
역시 파벡. 비록 그의 명성이 역사에 크게 기록될 정도는 아니다만 괜히 중장이 아님을 그는 몸소 증명했다.
그는 육전에서 현 독일군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가장 약해 보이는 곳을 하나 골라 벌써 두 시간 정도 포격을 가하고 있다.
아무리 꽁꽁 숨어도 피해자가 속출할 수밖에 없는 화력.
프랑스 지휘관이 그의 입장이었다면 압도적 물량 만세를 외치며 돌격부터 했겠지만 파벡은 아니었다.
길게 늘어진 참호선 중 한 곳을 골라 포병 화력으로 집중 포격을 가한다.
포격이 심해질수록 구멍이 점점 커진다는 걸 알았지만 난 추가로 병사들을 보내지 않았다. 지금 보내면 가서 자살하란 소리밖에 더 안 된다.
잠시 포성이 잦아들자, 난 즉각적으로 대처에 들어갔다.
“우측으로 올 거란 사실을 숨기지도 않는군. 집중포격 당한 우측 진영의 산병호들의 상태는?”
“최전방의 참병호들은 10명씩 배치된 곳들입니다. 호가 그리 깊지 않고 무엇보다 가장 앞에 있었기에 피해가 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겠지. 쯧, 최전방 참병호 병력 전부 뒤로 물려.”
“전부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소형 참병호에는 중기관총 진지 있는 곳이 얼마 없잖아. 물려도 괜찮네.”
일자 참호보다 몇 배나 효율적인 화력 구성이 가능한 일부 참병호를 난 과감히 포기했다.
저 포격은 이제 겨우 1차다. 당장은 한 부분을 충분히 집중타격했다는 생각에 멈췄을 뿐이고.
그 말은 즉.
“파비앵, 곧 저쪽으로 경보병들이 침투할 거 같네. 무슨 말인지 알겠나?”
“타격대 준비하겠습니다.”
“좋아.”
파비앵이 곧장 나가자 타 지휘관들이 입을 못 다문 채 괴물 보듯 날 쳐다보는 게 느껴지지만 이를 신경 쓸 틈은 없다.
2차대전 독일 국방군과 친위대의 전술인 전격전.
지금 파벡이 보여주는 전술은 그 전격전의 시초와 같은 전략이다.
이른바 후티어 전술.
프랑스군이 내후년에야 벤치마킹할 침투 전술이다. 지금은 독일군도 데모 버전인 것 같다만.
아직은 전술의 신, 오스카 폰 후티어(Oskar von Hutier)의 손에서 정형화되지도, 체계화되지도 않았지만 파벡이라면 후티어 전술의 밑그림 정도는 그렸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포격이 잦아들자 일부 병력이 빠르게 튀어나왔다.
간단한 복장에 총 한 자루 들고 몸을 낮춘 채 빠르게 달려오는 적 경보병이었다.
방금까지 포탄이 터져나가던 위치로 빠르게 접근하는 경보병.
뒤늦게 아군 병사들이 정신 차리고 대응에 나섰으나 적이 한발 더 빨랐다.
선두에서 달리던 이가 죽어도 그들은 쉬지 않는다.
저 참호에 도착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라는 걸 잘 알기에 일부 엄호사격을 위해 멈춰 선 인원들을 제외하면 경보병은 멈추지 않았다.
만약 눈으로 경보병을 확인하고 난 뒤에 대응했다면 몰아내기 위해 상당한 시간과 병력이 소모되고, 이는 고스란히 파벡의 시간이 되었을 거다.
그 시간은 중화기로 무장한 정예 보병이 전진할 시간이었을 테고.
“다른 곳은 전부 시선 돌리기 용이야. 아군 타격대가 우측에 나타난 적 경보병을 무너트리면 다시 참병호에 병력을 채우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내 명령을 받은 한 하급 참모가 나가자 난 본격적인 전투 양상을 머릿속에 그렸다.
‘자, 파벡. 우리 간보기는 그만하자고.’
너 지금 여기서 해 질 때까지 대치하고 싶은 거 아니잖아.
아라스를 가루 내고 북부 전선을 깊숙이 파고들어 그 안의 부드러운 살코기를 베어 먹고 싶잖아.
그럼 고작 포격 몇 시간과 경보병으로 우리가 준비한 방어 진지를 홀라당 먹겠다는 도둑놈 심보는 버리라고.
참호를 원한다면, 그에 걸맞은 값을 지불해라. 그게 맞다.
‘땅값은 적당히 파리 번화가 정도로 쳐주지.’
아라스는 우리 33연대가 주둔하던 곳. 원래 군에서 쓰는 건 다 비싼 법이다.
당장 돈이 없어도 괜찮다. 1리터의 피도 1프랑으로 환산해서 받아줄 테니.
여긴 아마추어들이 싸우던 국경도, 무식하게 집단군이 충돌하던 마른도 아니다.
그러니, 어서 와라. 성대한 환영식을 준비했으니.
Welcome to Arras.
***
“쯧, 바보는 아니란 건가.”
“대응이 빠르군요.”
“포격 속으로 병사들을 끊임없이 밀어 넣은 게지.”
그게 아니면 저 대응 속도는 설명되지 않는다.
‘무식한 놈.’
저런 식의 해결이라면 몇 번이고 포격과 경보병 투입을 해주겠으나 그랬다간 시간이 너무 끌린다.
적을 살살 깎아 먹는 건 본래의 목적과 맞지 않기에 파벡은 경보병 투입을 중단했다.
“포병은 전부 최전방 참호 포격으로 전환하게. 한 곳이 뚫리면 그쪽으로 병력을 집중할 수 있게 선발대와 후발대를 철저히 나누도록. 공세는 세 시간 뒤로 한다.”
“당장 포격을 시작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전선 특정 지점에 주공과 조공을 나누지 않고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눴다.
경보병을 물리쳤다고 좋아하고 있을 저 건방진 것들에게 진정한 바이에른 군단의 힘을 보여줄 때다.
‘한 곳만 뚫려봐라. 다시는 그 땅을 밟지 못하게 될 테니.’
작은 바늘구멍이라도 나는 순간 후발대가 투입되어 그 구멍을 찢어버릴 테니까.
선발대에서 꽤 출혈이 있겠지만 이는 충분한 투자이고 남는 장사이다. 파벡은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았다.
“전군, 공격.”
파벡의 입으로부터 총공세 명령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