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154
============================ 작품 후기 ============================
* 라무네[ラムネ]: 탄산수에 감미료와 향료를 첨가한 음료수로 사이다와 비슷합니다. 영국의 레모네이드를 본따 일본 메이지 유신 초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구슬로 마개를 한 독특한 형태의 유리병으로 유통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한국에는 1905년 일본인 히라야마 마츠타로가 인천에 ‘스타사이다’ 공장을 세워 크게 히트했으며, 스타사이다의 성공에 힘입어 1910년 나까야마 우노키치가 라무네 제조소를 만들어 라무네를 유통시키기 시작했습니다.
* 명전차(明前茶): 청명절(4월 5일경) 전에 수확하여 만든 차를 말합니다. 녹차 중 최고급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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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덫
중만은 불을 켜지 않은 채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집으로 돌아온 지 이미 서너 시간이 지난 뒤였다. 늦은 밤이라 창 밖은 커튼을 치지 않아도 이미 온통 어둠이었다.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중만에게서 대답이 없자 바깥에서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중만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눈을 뜨지 않은 채 대답했다.
“들어오게.”
문이 열리고 금석이 안으로 들어섰다.
“주무셨습니까?”
방이 어두워 혹여 자는 것을 깨웠는가 한 모양이었다. 책상 위의 조명을 켠 중만은 금석에게 축음기를 끄라는 손짓을 건네고는 담배를 꺼내 물며 불을 붙였다. 먼 길을 서둘러 다녀온 탓인지 금석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금색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모시고 왔습니다만 늦은 시간이니 우선 쉬시고 내일 아침에…….”
“아니야. 들어오라 해.”
중만이 금석의 말을 끊고 내뱉자 금석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물러갔다. 잠시 후 방 안으로 중키의 나이 든 남자가 쭈뼛거리며 들어섰다. 행랑아범이었다. 당장 불러 오라고 재촉을 한 통에 영문도 모르고 금석과 함께 급히 올라온 듯했다. 행랑아범은 어릴 때부터 중만을 보아 온 탓에 누구보다 그 성격을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중만이 갑자기 찾는다니 혹여 심기에 거슬리는 일이 생겼는가 싶었는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 눈에 띌 정도였다. 중만은 행랑아범에게 담배를 권했다.
“한 대 피우지.”
“예, 도련님.”
행랑아범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담배를 한 대 가져갔다. 중만은 성냥을 그어 직접 불까지 붙여 주었다. 중만은 행랑아범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눈치 챘으나 못 본 척 담배 연기를 뿜었다.
“커피라도 한 잔 하겠나?”
“아, 아닙니다.”
“올라오느라 수고 많았네.”
“무얼요, 차에 그저 앉아만 있었습니다.”
중만은 환갑이 다 지난 행랑아범이 자신의 앞에서 굽신대는 모양새에 짧게 실소했다. 행랑아범이 중만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중만은 재떨이에 몇 모금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비벼 끄며 입을 열었다.
“좀 궁금한 것이 있어 올라오라 했어.”
“예.”
“자네가 아버지와 언제부터 알던 사이라 했지?”
행랑아범이 멈칫하며 대답을 주저했다. 사정을 빤히 아는 중만의 입에서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무슨 의도인지 가늠해 보려는 듯했다. 중만은 행랑아범을 빤히 쳐다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행랑아범이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떨리는 손으로 얼른 담배를 끄고는 대답했다.
“나으리와는 어릴 적부터 한 동네에서 자랐습니다. 일이 잘 되시면서 워낙 집이 찢어지게 가난해 풀칠도 못하고 빌어먹게 된 것을 거두어 주셔서…….”
중만은 바람 새는 소리로 웃었다. 행랑아범과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서는 중만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족보로 없는 살림에 양반 행세를 하며 다녔다는 조부 아래서 자랐고, 행랑아범은 당시 고향에서 천석꾼 집안의 종살이를 하던 자라 했다. 어릴 적부터 어울려 놀다 우연한 기회에 아버지가 재산을 얻고 대전으로 이주하며 그를 데리고 와 심복으로 부렸고, 중만 역시 그에게 각종 처리하기 까다로운 일의 뒤처리를 맡겨 왔다. 입이 무겁고 제 식구는 끔찍이 여기는 자라 가족만 잘 돌보아 준다면 무슨 짓이든 기꺼이 했던 것이다. 아버지와 중만에게는 꼭 필요한 자였다. 중만은 팔짱을 끼며 행랑아범에게 물었다.
“자네는 아버지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지?”
“아이고, 감히 저 같은 놈이…… 그저 나으리를 오래 모시기는 했지요.”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고개를 조아리던 행랑아범이 입을 다물었다. 중만은 농담이라는 양 손을 저으며 킬킬거렸다.
“그리 긴장하지 말게. 그저 잠시 옛 생각이 난 게야. 자네와 나는 어차피 한 배를 탄 사이 아닌가?”
“예, 그러믄요.”
행랑아범이 황급히 대답했다. 중만은 비밀을 지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함께 있는 자를 공범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행랑아범은 중만의 가장 믿을 만한 공범이었다. 중만은 그를 물끄러미 마주보았다.
“한 십오 년도 더 전에 말이야, 이십 년쯤 되었나? 아버지가 갑자기 노다지를 터트렸을 때지. 지금 본가로 이사를 하면서 데려온 종놈들이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하나?”
“종놈들 말씀이십니까?”
행랑아범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중만이 입때껏 집에서 일하는 종들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는 탓이었다. 중만이 고개를 끄덕이자 행랑아범이 조심스럽게 중만의 눈치를 보았다.
“계집년들까지 다요?”
“그래.”
“이삼십 명쯤 되었을 것입니다. 중간에 죽거나 내보낸 것들도 있으니…….”
“음, 그래. 그 중에 남매가 하나 있었지?”
“남매요?”
“길바닥에서 빌어먹는 것을 보고 불쌍하다고 밥이나 먹여 주겠다 하고 데려오셨다 했는데 기억이 없는가?”
중만은 행랑아범을 뚫어지게 보았다. 남매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눈동자가 눈에 띌 정도로 흔들렸다. 마른침을 삼킨 행랑아범이 주억거렸다.
“예, 예. 기억이 납니다. 산에서 죽은 놈과 그 누이를 말씀하시는 게지요?”
“잘 알고 있군. 그때 자네가 종놈들과 함께 산을 뒤졌지?”
“예, 그랬습니다. 때가 동지 무렵이라 산길이 원체 어두워서…… 놈이 비탈 아래로 굴러 죽었지요. 계집년은 발목이 부러져 숨어 있던 것을 찾아 데리고 왔고요.”
“그래, 그 계집년이 역병에 걸려 빈 집에 가두었는데 없어진 것도 기억하겠군.”
행랑아범이 초조한 듯 손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당시에 계집이 사라진 것을 안 중만이 집안의 종들을 모조리 잡아 죽일 기세로 족치며 당장 찾아내라고 펄펄 뛰던 것이 생각난 듯했다. 어릴 적부터 한 번 손에 들어온 것을 버리는 일은 있어도 두 눈 뜨고 빼앗기는 일은 없었던 중만이었다. 때문에 패악질이란 패악질은 죄다 부려 가며 며칠을 들볶아대고, 결국 계집이 소에 빠져 죽었다더라 하는 소문을 들은 후에야 포기했던 것이다. 워낙 깊어 사람이 빠져 죽어도 시체가 뜨지 않는다는 소였다. 아무리 중만이라 한들 소 바닥까지 뒤집어 계집년 시체를 건져 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행랑아범이 다시 한 번 마른침을 넘겼다.
“소에 빠져 죽은 계집 말씀이시지요?”
“시체를 건졌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나?”
“아니오, 그건 아닙니다만…….”
행랑아범이 말끝을 흐렸다. 중만은 미간을 좁혔다. 생각해 보면 그 두 연놈 다 자기 눈으로 시체를 확인한 적이 없다는 것이 퍼뜩 뇌리를 스쳤다. 동생 놈은 그 겨울밤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져 죽은 것을 보았다는데, 한밤중이었던 데다 다음날부터 눈이 쏟아져 시체를 수습하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터였다. 후에 날이 풀리고 눈이 녹은 뒤 누군가 산짐승에게 뜯어 먹히고 뼈만 남은 시체를 보았다 하기에 당연히 죽은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다. 계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병에 걸린 년이 가면 얼마나 가겠느냐며 사람을 그리 풀어 며칠을 뒤졌지만 찾지 못했고 소에 빠져 죽었다 하니 그런 줄로만 알았을 뿐이었다.
“그 년이 죽은 것이 확실한가?”
“예?”
행랑아범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펄쩍 뛰었다. 물론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다가는 중만이 무슨 꼬투리를 잡을지 몰랐기에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겠으나, 이미 중만의 마음속에 한 번 자리한 의혹은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차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중만은 손가락을 까딱여 행랑아범을 조금 더 가까이 오게 하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람을 풀어 당시에 인근에서 비슷한 계집을 본 적 있는지 한 번 알아보게. 나이는 열대여섯 정도 되었고 얼굴이 반반했으니 살아 있다면 분명 기억하는 자가 있을 것이야.”
“허나 도련님, 말도 아니 되는 일입니다. 역병은 그냥 병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어도 열이 끓고 위아래로 쏟아내며 바닥을 기는데 어린 계집년이 무슨 수로…….”
“언제부터 그리 여러 말 하며 토를 달았나?”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중만의 되물음에 행랑아범이 바로 말을 멈췄다. 중만은 쯧, 하고 혀를 차고는 잠시 과거의 기억을 되짚었다. 계집의 반반한 얼굴을 되새기자 처지답지 않게 무언가 고상하던 분위기가 떠올랐다. 옷만 제대로 입혀 놓았다면 웬 양반댁 규수라 해도 그러려니 했을 터였다. 처음 자신의 집에 왔을 때는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동생 쪽도 그저 굴러 처먹는 종놈의 새끼들과는 다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퍼뜩 지나쳤다. 강박일 수도 있었으나 그 출신을 확인해 나쁠 것은 없었다. 실제로 아버지는 길거리에서 웬 애새끼들이 빌어먹는 것을 불쌍히 여겨 집에 데려올 정도로 동정심 넘치는 인간도 아니었다.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연놈들을 아버지가 처음 데려왔을 때 어디서 데려왔다고 하셨던가?”
중만의 질문을 들은 행랑아범이 대답을 어물거렸다. 무언가를 아는 듯한 눈치였다. 중만은 지금까지 자신이 한 번도 그 맹랑한 것들에 대해 궁금해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고작 종살이하는 연놈들에게 기울일 관심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십여 년도 더 지난 일이 한 장의 종이 위에 적힌 이지순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나기 전까지는. 중만은 행랑아범을 다그쳤다.
“왜 말을 하려다 말아?”
“저,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나으리께서 하셨던 일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 같았지만…… 아는 분의 자식들인데 집이 망해 빌어먹게 된 것을 데려왔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아는 분이 누구란 말이야?”
“그것까지는…….”
“누구인지도 알아오도록 하게. 여러 말 하게 만들지 말고.”
행랑아범이 잔뜩 주눅이 든 표정으로 고개만 주억거렸다. 중만은 다시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입 안이 썼다. 무언가 진득한 것이 달라붙어 씻기지 않는 듯 썩 유쾌하지 않은 감각이 뇌리 한구석에 달라붙어 있었다. 행랑아범이 중만의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도련님, 저어, 말씀을 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마침 여기 부르신 김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리 뜸을 들여?”
중만이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행랑아범이 저렇게 주저하는 일이라면 분명 새어머니와 동생에게 관련된 일이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중만은 얼마 전부터 사업 확장을 위해 슬슬 명숙을 제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명숙이 아버지의 죽음에 자신이 관련된 것이 틀림없다고 소문이라도 내고 다닌다면 곤란해질 것이 뻔했기에, 어떻게 하면 후환 없이 명숙을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을지 때때로 고민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행랑아범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며칠 전에 경성에서 기자가 하나 찾아왔습니다. 동네 사람들 말로 나으리 일을 샅샅이 캐묻고 다녔다 합니다. 본가에도 한 번 방문했는데 자기가 도련님을 잘 안다고 해서…….”
“기자가?”
중만은 눈썹을 찌푸렸다. 자신을 잘 아는 기자가 아버지의 일을 묻고 다닌다? 바로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진상을 아는 자는 몇 되지 않았고, 그들 모두가 중만의 공범이었다. 그 중 고문 변호사였던 허진남은 평양에서 이미 죽었으므로 남은 사람은 행랑아범과 금석 정도였다.
“이름이?”
“조선일보의 기자라는데 장순현인가 하는 이름이었습니다.”
순간 누군가가 가느다란 바늘을 꽂은 듯 선뜩한 감각이 지나갔다. 장순현. 장순현이라. 순현이라면 환에게 다리를 놓기 위해 이용했던 기자였다. 상해 쪽에서 독립신문의 간사로 있던 장순명이라는 자의 사촌 동생으로, 환과 동문이라고 하여 순현을 소개받아 환에게 자신을 연결해주기를 부탁했었다. 평양 일이 있고 나서 환에게 연락이 끊겼을 때도 순현에게 서면으로 환의 안부를 물었던 중만이었다. 순현을 이용해 환과 우선 다시 연락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순현에게서는 아직 답이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그런데 그 사이 그가 본가에 내려가 아버지에 대한 것을 캐묻고 다닌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왜 묻는 것 같았나? 무슨 냄새를 맡은 것인가?”
중만이 다급히 묻자 행랑아범이 고개를 저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중만은 머리를 굴렸다. 아버지의 일은 완벽히 사고로 처리되었기에 이제 와서 다시 조사를 한다 한들 무언가가 나올 리 없었다. 순현이 자신의 뒤를 캘 까닭이라면, 하고 생각하던 중만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환의 부탁을 받은 것인가. 혹은 이환에게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중만에게는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중만은 행랑아범을 마주보았다.
“알겠네. 올라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물러가서 쉬지. 내일 언제든 차편은 수배해 줄 테니 편할 때 내려가도록 하고. 그리고 나가서 이 비서를 좀 불러 주어.”
“예, 도련님.”
행랑아범이 안도한 표정으로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방으로 들어온 금석이 문을 닫았다. 중만은 관자놀이 부근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긴 한숨을 쉬었다.
“독립신문 간사로 있던 장순명 알고 있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그쪽에 연락을 하게. 급한 일이라고.”
“네.”
“골치 아프게 되었군.”
중만은 혼잣말처럼 무심코 중얼거리고는 피곤한 말투로 물었다.
“이환의 동향에 대해서도 좀 알아보아야겠네. 정해경과 그 계집한테 사람을 붙인 것은 어찌 되었나?”
중만의 물음에 금석이 즉각 대답했다.
“계집은 정해경 사무실의 여급으로 일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매일 나간다 하더군요. 개성에서 약방을 하던 집안 출신인데 가족이 모두 죽어 천애고아 신세랍니다.”
“그러면 정해경이 때로 위장을 시켜 가며 끼고 다니는 종년인 게로군. 정해경은?”
“경성에 왔을 때 처음 일하던 상회 직원을 수소문하여 알아냈는데, 조실부모한 천애고아라 하면서도 글도 잘 읽고 배우지도 않은 장부 계산도 척척 잘 했답니다.”
“어디서 배웠기에? 학교에 다닌 것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했습니다. 그런데 내지 말도 몹시 능숙하고 영어도 할 줄 알아 사장이 몹시 아꼈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 사장은 지금 어디 있나?”
“상회는 진작에 정리했고 재작년에 병으로 죽었답니다.”
조실부모한 천애고아가 글을 읽고 장부 계산을 하며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것을 어디서 배웠단 말인가. 고보까지 다닌 학생들 중에도 내지 말과 영어까지 모두 능숙한 자들은 드물었다. 만약 해경이 고보를 다닌 적이 있다면 조실부모한 천애고아일 리가 없었다. 고보에 입학할 수 있는 조선인 학생의 수는 극도로 적었고 당연히 돈이 없는 집안에서 무리를 해 고보까지 보내는 경우는 더욱 드물었다. 천애고아라면 애초에 고보에 들어가는 것 자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국의 고보를 샅샅이 뒤져 정해경의 출신학교가 있는지 한 번 알아봐. 만약 정해경이 다닌 학교가 있다면 분명 집안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게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지순을 찾아보라 한 것은?”
“인근의 흥신소 몇 군데에 의뢰를 해 두었습니다. 혹시 동명부(洞名簿)에 기록이 되어 있을까 싶어 면사무소 쪽에도 연락을 돌려 찾아보라 이야기를 했습니다.”
“알겠네.”
금석의 대답을 들은 중만은 손을 저어 금석을 물러가게 했다. 육중한 문이 닫히자 방 안이 침묵 속으로 잠겨들었다. 한동안 방치한 솜뭉치처럼 앉아 있던 중만은 손으로 마른 얼굴을 문질렀다. 모든 일이 마치 산꼭대기에서 작은 눈뭉치를 굴리는 것처럼 여겨졌다. 산 아래 도착할 즈음이면 그 작은 눈뭉치가 이미 혼자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이 불어난 눈덩이가 되어 자신을 덮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등골이 스산해졌다.
이 모든 것이 정해경 때문이었다. 애초에 정해경만 아니었다면 라 세느에서의 실험도 계속되었을 것이고 평양에서의 일을 실패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이환의 신뢰를 잃을 일도 없었고 골치 아프게 방해되는 돌부리를 일일이 뽑아야만 할 일도 없었을지 몰랐다. 묘한 악연이로군, 하고 중얼거린 중만은 고개를 뒤로 젖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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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덫
해경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내려놓고는 눈가를 눌렀다. 책상 위에는 무언가가 잔뜩 쓰인 종이 몇 장이 놓여 있었다. 해경은 눈을 감았다 뜨고는 흩어진 종이를 모아 정리하며 다시 거기에 시선을 주었다. 중만의 새어머니라는 백명숙에 대한 정보들이었다.
명숙은 일본여자대학 가정학부 출신으로 종로통 포목상의 딸이었으나 가세가 기울며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었고, 칠팔 년쯤 전 일본에서 만난 권경천을 따라 후처로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해 아들을 하나 낳아 중호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권경천이 늘그막에 얻은 이 늦둥이를 몹시 총애해 재산의 상당 부분을 유산으로 남겨 주기로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권경천이 뜻밖의 사고로 죽게 되면서, 유산을 물려받은 중만이 뛰어난 수완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지금의 인천항만주식회사 사장이 되었다는 것이 대외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명숙과 중호는 아직 대전 인근의 본가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해경은 중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와 같은 자가 과연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꼴을 가만히 참고 있을 수 있었을까.
“‘모(母)인 백명숙은 현재 재산 관리의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권중호에게 상속되는 유산은 성년이 될 때까지 권중만이 후견인으로 관리하기로 한다.’”
해경은 종이 위에 쓰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권중호의 유산 상속과 관련된 합의서였다. 해경은 가장 아랫줄에 쓰인 변호사의 이름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았다. 허진남. 평양에서 총격 살인으로 위장당해 죽었던 자였다. 인혜의 도움으로 조선변호사협회를 통해 얻어 낸 것이었다. 당시 중만은 그가 조선변호사협회 소속이라 했으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경은 협회에서 다른 정보를 얻어낸 바였다. 중만은 그에 대해 이야기하며 조선공산당 건으로만 도움을 주고받았던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실은 허진남이 오래 전부터 권중만의 고문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해경은 머릿속에서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그림을 천천히 맞춰 보았다. 그 그림에는 권중만과 고문 변호사인 허진남, 그리고 백명숙과 권중호가 있었다.
백명숙은 금치산자도 아니었으며 일본에 유학까지 다녀온 재원이었다. 그런데도 변호사가 그녀에게 재산 관리의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이것이 중호의 유산을 빼앗기 위한 노골적인 공작임을 알 수 있을 터였다. 물론 명숙 자신조차도.
그러나 이미 유산의 대부분은 중만의 것이었고, 권경천이 죽은 이상 명숙이 그에게 대항할 만한 수단이 없었을 거라는 사실 역시 자명했다. 해경은 중만이 본가에 명숙과 중호를 그대로 두고 있는 것에도 무슨 의도가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해경은 미간을 문지르다 책상 위에서 오래된 신문 기사를 철해 놓은 서류철을 찾아냈다. 권경천의 죽음에 관련된 기사였다.
― 지난 이십일일 오전 다섯 시 경 만흥주식회사 사장 권경천이 자기 소유의 자동차를 운전해가지고 충남 대전군 유천면 사정리 인근을 진행하다 비탈 아래로 굴러 떨어져 머리에 중상을 입고 현장에서 혼도(昏倒: 정신이 어지러워 쓰러짐)되어 인사불성에 이르렀으므로 이를 발견한 인근의 주민 김 아무개가 신고하여 읍내로 실고 가 의사에게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워낙 상처가 커 하등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마침내 동일 오후 네 시 이십 분에 사망하였다.
기사만 놓고 보자면 흔한 자동차 사고에 지나지 않았다. 사업도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명숙과의 사이에서 중호가 태어난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때였다. 그러나 해경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해경은 그 다음 장을 넘겨보았다. 거기에는 사망한 권경천 사장의 아들 권중만이 만흥주식회사의 주주들을 모아 총회를 개최하였고 경영권을 넘겨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권경천이 사망하고 고작 이틀이 지난 뒤의 기사였다. 해경은 중호의 유산 상속 합의서를 나란히 놓고 하단의 날짜를 살폈다. 주주총회를 한 날과 같은 날이었다.
상(喪)을 채 마치기도 전에 주주총회를 열고 유산 관련 내용을 정리한다는 것은 확실히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더구나 권경천에게 병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갑작스러운 사고였는데, 중만의 행동을 보면 마치 모든 것을 예견한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해경은 권경천의 사망 기사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만에 하나, 권중만이 이 사고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잠시 생각하던 해경은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고는 짧은 한숨을 뱉었다. 자신이 중만을 지나치게 나쁘게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집착은 눈을 가린다…… 미간을 찌푸린 해경은 몸을 돌려 창가 쪽을 보고 앉았다. 라무네 병에 꽂힌 개나리 가지에서 노랗게 피어난 꽃들이 어두운 창가에 수를 놓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서도 차가운 기운은 어느덧 모두 사라진 채였다. 해경은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가까이 다가갔다.
「저는 지금이 좋아요, 선생님.」
만약 자신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으냐고 물었을 때 소화가 대답하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해경은 자신이 소화에게 좋은 상대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화에게는 좀 더 평범하고 안정적인 누군가가 있어야만 했다. 결코 의도한 적 없었지만 소화를 몇 번이고 위험에 빠뜨린 뒤로는 더더욱 그랬다.
소화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분명 스스로 좋아서 한 일이고 해경의 탓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테지만, 해경은 소화가 그런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인혜의 말대로 소화는 이곳에서 사무실 여급이나 하며 여생을 보내기에는 아까운 소녀였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의 곁에서 떠나보내야 할지도 몰랐다.
「내 곁에 있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렇기에 소화에게 그렇게 말했을 때 그것은 틀림없는 진심이었다.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까. 얼마 전부터 해경의 마음속에 자리하기 시작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당장 내일의 일조차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겨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그 말을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쩐지 지금 그 말을 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해경은 손끝으로 물이 오른 개나리 가지를 가만히 만져 보았다. 코끝으로 희미하게 풋풋한 봄내음이 스쳐 지났다. 입 안에 쓴 맛이 돌았다. 해경은 잠시 창 밖의 어둠에 시선을 주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벽에 걸린 시계는 밤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혹시 신문사 기자들이라면 이 일에 대해 무언가 아는 것이 더 있을까 싶어 동아일보 기자인 김양호와 만날 약속을 미리 잡아 둔 채였다.
양호는 취재를 갔다가 저녁에 오겠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었다. 신문사에 연락을 해 봐야 대부분의 직원들은 이미 퇴근했을 터였다. 아마 취재를 나간 일이 길어지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해경은 아까 우려 놓은 식은 차를 찻잔에 부었다. 해경이 막 차를 한 모금 마셨을 때였다.
“아직 있소?”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양호의 목소리였다. 숨이 턱까지 찬 채였다. 해경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들어오십시오.”
양호가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큰 체구였는데, 지난번 윤자희의 일 때문에 만났을 때보다 그새 살이 더 붙어 있었다. 양호는 몸을 끌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해경이 물었다.
“마실 것이라도 드릴까요?”
양호가 손부채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찬물이나 좀 주시오. 아침부터 진남포(鎭南浦: 현 평안남도 남포특별시)까지 갔다가 이제야 간신히 내려왔소. 미리 연락을 했어야 하는데 미안하군 그래. 오래 기다렸소?”
“아닙니다. 어차피 일이 있어서요.”
해경이 물을 따라 건네자 양호가 숨도 쉬지 않고 두어 잔을 연거푸 들이키며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이제야 살 것 같다는 얼굴로 크게 한숨을 내쉰 양호가 등을 기댔다. 해경은 양호의 맞은편에 앉았다.
“진남포까지는 무슨 일로?”
“상해로 밀항하려던 자들이 진남포에서 체포당했소. 조선 독립을 기원하며 테러 행위를 공모한 자들이라는데, 인천항에서 화물선을 통해 밀항했다가 진남포에 정박한 사이 발각됐다더군.”
“그렇습니까?”
양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고는 안타깝다는 투로 투덜거렸다.
“네 명인데 모두 선원으로 위장했다니 잘만 했으면 성공했을 거요. 인천항만주식회사 소속 화물선이었는데 워낙 큰 배라…….”
“인천항만주식회사라고요?”
해경은 저도 모르게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인천항만주식회사라면 중만의 회사였다. 독립 운동을 하는 자들이 수배당하면 밀항하여 외국으로 도망치는 일은 종종 있었는데, 선원으로 위장까지 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선원으로 위장을 했다면 적어도 배 안의 누군가가 그들의 뒤를 보아 주었다는 말이 될 터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인천항만주식회사의 배일까. 물론 큰 화물선을 운행하는 회사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다른 선택이 없을 수도 있었으나 중만은 이미 조선공산당을 밀고한 전적이 있는 자였다.
“밀고가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까?”
“밀고가 없었다면 분명 밀항에 성공했을 거요. 일차 조사가 끝나면 경무국으로 넘어올 테니 자세한 것은 그 때 알 수 있겠지. 잡힌 이들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소. 수색을 하다 한 사람 품에서 용정 소인이 찍힌 봉투가 나왔는데 내용물은 없더군. 아마 잡힐 때 내용물은 바다에 버렸거나 한 모양이오.”
양호가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말투로 대답하고는 몸이 뻐근한지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지난번에 장준학에 대해 묻더니 그건 잘 해결이 되었나?”
잠시 잊고 있었던 준학의 이야기가 나와 멈칫한 해경은 곧 미소를 지었다.
“네,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별 일은 아니었습니다.”
굳이 양호에게 전후 사정을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다행히 양호 역시도 그냥 지나가는 물음이었던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마 전에 김석란의 부고가 실려 깜짝 놀랐는데, 장준학이 경영도 재단 측에 맡기고 해외로 나갔다기에 갑자기 생각이 나서 말이야. 그나저나 권중만 사장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던가? 그러고 보니 하필 또 내가 인천항만주식회사와 관련된 곳에 취재를 갔군.”
“정확히는 권중만 사장의 부친에 대해 좀 알고 싶어서요. 혹시 주변에서 취재를 한 분이 있습니까? 무어 들으신 이야기가 있거나…….”
“이름이, 가만 있자. 권경천이라 했던가? 몇 년 전에 사고사로 죽었다고 한 것 같은데.”
해경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철을 가져와 양호에게 내밀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기사를 가만히 보던 양호가 알겠다는 표정을 했다.
“그래, 그래. 맞소. 당시에 취재를 한 사람은 있을 텐데 별 일이 아니라서 기억을 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군. 이 당시까지만 해도 만흥주식회사가 작은 회사였어서 말이야. 권중만 사장이 부친이 죽은 뒤 사업체를 물려받아 키운 것이다 보니 아마 이전의 이야기에 대해 잘 아는 이는 별로 없을 거요. 그런데 권중만 사장에게 무슨 일이 있나? 최근 들어 관심을 갖는 친구들이 좀 있어 이상하군.”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놀란 해경이 묻자 양호가 팔짱을 끼었다.
“음, 지난주였던가, 아니면 열흘도 더 되었던가. 조선일보의 장순현이라는 기자가 우리 신문사로 찾아왔었소. 사회부의 오선중 기자라고 내 동료가 있는데 그가 장순현의 경성고보 동문이라 하더군. 오 기자에게 권중만 사장과 그 부친에 대한 것을 이것저것 묻고 가면서 혹시 무슨 이야기든 아는 것이 있으면 다 말해 달라고 한 모양이오. 그래서 오 기자가 우리에게 무어 들은 이야기가 없냐고 묻고 다녔거든.”
장순현. 해경은 그 이름을 입 안으로 뇌어 보았다. 낯선 이름이었다. 중만의 뒤를 캐는 자가 그렇게 많다는 것은 어쩐지 이상했다. 이미 환의 친구가 권중만 부자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또 다른 기자가 중만을 쫓는다는 것인가. 많은 사람이 움직일수록 권중만 역시 곧 자신이 뒤를 밟히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챌 가능성이 높았다.
“장순현 기자에 대해 아십니까?”
해경이 넌지시 떠 보자 양호는 별 의심 없이 대답했다.
“경성제대 출신인데 중도에 그만두고 조선일보로 들어왔다고 들었소. 오 기자의 말로는 사람은 몹시 좋은 친구라 하더군.”
“그렇습니까.”
조선일보의 장순현이라,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해경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누구를 믿을 수 있고 누구를 믿을 수 없는지 가리기 어려운 판국이었다. 살얼음 위를 디디는 듯한 기분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누가, 무엇 때문에 권중만의 뒤를 밟고 있는 것인가.
기자라면 혹여 그가 중만에 대해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을 찾아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친일파이자 조선공산당의 밀고자인 동시에 상해 독립단체의 자금 세탁을 담당하고 있는 자. 두 얼굴 중 어느 쪽이 진짜건 간에 만약 냄새를 맡은 기자가 있다면 구미가 당길 만한 일일 수는 있었다. 해경은 일단 장순현에 관한 것은 배제하기로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때 무어 들으신 이야기는 좀 있었습니까?”
해경이 말을 돌리자 양호가 잠시 생각하다 흠, 하고는 턱을 괴었다.
“딱히 별 이야기는 없었소. 내무국이나 탁지부(度支部: 현 재정부)에 줄을 댔을 것이라는 말은 있더군. 젊은 친구가 회사를 아주 빨리 키웠는데 뒷배를 보아 주는 이가 없다면 그리 하긴 힘들었을 거라 누구나 짐작은 했을 거요. 그 정도 규모의 사업을 하는 자라면 뒷줄 대는 것도 당연할 것이고. 친일 인사들과 주로 어울리고 서경친목회에도 가입되어 있다고 하니 총독부와 나쁜 관계일 수는 없겠지.”
“혹시 독립 운동 단체와 관련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권중만이?”
양호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되묻고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랬다면 이미 회사가 박살났을 거요. 총독부에서 가만히 둘 리가 있겠소?”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양호의 말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정도 규모의 사업을 벌이는 자라면 크든 작든 총독부 측과 관련이 없을 수는 없었다. 친일 인사들을 혐오하는 자들조차 총독부에 어느 정도 뒷돈을 찔러 주는 것이 거의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갖 감사니 뭐니 하며 피를 말려 죽일 기세로 덤벼 오는 일이 태반인 탓이었다.
물론 중만이 총독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 도리어 등잔 밑이 어둡다 했으니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자금 세탁을 보다 쉽게 해낼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작은 가시처럼 계속 껄끄럽게 걸리는 기분이었다. 양호가 시계를 보았다. 무심코 양호의 시선을 따라가던 해경은 아, 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피곤하실 텐데 오래 붙잡아 두었군요.”
“아니오. 어차피 가는 길에 들른 것이니까. 정 선생도 꽤 늦게까지 일하는 모양인데 젊은 사람이 그러다가 몸 축나니 적당히 해요. 권중만 사장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면 무언가 알게 되는 대로 다시 연락을 주겠소.”
“감사합니다.”
양호가 끙,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 큰 체구를 감당하기 버거웠는지 소파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양호가 아직도 덜 마른 땀을 닦으며 사무실을 나가는 것을 배웅한 해경은 잠시 자리에서 몇 걸음 서성거리다 고개를 흔들었다. 크게 숨을 들이쉰 해경은 다시 책상 앞에 앉았으나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이전처럼 심한 불면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근 들어 자리에 누우면 생각이 많아서인지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해경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젖혔다. 중만에 대해 조사하는 것을 모두 놓아 버린다면 지금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들의 절반 이상은 떨어져나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누나 때문에라도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중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해경은 누나가 살아 있으리라는 희망에 일말의 확신을 더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적어도 중만의 뒤를 쫓다 보면 누나가 죽었든 살았든 그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해경을 멈출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해경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책상 위에 엎드렸다. 머릿속이 이런저런 일들로 가득 차서 터질 것 같았다. 애초에 희망 같은 건 버리고 살았다면 지금쯤은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 수도 있었을까.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은 가정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한참을 엎드려 있던 해경은 고개를 들었다. 시계는 이미 열 시를 지나고 있었다. 해경은 자신이 몹시 지쳐 있다는 것을 오랜만에 자각했다. 몸도 마음도 마치 물을 잔뜩 먹인 솜 같은 기분이라, 오늘은 아무래도 더 이상 앉아 있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책상 위를 정리하고 흩어져 있던 종이 위에 안경을 접어 올려놓은 해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걸이에 걸어 둔 재킷을 내려 입고 창문을 잠근 뒤 불을 끈 해경은 사무실 밖으로 나서 문을 닫고 주머니 안의 열쇠를 찾기 위해 손을 넣었다.
사무실 안에서 전화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해경은 주머니에 한쪽 손을 넣은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 시간에 전화가 울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집에 돌아가 눕기만 하면 그대로 잠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은 상태였기에 해경은 잠시 망설였다. 그 사이 전화벨 소리가 멈췄다.
의뢰인이었을까. 이 시간에 전화를 할 만한 사람이라면 인혜 정도였는데, 만약 정말 급한 일이 있다면 집으로라도 찾아올 터였다. 해경은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열쇠를 꺼내 구멍에 꽂았다. 그 순간 다시 안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두어 번 문지른 해경은 사무실의 문을 열고 어둠 속에서 발악하듯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명치정 정해경입니다.”
― 정 선생, 지금, 지금 거기 있습니까? 사무실이오? 내가 그리 가도 되겠습니까?
전화를 받기 무섭게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당황한 해경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멍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지 않았다. 해경이 대답을 하지 않자 상대방이 거의 악을 쓰듯 외쳤다.
― 내 목소리 들립니까? 대답 좀 해 봐요!
간신히 그것이 환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은 해경은 저도 모르게 마르는 입술을 축였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환에게 몹시 다급한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방금 전까지 멍했던 머릿속이 갑자기 찬물을 부은 듯 선뜩하게 차가워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퇴근하려던 참입니다.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사가에 계시는 겁니까?”
― 숭삼동이오. 연구실에서 지금 돌아왔는데, 전보가…… 용정에서 전보가 왔소.
“전보라고요?”
해경이 되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보는 무엇이고 용정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 퍼뜩 환의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와 거의 동시에 환이 대답했다.
― 친구가 죽었소.
전화 너머로도 환의 목소리는 분명 떨리고 있었다. 해경은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 내 친구가 죽었단 말이오! 부고가 왔소. 용정에서 부고가 왔단 말입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소. 어떻게 된 건지…… 무엇이 어찌 된 건지 전혀 모르겠소.
환이 그처럼 황망해하는 것은 몹시 드문 일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 같은 환의 목소리에, 해경은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 바로 사가로 가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수화기를 내려놓은 해경은 사무실을 나서 문을 잠그고는 서둘러 택시를 잡았다. 해경은 어둠에 잠겨 안개처럼 번지는 와사등의 빛무리가 뒤엉킨 거리를 달리는 택시 안에서 등을 기대고 있다가 눈을 감았다. 너무 많은 죽음이 가까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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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덫
해경이 환의 숭삼동 사가 근처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거리에 나와 초조하게 선 채 자신을 기다리는 환의 모습이었다. 택시에서 내린 해경은 바로 환에게 달려가 그 팔을 잡아챘다. 움찔하며 놀란 환이 해경의 얼굴을 보았다. 환의 얼굴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경호도 없이 어쩌려고 나와 계셨습니까? 어서 들어가시지요.”
해경은 서둘러 환을 사가의 대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환의 친구가 죽은 것이 사고인지 아니면 다른 까닭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만에 하나라도 그것이 환과 관련이 있다면 이렇게 무방비한 태도는 위험했다. 순순히 떠밀려 들어간 환은 현관을 걸어 잠그고는 거실 소파에 주저앉으며 얼굴을 감쌌다. 눈치를 살피던 하녀가 주저하며 물었다.
“손님께 차라도 내어 드릴까요?”
“무엇이든 가져다주어요.”
환이 잠긴 목소리로 내뱉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서둘러 하녀를 만류한 해경은 환의 맞은편에 앉아 그를 가만히 마주보다 입을 열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환이 대답 대신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전보용지를 해경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해경은 그 전보용지로 시선을 돌렸다. 휘갈겨 쓴 한글 전보였다. 일부인(日附印: 발신 우체국 소인과 날짜가 찍힌 도장)은 경성우편국 것이었다. 그러나 해경의 눈을 붙든 것은 소인보다는 전보의 내용이었다. 용정 장순현 사망. 전보를 눈으로 한 번 더 읽어 본 해경은 벼락을 맞은 듯한 감각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장순현. 양호가 말했던 기자의 이름이었다. 해경의 놀람을 알 리 없는 환이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오후에 전보가 도착했던 모양이오. 받은 사람은 있었지만 당연히 개인 우편이라 생각해 내용을 보지 않고 내 방에 가져다 두었다 하더군요. 연구실에서 돌아와서 이 전보를 보았고, 그게 다요. 전보를 보자마자 정 선생에게 연락을 한 겁니다.”
“권중만 사장과 그 부친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는 친구분이 맞습니까?”
“그렇소.”
“혹시 이 친구분이 조선일보 기자였습니까?”
해경의 물음에 환이 미간을 약간 좁혔다.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군요. 맞소.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고 있었지요. 어떻게 알았소?”
해경은 흠, 하며 짧은 숨을 뱉었다. 중만의 뒤를 캐던 조선일보 기자와 환의 친구는 결국 동일 인물이었던 것인가. 권중만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다른 신문사의 기자로부터 우연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저기 조사를 하러 다녔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분이 권중만 사장을 소개해 주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정확히는 그 사촌 형이 권중만 사장과 관계가 있는 자라 했소. 독립신문 간사로 일했던 장순명이라는 사람인데, 장순명이 있는 단체에 권 사장이 자금을 세탁해 보내 주었던 모양이오. 그래서 내 이야기를 듣고 그 형이 순현이를 불러 권 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순현이는 내게 그걸 다시 전한 거지요.”
해경은 환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등장인물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권중만과 장순명, 그리고 장순현과 이환. 일이 돌아가는 것을 보았을 때 권중만이 상해에 자금을 원조하는 일을 돕는 것에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공산당의 밀고자였던 것은 총독부의 신뢰를 얻기 위함이라고 쳐도 지나친 감이 있었다. 아무리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지만 조직 전체가 와해되어 버릴 정도의 엄청난 일이었던 것이다. 중만이 그것을 모르고 그런 일을 저질렀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까 양호가 말했던 밀항자 체포 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하필이면 인천항만주식회사의 화물선을 택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해경은 손끝을 떨며 주먹을 움켜쥐는 환을 보고는 우선 환을 달래듯 입을 열었다.
“일단 진정하시고 차분하게 생각을 해 보지요. 누군가가 거짓으로 발송한 전보일 수도 있는 것이고, 아직 아무 것도 확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용정으로 갈 거요. 사실이든 아니든 내 눈으로 확인을 하고, 사실이라면 장순현이 어떻게 죽었는지 반드시 알아야겠소.”
“혼자 움직이시는 건 위험합니다.”
“경호를 붙일 수는 없어요.”
환이 단호하게 내뱉었다. 확실히 간도에 간다는 것은 사대문 밖 나들이를 떠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간도에 가야겠으니 경호원을 붙여 달라고 이야기한다면 본가에서 분명 무슨 일인지를 꼬치꼬치 캐물을 터였다. 환이 자세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으나, 해경은 본가에서 환의 태도를 썩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주변 사람 중 연락이 되는 이는 없습니까?”
해경의 물음에 환이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본래 용정이 연고인 것도 아니고, 상해에 있던 사촌 형의 부름으로 급히 간 것이니 아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해경은 탁자 위에 놓인 전보용지를 다시 한 번 뚫어지게 보며 물었다.
“평소에 지병이 있었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없었소.”
“그렇다면 사고사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언제 사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보가 오늘 오후 도착했다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닐 테고, 사고였다면 분명 병원으로 실려 왔을 겁니다. 거기에는 연고가 없으니 바로 장례 처리를 할 리 없을 테고요. 다른 가족은 어디에 있습니까?”
해경의 말을 듣고 있던 환이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경성고보에 제대 출신이니 아마 가족들도 경성에 있을 거요.”
“단순한 사고로 사망한 것이 확실하다면 곧 이쪽으로 시신을 보내오겠군요. 혹은 가족들이 직접 가지러 가든지요. 우선 용정 인근의 병원을 수배해 보아야 할 겁니다. 지인 중 연이 닿는 사람은 없습니까?”
“용정까지는 모르겠지만 선배들 중 인근에 올라가 개업한 이들이 좀 있으니 알아보지요.”
환이 아까보다는 차분해진 태도로 대답했다. 해경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환이 정말 앞뒤 가리지 않고 당장 용정으로 가겠다고 한다면 일이 더 커질 가능성이 있는 탓이었다. 환에게는 그저 사고일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나 해경은 자신의 마음에서 고개를 치켜드는 의심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권중만의 일을 조사하던 중 갑작스럽게 아무런 연고도 없는 용정으로 호출을 받은 것부터가 마음에 걸렸다. 사촌 형이라는 장순명은 왜 상해에서 용정으로 간 것이며, 사지 멀쩡한 젊은 남자가 비명횡사한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우선 지금은 황망하시겠지만 침착하게 행동하도록 하십시오.”
해경의 말을 들은 환이 얼굴을 두어 번 문지르고는 한숨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침착하게라, 좋지요. 그러나 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날이 밝을 때까지는 결국 이대로 있을 수밖에 없는 거군요.”
“어떤 심정이실지 알고 있습니다.”
한동안 침묵하던 환이 무언가 생각난 듯 해경을 보았다.
“순현이가 내게 찾아왔을 때, 상해 쪽에서 내가 변심할까 두려워하고 있다고 했소.”
“무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그런 일은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소. 보는 눈이 많기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어 그런 거라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순명이 용정에서 순현이를 부른 거요. 별 일이 아니었다면 신문사 일도 제치고 당장 거기까지 갔을 리 없습니다.”
“상해 쪽에서 그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닌지 의심하시는 겁니까?”
해경이 선수를 쳐서 묻자 환은 눈썹을 좁혔다.
“그런 건 아니오. 아니, 그럴 수도 있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확신할 수가 없다고 해야겠군요. 그러나 지금 나는 그것 외의 다른 생각은 하기 어렵습니다. 혹시 나 때문에 순현이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이환 씨.”
해경은 바로 환의 말을 끊었다. 환이 자책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설령 환의 태도가 돌변한 것 때문에 순현이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라 해도 환이 그 일로 자신의 탓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아직 우리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내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소.”
“이환 씨가 친구분을 용정에 보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너무 많은 생각은 독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하지요.”
해경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경은 그가 속으로 어떤 고뇌를 하고 있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 역시 얼마나 긴 시간을 후회 속에서 살아 왔던가. 그 날 자신을 먼저 도망치게 한 것은 누나의 선택이었지만, 해경은 그 모든 일이 결국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처럼 그 자책감은 언제나 자신의 발치에 달라붙어 있었다. 해경은 먼저 짧은 침묵을 깨고 환에게 말했다.
“무슨 생각 하시는지 알고 있지만, 오늘은 일단 주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저도 날이 밝는 대로 이 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무엇이든 알아내는 즉시 연락을 드릴 테니 쉬고 계십시오.”
“……경황이 없어 한밤중에 연락을 했소. 미안합니다.”
환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느 정도 이성이 돌아오기는 한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이렇게 허둥거리는 꼴을 보인 것이 좀 창피하기도 한 듯했다. 해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경황이 없으실 수밖에 없지요. 이런 때 찾아 주셔서 오히려 감사합니다.”
“차를 대기시키라 하지요. 늦은 시간인데 모셔다 드리겠소.”
“괜찮습니다.”
환의 말을 얼른 거절한 해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이 무어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선수를 친 쪽은 해경이었다.
“잠시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그렇습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소.”
“나오지 마십시오.”
해경은 따라 일어나려는 환을 만류하고는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대문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자 거실 창가에 선 채 무슨 생각인가에 잠겨 있는 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해경은 환의 사가를 나서 어두운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이미 상점가의 불은 모두 꺼진 지 오래였고, 간간이 지나가는 취객의 고성이 잘못 틀어 놓은 레코드처럼 지나쳤으나 해경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늘 오후에 전보가 왔다면 적어도 순현이 죽은 것이 어제오늘 사이임은 분명했다. 환에게도 부고를 보낼 정도라면 가족은 물론이고 다른 신문사 동료들에게도 부고가 갔을 터였다. 단순 사고사가 확실하다는 전제 하에 가족이 부검을 원할 확률은 거의 없었으나, 만약 의심 가는 정황이 발견됐다 해도 그때 부검을 허락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해경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물론 환의 말처럼 상해 쪽에서 환의 태도가 급변한 것을 이유로 순현의 책임을 묻다 일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순현이 마지막에 조사하던 일이 권중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역시 마음에 걸렸다. 순현이 알아낸 내용 중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것이 있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순현이 그 먼 곳에서 죽은 이상, 가지고 있었을 증거들이 온전히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기 어려웠다.
근처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온 해경은 자리에 누웠으나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아마도 환 역시 지금의 자신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결국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샌 해경은 날이 밝기를 기다려 집을 나섰다. 해경이 향한 곳은 명치정 사무실이 아니라 조선일보 건물이었다. 이제 막 직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한 사무실로 들어선 해경은 가장 가까이에 앉은 청년에게 물었다.
“혹시 장순현 기자님 어디에 계십니까?”
“네?”
청년이 멈칫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해경의 입에서 장순현이라는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분주했던 사무실 안이 일순간 강제로 시간을 멈춘 듯 잠깐 고요해졌다. 청년이 주저하다 해경을 쳐다보았다.
“죄송하지만 누구신지요?”
“지인입니다. 일 때문에 오늘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했는데요.”
해경이 둘러대자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던 청년이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소식을 아직 못 들으셨군요. 장 기자가 취재 나갔다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라고요?”
“저희도 어제 이야기를 들어서 자세한 것은 잘 모릅니다만…….”
순현이 죽었다는 말을 꺼내기가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해경은 부러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손목에 찬 시계를 보고는 곤란하다는 얼굴을 했다.
“오늘 제게 건네주기로 한 중요한 서류가 있었는데 어쩌지요? 사무실에 두었다고 이리 오라고 했는데요.”
“저기 창가에 제일 왼쪽 자리가 장 기자 자리니 가서 한 번 찾아보십시오.”
청년이 손가락으로 창가의 책상을 가리켰다. 해경은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고는 그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흘끔거리는 시선을 던지다 곧 자신에게서 관심을 거두는 것을 눈치 챈 해경은 조심스럽게 순현의 책상을 살폈다. 깔끔하게 잘 정리된 책상에서 그의 성격이 드러나는 듯했다. 제목을 가나다순으로 맞추어 책을 꽂아 둔 것이며, 서랍 안도 칸을 나누어 종류대로 펜이며 연필, 수첩 따위를 놓아 둔 것 역시 보통 수준의 꼼꼼함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해경은 주위를 슬쩍 살피며 책꽂이에 꽂혀 있는 서류며 종이 뭉치 따위를 꺼내 살펴보았다. 대부분 신문이나 잡지 기사를 오려 붙여 둔 서류철과 취재 내용을 정리한 종이로, 주의 깊게 읽어 보았으나 중만과 관련된 내용은 없었다. 책상 안의 수첩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경은 가장 아래쪽의 서랍을 열어 보았다. 우편물을 모아 두는 서랍인 듯 안은 편지와 전보용지 뭉치로 가득했다. 그 뭉치 중 하나를 꺼내 넘겨보니 발신인별로 묶어 둔 것이라, 해경은 내심 순현의 정리벽에 감탄하며 우편물을 살폈다. 딱히 눈에 들어오는 이름은 없었고, 가장 최근의 소인도 거의 한 달 전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 취재를 하며 알아낸 내용은 모두 본인이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서랍을 닫으려던 해경의 눈에 구석에 끼어 있던 봉투 하나가 들어왔다. 해경은 그 봉투를 빼어 발신인을 확인했다. 중국 우표가 붙은 것으로, 발신인의 주소 없이 順明(순명)이라고만 쓰여 있었다. 순명. 독립신문 간사로 있었다는 순현의 사촌 형이 장순명이라는 이름이었던 것을 떠올린 해경은 봉투를 열었다가 멈칫했다. 안은 비어 있었다.
해경은 빈 봉투의 겉면을 다시 자세히 살폈다. 소인은 용정우체국으로 되어 있었으며, 찍힌 날짜는 대략 이십 일쯤 전이었다. 그때라면 환에게 순현이 찾아오기 전이 확실했다. 그러면 이미 이때부터 장순명은 용정에 있었다는 뜻인가.
“그것은 개인 물품이 있는 서랍인데 무얼 찾는 겁니까?”
아까 순현의 자리를 가르쳐 준 청년이 가까이 다가왔다. 순현의 자리를 한참 뒤지고 있으니 의심이 든 모양이었다. 해경은 얼른 봉투를 서랍에 다시 넣고 닫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는 없는 듯한데, 아마 집으로 서류를 가져간 것 같군요. 혹시 연락처나 주소를 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집이 이사를 했다는데 이사한 주소는 미처 묻지 못해서요.”
해경의 자연스러운 거짓말에 청년은 별 의심 없이 자기를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해경이 그를 따라가자 청년은 자기 책상 서랍에서 무슨 명부 같은 것을 꺼내 해경에게 내밀었다.
“주소는 여기 있습니다.”
연락망인 모양이었다. 해경은 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서둘러 순현의 주소를 적었다. 주소는 팔판동 육십팔번지로 되어 있었다. 해경이 수첩을 다시 집어넣는 것을 본 청년이 문득 생각난 듯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런데 장 기자가 이사를 했었습니까? 팔판동 토박이로 들은 것 같은데요.”
“팔판동 앞 번지에 살다가 이사를 했다는 모양입니다.”
적당히 둘러댄 해경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시간을 끌면 더 의심받기 쉬운 탓이었다. 일단 청년을 비롯한 사무실 사람들의 반응을 미루어 본다면 모두가 부고를 받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해경은 근처에서 택시를 타고 팔판동으로 움직였다. 순현의 집에 무언가 남아 있는 증거가 있다면 사라지기 전 찾아야 했다. 그러나 팔판동 육십팔번지에는 사람이 없었다. 해경이 대문을 두드리며 누구 안 계십니까, 하고 서너 번쯤 묻자 대신 옆집의 대문이 열리며 누군가 고개를 내밀고 짜증스럽게 뱉었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뭐요?”
허리가 구부정한 백발의 노파였다. 해경은 얼른 노파에게 물었다.
“육십팔번지를 찾아왔는데 사람이 아니 계시는군요.”
“그 집 식구들은 왜? 어제 다 같이 나섰소.”
노파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딜 말입니까?”
“아들이 멀리 갔다가 죽었다더구만. 시체 가지러 갔겠지.”
노파의 말투는 대수롭지 않다는 식이었으나 해경은 그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만에 하나, 죽음을 위장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가족들이 다 함께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면 순현이 죽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가족들이라면 누군가 시체를 바꿔치기한다 해도 알아볼 것이 틀림없었다. 노파가 다시 대문을 닫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해경은 굳게 닫힌 육십팔번지의 문을 보고 있다가 명치정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새 출근해 있던 소화가 시계를 보더니 놀란 얼굴을 했다.
“어쩐 일로 이리 늦으셨어요?”
이미 열 시 가까이 된 시각이었다. 해경은 재킷을 벗지도 않은 채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아침에 잠시 들를 데가 있었습니다. 별 일은 없었지요?”
“네.”
소화는 무슨 일일까 궁금해 하는 표정이었으나 더 묻지는 않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해경은 흠, 하고 짧은 숨을 뱉고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에게 우선 연락을 해 줄 심산이었다. 해경이 막 수화기로 손을 뻗은 순간 마치 누가 보고 있었던 양 전화벨이 울렸다. 멈칫한 해경은 수화기를 들었다.
“명치정 정해경입니다.”
― 우편이 왔소.
환이었다. 목소리가 잠긴 것으로 보아 자신처럼 잠을 설친 것이 분명했다. 잠시 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해경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우편이라고 하셨습니까?”
― 장순현이 보낸 거요. 이따 잠시 들르지요. 지금은 길게 통화하기 어렵습니다.
전화가 급히 끊어졌다. 해경은 수화기를 내려다보고 선 채 환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우편이 왔소. 장순현이 보낸 거요…… 죽은 자에게서 온 우편은 무슨 내용이란 말인가. 소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수화기를 들고 선 해경의 눈치를 살폈으나 해경은 한동안 수화기를 내려놓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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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덫
소화는 해경이 전화를 받은 이후 내내 답지 않게 무척 초조한 듯 책상 앞에 앉아 연신 시계를 확인하는 것을 보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평소였다면 시간이 될 때까지 다른 서류나 기사 따위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거나 했을 해경이 오늘만은 그렇지 않았다.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점심때가 다 지나도록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해경을 본 소화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점심시간인데 식사하고 오셔요.”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해경이 퍼뜩 놀라 소화를 보더니 시계로 흘끔 눈길을 주고는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소화 양 먼저 드십시오.”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요?”
소화는 주저하다 물었다. 해경이 잠시 놀란 듯 눈을 약간 크게 떴다가 곧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침 식사를 늦게 했더니 별 생각이 없군요. 소화 양은 어서 가서 식사하고 오도록 해요. 나 때문에 늦어져서 미안하군요.”
소화는 그 미소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임을 금방 눈치 챘다. 그러나 더 캐물어도 해경이 대답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소화는 이럴 때는 빨리 포기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이 필요한 일이라면 해경이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해 줄 터였다.
“네. 그러면 저 먼저 먹고 올게요, 선생님.”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사무실을 나온 소화는 생각에 잠겼다. 최근 해경이 신경 쓰는 일은 무엇일까. 해경은 요즘 사건 때문에 찾아오는 의뢰인들을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때로 사정이 정 안된 사람이라면 도움이 될 만한 이들을 소개시켜 주는 정도까지는 하는 것 같았으나, 그것을 제외하면 아예 모든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특히 일전에 환이 방문한 이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소화는 길 맞은편 떡집에 가 가래떡을 한 줄 사서 우물거리며 건너편의 사무실을 빤히 보았다. 닫힌 문 안에서 해경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작은 한숨을 내쉰 소화는 반쯤 먹은 떡을 다시 종이에 싸서 들고는 길을 건넜다. 그때 사무실 앞에 검은 차가 한 대 서며 문이 열렸다. 무심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소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환이었다.
“어쩐 일이셔요?”
소화가 먼저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건네자 차에서 정신없이 내리던 환이 놀란 표정을 했다. 그리고는 가볍게 목례를 건네며 턱 끝으로 사무실을 가리켰다.
“정 선생 있습니까?”
“네, 계세요.”
“식사는 했습니까?”
시계를 본 환이 묻는 말에 소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환이 소화의 손에 들린 종이뭉치를 가리켰다.
“이건 무어지요?”
소화는 그제야 자신이 손에 종이로 싼 떡을 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손을 뒤로 감추며 대답했다.
“점심으로 먹은 떡이에요. 조금 남아서요.”
“왜 밥을 먹지 않구요.”
“선생님이 아니 드셔서 혼자 거창히 먹기가 영…….”
대답하던 소화는 환의 손에도 무언가가 들린 것을 알아차렸다. 큰 봉투였다. 소화가 말끝을 흐리자 환이 한쪽 눈썹을 약간 치켜 올렸다. 무언가 더 말하려는 얼굴을 하던 환이 곧 사무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군요. 일단 들어가지요.”
환이 먼저 앞장서 사무실로 향했다. 소화는 그 뒤를 따르며 오전의 전화는 역시 환에게서 왔던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그러자 혹시 지난번 왔을 때 이야기했던 그 친구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일까 하는 생각이 퍼뜩 지나쳤다. 환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가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해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곧 소화가 함께 온 것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했다.
“어떻게 함께 오셨습니까?”
“사무실 앞에서 만났소. 일단 앉지요.”
해경이 자리를 권하기도 전 환이 먼저 소파에 앉았다. 소화가 차를 드릴까요, 하고 막 물으려던 참에 환이 소화를 돌아보았다.
“차는 되었습니다.”
마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한 환의 말에 놀라 소화가 멈춰 선 채 고개를 끄덕이자 해경이 서둘러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우편이 온 겁니까?”
환이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풀로 단단히 봉해진 봉투의 가장 위쪽은 깨끗하게 잘려 있었다. 아마 환이 종이칼 같은 것으로 봉투를 먼저 뜯어 내용물을 본 모양이었다. 해경은 열린 봉투 안을 확인하고는 내용물을 끄집어냈다. 수십 장은 될 듯한 종이였다. 환은 해경이 그 내용을 읽어 보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내용이 궁금해진 소화는 조심조심 해경의 등 뒤로 가 어깨너머로 해경이 보고 있는 것을 훔쳐보았다. 공문서의 사본처럼 보였는데 급하게 베껴 쓴 뒤 접어 넣은 것인지 펼친 면의 군데군데 덜 마른 잉크가 묻어난 자국이 눈에 띄었다. 조금 더 몸을 내민 소화는 그것이 권경천이 사망한 사고에 대한 보고서임을 곧 알아차렸다.
“차가 비탈 아래로 굴러 낙상(落傷)과 혼도한 상태가 심하였고 응급실로 옮겼지만 사망했다는 것이 사고의 전말이라는 거지요.”
한참 침묵하며 종이를 여러 장 넘겨 읽은 해경이 입을 열었다. 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해경이 미간을 좁히며 그 다음 장을 넘겼다. 괘지(罫紙)에 수기(手記)로 빠르게 쓴 듯 날아가는 글씨였으나 읽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소화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飮酒(음주)’라는 단어였다. 해경이 그 종이에 눈을 둔 채 말을 이었다.
“신문기사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기사에는 없었지만 경찰에서는 심히 취한 것으로 본 모양입니다. 처음 발견한 목격자도 그렇고, 경찰도 차와 권경천의 몸에서 술 냄새가 몹시 진동했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친구분의 생각은 달랐던 거군요.”
“그랬던 것 같소. 부검을 했다면 정확히 알 수 있었겠지만…….”
“권중만 사장이 부검을 원하지 않았겠지요.”
해경이 환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는 탁자 위에 종이를 쭉 늘어놓았다. 문서의 사본들과 휘갈겨 쓴 글씨가 가득한 괘지 여러 장이 탁자 위에 펼쳐졌다. 해경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소화를 돌아보고는 곁으로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소화가 얼른 해경의 옆에 앉자 해경은 괘지 한 장을 가리켰다.
“장 기자님께서는 거기에 의문을 가졌던 거고요. 기사에는 권경천이 그날 새벽 변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동차를 몰고 그 새벽에 사정리를 지나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회사와도, 본가와도 반대 방향인데요. 게다가 당시 취해 있었다면 간밤에 술을 많이 먹었다는 이야기인데, 권중만 사장은 아버지가 전날 사업 동료였던 백명상회의 윤후택이라는 자와 늦게까지 술을 먹고 돌아오다 변을 당한 것 같다고 진술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경찰은 윤후택을 부른 적도 없었군요. 그래서 직접 윤후택을 만나러 가셨던 거고요.”
소화는 해경이 가리킨 종이를 보았다. 상단에는 ‘윤후택 취재’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고, 그 아래부터 이야기한 내용을 받아 적은 내용인 듯했다.
― 권경천을 전날 만났던 것은 사실
대전역 인근, 헤어진 것은 오후 아홉 시 반 경으로 술은 아니 마심
권경천은 평소 기사가 딸린 자동차를 탔으나 그 날은 택시를 이용
만날 사람이 있다며 타고 온 택시를 대기시켰다 다시 타고 갔음
내장이 차고 속이 허해 술을 줄이겠다고 했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지 못함
소화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 여섯 줄이었다. 소화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술을 아니 마셨다 하는데 왜 목격자와 경찰은 취했다 했을까요? 게다가 택시를 타고 오고 갔다면 그 자동차는 또 무엇이고요? 대전역에서 사정리까지는 많이 먼가요?”
소화가 묻는 말에 대답한 것은 해경이었다.
“장 기자님도 그 점을 의아하게 여긴 겁니다. 대전역에서 사정리까지의 거리는 대략 이십오 리(里)가 넘습니다. 그 밤에 걸어가기는 어려웠을 텐데 차로 이동했다 한들 왜 그리로 갔는지는 설명되지 않지요. 몸이 좋지 않아 술을 줄이겠다 하고 마시지 않았다면 가족들도 이미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었을 텐데, 권중만 사장은 마치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단순한 사고로 생각했기에 부검 따위는 하지 않았던 거고요.”
“부검을 했다면 정말 술에 취했었는지 아니었는지 정도는 쉽게 가려냈을 거요.”
“그랬기에 부검을 더더욱 막고 싶었을 수도 있지요.”
“누가?”
환의 물음에 해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화는 해경이 누구의 이름을 말하려 하는지를 쉽게 알아차렸다. 권중만. 아버지가 전날 밤 누군가를 만나 술이 많이 취했기에 이런 사고가 벌어졌을 거라고 진술했다면 경찰이 더 이상의 조사를 하지 않은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소화는 자신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중만의 눈을 떠올리고는 문득 어깨를 움츠렸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해경이 입매를 약간 비틀었다.
“쉬운 답일 겁니다. 그러나 모든 가능성은 열어 두어야지요. 장 기자님 역시 그렇게 했던 모양입니다. 권경천에게 그 정도의 복수심을 품을 만한 어떤 인물이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리고 그럴 만한 사람들의 명단을…….”
마지막에 놓인 종이로 손을 뻗었던 해경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마치 순간 얼어붙은 듯 굳어지는 해경의 얼굴에 곁에 앉아 있던 소화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해경의 팔을 잡았다. 소화의 손길에 놀란 듯 움찔한 해경이 곧 소화를 돌아보더니 괜찮다는 듯 소화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나 소화는 방금 잡은 해경의 팔이 떨리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해경이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그 종이를 들었다.
“……명단을, 만든 거군요.”
소화는 해경이 그 말의 첫 마디를 발음하기 전 약간 주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해경은 겉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으나, 종이를 쥔 손을 떨지 않기 위해 손끝에 몹시 힘을 주고 있었다. 소화는 하얗게 질린 해경의 손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해경이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말단직으로 있던 시절 권경천과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이름인 모양입니다.”
“지난번에 이야기한 밀고 건이었을 가능성이 커요.”
환이 종이를 뒤집어 보라는 손짓을 했다. 해경은 들고 있던 종이를 뒤집었다. 그러자 그 종이의 뒷면에 몹시 급히 쓴 듯 펜촉이 걸려 번지고 잉크가 여기저기 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짧은 문장이었다.
― 덫에 걸렸네
까닭을 알 수 없이 그 한 줄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소화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무슨 뜻일까. 해경 역시 같은 생각을 한 듯 미간을 좁히고 한참이나 그 문장을 들여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고라고는 생각할 수 없소. 함흥 제혜병원(濟惠病院)에서 일하는 선배가 있어 이 편지를 받고 즉시 연락을 했어요. 그곳에 서양인 여의사가 있는데 용정 제창병원 원장인 마틴 씨에게 연락을 넣어 주겠다고 했답니다. 용정에서 사고가 나서 사망했다면 제창병원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더군요.”
소화는 환의 입에서 나온 병원의 이름에 순간 움찔했으나 다행히 해경과 환 둘 중 누구도 그것을 알아채지는 못한 듯했다. 제창병원이라면 침대 밑에서 발견한 공책에 적혀 있던 병원의 이름이었다. 물론 조선 팔도에 이름이 같은 병원이 있을 수도 있었으나 가슴이 철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소화는 그보다도 용정에서 사고가 나서 사망했다면, 하는 환의 말을 곱씹다 그것이 환의 친구가 죽었다는 뜻임을 곧 깨닫고 더욱 놀랐다. 환이 찾아온 것은 그 때문이었던가. 소화는 해경의 손에 아직도 들려 있는 종이로 다시 한 번 시선을 주었다. 덫에 걸렸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던 해경이 흠, 하고 짧은 숨을 뱉었다.
“사고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장 기자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군요.”
“자기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소. 그래서 죽기 전에 나한테 이걸 보낸 겁니다. 누군가 이것 때문에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던 거요.”
소화는 탁자 위에 펼쳐진 종이들을 보았다. 이 종이 몇 장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해경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을 하며 환에게 물었다.
“가실 겁니까?”
“내 눈으로 봐야겠소.”
“가족들이 어제 시신을 수습하러 출발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늦어도 오늘내일 사이면 용정에 도착할 텐데 가족들이 부검을 원하지 않는다면 어찌 하시려고요. 또 연구실 일은…….”
해경이 황급히 환을 말리려 했으나 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영택 참교와 동행할 것이고, 이미 구니히사 교수님께 이야기를 했소. 오후 기차로 제혜병원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선배와 함께 용정으로 갈 겁니다.”
해경이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은 얼굴로 환을 마주보다 마른세수를 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의 침묵 후 해경이 환을 마주보았다.
“……그럼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좋겠습니까?”
해경은 환이 한 번 마음을 먹은 이상 이제 와서 환을 말려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 듯했다. 환이 탁자 위의 종이들을 가리켰다.
“여기에 사람을 죽일 만한 비밀이 정말 있는 건지, 대체 누가 이런 일을 사주했을지 알아봐 주시오. 의뢰비는 원하는 대로 드릴 테니 아무런 걱정 말고, 모든 경비는 내 앞으로 청구하도록 해요. 얼마가 들든 나는 이 사건의 진실을 알아낼 거요.”
“알겠습니다.”
“밖에서 차가 기다리고 있으니 오래 지체할 수는 없습니다. 부디 몸조심하도록 해요. 소화 양도요.”
신신당부를 한 환이 서둘러 일어났다. 소화가 따라 일어나려 하자 손짓으로 얼른 소화를 막은 환이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사무실 문이 채 닫히기도 전 열린 틈으로 자동차가 거리를 떠나는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해경이 다시 한 번 한숨을 쉬고는 책상 위에 흩어진 종이를 한데 모아 다시 봉투 안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화 양은 오늘은 이만 퇴근하도록 하십시오.”
“네?”
“좀 알아보아야 할 것이 있어서요.”
소화는 해경의 눈치를 잠깐 살피다 네, 하고 대답했다. 아까 마지막 장의 내용을 본 해경이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구는 것을 보았기에, 해경이 알아본다는 것이 그 장에 쓰인 내용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그 장에 쓰인 것은 몇 개의 이름이었다. 소화는 자신의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 그 이름들을 복기해 보았다. 曺出英(조출영), 李度宣(이도선), 車景殖(차경식), 朴在文(박재문), 金哲滿(김철만), 鄭漢周(정한주). 그 이름 중 무엇이 해경을 그렇게 놀라게 했던 것일까.
소화는 봉투를 든 채 자리에 서서 생각에 골몰해 있는 해경의 등을 보았다. 그러자 병실에서 자신에게 괴로움을 토로하던 목소리며, 곁에 있어주어 고맙다고 말하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소화는 마른침을 삼키며 해경의 등에 대고 조금 큰 목소리를 내었다.
“저, 선생님. 혹시 제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시켜 주세요. 이번에는 위험한 일은 하지 않을게요. 절대로 폐가 되지 않게 할게요.”
멈칫한 해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저도 여기서 일하는 것이 참 좋아요. 선생님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차마 해경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바닥에 눈을 둔 채 말한 소화는 얼른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안녕히 계세요, 하고 중얼거리듯 말하며 후다닥 돌아섰다. 공연히 귀가 화끈거렸다. 해경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기에 더 민망해져 얼른 문을 열었던 소화는 다음 순간 팔을 잡혀 돌려세워졌다. 해경이 몸을 숙여 눈을 맞춰 오는 통에 놀란 소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해경이 새빨개진 소화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나는 소화 양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소화의 머릿속에 퍼뜩 예전 언젠가의 일이 생각났다. 이주의 누나 김명희가 죽은 일을 조사하다 돌아오던 택시 안에서 해경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제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요? 실은 아주 끔찍한 악당일지 모르지 않습니까. ……저보다 소화 양이 저를 더 잘 안단 말입니까? 농담처럼 뱉었던 말 속에 실은 날카로운 진심이 있었다는 것을 소화는 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은 사람을 죽이려 했다며 괴로워하던 해경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스치고 사라졌다. 소화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생님이 어떤 분이라도 제게는 상관없어요.”
이번에 놀란 쪽은 해경이었다. 누군가 가슴 위로 불을 지른 듯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웠다. 소화는 마른 입술을 한 번 물었다가 놓고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다른 데로 가라 하지 마셔요. 저는 여기에 꼭꼭 붙어 있을 테니까요.”
팔을 쥐고 있던 해경의 손이 떨어졌다. 소화는 조금 망설이다 해경의 손을 양손으로 가만히 감싸 쥐었다. 서늘한 손이 조금 떨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착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소화는 곧 잡고 있던 해경의 손을 놓고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내일 뵈어요, 선생님.”
소화는 해경의 대답을 듣기 전 사무실을 나와 문을 닫고는 거기 기대섰다. 문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화는 숨을 들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먼지 냄새와 달콤한 과자 냄새, 음식 냄새와 자동차의 연기 냄새가 한데 뒤섞인 경성 거리의 공기가 밀려들었다. 이 문 너머에서 해경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소화는 해경의 손을 잡았던 두 손을 펼쳐 내려다보았다. 내 곁에 있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해경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소화는 저도요, 하고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말을 입술만으로 달싹이며 오랫동안 문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