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48
00045 나의 신부 =========================================================================
해경은 종로서로 걸어가는 내내 전날 오후 영등포의 조선맥주 공장 근처에 가 보았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통행량이 많은 곳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외진 곳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수연의 시체가 발견됐다는 도랑은 인도(人道)와 매우 가까웠다. 배수로도 없어 시체를 숨길만한 공간도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수연의 시체는 얼굴 외의 다른 곳에 거의 부패가 진행되지도 않은 터였다. 어떤 살인범이라도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 이런 곳을 굳이 사체 유기 장소로 택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장소를 고른 까닭은 무엇일까. 해경이 종로서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기다리고 있던 성국이 후다닥 달려 나왔다. 수연의 시체와 함께 발견된 증거들을 보여 주기로 선약이 된 뒤였다. 성국은 남들의 눈을 피해 해경을 증거 보관실로 데려갔다.
“수사는 좀 진행된 게 있습니까?”
해경이 목소리를 낮추어 묻자 성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 뭐……살인이라기에도 부검 결과를 보면 그게 아니다 보니 수사를 진행하기가 어려운 모양입니다.”
“그렇겠지요. 혹시 서수연 양의 가족들이 와서 직접 확인했습니까?”
성국이 그 물음에 아이고, 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가족들이 와서 대성통곡을 하고, 송 사장까지 어디서 들었는지 득달같이 달려와서는 이게 무슨 일이냐고 난리를 치는데 오구라가 아주 혼을 쏙 뺐습니다.”
광만까지 알게 되었다면 일이 조금 복잡해질 터였다. 해경은 미간을 몇 번 문지르다 물었다.
“신원은 맞답니까?”
“이모라는 여자가 확인했는데 그 날 아침에 입었던 옷이 맞고, 가방의 물건도 전부 평소 쓰던 것이라 합니다.”
“비슷한 것은 아니고요?”
“절대 아니라더군요.”
성국이 강하게 부정했다. 해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국이 더 안쪽으로 해경을 데려갔다. 상자를 하나 내려 뚜껑을 연 성국이 상자 안을 가리켰다. 해경은 그 앞에 무릎을 접어 앉으며 상자 안의 내용물을 살폈다. 젖었다 마른 탓인지 얼룩이 남은 옷가지와 갈색의 가방이 안에 들어 있었다. 해경은 가방을 꺼내 열어 보았다. 수를 놓다 만 자수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를 수놓던 모양이었다. 알록달록한 깃털이 절반쯤 완성되어 있었다. 해경은 자수들을 앞뒤로 돌려 살펴보았다. 매우 능숙한 솜씨였다. 성격이 꼼꼼하고 차분한 사람일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한참 그 수틀을 보고 있던 해경은 그것을 내려놓고 가방 안을 뒤졌다. 가방 안에 있는 것은 표지가 몹시 낡은 문고본 소설책 한 권과 천으로 만든 지갑이 전부였다. 해경은 지갑을 열어 보았으나 지전 서너 장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돈은 이게 전부였답니까?”
해경이 성국을 올려다보자 성국이 대답했다.
“집 밖으로 나가지를 않다 보니 돈을 쓸 일이 없었고, 이건 그 이모가 아침에 길 떠나기 전에 준 것이라 합니다. 그때 쌈지에 사십 원이 있기에 그걸 주었다고 하더군요.”
“돈을 노린 강도는 아니겠군요.”
해경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소설책을 집어 들었다. 최독견의 이었다. 두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통속소설로, 어린 여학생이 읽기에는 다소 선정적인 내용이었으나 한동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지 않는 바도 아니었다. 책을 펼쳐 넘겨보던 해경은 잠시 손을 멈췄다. 책 사이에 책갈피처럼 꽂혀 있는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물에 젖어 글씨가 군데군데 날아가기는 했으나 아주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종이를 가만히 보고 있던 해경은 다음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해경이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서 있던 성국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 책 제가 잠시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증거물을 서 밖으로 반출하는 것은 좀…….”
성국이 난처한 표정을 했다. 해경은 성국을 붙들며 전에 없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 하루면 됩니다. 내일은 반드시 제자리에 돌려놓지요.”
해경의 기세에 눌린 성국이 어깨를 움츠리더니 어물거렸다.
“그렇다면야……그런데 그 책이 무어 중요한 것입니까? 우리도 살펴보았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는데요.”
“혹시나 해서 그런 것입니다.”
해경은 대답하며 문고본 책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것은 생각지도 못한 증거물이었다. 상자의 뚜껑을 닫아 본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은 해경은 성국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바로 증거 보관실을 나와 종로서 건물을 나섰다. 해경은 이주에게 들었던 남학생 실종 사건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곱씹어 보았다. 종로통 가경상회의 차남인 우재영이 어느 날 아침 등굣길에 홀연히 사라졌다. 교제중인 여자도 없었고 집안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남겨진 것은 의문의 전보용지와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들뿐이었다. 해경은 바로 가경상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경상회는 종로서와 그리 멀지 않았다. 가경상회의 사무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수척한 얼굴의 중년 여인이 문을 열었다.
“뉘신지요?”
여인이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해경은 그 여인이 재영의 어머니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가경상회는 우병진과 이숙자 두 부부가 공동 사장으로 운영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여인은 분명 이숙자일 터였다. 해경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재영 군의 일로 왔습니다.”
재영의 이름을 듣자마자 숙자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입을 가린 채 부들부들 떨며 서 있던 숙자가 문을 더 열며 해경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병진은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인지 사무실 안은 비어 있었다. 황급히 사무실의 문을 닫은 숙자가 해경의 팔을 붙들며 물었다.
“우리 재영이, 우리 재영이를 어떻게 아십니까?”
“재영 군이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단 진정하시고 자리에 앉으시지요. 그 일로 몇 가지 여쭤 볼 것이 있습니다.”
“경찰입니까?”
해경은 대답 대신 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해경의 명함을 본 숙자가 잠시 의아한 표정을 하더니 해경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창졸간에 아들을 잃은 여인이라면 탐정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거기 매달리고 싶을 터였다. 해경은 숙자의 맞은편에 앉아 숙자를 마주보았다.
“가경상회를 개업하신 지 십 년이 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숙자는 왜 그런 것을 묻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투였으나 대답은 순순했다. 해경은 몸을 조금 앞으로 숙였다.
“본래 친정이나 시가 쪽에 자본이 있었습니까?”
숙자가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해경은 참을성 있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을 망설이던 숙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남편과 제 집안은 본래 나주에서 소작(小作)을 했습니다. 그러다 시아버지께서 은광 사업에 투자를 하셨는데 그것이 운 좋게 잘 되어 소작을 그만두고 경성으로 올라와 사업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서수연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신 적 있습니까?”
“서수연이요?”
뜻밖의 물음에 해경에게 되물은 숙자가 한참이나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굴리다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들어 본 것 같기도 한데,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서한구 씨는 아십니까?”
해경이 한구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숙자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해경은 의아한 얼굴로 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표정만으로도 숙자가 한구를 알고 있다는 것은 거의 분명해졌으나, 왜 그렇게까지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무릎 위에 놓인 숙자의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해경이 막 까닭을 물으려고 하는 순간 사무실 문이 열리며 한 중년 남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병진이었다. 병진은 낯선 남자와 숙자가 사무실에 마주앉은 것을 보고 놀란 얼굴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해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우병진 사장님 되십니까?”
“그렇소만.”
병진이 경계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때 숙자가 해경을 가리켰다.
“탐, 탐정이라는데 서……서한구를 알고 있느냐고…….”
숙자의 말에 병진의 안색이 대번에 달라졌다. 병진은 해경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쥐었다.
“웬 놈이냐? 누구의 사주를 받았어?”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놀란 해경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최대한 정중하게 병진의 손을 떼어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니 서한구와 이 두 사람이 어떤 일로 얽혀 있으리라는 것은 확실했으나, 그것이 무슨 일인지 순순히 대답할 것 같지는 않았다. 병진은 해경을 잡아끌어 문 밖으로 밀쳐냈다.
“누구의 사주인지 모르겠지만 이 일로 한몫 떼먹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전해!”
버럭 소리를 지른 병진이 사무실 문을 부서져라 닫았다. 안에서 걸쇠가 잠기는 소리가 났다. 해경은 허, 하고 웃는 소리를 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뜻밖의 수확이라면 수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잠시 닫힌 문을 보고 있던 해경은 미련 없이 발을 돌려 전차 정류장으로 향했다. 전차를 타고 명치정의 사무실로 돌아온 해경은 소화가 이제 오셔요, 하고 건네는 말에 고개를 까딱이고는 소파에 앉아 주머니에 넣어 온 문고본 책을 펼쳤다. 책의 내용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끼워져 있던 종이였다. 해경은 그 종이를 손끝으로 집어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전보용지군요.”
소화가 따뜻한 차를 따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고개를 빼어 해경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는 말했다. 해경은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이다 소화의 앞으로 그 전보용지를 밀어 놓았다.
“이것과 아주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지요?”
“네, 연희정의 김이주 군이 가져오신 것과 똑같은데요.”
소화가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해경은 대답 대신 씩 웃었다. 뒤의 숫자 하나가 물에 젖어 흐려지기는 했으나, 이 전보용지에 적힌 것 역시 다섯 자리의 숫자였다. 전보의 수신인은 수연이었으며, 발신인의 이름은 없었다. 이 때문에 가경상회에 들러 일부러 수연과 한구를 아느냐고 물어본 것이었다. 소화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가경상회 아드님 것입니까?”
“아니오, 수연 양의 것입니다.”
“수연 양이라고요?”
소화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누가 보아도 재영의 전보용지와 수연의 전보용지는 같은 것이었다. 아주 일상적인 내용이라면 혹여 우편국의 실수로 수취인이 잘못되었을 수 있었겠지만, 발신인의 이름이 없이 다섯 자리의 숫자만이 있는 전보용지를 두 사람이 우연의 일치로 받게 되었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해경은 수연의 전보용지에 쓰인 숫자를 종이 위에 옮겨 적었다. 0510. 뒤의 한 자리는 번져서 알아볼 수 없었으나 그 자리에 숫자가 있었던 것은 확실했다. 해경은 소화에게 손짓을 했다.
“이주 군이 가져왔던 전보용지를 모두 이리 주시겠습니까?”
“네.”
소화가 얼른 사무실 한쪽의 서랍장 가장 아래 칸을 열어 갈색 봉투를 하나 꺼내 왔다. 해경은 그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탁자 위에 쏟아 놓았다. 수십 장이나 되는 전보용지가 책상 위로 쏟아졌다. 해경은 소화에게 말했다.
“이것을 작은 숫자부터 정리해 주세요.”
소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보용지를 모두 헤쳐 놓고는 가장 작은 숫자부터 순서대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십여 분쯤 지나 탁자 위는 순서대로 정리된 전보용지로 가득해졌다. 해경은 그 전보용지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팔짱을 끼었다.
“이 숫자들에는 규칙성이 없습니다. 이주 군이 가져온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많은 숫자가 영(0)으로 시작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전보는 글자 수대로 돈을 내야 하기에 굳이 없어도 될 숫자는 적을수록 좋을 텐데요.”
탁자 옆에 쭈그려 앉아 전보용지를 뚫어지게 보고 있던 소화가 해경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날짜를 표시할 때 일이나 월 앞에 영 자를 넣기도 하나요?”
“서양에서는 그렇게 표기하기도 합니다.”
해경의 대답에 소화가 전보용지를 가리켰다.
“선생님, 혹시 이건 날짜 같은 것이 아닐까요? 여기 0606이라고 된 것은 발신일이 6월 5일로 되어 있습니다. 서양식으로 표기한다면 0605일 텐데 왠지 비슷해 보여서…….”
해경은 멈칫하며 전보용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대부분의 전보용지에 적힌 숫자 앞의 네 자리는 발신일을 숫자로 환산한 것과 1, 혹은 2 정도의 차이밖에 없었다. 발신일이 모두 한자 도장으로 찍혀 있었기에 바로 연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달력을 좀 보지요.”
해경의 말에 소화가 바로 벽에 걸린 달력을 떼어 가지고 왔다. 해경은 전보에 적힌 날짜를 달력과 모두 대조해 보았다. 이 전보들은 몇 달 동안 거의 매주 발신된 것이었다. 앞의 네 자리가 날짜를 뜻하는 것이라면 그 뒤의 숫자 하나에도 의미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해경은 물끄러미 전보용지를 보고 있다가 수연의 책 사이에서 나온 전보용지를 다시 한 번 보았다. 0510이라면 열흘 정도 전의 것이었다. 매주 이렇게 약속된 방식으로 전보를 주고받았다면 분명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어떤 매체를 이용했음이 틀림없었다. 해경은 바로 신문과 잡지를 모아 두는 책장으로 가서 대략 2주 전 발간된 모든 신문과 잡지를 다 끄집어 내서는 아예 바닥에 그것들을 다 펼쳐 두었다. 해경은 소화에게 손짓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읽어 보고 무언가 이상한 것이 있다면 전부 찾아 주십시오.”
소화가 얼른 뛰어와 해경의 맞은편에 앉았다. 해경은 바닥에 앉은 채 모든 신문과 잡지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 날짜를 제외한 하나의 숫자만으로도 메시지를 전달할 만한 것이 무엇일까. 서양 탐정 소설에서 신문의 줄 수와 글자의 순서를 세어 암호문을 만드는 것을 본 일은 있었으나, 이렇게 단 하나의 숫자로 암호문을 만들려면 그런 방식으로는 불가능했다. 매주 편지처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면 기사를 이용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해경은 신문을 읽다 말고 소화에게 말했다.
“기사 외의 것을 봐 주십시오. 기사는 읽을 필요 없습니다.”
소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간 정도 샅샅이 신문을 살피던 소화가 눈이 침침한지 손등으로 눈가를 두어 번 비비다 해경에게 들고 있던 신문을 내밀었다.
“선생님, 이것 좀 보시겠어요?”
해경은 소화가 내민 신문을 받아들었다. 소화가 손가락으로 짚은 것은 석간신문의 소식란이었다. 한 줄짜리 단신으로 기업이나 중요 기관의 소식 등을 알리는 란이었다. 기자들이 취재를 해서 싣는 경우도 있었으나 해당 기업이나 기관에서 알려 달라고 청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소화가 가장 마지막 줄을 가리켰다.
“다른 단신과는 달리 누가 한다는 것인지 이름도 없고 날짜도 없어요.”
해경은 그 줄을 눈으로 읽었다. ‘加景 禹, 該當日 徐 京城 訪問 要求 驛舍 函(가경 우, 해당일 서 경성 방문 요구 역사 함).’ 해경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그 기사를 메시지로 만들어 보았다. 가경상회의 우재영이 보낸다. 해당일에 서수연은 경성을 방문해 주기 바란다……뒤의 역사 함(驛舍 函)이 무슨 뜻인지 명확하지 않았으나 이 단신이 정말 두 사람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밖에는 읽히지 않았다. 이 단신은 소식란의 네 번째 기사였다. 어쩌면 지워진 마지막 숫자는 4일지도 몰랐다. 마지막 숫자가 소식란의 순서를 뜻하는 것이라면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그런데 이 해당일이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이 전보를 받고 이틀 뒤 수연은 대전을 떠나 경성으로 향했다. 역사, 함. 알 수 없는 마지막 세 글자를 입 안으로 다시 한 번 뇌어 본 해경은 몸을 일으켜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가 두어 번 가자 곧 달칵 하며 전화를 받는 소리가 났다. 해경이 물었다.
“매일신보 편집국입니까?”
― 네, 그렇습니다.
사환인 듯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소식란 담당자를 연결해 주시겠습니까?”
―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년이 수화기를 막은 채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잠시 후 웬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 매일신보 기자 손경훈입니다. 소식란 담당자를 찾으신다고요.
“네. 소식란에 기사를 싣고 싶을 때는 어찌 하면 되는지 문의하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해경의 물음에 경훈이 친절하게 대답했다.
― 보내실 내용이 있다면 편집국 앞으로 전보를 치거나, 날짜에 여유가 있다면 편지로 보내셔도 됩니다. 소식란에 실을 내용까지 방방곡곡 전부 취재를 나가기는 어려워 이런 방식으로 기사를 받고 있습니다.
“혹시 같은 곳에서 여러 차례 소식란에 기사를 실은 일도 있습니까?”
― 같은 곳에서요?
되물은 경훈이 잠시만요, 하고는 한참 말이 없었다. 몇 분 후에 다시 전화를 받은 경훈이 말했다.
― 보낸 곳까지 일일이 확인하지는 않습니다만 꾸준히 오는 곳은 종로우체국과 대전우체국 소인이군요.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해경은 아직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이쪽을 보고 있는 소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화가 머뭇거리다 해경의 손을 잡았다. 해경은 소화를 일으켜 주고는 몸을 숙여 눈을 맞췄다.
“그날 제가 소화 양을 도와준 건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네?”
소화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해경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소화 양이 없었을 때 제가 이 일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소화가 아, 아니어요,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으나 해경은 대답 대신 말했다.
“미안합니다만 사무실 정리를 좀 부탁합니다. 수연 양의 가족들을 만나러 가야겠군요.”
소화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진 신문과 잡지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해경은 소화의 동그란 뒤통수를 내려다보다 씩 웃는 얼굴을 하고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