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89
00081 여학교의 유령 =========================================================================
흰 블라우스는 품이 조금 컸지만 보기 싫은 정도는 아니었다. 급히 준비한 교복인 탓인지 꼭 맞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지만 이만하면 도리어 괜찮게 보일 정도였다. 소화는 차에서 내려 교문 앞에서 심호흡을 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 날을 위해서 일부러 인혜에게 이야기해 기사 딸린 차까지 빌려 둔 뒤였던 것이다. 뒤따라 내린 해경이 소화의 짐 가방을 들고 먼저 학교 안으로 들어가며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소화는 교정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소녀들이 자신과 해경을 흘끔거리는 시선을 느꼈다. 해경은 복도를 지나 교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영순이 교무실 문을 들어서는 해경과 소화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부터 등교하시는 것이지요?”
영순이 매우 정중한 태도로 해경에게 물었다. 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이런 명문 여학교에 동생을 맡기게 되어 무척 안심이 됩니다. 잘 가르쳐 주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소화 양은 지금도 아주 고상한 숙녀인걸요.”
누가 봐도 평범한 보호자와 교장의 대화였다. 소화는 곁에서 바닥에 시선을 둔 채 손끝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박영순 교장과 이정숙, 김세명 선생을 제외하고는 소화가 이 학교의 진짜 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감쪽같이 위장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교사들과 학생들이 있는 자리에서 전입해 온 학생인 것처럼 꾸미기로 말을 맞춘 뒤였다. 해경이 소화의 양 어깨를 잡아 자기를 보게 했다.
“처음 겪는 기숙사 생활이 낯설겠지만 잘 할 수 있을 거야.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동무들과도 잘 지내야 한다. 알겠지?”
서늘한 눈매가 약간 가늘어지며 소화를 응시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해경의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어쩐지 낯설어 공연히 얼굴이 달았다. 소화는 시선을 조금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평소의 입버릇대로 무심코 선생님, 하고 덧붙이려던 소화는 얼른 말을 삼켰다. 영순이 곁에서 소화를 보며 말했다.
“외출은 꼭 상급생과 조를 지어 하도록 해요. 외출하기 전에는 꼭 허락을 받아야 한답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가족들과 만날 수 있으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말도록 해요.”
“네.”
소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영순이 손뼉을 딱딱 쳐 교무실 안의 선생들이 이쪽을 보게 만들었다.
“오늘부터 우리 학교에 다니게 될 박소화 양이에요. 여기 계신 박재한 씨는 중국에 계시다가 얼마 전부터 경성으로 돌아와 방직 사업을 하신다고 합니다. 소화 양이 조선에서 신식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니 혹여 진도를 잘 따르지 못하더라도 모두 차근차근 잘 가르쳐 주도록 하세요.”
미리 입을 맞춰 둔 이야기였다. 소화는 영순이 말하는 동안 선생들의 눈이 하나같이 해경을 흘끔거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해경 본인은 그런 시선이 매우 익숙한 것처럼 보였으나 소화는 그런 상황이 쉽게 적응되지는 않았다. 해경과 함께 다닐 때면 본의 아니게 자신에게 돌아오는 시선이 어쩐지 불편했던 것이다.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화는 슬쩍 문가로 시선을 돌렸다가 열린 문틈 사이로 이쪽을 엿보던 몇 개의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 눈동자들은 소화가 자신들을 알아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곧 사라졌다. 해경이 그때까지 들고 있던 짐 가방을 소화의 손에 건넸다.
“주말에 만나자, 알겠지?”
소화가 가방을 받아들자 다정하게 말한 해경이 소화를 품에 한 번 꼭 안았다가 놓아 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해경의 행동에 소화는 저도 모르게 흐익, 하고 숨을 들이켰다가 제풀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물론 덕분에 누가 보아도 사이좋은 남매로 보일 것은 틀림없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게 무척 소중한 동생이니까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제가 혼자 키워 서툰 점이 많아 걱정됐는데, 훌륭한 선생님들께 맡기게 되어 안심입니다.”
교무실 안의 선생들에게 인사를 건넨 해경은 다시 한 번 소화의 어깨를 잡아 자기를 보게 하고는 한쪽 눈을 살짝 찡긋해 보였다. 소화가 고개만 끄덕이자 해경이 빠른 걸음으로 교무실을 나갔다. 소화는 교무실 앞에서 기웃거리던 몇 명의 여학생들이 후다닥 도망치는 것을 보았다. 영순이 정숙을 불렀다.
“이정숙 선생, 소화 양을 교실로 안내해 주어요.”
정숙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화에게 눈짓을 했다. 소화는 정숙의 뒤를 따라 교실로 향했다. 정숙이 소화를 데려간 교실은 일 층 복도 끝의 교실이었다. 새가 지저귀는 듯 조잘대는 소리가 복도까지 들려 왔다. 정숙이 앞문을 열자 그 소리는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정숙은 교단 앞에 서서 곁에 있는 소화를 소개했다.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공부하게 될 박소화라고 해요. 소화는 신식 학교가 처음이라니 모두 잘 도와주도록 하고요. 어디 보자, 옳지. 소화는 저기 두 번째 줄의 빈 자리에 가서 앉도록 할까? 영신이가 소화의 짝이 되어 당분간 좀 챙겨 주렴.”
영신이라고 불린 소녀가 네, 하고 대답했다. 긴 목덜미가 드러나도록 시원스럽게 친 단발이 인상적인 소녀였다. 소화는 쭈뼛거리다 영신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정숙이 소화 쪽을 한 번 보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뜬 옷본에 맞추어 양재(洋裁)를 할 거예요. 박소화, 바느질은 할 줄 아니?”
정숙의 물음에 소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느질이라면 어릴 때부터 해 온 데다 경성으로 와서 하녀 일을 하면서도 자주 했던 것이라 어렵지 않았다. 정숙이 영신에게 말했다.
“그러면 영신이는 소화와 함께 하도록 해. 잘 모르는 것은 가르쳐 주고. 지난 시간에 뜬 옷본은 모두 가져왔지요? 오현자, 김수희 둘이 교무실에 가서 옷감을 좀 가지고 오렴.”
이름을 불린 두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교실을 나갔다. 두 소녀가 돌아온 것은 오 분쯤 지난 뒤였다. 둘이 적당한 크기로 재단해 놓은 옷감 더미를 가져다 교단 위에 내려놓자 정숙이 그 중 키가 큰 소녀를 보았다.
“수희가 옷감을 나누어 주렴. 마름질이 잘못되어 옷감을 망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해요. 알았지요?”
“네.”
소녀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앞줄부터 차례로 천을 나누어 준 수희가 영신과 소화에게도 천을 주었다. 무늬 없는 푸른색 린넨 천이었다. 소화는 손끝으로 옷감을 살짝 만져 보았다. 매우 고급은 아니었으나 학생들의 실습용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쁘지는 않았다. 옷본을 꺼낸 영신이 천 위에 본을 대어보고는 소화에게 소곤거렸다.
“이애, 너 바느질 잘하니? 나는 바느질은 영 젬병이거든. 지난번에도 마름질을 망쳐 혼이 났지 뭐야.”
소화는 대답 대신 웃고는 영신이 꺼내 놓은 옷본을 살폈다. 기본적인 셔츠 옷본이었다. 직접 양장을 할 일은 없었지만 수선은 자주 했던 터라 익숙했다. 소화는 재봉가위를 들고 옷본에 맞추어 천을 잘라냈다. 그리고는 영신에게 실과 바늘을 받아 시침질을 먼저 해 놓고는 박음질을 할 곳을 가리켰다.
“여기를 따라서 쭉 박으면 돼. 내가 먼저 오른쪽을 해 놓을게.”
재봉틀을 쓰면 순식간에 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굳이 손바느질을 시키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소화는 빠른 손놀림으로 셔츠 옆판 한쪽을 박음질했다. 하녀로 일할 때도 손이 빠르고 꼼꼼하다고 항상 칭찬을 들어 온 터라, 이 정도의 바느질은 쉽게 할 수 있었다. 영신이 잔뜩 부러움이 섞인 눈으로 소화가 바느질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소화는 금세 한쪽을 끝내고 다른 쪽을 영신에게 밀어 주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야.”
박음질을 할 곳을 손으로 짚어 주자 영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느질을 하기 시작했다. 젬병이라는 말은 겸손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한 땀 한 땀 떠가는 품이 저래서야 여름에 만들기 시작한 셔츠를 겨울이 되어서야 입을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땀까지 뻘뻘 흘려 가며 바늘을 움직이던 영신은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고 정숙이 교실을 나가기 무섭게 아이고 모르겠다, 하며 바늘을 집어던졌다.
“나는 바느질은 암만해도 틀렸어.”
투덜거리던 영신이 숫제 의자를 돌려 소화를 향해 앉았다.
“너 아주 소공녀라더니 어찌 그리 바느질을 잘 하니?”
“응?”
소화는 내심 깜짝 놀라 되물었다. 영신이 입가를 가리며 웃고는 교실 뒤편에 삼삼오오 모인 무리들을 가리켰다.
“저 애들이 아주 소식통이거든. 아까 교무실에서 너 오는 걸 보았대. 아주 근사한 미남과 함께 왔다면서?”
“으, 응.”
얼버무린 소화는 교무실 문틈 사이로 안을 엿보던 눈동자들을 떠올렸다. 저 아이들일까. 슬쩍 영신이 가리킨 무리를 보자 이쪽을 흘끔거리며 뭐라고 소곤거리던 소녀들이 소화와 눈을 마주치고는 딴청을 부렸다. 영신이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이애, 눈에 띄면 피곤할 일 많을 거야. 그렇지 않아도 요즘 학교에서…….”
영신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어머, 하고 입을 다물었다. 소화는 영신이 유령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겠거니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있던 학생들도 유령 때문에 나가려고 하는 판국에 전입생이라면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나 해경처럼 눈에 띄는 남자와 함께 왔으니 한창 그런 것에 예민한 나이의 소녀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터였다. 소화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으응. 우리 오빠야. 중국에서 사업을 하다가 얼마 전에 들어와서……경성에서 사업을 시작했거든.”
“오빠는 결혼했고?”
눈을 빛내며 묻는 영신의 얼굴에 소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이야.”
“약혼자는 있겠지?”
“아니.”
“그러면 너 언니들에게 무척 잘 보이겠구나. 오빠가 그리 미남에 사업가라니 눈독 들이는 언니들이 많겠다. 나는 아래로 남동생만 둘인데다 이제 열 살, 여덟 살이라 언니들에게 잘 보일 일이 영 없단다.”
영신이 부러움 반 투덜거림 반을 섞어 말했다. 소화가 물었다.
“언니들에게 잘 보이면 무어 편한 것이라도 있니?”
영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슨 당연한 말을 하느냐는 투로 대답했다.
“그럼. 여기 학교생활은 뭐든 자치야. 기숙사 살림도 모두 사생(舍生)들이 맡고 있으니까. 말이 신여성이지 무어 요조숙녀 되어 좋은 데 시집가려는 언니들이 많으니 너처럼 근사한 오빠가 있으면 생활이 몹시 편하지. 나중에 몰래 오빠더러 얼굴 자주 비추라고 이야기해 두어.”
자기 또래의 아이들이 모인 곳에서 생활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영신의 말은 놀랍고도 신기한 것이었다. 뭐든 자치로 결정한다면 확실히 다른 학생들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할 터였다. 소화는 문득 세란이 학교에서 조금 겉돌았다던 정숙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면 언니들한테 밉보이면 어찌 되는데?”
“어찌 되기는, 몹시 피곤하지.”
영신이 깔깔대며 웃었다. 어쩌면 세란도 어떤 계기로 ‘밉보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으나 아직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곧 다음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다음 시간은 영어 수업이었는데, 영어라고는 한 글자도 모르는 소화였기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영신이 간혹 소곤대며 가르쳐 주는 것에 고개만 끄덕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영어 수업 뒤는 작문 수업, 그 뒤는 수학 수업이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수업은 오후 세 시 반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종례를 한 뒤에는 모두 함께 교실 청소를 했다. 창을 열고 바닥을 닦는 소화를 본 영신이 농담처럼 말했다.
“너 성격이 참 부지런한가 보다. 집에서 일을 자주 하지도 않았을 텐데 바느질도 척척 하고 청소도 척척 잘 하는구나.”
속으로 뜨끔한 소화는 적당히 말을 둘러댔다.
“으응. 고모님께서 여자가 이런 일을 못하면 아니 된다고 어릴 적부터 가르쳐 주셨으니까.”
“박소화?”
소화가 서둘러 청소를 마무리하고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열려 있던 교실 앞문에서 누군가 소화를 불렀다. 소화가 고개를 들자 정숙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정숙은 소화에게 아침에 들고 온 짐 가방을 건네며 말했다.
“동무들이 청소를 끝내고 기숙사로 이동할 때 함께 나가도록 하렴. 방은 영신이가 알려 줄 거야.”
“네, 선생님.”
소화는 가방을 받아들며 대답했다. 교실 정리가 완전히 끝나자 아이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학교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기숙사로 향했다. 기숙사는 오래된 서양식 주택 두어 채를 개조한 모양새였다. 소화가 영신을 따라 첫 번째 건물로 들어가려 하자 문 앞에 서 있던 소녀가 소화를 가로막았다. 영신이 얼른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소녀는 영신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소화를 보았다.
“네가 박소화니?”
긴 머리를 땋아 내린 소녀로, 아마 상급생인 모양이었다. 소화가 네, 하고 대답하자 소녀가 옆 건물을 가리켰다.
“네 방은 저기 희락당(喜樂堂) 이층의 끝 방이야.”
“민옥 언니, 저어…….”
그 말을 들은 영신이 주저하며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민옥이라고 불린 소녀가 말없이 영신을 마주보자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소화는 민옥의 눈치를 보다 네, 하고 대답하고는 민옥이 가리킨 옆 건물로 향했다. 희락당이라는 현판이 입구 위에 걸려 있었다. 소화는 그 현판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소녀들이 시선을 던지는 것이 느껴졌다. 소화는 가방을 든 채 계단을 하나하나 올랐다. 잘 관리된 듯 반들반들 윤이 나는 나무 계단이 밟을 때마다 작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벽으로 낸 창에서 드는 오후의 햇살이 계단 위로 아롱지고 있었다. 고즈넉한 풍경이었으나 소화는 어쩐지 그 고즈넉함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이층의 끝 방은 문이 열린 채였다. 소화가 복도를 지나 그 방으로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두 명의 소녀가 인기척에 문가를 돌아보았다. 소화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안녕하세요, 박소화입니다. 오늘부터 미리암여학교에 다니게 되었어요.”
잠시 소화를 마주보던 소녀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아아, 그래? 일 학년? 이 학년인가? 우리는 사 학년이고 나는 서은용, 이애는 고명하라고 해. 우리가 이쪽 침대하고 장을 쓰고 있으니 너는 둘 중 아무 쪽이나 써.”
은용의 말에 소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용이 가리킨 쪽을 보았다. 방 안에는 네 개의 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은용과 명하가 문 쪽의 침대 두 개를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화는 창가에 붙어 있는 침대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옆의 장을 열었다. 장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분명 네 명이 쓰는 방이라고 했고 두 사람이 저쪽 장을 쓰고 있다면 누군가 소화와 함께 이 장을 써야 할 테지만 아무 물건도 없었던 것이다. 소화가 잠시 멈칫하는 것을 보았는지 은용이 소화의 뒤에 대고 말했다.
“우리 방은 너까지 세 명이 쓰고 있어. 다른 두 명은 전학을 갔거든.”
“아, 네.”
대답한 소화는 가방에서 옷가지며 속옷 따위를 꺼내 장 안에 정리했다. 소화가 하는 품을 빤히 보고 있던 명하가 입을 열었다.
“너 손이 아주 야무지구나. 아버지가 무얼 하시니?”
뜻밖의 질문에 소화는 명하를 돌아보았다. 큰 눈에 독특한 분위기가 있는 소녀였는데 어쩐지 소녀라기보다는 여인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자신을 보는 명하의 시선에 소화는 침착하려 애쓰며 대답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오빠와 지내고 있어요. 오빠는 방직 사업을 하고 있고요.”
“그래?”
명하는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소화가 짐 정리를 끝내고 장을 닫자 은용이 말했다.
“저녁 여섯 시까지는 자유시간이고, 여섯 시에는 식당에서 다 같이 식사를 해. 일곱 시 반부터 여덟 시 반까지는 독서시간이고 아홉 시 반에는 일제히 소등을 하지. 소등하기 전에는 실장들이 점호를 하니 반드시 방에 있어야 해. 우리는 저녁 시간 전까지 잠시 외출할 거야.”
소화가 알겠다고 대답하기도 전 은용과 명하가 방을 나갔다. 은용과 명하의 태도가 묘하게 차갑다고 느꼈으나 첫날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소화는 열린 문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발소리를 듣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방 안 역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나무 바닥에서는 윤이 났고 벽지라든가 옷장에는 긁힌 곳 하나 보이지 않았다. 소화는 반대편에 놓인 책상으로 가서 그 위를 살펴보았다. 두 사람이 나갔다더니 벽에 붙은 책상 위에는 거의 아무 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소화는 몸을 숙여 아래의 서랍을 열었다. 왼쪽 서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오른쪽 서랍을 열자 장부 같은 것이 하나 들어 있었는데, 소화는 무심코 그것을 꺼내 보았다. 표지에는 出納簿(출납부)라고 적힌 채였다.
“출납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소화는 표지를 넘겼다. 단정한 글씨로 이름과 숫자가 죽 쓰여 있었다. 아마 금전 관계의 출납부인 모양이었다. 무심코 그것을 죽죽 훑어가던 소화의 눈이 표지 안쪽으로 향했다. 표지 안쪽에 조그맣게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소화는 그 이름에 눈을 가까이 가져갔다. 金世蘭(김세란). 김세란…….
“이애, 무얼 그리 보니?”
소화는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라 황급히 출납부를 덮어 버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영신이 문가에 서서 얼굴만 내밀고 있었다. 소화는 출납부를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고는 돌아섰다. 영신이 바깥을 가리켰다.
“저녁 먹기 전까지는 자유 시간이니 산책이라도 가면 어떨까 하고.”
“응, 그래.”
소화는 얼른 방을 나서 문을 닫으며 영신을 따라나섰다. 소화는 복도를 걸어가며 고개를 살짝 돌려 닫힌 문을 다시 보았다. 묘한 기분이 뒷덜미를 자꾸만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