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Treasure Sword RAW novel - Chapter 111
111
그의 육신은 죽는 순간에도 힘이 풀리지 않았다.
해과월은 그 이유를 진기에서 찾았다.
진기다. 진기만이 그런 힘을 받쳐줄 수 있다.
물론 만수가 진기를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무공을 수련하지 않은 사람이니 진기를 알 리 없다. 그는 의식적으로는 진기를 쓰지 않았다. 쓴 적이 없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이끌어 낸 것은 틀림없이 진기다.
진기가 온몸 구석구석에 퍼졌다. 육신은 생명을 잃었지만 진기는 풀리지 않고 온몸을 유지시킨다. 그 힘이 망치를 들고 있는 기이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 광경!
네 번째 삶, 네 번째 행운!
이런 말을 하면 미쳤다고 할지 모르지만…… 만수의 망치를 들고 잇는 모습에서 검을 봤다. 혈황검이나 천살검 같은 유형의 검들은 근처에도 다가갈 수 없는 절대검을 봤다.
만수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보여준 후, 어둠 속에서 무너졌다.
모옥을 떠날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다. 만수에게 받은 충격이 너무 커서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길을 오면서 내내 생각하니 깨달아지는 게 있다.
어둠 속에서 만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 필연이었다.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던 만수의 육신은 자신의 강렬한 진기에 자극 받았다. 그래서 균형을 잃고 무너졌다. 진기가 허공으로 빠져나와 산산이 흩어졌다.
당연히 망치를 들고 있던 손도 무너졌다.
목내이가 된 시신이니 형체는 유지하고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이 봤던 강렬한 느낌은 사라지고 없다. 이제는 설혹 그의 모습을 보더라도 처음 봤을 때처럼 큰 충격을 받지 않을 게다.
진기가 사라지고 없는 형체는 감동을 줄 수 없다. 진기가 빠져나간 목내이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동안 만수의 유체를 접한 사람은 많을 것이다.
목내이가 도리 정도로 죽은 지 오래 된 사람인데 설마 자신이 처음 봤겠나. 최소한 자신을 모옥 속으로 밀어넣은 노파는 만수와 대면했을 것이다.
노파는 무공을 수련하지 않았다.
노파가 가진 기운으로는 만수의 육신을 무너트리지 못했다. 팽팽한 균형을 깨지 못했다. 단단한 바위를 무너트릴 정도로 강렬한 진기를 가진 사람만이 만수를 무너트린다.
그것이 자신이었다.
자신이 진기를 자극하자마자 만수의 진기가 무너지면서 빛을 토해냈다. 광채를 발산시켰다. 그리고 지극히 짧은 순간동안 평생 잊지 못할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모습…… 영원히 잊지 못한다.
그는 이대로 중원 땅을 밟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산으로, 산으로 깊이깊이 들어섰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곳, 염사나 약초꾼도 발길을 들여놓지 않는 곳…… 이 세상으로부터 뚝 떨어진 듯한 전인미답(全人未踏)의 땅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곳을 찾았다.
이곳이 어딜까? 어딘지 모르겠다.
고개를 들어보면 하늘이 사발 만하게 보인다. 사방이 높고 험한 산이어서 하늘을 나는 새도 날아들지 못할 것 같다.
‘여기가 좋겠군.’
그는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왜 그런지 자신도 모르겠는데…… 아무도 없는 곳에 당도했다고 생각하자 안도의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휴우!”
기쁨, 편안함의 한숨이다.
나무를 들었다.
인간의 육신이 검이다. 혈황검을 능가하는 육신의 검이 탄생한다.
나무를 들고 만수의 부동심을 수련한다.
꼼작도 하지 않는다. 가만히 서있기만 한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이 수련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령은 안다.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서있는다. 이것이 외형적인 모습이다. 내면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진다. 빛의 통로를 통해서 외기를 끌어들인다. 진기를 끌어낸다. 그리고 전신에 고루 유포시킨다.
팔에 들어가는 힘과 발가락 끝에 들어가는 힘이 같아야 한다. 신체의 어느 부분을 뚝 잘라서 진기의 무게를 달아보면 똑같은 무게가 나와야 한다.
만수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 상태가 되면 어떤 효과가 일어날까?
그런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다.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는다.
제일 처음, 만수의 모습에서 완벽한 공수(攻守)를 봤다. 그 어떤 검도 들어갈 수 없고, 그 어떤 자도 쳐낼 수 있는 완벽한 초식을 느꼈다.
그런 것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지금 무공으로써 만수의 모습을 그리는 게 아니다.
만수가 만든 검을 쥐어보고 싶다.
마음으로부터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이것이다.
만수가 만든 게 쇠를 달궈서 망치로 두들기는 것이라면 벌써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수는 다른 검을 내놨다. 진기로 만든 검을 내놨다.
“하아!”
거친 숨이 토해진다.
진기를 고루 유포시키는 것은 쉽다. 진기를 보는 눈이 있고, 이끄는 의념(意念)이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가능하다. 한 마디로 무인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다.
하지만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진기를 고루 배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상태가 되려면 진기가 일시 정체되어야 한다.
진기가 흐르지 않고 몸속에서 멈춘다.
이는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자칫 자신의 생명을 자신이 끊어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아니, 이론적으로는 틀림없이 그런 일이 벌어진다.
진기는 멈추지 않는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흐른다. 이것이 진기의 속성이다.
진기가 멈춘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살아있는 진기는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진기의 소유자가 진기를 유인하지 않아도, 이끌지 않아도 진기 스스로 조금씩 유동한다.
그런 흐름을 억지로 차단시키면 역혈(逆血)을 할 때보다 더 위험하다. 아주 극심한 충격이 치민다.
강제적으로 진기를 끊으면 안 된다.
그래도 해본다.
만수가 만든 검이라면…… 그가 삶의 끝에서 완성한 검이라면……
‘그 검을 쥐어보는 대가로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어. 해보는 거야!’
스읏! 스으스!
백회혈을 통해서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외가가 밀물처럼 밀려들어온다. 그 힘을 경략으로 밀어 넣는다. 고루고루…… 전신 경맥에 골고루 유포시킨다. 그리고 한 순간,
‘핫!’
일시에 진기의 흐름을 끊는다. 멈춘다. 헌데!
“컥!”
그는 진기를 끊자마자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진기를 유통시켰다.
“컥! 컥컥!”
그는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그는 자신이 방금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릴 뻔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솔직히 주화입마라는 말뜻조차 알지 못한다. 진기를 사용하면 무조건 좋다는 것만 알지 그것에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귀사령주에게 진기에 대한 말을 들었지만 세세한 것까지 듣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설혹 시간이 많이 있다고 해도 귀사령주는 주화입마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을 게다.
주화입마라는 말은 진기를 수련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도 기본적인 단어다.
해과월이 설마 그런 단어조차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해과월은 그런 말을 모른다. 진기를 억지로 중단시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무지가 무모한 행동을 끌어냈다.
‘억지로 끊기는 게 아니라 이거지. 자연적으로…… 때가 되면…… 잘 익은 감이 툭 떨어지듯이 그렇게. 인위적인 멈춤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도록.’
스읏!
나뭇가지를 들고 진기를 유포시켰다.
이번에는 느리게 운행시킨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움직여본다.
그러나 멈춤은 일어나지 않는다.
“카악!”
이번에도 급히 숨을 토해냈다.
느림은 느림일 뿐이다. 느리지만 흐름은 지속된다. 완벽한 멈춤은 죽음에서만 일어난다. 삶에서는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릴 망정 흐름은 계속 이어진다.
만수의 모습은 쉬워보였다. 마음만 먹으면 재현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너무 힘들다. 너무 어렵다.
스읏!
다시 나뭇가지를 들었다.
새로운 검을 찾는 작업이다. 급할 것이 없다. 세상에 나가도 할 일이 없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이것이다. 만수가 만든 검…… 그 검을 쥐어야 한다.
2
탁!
책자 한 권이 탁자에 놓였다.
운벽슬은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불길한 예감이 소록소록 내려앉는다.
‘손을 대면 안 돼!’
마음에서부터 강렬한 거부감이 일어난다.
이 책자는 함정이다! 이 책은 마물이다! 이 책에 손을 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진다!
단지 예감일 뿐이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예감치고 틀린 적이 없다.
“이것이?”
“펼쳐봐라.”
“……”
“겁나는 모양이구나.”
“네. 솔직히 겁나요.”
“후후후! 천하의 운벽슬이 겁을 먹을 때도 있던가. 나와 마출성을 양쪽에 놓고 저울질하던 여자가?”
“그러게요.”
“펼쳐봐라.”
운벽슬은 책자에 손을 댔다.
그녀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펼쳐보라고 하면 펼쳐봐야 한다. 손대지 말라고 하면 손대지 말아야 한다.
그녀의 목숨을 주한극이 쥐고 있다.
그녀의 주위에는 귀사령주가 있다. 그리고 그를 목숨처럼 떠받드는 귀사령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도 주한극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혈황검은 묵검을 수수깡처럼 베어낸다. 주한극이 펼치는 검공은 귀사령주보다 훨씬 빠르다. 귀사령주가 일검을 펼쳐낼 동안 그는 이검을 쏟아낼 정도다.
차이가 너무 현격하다.
당적할 방법이 없다.
주한극이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때부터 그녀는 선택권을 잃었다.
‘불길해.’
책에는 아무런 권제(券題)도 적혀있지 않다. 그래서 더욱 신경을 짓누른다.
사락!
첫 장을 넘겼다.
– 항산오검(亢山五劍)
– 청운(靑雲) 진인(眞人)
……
책자에는 별호가 큰 글씨로 적혀 있었다.
운벽슬은 눈을 부릅떴다.
항산오검은 곤륜파(崑崙派)의 속가제자들이다. 청운진인은 무당파(武當派)의 구(九) 장로(長老)다.
중원에 무인이 얼마나 될까? 수도 헤아릴 수 없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십만은 될 게다.
어느 지방에서 이름을 얻었다고 해도 백 리만 벗어나면 무명인이 되기 십상이다.
책에 적힌 별호는 다르다.
중원 무인치고 여기에 적힌 사람들을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궁벽한 곳에서 이제 막 검을 잡은 초심자라고 해도 이들의 이름은 안다.
그만큼 유명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운벽슬은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첫 장을 펼치고 별호 몇 개를 봤다. 그리고 책을 덮었다. 다른 장은 펼쳐볼 필요가 없다. 다 똑같다.
인명록(人名錄)!
주한극의 인명록이다. 짐작으로는 주한극을 따르는 사람들의 총체인 것 같다.
“그걸로 그림을 만들어봐.”
“이,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녀는 이미 짐작하고 있는 말을 물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하니, 인명록에 적힌 사람들의 충성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단순히 동조하는 정도라면 그림을 그릴 수 없다. 하지만 목숨을 내놓고 오로지 주한극만 따른다면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후후후!”
주한극은 대답 대신 자신 있는 웃음을 흘렸다.
‘맙소사!’
운벽슬은 기가 질렸다.
이것이…… 주한극의 진짜 힘인가.
비성검문 외에 다른 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림의 힘이 그의 진짜 힘이었나.
‘한 장에 세 명. 약 백오십 장! 사백오십 명!’
인명록에는 하나같이 비중 있는 자들만 적혀 있다. 당연히 이들이 무림에 미치는 영향력도 매우 크다.
가상적인 영향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실질적으로 이들이 동원할 수 있는 무인의 수는 한 사람 당 백 명 정도는 우습게 끌어들인다. 아니, 평균 이백 명 정도라고 할까?
한 명당 이백 명을 움직인다고 가정하면 근 만 명에 이르는 무인들이 한 날 한 시에 들고 일어난다.
이는 청천맹 외단 조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규모다.
더군다나 이들이 동원하는 무인이라면 무공 면에서도 믿을 수 있다. 비성검문 수호자 한 명에게 백 명이 몰살하는 청천명이 급조 조직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인명록은 보물 중에 보물이다. 아주 대단하다.
주한극이 웃으면서 말했다.
“멋진 그림을 그려봐. 그들을 오래 써먹지는 못해. 전쟁을 원하는 게 아니니까.”
“네. 알고 있어요.”
운벽슬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싸움이 길어지면 동조세력이 빠져나간다. 자칫 자신의 문파에 검을 들이대는 일이 벌어지는데, 그럴 때는 반란을 일으킨 쪽이 불리할 건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