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Follicle Exhibition RAW novel - Chapter 171
170화 지자(智者)는 은거하고 우인(愚人)은 날뛰리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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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해를 등지고 있는 탓에 윤곽만 보일 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눈이 익으며 장한의 모습이 보였다.
백발(白髮), 백미(白眉), 백염(白髥)의 삼백(三白)을 갖추고 있으나 이와는 걸맞지 않은 홍안에 키는 팔척이 훨씬 넘었고, 기골이 장대한 것이 영락없는 무인의 상이었다.
이자는 문(文)에서도 일가를 이루고 무(武)로도 태사록에 영예로운 이름을 남긴 문무를 겸비한 명장 노식.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장성 밖에 은거해버린 후한의 거목이었다.
“장군!”
전풍은 그를 알아보자마자 그나마 성한 한 쪽 다리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일어서서 읍을 해야 마땅하나 그러지 못하니 과하기는 하나 이로써 예를 갖추는 것이다.
게다가 전풍과 노식의 관계라면 절을 하는 것 또한 과례라 할 수는 없을 터였다.
“원호, 오랜만이로구나. 그래, 정 강성은······?”
“정정하시지요.”
“골골하길래 나보다 먼저 갈 줄 알았더니만 다행이구먼.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내 집으로 가자.”
노식은 전풍의 의사도 묻지 않고 그를 한 손으로 달랑 들어 어깨에 걸치고는 비호처럼 산길을 치달렸다. 순식간에 도착한 곳은 노식의 움막. 겉으로 보기에는 다 쓰러져 가는 초옥이나 안으로 들어서니 사뭇 느낌이 다르다.
한 쪽 벽면을 채우고 있는 병장기가 아니라면 여느 사인의 방과 다를 바가 없었다. 향기부터가 다르다. 짙은 묵향이 코 끝에 감돌자 전풍은 고향집에 돌아온 듯한 감상에 젖어야만 했다.
“양껏 마셔두는 게 좋을 게다.”
노식은 전풍을 뉘이고는 독주 한 병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전풍은 멧돼지에게 받쳐 다리가 부러져버렸기에 접골하지 않으면 남은 평생을 목발 짚고 다녀야 할 터였다.
부러진 뼈를 다시 맞추는 것은 뼈가 부러지는 것 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것. 맨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드니 독한 술을 들이켜 술기운으로 버텨보라는 것이다.
전풍은 술병을 잡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입안에 술을 때려부었다. 그러자 노식은 그 사이 손을 씻고 와서는 전풍의 부러진 다리를 붙잡았다. 솥뚜껑 같은 그의 손에 붙잡힌 전풍의 다리는 흡사 여인의 손목처럼 가늘어보일 지경이었다.
“셋을 세면 뼈를 맞출 것이다. 준비 되었느냐?”
노식이 묻자 전풍은 이를 꽉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식은 전풍의 부러진 다리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하나!”
노식이 하나를 세자 전풍은 마른침을 삼켰다. 다리가 부러진 것도 처음이고, 뼈를 다시 맞추는 것도 처음. 처음이란 항상 미지의 두려움을 담고 있는 것이기에 지천명의 나이에도 전풍은 어린 아이처럼 겁을 내고 있었다.
“둘!”
노식은 셋을 세지 않고 둘에서 전풍의 부러진 뼈를 맞춰버렸다. 그와 동시에 전풍은 미친 듯이 비명을 내질러댔다. 그러자 노식은 눈살을 찌푸리며 술병을 전풍의 입에 물렸다.
전풍은 아파죽겠는데 갑자기 독한 술이 쏟아져 들어오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술병을 내려놓고 노식에게 따지듯 물었다.
“장군! 셋에 맞추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노식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입 놀릴 정신이 있는 걸 보니 이제 됐다. 한 숨 자거라. 이럴 땐 진탕 마시고 한 숨 푹 자면 한결 나을게다.”
* * *
전풍은 노식의 말대로 독한 술을 진탕 마시고 미동조차 없이 시체처럼 잠이 들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구수한 고기냄새를 맡으며 눈을 떴다.
다친 발에는 부목이 대어져 있으나 성한 발이 하나 있으니 그는 한 발로 간신히 움직여 밖으로 나섰다.
집 밖에는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불 위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져가고 있었고, 그 앞에서 노식은 짧은 칼로 나무를 깎고 있었다.
“일어났느냐?”
노식은 돌아보지도 않고 전풍에게 말했다.
“예, 장군.”
전풍의 목소리가 제법 맑다 여긴 모양인지 노식은 깎고 있던 나무를 휙 던졌다. 전풍은 엉겁결에 받아들고 보니 지팡이임을 알게 되었다.
“한동안 그 놈이 필요할 게다. 시장할 테니 이리 오너라. 조금만 더 익히면 되니······.”
두 사람은 모닥불 앞에 나란히 앉았다.
“무슨 일로 찾아왔더냐?”
“장군께 가르침을 얻고자 왔습니다.”
“후후후! 정 강성의 제자가 모르는 것도 있더냐?”
노식이 우스갯소리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자 전풍도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놀리지 마십시오.”
“강성의 제자를 누가 놀릴 수 있단 말이냐? 말해보거라. 장성 너머 산중에 있으니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즐겁구나.”
“실은 넋두리도 좀 풀어낼 겸, 제가 앞으로 어찌 처신해야 할지 장군께 조언을 얻으려 합니다.”
전풍의 말에 노식은 익어가던 고기를 한 점 베어 건네며 말했다.
“그런 일이라면 네 스승에게 하지 왜 이 먼 곳까지 찾아왔더냐? 당금 천하에 강성에게 견줄만한 현인이 몇이나 된다고······.”
“스승님께 찾아가 말씀드리면 상심이 크실 겁니다. 게다가 장군께선 스승님과 동문수학하신 벗이니 응당 제 스승과 같으니 제가 어디를 가겠습니까?”
전풍은 어려서부터 여러 선생을 모셨으나 정현의 문하에서 비로소 나름의 학문을 완성했다. 정현은 노식과 함께 전대의 거두였던 마융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다.
정현은 당대 최고의 명사이자 학자인 채옹보다 한 세대 전에 시대를 풍미했던 자이니 그의 학문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허허허! 어디 유세라도 다니느냐? 입심이 제법이로다. 한데 그 만한 입심으로 어찌 그 몰골을 하고 있는 것이냐? 강성의 제자라 하면 제후들도 중용할 터인데······.”
노식의 말에 전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군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 학파는 탁류의 앞잡이로 낙인 찍혀 청류의 인사들은 저나 제 동문들을 중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백이 되어서도 출사하지 못했더냐?”
“난세가 아닙니까? 조정에 출사할 마음이 없어 주군이 될만한 자를 기다렸습니다.”
“허허허! 네가 태공망이더냐? 아니면 역이기더냐? 그들만 못함을 안다면 네가 주군 될 영걸을 찾아다녀야 함이 옳거늘······.”
노식이 꾸짖자 전풍은 나름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라고 어찌 주인을 찾아 재주를 쓰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천하인들이 영웅호걸이라 부르는 자들을 찾아 만나보았으나 마땅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수 개월 전에 기주목 왕굉을 주인으로 모시고자 했습니다.”
전풍은 왕굉의 휘하에 들었다가 그의 곁을 떠났던 일을 노식에게 말했다. 그런 후에 길게 한 숨을 내쉬며 말을 맺었다.
“후우! 제가 모시고자 했던 영걸들은 제 재주를 중히 여기지 않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편협하기 짝이 없는 자들 뿐이었습니다.”
전풍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노식은 말 대신 나뭇가지로 바닥에 글씨를 써내려갔다.
– 獲賣一張皮(획매일장피)
노식이 쓴 글귀를 보자 전풍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획매일장피(獲賣一張皮)’란 글귀의 뜻은 쉽게 말하자면 보기 좋은 물건이 잘 팔린다는 뜻이었다. 이는 노식이 전풍의 외관을 두고 놀리는 말이었다.
나이도 적지 않고, 얼굴도 오관이 반듯하지 못하니 잘 생긴 외모라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기골이 장대한 것도 아니니 아무리 그 알맹이가 달다 한들 쉽게 손이 가지 않는 돌배와 무엇이 다르랴.
“허허허! 농을 좀 해보았느니라.”
노식은 동문수학한 정현의 제자를 놀리는데 재미를 붙인 듯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어느새 바닥의 글씨를 지우고 새 글씨를 쓰고 있었다.
– 人無完人(인무완인)
“세상 천지에 어디 흠 없는 사람이 있더냐? 남녀 간에도 그렇지만 군신간에도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사람이 혼자서 살 수 없는 까닭이다.”
“장군의 말씀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범의 아가리 임을 알면서 머리를 들이밀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왕굉은 제 조언을 무시하고 멋대로 행하다가 결국 원소에게 크게 패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내게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이더냐? 장성 너머 산중에 은거하고 있는 내가 너를 위해 제후들에게 천거한다 한들 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장군께 비할 바는 아니나 소생도 이제 나이를 먹어 다시 주군을 모시게 되면 그것이 마지막이 될 겁니다.”
전풍의 말에 노식은 심술궂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오늘 내일 하는 늙은이 앞에서 나이를 논하다니 우습구나.”
“소생의 말은 그게 아니라······.”
“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현명한 자를 주인으로 모시고 싶겠지. 그 이름도 태사록에 남겨야 하고, 부귀와 영화도 탐이 날 테고······?”
“사내로 태어났으면 칼이든 붓이든 무엇으로라도 그 이름을 태사록에 남기고 싶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식읍까지 얻을 수만 있다면야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전풍은 자신의 꿈을 말하는 것이라 그런지 조금은 흥분한 목소리로 손짓을 해가며 호기롭게 말했다. 하지만 노식의 눈빛이 우수에 젖었다.
“식읍이라······. 천상 사슴을 쫓는 자가 아니면 주인으로 모실 수 없겠구나. 하지만 어쩌랴? 지자는 은거하고 우인은 날뛰니 선비와 영웅호걸은 서로를 찾아 헤매리라.”
“장군, 그걸 모르니 장군께 가르침을 받으러 오지 않았겠습니까? 우인들로 가득한 당금 천하에서 어떻게 하면 천하의 주인이 될 자를 찾아 주인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 天命(천명)
“천명? 무슨 뜻입니까?”
“천명을 지닌 자만이 천하를 얻을 수 있다. 위로는 왕후장상으로부터 아래로는 촌부와 천인에 이르기까지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가슴 속에 웅지를 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은 지자에게 천명을 내리지 우인에게 큰 뜻을 이룰 천명을 내리지 않는다.”
“그러면 천명은 공융에게 있습니까?”
북해의 공융은 공자의 후손으로 그 학문 또한 높이 평가 받았다. 천하를 노리는 제후들 중에 학문이 높은 자를 꼽자면 그가 첫 손가락에 꼽히니 전풍은 그의 이름을 입에 담은 것이다.
하지만 노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융은 명가의 후예이고, 학문도 높지만 배포가 작다. 천하를 담을 그릇은 아닌 게지.”
“그렇다면 장군의 제자들 중에서 천명을 받은 자가 있겠군요.”
“공손찬?”
“그렇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노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닥에 떨어진 보리싹은 주워도 사람싹은 줍는 게 아니라 하더니 그 놈을 두고 하는 말이렷다.”
노식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풍이 천하에 가장 가까운 자라 할 수 있는 공손찬을 들먹이자 탐탁지 않아 했다.
그러자 전풍은 유비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장군의 문하 중에 장군의 무예를 모두 익혀낸 유 현덕은 어떻습니까?”
“무예는 대단하나 그걸 빼고 나면 백규만 못하다. 백규는 독심이라도 있지. 현덕에게는 불같은 성정 뿐이니······.”
어찌된 일인지 노식은 자신의 제자들을 평가절하했다.
“그러면 대체 누구에게 천명이 있습니까?”
“내가 하늘이 아닌데 억조창생 중에 누구에게 천명이 있는지 어찌 알고 있으랴?”
“그럼 누구에게 천명이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천명은 현인에게 있다. 하지만 단순히 글을 많이 읽었다하여 현인이라 할 수 없음이라.”
노식은 그리 말한 후 다시 바닥에 글귀를 써내려갔다.
– 人盡其才(인진기재) 才盡其用(재진기용)
사람을 쓸 때 그 재주를 다하게 하고, 재주를 쓸 때 그 용도에 맞게 쓰라는 의미였다.
본디 이 말은 우왕이 남겼다던 홍범구주를 기록한 서경의 홍범편에 나오는 ‘인진기재(人盡其才) 물진기용(物盡其用)’이라는 말을 변용한 것이다.
공자의 학문 역시 그 뿌리는 홍범구주에 있다 할 것이니 노식의 학문은 공자의 영역을 넘어서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아직도 공자의 가르침을 모두 이해하지 못한 전풍으로서는 천외천의 비경을 감상하듯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노식은 친절히 그 말을 전풍의 상황에 맞게 풀이했다.
“출신에 따라 사람을 가려 쓰지 않고 오직 재주 만으로 사람을 쓰고, 그리 뽑은 사람이 자신의 재주를 마음껏 뽐낼 수 있도록 해줄 사람이야말로 가히 천하를 얻을만한 그릇이라 할 것이다.”
“세상 천지에 그런 자가 있겠습니까?”
전풍이 묻자 노식은 다시 바닥에 글씨를 썼다.
– 萬民無類(만민무류)
“만민무류? 장군, 억조창생이 어찌 같을 수 있단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자칫 타 학파의 사람이 이를 볼까 두렵습니다.”
천하인들은 위로는 황족으로부터, 관인과 공족, 사인과 무인, 그 아래로는 농민과 공인, 상인은 물론 노비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저마다의 한계가 분명히 존재했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곧 유가의 법도를 부정하는 것. 그리고 그것은 곧 한조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차피 이 몸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장군께서 이토록 급진적인 글을 쓰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것은 나의 대의가 아니다.”
“공손찬의 대의입니까?”
“그 이름은 듣고 싶지 않다. 게다가 그 아이의 머리에서 이런 대단한 대의가 나올 수 있다 보느냐?”
전풍은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대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곧 최소한 노식의 학문에 버금가는 자여야만 했다.
“그럼 이걸 어디서······.”
“이 나이에 이르러 그간 익힌 학문이 헛되었음을 이 글귀를 보고 알았노라. 이것은 여포의 비의니라.”